기도, 만능키?

요가인지 단학인지로 인해 기(운)를 느끼고 읽을 수 있는 후배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정육점 근처에 가면 죽임당한 동물의 고통스러워하는 기운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새벽기도를 갔었는데 새벽기도를 하는 그 공간에서도 너무나 나쁜 기운이 가득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떤 이-주로 개신교인들-는 요가나 단학이 나쁜 영에 씌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신비스러운 이야기에서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딘지 미심적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어느 스님께서 불교와 기독교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통해서 조금은 명확해졌다.

새벽기도나 부흥회 등의 모임에서는 뜨겁게 부르짓는 통성기도를 쉽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중고등부에서 청년에 이르는 수년간의 기간동안 그런 기도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기도의 내용은 개인적인 회개나 바램, 이웃이나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원 등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해도 개인적인 회개와 성령충만, 그리고 개인적인 간구에 대한 것이 가장 간절한 기도의 영역일 것이다.

이런 간절한 기도는 요한복음 15:7의 말씀에 근거한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이 말씀의 앞부분이 무시되곤 한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말씀이 기도하는 사람 안에 있을 때에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말씀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는 무시되고 뭐든지 다 이뤄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특히나 예수님께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기도는 다 이뤄진다는 의미를 낳는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교회 안에서 간절히 울리고 있는 기도 중에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기도가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건강, 대학합격, 취직, 성공 등등등...가장 간절한 기도의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은 자기를 긍정하다 못해 목이 찢어져라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기도들이 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인해 코 앞에 놓인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기기만은 아닌지. 회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조차도 실은 자신의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한 욕망을 감춘 것은 아닌지. 바울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선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했건만 어떤 목사님은 천국이 없다면 믿음도 소용없다고 까지 말한다. 그 목사님의 생각은 그 목사님만의 것인지..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에 만연해 있는 원력(願力), 곧 부처님이나 아미타불에게 기도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줄임으로써 참된 자유에 이르라는 것이 핵심인데, 원력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이뤄달라는 것이 강해지면 '갈망', 좀 더 강해지면 '욕망', 좀 더 강해지면 '탐욕', 왕창 강해지면 '집착'이 된다. 이 모두는 같은 계열의 용어라는 것이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바램을 계속 키워가는 과정이 되기 쉽다. 그 후배가 새벽기도에서 느낀 것이 어쩌면 이런 욕망과 집착의 탁한 기운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웃을 위한 기도는 자칫 스스로 행해야할 자비를 회피하는 이유가 된다고 비판하다. 부처님이 가르쳤던 자비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였는데, 원력의 방식에서는 아미타불 등의 절대신이 자신에게 베풀어줄 자비를 구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베풀어주라는 구조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내 것을 주는 것은 축소되고 절대자가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자비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의 목표가 욕망 지수를 낮추고 만족 지수를 높여가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베푸는 자비행이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앞서 살펴본 성경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위해서 짊어져야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으로 구하는 기도가 들어진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것은 나를 위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내 것을 내어주는 기도인 것이다.

이런 기도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내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주는 행위에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단지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의 깊은 의미를 더디게 깨닫는 오해와 무명(無明)의 틈이 있을 뿐이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 직전에 이미 다 이루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웃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의 틈처럼, 그렇게 가득한 틈이...

물론 인간의 기도가 고통을 피하려는 바램,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그 욕망이 정화되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렇게도 인색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기독인, 곧 "예수 따름이"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명확히할 필요가 있다. 자연스럽지만 미숙한 기도에서 피와 땀을 흘리지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주검, 실패를 피하려 하기 보다는 당당히 마주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감사의 제목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도, 하나님께 이웃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내 부끄러운 손길로 따듯하게 붙들어주는 행위의 기도, 시끄럽게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보다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히 보고 씻어내는 기도, 그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간절하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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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안 다니고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항상 저를 소외시키더군요. 썩 다가가지 못하게, 아주 낯설게 하더군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혀보고 씻어내는 기도..." 님만큼 저에게도 간절한 것이겠지요. 교회는 제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아요. 시어른들과 이 문제로 갈등입니다.

물무늬 2004-04-1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적한 제 서재에서 만나는 님의 흔적이 언제나 참 소중합니다.^^
근래들어 개신교인에서 비신자나 타종교로 개종하시는 분들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죠. 아마도 7,80년대 교회가 급성장하던 때의 코드가 더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통성기도에 무척 익숙했었는데 저도 언젠가부터 어색하고 낯설어지더군요. 이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기도하기 어렵게 되었죠. 아니 그렇게 기도하는게 싫어진 것 같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기도에 마음이 더 많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 제게도 교회는 평생의 숙제입니다. 이젠 교회를 다니지시는 않지만 평생 숙제라는 님의 마음이 어쩌면 더 정직한 신앙의 한 무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간의 신앙문제는 참 난감하고 서글픈 일인 것 같습니다. 부디 잘 풀려가시길...
 

용서해야 용서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 때만 나의 죄도 용서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마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어떤 조건부의 사건인듯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고, 조건없이 다 용서해 주신다는데.....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 조건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마음이 넓어지는 아량의 차원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이다. 자기 의와 교만의 함정.
용서는 그 사람이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사회적 한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나와 똑같은 모습임을 체감하는 깨달음의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깊이 체감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도 용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의 죄를 용서하는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결국 남과 나의 인간적 사회적 존재적 한계를 깨닫는 순간 남과 나는 하나가 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용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해야 용서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되어야 그 결과 일어나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이 양자는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 발생적 상황이다. 나를 용서하는 것과 동시에 너를 용서하는...용서가 일어나는 그 순간 양자는 함께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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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불의한 마음 : 불의와 악의

어릴 적에 한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구호들이 있다. 선생님께서 "우리는"이라고 선창을 하면 "위법을 창조한다!"라고 외치곤 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시지 않고, 화두삼아 스스로 깨닫게 던져주셨다. 누구도 스스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각자 스스로 깨닫도록 방치시킨 것이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화두를 붙들고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생각해보고는 모르겠다고 포기해버렸으니까...이제 그 화두에 대해서 풀어 새겨놓으려 한다. 우연한 기회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당한 정의에 대해서는 음흉한 욕망의 그림자가 그 뿌리에 드리워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현실 속의 정의는 대부분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 움직여 가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는 오히려 교만한 욕심과 가진 자의 여유가 배경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삶을 부끄러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마음은 힘겨운 현실을 알기 때문에 애처롭게 동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 뿌리는 자기 합리화의 수액에 욕망의 촉수를 깊이 담그고 있기 쉽다. 그리고 그 수액을 통한 시원함은 불의와 악의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악의를 향해 불어가는 것도 모른채 현실의 정의를 즐기기 쉽다.

모든 존재의 생명이 다른 존재의 희생을 밟고 서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뭉클한 마음, 그 마음은 기꺼이 불의해 질 수 있다.

기꺼이 불의한 삶을 선택하는 마음은 이웃의 죄를 향한 정죄의 손가락을 위로의 포근한 손길로 바꾸게 한다. 또한 불의로 찌운 살과 피를 이웃의 먹거리로 내어줄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생존이 뿌리 내린 불의를 못내 죄스러운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벅찬 감사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불의를 새로운 생명의 텃밭으로 읽궈간다.

불의한 방식, 다른 존재를 누르고 올라서야 생존할 수 있는 이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살을 부대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근원적으로 불의한 길일 수밖에 없다. 세속을 떠나지 않는한 그 불의함을 벗어날 수 없다. 그 현실의 절망을 깊이 체감하고, 그 불의함의 심연 속에 깊이 깊이 가라앉을 때, 어떤 희망도 힘도 남아있지 않은 그 빈자리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 바닥을 차고 오르면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수면 위로 솟아오르면, 빚진 생명임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 빚진 살과 피를 또 다른 존재에게 내어주려는 적극적인 불의로 거듭나게 된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을 따라사는 "예수따름이"로 이름지은 것을 봤다. 깊이 동감이 되는 이름이었다. 그 예수따름이들은 이 땅의 돈과 권력이 선포하는 정의를 깨부수는 불의한 자리에 서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당시의 종교, 정치 권력이 규정한 정의를 깨는 불의한 삶, 위법한 삶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따름이"는 당연히 위법자여야 하지 않은가?

악의가 그 속에 또아리를 튼 정의를 포기하고,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 악의찬 정의를 분별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불의. 그렇게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자리가 내 안에서도 그립다. 빈 자리, 허공에 안개가 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그 자리에 신비하게 일어나는 안개구름. 내 마음 맑게 비우면 불의가 생명의 텃밭으로 일궈지는 거듭남 피어오르려나....


덧붙임; 한국 개신교회의 의로운 자화상
그런데, 우리 신앙의 결은 이를 역류하고 있는 듯하다.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하려는 열심은 너무나 반듯한 삶에 대해 집착하곤 한다. 죄짓지 않는 당당한 자기 모습, 축복받아 성공하는 삶,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그 수많은 은사체험들이 반복되어도 한국 개신교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역류의 결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로움과 선에 집착하는 신앙은 바리새인들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웃의 아픔을 깊이 동감하고 그것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사랑이 그 집착에는 자리잡지 못한다. 흰두교 명상을 수행하던 친구가 교회의 새벽기도회를 가보고는 그 안에서 너무나 탁하고 악한 기운이 가득한 것을 느꼈다고 했었다. 그 말을 당당하게 부인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신앙의 이런 성향을 알고 있기에 도둑이 제발저리는 심정에서 였다.

우리의 기도가 자기 욕망과 집착에 너무 깊이 빠져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할지, 어떻게 하면 신비한 은사를 체험할지 등에 대해서는 이방종교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겨가며 기도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말씀 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물어보고 그 삶에 더 가까이 가려는 몸짓은 흔하지 않다.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은 자기 의로움을 포기하는 사랑에서 싹튼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이 구원받는 댓가라면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려했던 마음도 이런 불의한 사랑과 공명할 것이다. 극락 앞에 몸을 묻고 모든 중생들이 극락으로 들어갈 때가지 기다린 지장보살의 자비와도 닮아있다. 소설 "침묵"에서 다른 신앙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하는 신부의 모습, "순교자"에서 교인들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 배신자인채 하는 목사님.....이 모두가 기꺼이 불의한 마음의 그 아름다운 향내를 풍겨준다. 그런 사랑으로 은혜를 목말라 할 때, 우리 신앙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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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8:27-31[메시야 비밀]

이름은 너무나 분명해서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아이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부모에게 저건 뭐야라고 묻죠. 무엇이라고 이름을 가르쳐 주면 그것을 안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는 지니고 있어서, 이름을 알고 싶어하죠. 그런데, 이름을 알고 몇 가지 그 이름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을 이야기로 갖고 나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곤하죠. 이름과 말로 풀어진 이야기, 그 너머에 감춰진 깊이와 신비는 애써 외면하려는 듯합니다. 이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깊이와 신비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에서는 너무나 믿었던 아내가 죽은 뒤에 그간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안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자기만을 깊이 사랑해 왔다고 믿었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고, 그것을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진실에 직면합니다. 그리곤 외부와 단절된 낯선 공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언어와 시공간을 부정하는 나눔을 갖죠. 이름이나 어떤 말을 애써 부정하고, 괴성과 몸짓으로 대화하는 원시적 나눔. 이 영화는 단순히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아픔을 그린 것만은 아닙니다. 이름과 언어,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 고정된 상을 소유하는 일상의 위태로운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이름을 소유하면서 잃어버린 신비들을 생각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최근에 봤던 GO라는 일본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 그 영화는 북한인 아버지를 둔 재일교포 2세 주인공이 조선인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고등학교로 옮겨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본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는 "차별적 이름짓기"를 통해서 집단주의, 국가주의, 파시즘에 이르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죠. 헤겔이 그랬던가요, "규정은 곧 부정이다"라고. 그것은 저것이 아니라는 부정을 통해서 하나의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그와 다른 것에 대한 구별이자 차별의 근원이 되죠. 인간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욕망이 언어의 한계를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젊고 유쾌하면서 역동적인 영상으로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무척 재미있고, 묵상의 꺼리를 깊게 던져주더군요.

이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뿌리가 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등장하죠. 보통 이 구절을 통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봤다는 의미로 생각되곤 합니다. 특히, 마태복은16장에서는 다른 복음서(마가와 요한)와는 달리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의 고백을 중심으로하는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근거 본문으로 이야기 되곤 하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감추신 이상한 상황이 이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게다가 그 이름을 고백하고 알았던 제자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십자가에 달려 주게 한 공범이자 방관자였음이 더더욱 그 고백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름지음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의 깊은 신비를 잃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전통이나 타종교의 전통에서 사용되던 개념으로 예수님을 정의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했을 뿐, 그 분의 깊은 사랑과 희생의 길은 완전히 오해했으니까요. 이렇게 볼 때, 그 고백이 참된 신앙고백의 뿌리인지 의심스럽게 보입니다.

신비나 체험을 말과 글자에 담으면, 화석이 되고 맙니다. 단순하고 별 것도 아닌 듯한 것으로 축소되고 말죠. 맛이나 감정조차도 설명이 않되고, 언어로 전하면, 오히려 더 깊은 단절에 직면할 뿐입니다. 말의 공간적 울림에서 빛깔과 형상, 감촉은 사라지고, 글자로 평면 위에 새겨넣으면 이미 생명력이 사라진 미이라가 되고 말죠. 종교적 진리를 기이하고 난해한 화두로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그 깊이에 온 몸이 빠져볼 때만 접근이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감추시는 것도 일종의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이나 언어라는 틀에 갖힐 때 잘려나가는 여실한 진리를 지키고 전하려는 화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시는 장면들을 메시야 비밀이라고 학문적으로 부르더군요.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다양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정황, 교리적 이유의 삽입, 알레고리적 상징 등. 어느 것이 맞는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신비한 비밀은 그런 이름 따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체험함으로서만 드러나고, 고백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보며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가15:39)"라고 고백하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아지죠. 이런 면에서 메시야 비밀은 "예수님의 신비한 정체는 모든 존재를 위한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배신자로 못을 박는 자리에서건, 못박히는 자리에서건 온몸으로 체험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놀라운 기적과 표적, 비유를 통한 권위있는 가르침들, 지식들, 삶과 아픔을 나누는 제자들과의 생활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은 오해될 뿐이었죠. 메시야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고 깨달아 지는 길이 십자가라는 "존재의 본질적 관계 체험" 위로만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메시야 비밀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도 맞아떨어지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들이 있다고, 우리 삶이 쉽게 변하지 않죠. 그 이름을 고백하고 소유했다는 것에만 안심하고 고여있기 때문에 그 깊은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형상을 그 이름에 맞춰 고정시킨 후에 거기서 벗어나는 다른 형상을 파괴하려는 증오심마져 키우죠.

우리가 참된 신앙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길은 오히려 그런 이름을 버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고 믿고 있다는 오해가 오히려 메시야의 신비를 은폐시키고, 그 비밀을 깨닫게 하는 체험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목격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켰던 이름인 "메시야"의 실체, 그 허망한 주검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욕심이 가져오는 결과, 메시야의 비참한 주검 위에서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목격했던 거죠. 이제 우리도 영원한 생명, 복받는 삶 따위의 욕망을 투영시킨 메시야라는 이름을 십자가에 못밖아야 하지 않을까요? 알고 있다는 교만과 내가 믿고 있는 고정된 메시야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신비를 만나는 다양한 이름들을 향해 겸손히 마음을 여는데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무엇인지 십자가를 통해서 깊이 체인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근원적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죽음을 뿌리로 해서 살아숨쉰다는 진리를 몸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특정한 개인이 단지 인격적으로 미숙해서 누군가를 배신한 차원이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가 그런 배신으로만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진리가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해서 살아남는 체험은 바로 이런 진리를 온몸으로 부딪힌 사건이었죠. 그것이 바로 "존재의 본질적 관계체험"이죠.

바로 그 체험을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손 끝에서 예수님을 찌른 창과 못의 흔적을 마주치고, 내 이웃의 아픔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상처를 매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봐야만 믿겠다던 도마의 의심이 오히려 필요합니다. 과거의 언제인가 일어났던 부활을 교리로서 머리로 믿는 화석화된 신앙보다는 우리 일상과 이웃의 상처 속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져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썩어가는 주검들을 정면으로 부딪혀 생명을 싹트게 하는 희생과 부활을 체험할 때, 메시야의 비밀은 밝혀질 것입니다.

"나"라는 허상의 존재가 온 우주의 다른 존재들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숨쉬고 있다는 진리와 그 희생에 어린 깊은 사랑에 공명할 수 있을 때, 메시야의 비밀은 탈은폐되고, 우리의 굳어진 신앙의 뿌리와 줄기에 생명수가 녹아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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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4:19,20 [방언에 관하여]

이제 여름 수련회들이 끝나간다. 많은 은혜를 체험하기도하고, 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며, 또한 너무나 재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가는 수련회. 그런데, 수련회를 끝내고 난 후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하는 고민이 바로 방언에 관한 것이다. 나도 방언을 하지 못해서 고민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뜨겁게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기 저기서 이상한 기도소리가 터져나올 때, 그런 기도를 하고 싶어 더 간절히 기도하지만, 되지 않는 경험들. 그러면 낙심이 되면서 하나님께선 왜 내게는 허락하지 않지라는 의문에 붙들리기 쉽다. 이런 무거운 마음의 지체들을 이번 수련회에서도 만났고, 다른 수련회를 다녀온 지체들에게도 들었다. 그 만남들을 통한 대화에서 방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1. 두 가지 방언
이상한 소리에 가까운 방언을 우린 보통 사도행전 2장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히 그 본문을 살펴보면, 거기에 나타난 방언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2장의 방언은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예수가 승천한 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복음을 각 지방의 말로 전하게 한 강권적 힘이 바로 방언이었던 것이다. 이 방언은 내가 중심이 되어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폭력적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에 두고 그의 입장에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성육신적 언어"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 낮아지는, 작아지는 성육신처럼, 방언도 단순히 언어적 측면 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언어소통적 성육신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요즘 교회에서 만나는 방언은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다. 언어로서의 기능이 결핍된 소리이기에 사도행전 2장의 방언처럼 복음을 전하는 기능이 없다는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런 형태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방언은 사도행전의 그것과 달리, 통역의 은사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고전14:2)'하는 것이다. 즉, 다른 지방 사람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는 이런 방언의 한계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고전14:4)'치고,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징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징(고전14:22)'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처럼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통역할 사람이 없을 때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전14:28). 그리고, 방언을 주심을 감사하지만,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이성)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고전14:19)'라고 한다. 몇 시간 동안의 방언기도보다는 친구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들어줌과 그 상처가 치유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어눌한 몇 마디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 때의 기쁨이 훨씬 큰 행복이 아닐까? 성령을 통해 선물받는 은사들은 지체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보다는 이웃과 친구를 위한 은사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고전12:31절의 말씀을 볼 때, 이런 방언은 자기유익에만 고여있기 쉬운 낮은 단계의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
이런 두 가지 방언의 차이를 통해서 우린 방언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린 너무나 다양한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을 이미 가지고 있다. 복음의 비밀을 우리와 다른 누군가에게 그의 입장으로 다가가서 전하는 모든 언어-몸의 언어까지-가 성육신적 방언이 아니겠는가? 외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에서 사랑의 마음을 담을 작은 섬김의 손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성육신적 방언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은사라고 볼 수 있는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기한 표징에 눈이 어두워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더 큰 은사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겐 이미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그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활용될 때, 은사는 드러나고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에 대한 욕심이 은사의 본래적 의미를 망각하게 하여 자칫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소중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미 받은 은사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표징에만 집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일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4장에서 수많은 방언보다 몇 마디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이어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데는 어른이 되라고 말한 것(고전14:20)이 아닌가?

하나님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이웃의 아픔을 치유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할 때, 선물로서 뜻하지 않게 받는 것이 은사가 아니겠는가? 혹여 직접적으로 어떤 은사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위한 간절함이 아니라 이웃과 지체를 위한 사랑의 간절함이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성령의 은사 체험은 그것 자체를 구했던 결과도 아니었고, 그 제자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았던가?
예수 당시에도 수많은 기적과 표적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표징을 요구했을 때, 예수는 그런 요구를 한탄하시면서 그들이 어떤 표징도 받지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뭔가 기이한 사건만이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욕망 앞에서는 그 어떤 놀라운 기적도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화가 아닌가? 그렇게 밖으로부터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압도해오는 증거로서의 기적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믿음의 시선만이 사소한 일상조차 놀라운 기적으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기적임을 깨달을 때, 우리에겐 더 이상 신기한 기적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이미 가진 모든 개성과 특성이 다 이웃을 섬기기위한 은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방언에서 예언으로
고린도전서14장에서는 모두들 방언(개인적인 방언)을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보다는 예언을 할 수 있기를 더 바란다고 말한다(고전14:5). 그 이유는 방언이 자신에게만 덕이 되고, 예언은 교회에 덕이 되는 더 훌류한 것이 때문이란다(고전14:5). 즉,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유아기적 단계에서 성장하여 이웃과 모두의 유익을 구하는 성숙한 단계의 은사가 예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방언받기도 쉽지 않은데, 예언이라니...조금은 난감한 바램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기적으로 탈은폐되고 나면, 예언도 그렇게 이상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즉, 일상의 평범한 모든 사건을 기적으로 볼 수 있고,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는 모든 행동이 다 성육신적 방언임을 깨달은 "뜨인눈"에게 예언도 다른 차원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현대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책 종교론에서 말한 것처럼 예언은 "종교적 사건의 반이 주어져 있을 때 다른 반을 희망하는 모든 것"(p.109)일 뿐이다. 이것은 예언이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라는 관점과 다르다. 이런 관점은 예언을 단순한 점술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예언은 현재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영원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가능성이다. 즉,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면서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며 비판적으로 섬기는 모든 행동이 예언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보면서 선포했던 예언들은 단순히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중심이 아니었다. 그 백성의 죄를 보면서 그것이 낳을 파괴와 고통을 걱정하는 사랑의 꾸짖음이자 비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으로 사회를 비판하며 고쳐가는 예언자들을 우리 교회는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우린 예언을 점술처럼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내 더 많은 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차원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가?

깨인 시선의 예언은 또한 종교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나머지 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예측하는 영역에 우리가 동참하기 때문에 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을 겸허히 인정하는 겸손이 함께 할 여백이 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어떻게 그런 뜨인눈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놓여있다. 일상의 모든 사건을 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섬세한 시선,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은사들을 깨달아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랑, 나보다 내 이웃에게 더 큰 은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랑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상한 말이나 놀라운 기적을 행할 힘을 얻을까라는 유아적 집착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사랑을 행할 자유와 힘이 어떻게 우리 안에 깃들 수 있을지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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