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8:27-31[메시야 비밀] |
이름은 너무나 분명해서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아이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부모에게 저건 뭐야라고 묻죠. 무엇이라고 이름을 가르쳐 주면 그것을 안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는 지니고 있어서, 이름을 알고 싶어하죠. 그런데, 이름을 알고 몇 가지 그 이름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을 이야기로 갖고 나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곤하죠. 이름과 말로 풀어진 이야기, 그 너머에 감춰진 깊이와 신비는 애써 외면하려는 듯합니다. 이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깊이와 신비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에서는 너무나 믿었던 아내가 죽은 뒤에 그간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안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자기만을 깊이 사랑해 왔다고 믿었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고, 그것을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진실에 직면합니다. 그리곤 외부와 단절된 낯선 공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언어와 시공간을 부정하는 나눔을 갖죠. 이름이나 어떤 말을 애써 부정하고, 괴성과 몸짓으로 대화하는 원시적 나눔. 이 영화는 단순히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아픔을 그린 것만은 아닙니다. 이름과 언어,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 고정된 상을 소유하는 일상의 위태로운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이름을 소유하면서 잃어버린 신비들을 생각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최근에 봤던 GO라는 일본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 그 영화는 북한인 아버지를 둔 재일교포 2세 주인공이 조선인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고등학교로 옮겨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본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는 "차별적 이름짓기"를 통해서 집단주의, 국가주의, 파시즘에 이르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죠. 헤겔이 그랬던가요, "규정은 곧 부정이다"라고. 그것은 저것이 아니라는 부정을 통해서 하나의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그와 다른 것에 대한 구별이자 차별의 근원이 되죠. 인간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욕망이 언어의 한계를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젊고 유쾌하면서 역동적인 영상으로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무척 재미있고, 묵상의 꺼리를 깊게 던져주더군요.
이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뿌리가 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등장하죠. 보통 이 구절을 통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봤다는 의미로 생각되곤 합니다. 특히, 마태복은16장에서는 다른 복음서(마가와 요한)와는 달리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의 고백을 중심으로하는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근거 본문으로 이야기 되곤 하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감추신 이상한 상황이 이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게다가 그 이름을 고백하고 알았던 제자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십자가에 달려 주게 한 공범이자 방관자였음이 더더욱 그 고백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름지음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의 깊은 신비를 잃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전통이나 타종교의 전통에서 사용되던 개념으로 예수님을 정의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했을 뿐, 그 분의 깊은 사랑과 희생의 길은 완전히 오해했으니까요. 이렇게 볼 때, 그 고백이 참된 신앙고백의 뿌리인지 의심스럽게 보입니다.
신비나 체험을 말과 글자에 담으면, 화석이 되고 맙니다. 단순하고 별 것도 아닌 듯한 것으로 축소되고 말죠. 맛이나 감정조차도 설명이 않되고, 언어로 전하면, 오히려 더 깊은 단절에 직면할 뿐입니다. 말의 공간적 울림에서 빛깔과 형상, 감촉은 사라지고, 글자로 평면 위에 새겨넣으면 이미 생명력이 사라진 미이라가 되고 말죠. 종교적 진리를 기이하고 난해한 화두로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그 깊이에 온 몸이 빠져볼 때만 접근이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감추시는 것도 일종의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이나 언어라는 틀에 갖힐 때 잘려나가는 여실한 진리를 지키고 전하려는 화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시는 장면들을 메시야 비밀이라고 학문적으로 부르더군요.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다양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정황, 교리적 이유의 삽입, 알레고리적 상징 등. 어느 것이 맞는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신비한 비밀은 그런 이름 따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체험함으로서만 드러나고, 고백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보며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가15:39)"라고 고백하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아지죠. 이런 면에서 메시야 비밀은 "예수님의 신비한 정체는 모든 존재를 위한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배신자로 못을 박는 자리에서건, 못박히는 자리에서건 온몸으로 체험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놀라운 기적과 표적, 비유를 통한 권위있는 가르침들, 지식들, 삶과 아픔을 나누는 제자들과의 생활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은 오해될 뿐이었죠. 메시야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고 깨달아 지는 길이 십자가라는 "존재의 본질적 관계 체험" 위로만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메시야 비밀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도 맞아떨어지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들이 있다고, 우리 삶이 쉽게 변하지 않죠. 그 이름을 고백하고 소유했다는 것에만 안심하고 고여있기 때문에 그 깊은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형상을 그 이름에 맞춰 고정시킨 후에 거기서 벗어나는 다른 형상을 파괴하려는 증오심마져 키우죠.
우리가 참된 신앙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길은 오히려 그런 이름을 버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고 믿고 있다는 오해가 오히려 메시야의 신비를 은폐시키고, 그 비밀을 깨닫게 하는 체험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목격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켰던 이름인 "메시야"의 실체, 그 허망한 주검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욕심이 가져오는 결과, 메시야의 비참한 주검 위에서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목격했던 거죠. 이제 우리도 영원한 생명, 복받는 삶 따위의 욕망을 투영시킨 메시야라는 이름을 십자가에 못밖아야 하지 않을까요? 알고 있다는 교만과 내가 믿고 있는 고정된 메시야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신비를 만나는 다양한 이름들을 향해 겸손히 마음을 여는데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무엇인지 십자가를 통해서 깊이 체인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근원적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죽음을 뿌리로 해서 살아숨쉰다는 진리를 몸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특정한 개인이 단지 인격적으로 미숙해서 누군가를 배신한 차원이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가 그런 배신으로만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진리가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해서 살아남는 체험은 바로 이런 진리를 온몸으로 부딪힌 사건이었죠. 그것이 바로 "존재의 본질적 관계체험"이죠.
바로 그 체험을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손 끝에서 예수님을 찌른 창과 못의 흔적을 마주치고, 내 이웃의 아픔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상처를 매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봐야만 믿겠다던 도마의 의심이 오히려 필요합니다. 과거의 언제인가 일어났던 부활을 교리로서 머리로 믿는 화석화된 신앙보다는 우리 일상과 이웃의 상처 속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져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썩어가는 주검들을 정면으로 부딪혀 생명을 싹트게 하는 희생과 부활을 체험할 때, 메시야의 비밀은 밝혀질 것입니다.
"나"라는 허상의 존재가 온 우주의 다른 존재들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숨쉬고 있다는 진리와 그 희생에 어린 깊은 사랑에 공명할 수 있을 때, 메시야의 비밀은 탈은폐되고, 우리의 굳어진 신앙의 뿌리와 줄기에 생명수가 녹아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