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4:19,20 [방언에 관하여]

이제 여름 수련회들이 끝나간다. 많은 은혜를 체험하기도하고, 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며, 또한 너무나 재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가는 수련회. 그런데, 수련회를 끝내고 난 후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하는 고민이 바로 방언에 관한 것이다. 나도 방언을 하지 못해서 고민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뜨겁게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기 저기서 이상한 기도소리가 터져나올 때, 그런 기도를 하고 싶어 더 간절히 기도하지만, 되지 않는 경험들. 그러면 낙심이 되면서 하나님께선 왜 내게는 허락하지 않지라는 의문에 붙들리기 쉽다. 이런 무거운 마음의 지체들을 이번 수련회에서도 만났고, 다른 수련회를 다녀온 지체들에게도 들었다. 그 만남들을 통한 대화에서 방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1. 두 가지 방언
이상한 소리에 가까운 방언을 우린 보통 사도행전 2장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히 그 본문을 살펴보면, 거기에 나타난 방언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2장의 방언은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예수가 승천한 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복음을 각 지방의 말로 전하게 한 강권적 힘이 바로 방언이었던 것이다. 이 방언은 내가 중심이 되어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폭력적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에 두고 그의 입장에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성육신적 언어"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 낮아지는, 작아지는 성육신처럼, 방언도 단순히 언어적 측면 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언어소통적 성육신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요즘 교회에서 만나는 방언은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다. 언어로서의 기능이 결핍된 소리이기에 사도행전 2장의 방언처럼 복음을 전하는 기능이 없다는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런 형태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방언은 사도행전의 그것과 달리, 통역의 은사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고전14:2)'하는 것이다. 즉, 다른 지방 사람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는 이런 방언의 한계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고전14:4)'치고,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징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징(고전14:22)'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처럼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통역할 사람이 없을 때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전14:28). 그리고, 방언을 주심을 감사하지만,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깨친 마음(이성)으로 교회에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고전14:19)'라고 한다. 몇 시간 동안의 방언기도보다는 친구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들어줌과 그 상처가 치유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어눌한 몇 마디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 때의 기쁨이 훨씬 큰 행복이 아닐까? 성령을 통해 선물받는 은사들은 지체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보다는 이웃과 친구를 위한 은사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고전12:31절의 말씀을 볼 때, 이런 방언은 자기유익에만 고여있기 쉬운 낮은 단계의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
이런 두 가지 방언의 차이를 통해서 우린 방언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린 너무나 다양한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을 이미 가지고 있다. 복음의 비밀을 우리와 다른 누군가에게 그의 입장으로 다가가서 전하는 모든 언어-몸의 언어까지-가 성육신적 방언이 아니겠는가? 외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에서 사랑의 마음을 담을 작은 섬김의 손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성육신적 방언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은사라고 볼 수 있는 "성육신적 언어로서의 방언"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기한 표징에 눈이 어두워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더 큰 은사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겐 이미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그 특별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활용될 때, 은사는 드러나고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에 대한 욕심이 은사의 본래적 의미를 망각하게 하여 자칫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소중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미 받은 은사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표징에만 집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일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4장에서 수많은 방언보다 몇 마디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이어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데는 어른이 되라고 말한 것(고전14:20)이 아닌가?

하나님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이웃의 아픔을 치유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할 때, 선물로서 뜻하지 않게 받는 것이 은사가 아니겠는가? 혹여 직접적으로 어떤 은사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위한 간절함이 아니라 이웃과 지체를 위한 사랑의 간절함이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성령의 은사 체험은 그것 자체를 구했던 결과도 아니었고, 그 제자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았던가?
예수 당시에도 수많은 기적과 표적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표징을 요구했을 때, 예수는 그런 요구를 한탄하시면서 그들이 어떤 표징도 받지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뭔가 기이한 사건만이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욕망 앞에서는 그 어떤 놀라운 기적도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화가 아닌가? 그렇게 밖으로부터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압도해오는 증거로서의 기적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믿음의 시선만이 사소한 일상조차 놀라운 기적으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기적임을 깨달을 때, 우리에겐 더 이상 신기한 기적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이미 가진 모든 개성과 특성이 다 이웃을 섬기기위한 은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방언에서 예언으로
고린도전서14장에서는 모두들 방언(개인적인 방언)을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보다는 예언을 할 수 있기를 더 바란다고 말한다(고전14:5). 그 이유는 방언이 자신에게만 덕이 되고, 예언은 교회에 덕이 되는 더 훌류한 것이 때문이란다(고전14:5). 즉,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유아기적 단계에서 성장하여 이웃과 모두의 유익을 구하는 성숙한 단계의 은사가 예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방언받기도 쉽지 않은데, 예언이라니...조금은 난감한 바램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기적으로 탈은폐되고 나면, 예언도 그렇게 이상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즉, 일상의 평범한 모든 사건을 기적으로 볼 수 있고,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는 모든 행동이 다 성육신적 방언임을 깨달은 "뜨인눈"에게 예언도 다른 차원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현대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책 종교론에서 말한 것처럼 예언은 "종교적 사건의 반이 주어져 있을 때 다른 반을 희망하는 모든 것"(p.109)일 뿐이다. 이것은 예언이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라는 관점과 다르다. 이런 관점은 예언을 단순한 점술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예언은 현재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영원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가능성이다. 즉,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면서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며 비판적으로 섬기는 모든 행동이 예언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보면서 선포했던 예언들은 단순히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중심이 아니었다. 그 백성의 죄를 보면서 그것이 낳을 파괴와 고통을 걱정하는 사랑의 꾸짖음이자 비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으로 사회를 비판하며 고쳐가는 예언자들을 우리 교회는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우린 예언을 점술처럼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내 더 많은 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차원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가?

깨인 시선의 예언은 또한 종교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나머지 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예측하는 영역에 우리가 동참하기 때문에 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을 겸허히 인정하는 겸손이 함께 할 여백이 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어떻게 그런 뜨인눈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놓여있다. 일상의 모든 사건을 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섬세한 시선,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은사들을 깨달아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랑, 나보다 내 이웃에게 더 큰 은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랑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상한 말이나 놀라운 기적을 행할 힘을 얻을까라는 유아적 집착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사랑을 행할 자유와 힘이 어떻게 우리 안에 깃들 수 있을지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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