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꺼이 불의한 마음 : 불의와 악의 |
어릴 적에 한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구호들이 있다. 선생님께서 "우리는"이라고 선창을 하면 "위법을 창조한다!"라고 외치곤 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시지 않고, 화두삼아 스스로 깨닫게 던져주셨다. 누구도 스스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각자 스스로 깨닫도록 방치시킨 것이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화두를 붙들고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생각해보고는 모르겠다고 포기해버렸으니까...이제 그 화두에 대해서 풀어 새겨놓으려 한다. 우연한 기회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당한 정의에 대해서는 음흉한 욕망의 그림자가 그 뿌리에 드리워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현실 속의 정의는 대부분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 움직여 가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는 오히려 교만한 욕심과 가진 자의 여유가 배경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삶을 부끄러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마음은 힘겨운 현실을 알기 때문에 애처롭게 동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 뿌리는 자기 합리화의 수액에 욕망의 촉수를 깊이 담그고 있기 쉽다. 그리고 그 수액을 통한 시원함은 불의와 악의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악의를 향해 불어가는 것도 모른채 현실의 정의를 즐기기 쉽다.
모든 존재의 생명이 다른 존재의 희생을 밟고 서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뭉클한 마음, 그 마음은 기꺼이 불의해 질 수 있다.
기꺼이 불의한 삶을 선택하는 마음은 이웃의 죄를 향한 정죄의 손가락을 위로의 포근한 손길로 바꾸게 한다. 또한 불의로 찌운 살과 피를 이웃의 먹거리로 내어줄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생존이 뿌리 내린 불의를 못내 죄스러운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벅찬 감사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불의를 새로운 생명의 텃밭으로 읽궈간다.
불의한 방식, 다른 존재를 누르고 올라서야 생존할 수 있는 이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살을 부대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근원적으로 불의한 길일 수밖에 없다. 세속을 떠나지 않는한 그 불의함을 벗어날 수 없다. 그 현실의 절망을 깊이 체감하고, 그 불의함의 심연 속에 깊이 깊이 가라앉을 때, 어떤 희망도 힘도 남아있지 않은 그 빈자리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 바닥을 차고 오르면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수면 위로 솟아오르면, 빚진 생명임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그 빚진 살과 피를 또 다른 존재에게 내어주려는 적극적인 불의로 거듭나게 된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을 따라사는 "예수따름이"로 이름지은 것을 봤다. 깊이 동감이 되는 이름이었다. 그 예수따름이들은 이 땅의 돈과 권력이 선포하는 정의를 깨부수는 불의한 자리에 서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당시의 종교, 정치 권력이 규정한 정의를 깨는 불의한 삶, 위법한 삶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따름이"는 당연히 위법자여야 하지 않은가?
악의가 그 속에 또아리를 튼 정의를 포기하고,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 악의찬 정의를 분별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불의. 그렇게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자리가 내 안에서도 그립다. 빈 자리, 허공에 안개가 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그 자리에 신비하게 일어나는 안개구름. 내 마음 맑게 비우면 불의가 생명의 텃밭으로 일궈지는 거듭남 피어오르려나....
덧붙임; 한국 개신교회의 의로운 자화상 그런데, 우리 신앙의 결은 이를 역류하고 있는 듯하다.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하려는 열심은 너무나 반듯한 삶에 대해 집착하곤 한다. 죄짓지 않는 당당한 자기 모습, 축복받아 성공하는 삶,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그 수많은 은사체험들이 반복되어도 한국 개신교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역류의 결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로움과 선에 집착하는 신앙은 바리새인들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웃의 아픔을 깊이 동감하고 그것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사랑이 그 집착에는 자리잡지 못한다. 흰두교 명상을 수행하던 친구가 교회의 새벽기도회를 가보고는 그 안에서 너무나 탁하고 악한 기운이 가득한 것을 느꼈다고 했었다. 그 말을 당당하게 부인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신앙의 이런 성향을 알고 있기에 도둑이 제발저리는 심정에서 였다.
우리의 기도가 자기 욕망과 집착에 너무 깊이 빠져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할지, 어떻게 하면 신비한 은사를 체험할지 등에 대해서는 이방종교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겨가며 기도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말씀 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물어보고 그 삶에 더 가까이 가려는 몸짓은 흔하지 않다.
기꺼이 불의할 수 있는 마음은 자기 의로움을 포기하는 사랑에서 싹튼다. 바울이 자신의 민족이 구원받는 댓가라면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려했던 마음도 이런 불의한 사랑과 공명할 것이다. 극락 앞에 몸을 묻고 모든 중생들이 극락으로 들어갈 때가지 기다린 지장보살의 자비와도 닮아있다. 소설 "침묵"에서 다른 신앙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하는 신부의 모습, "순교자"에서 교인들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 배신자인채 하는 목사님.....이 모두가 기꺼이 불의한 마음의 그 아름다운 향내를 풍겨준다. 그런 사랑으로 은혜를 목말라 할 때, 우리 신앙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