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김정현 지음 / 문이당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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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학기술이 그려주는, 꿈같은 미래를 온갖 광고들에서 만난다. 아니 육감적인 그녀는 우리의 일상을 겁탈하고 있다. 그 세계를 향유하기 위해 질주하다가 어느 새 쫓끼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끊임없이 쫓기는, 힘겨운 일상이지만 그녀는 온갖 재미와 즐거움으로 피로를 풀어준다. 가끔씩 고개를 드는 공허함이나 불안도 문제되지 않는다. 좀 더 열심히 살고, 더 즐기면 괜찮을 거라는 격려가 주변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저 밑바닥에서 가난에 찌든 이들은 성실하지 못해 그 댓가를 받는 낙오자들일 뿐이지. 나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그 멋진 미래를 향유할 수 있으려면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품는 희망이요, 꿈이다.

그러나 온갖 광고들이 계시(啓示)하는 희망을 불경스러운 눈길로 의심하게 되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노력할수록 그들의 슬픔과 작은 기쁨들로 부터 멀어지고,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버린다. 그것들을 함께 나누기에는 너무나 바쁘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나를 만나게 된다. 세련된 문명의 소비재를 가족에게 뱉어내는 자판기가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안돼 이런 의심은 이 경쟁사회에선 낙오자가 되게 하는 덫일 뿐이다. 더 열심히 살면 여유가 생기고 괜찮아 질거야. 그러나 그럴수록 자기 합리화와 자위의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바쁜 일상은 그 냄새를 날려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려준다. 주인공 정수가 자신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환상과 기만의 가면은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알몸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걸인의 동냥바구니, 토악질하는 중년의 굽은 등, 문명의 욕정과 몸부림을 다 받아내는 창녀의 비린 웃음까지 소중한 의미로 부활한다. 그건 요정의 접대부 소령과 포장마치 주인 아저씨가 당당하게 풍겨주던 그 알 수 없는 향기였다. 아련한 기억 너머 어디쯤에선가 잃어버린 사람냄새였다. 그 정감어린 체취의 진원지는 바로 죽음과의 조우(遭遇)였던 것이다. 그래 우린 풍요로운 미래와 진보하는 문명을 위해 이런 '사람냄새'를 대가로 지불했던 것이다.

'죽음을 끌어안은 사람냄새'를 한껏 들이키면 이 화려한 문명의, 썩어가는 알몸을 보게 된다. 이 평등한 사회에서 세련된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나의 개성이고 고상한 취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것을 소비할 수없는 사람을 깔보는 허위의식과 열등감, 더욱 세련된 상품과 문명을 소비해야 나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오해하는 자기기만이 도사리고 있다. 계급투쟁은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여 자신의 상품가치를 충족시키는 소비투쟁으로 바뀌어 있고, 사람다움을 향한 지혜와 예술과 종교도 이젠 이 치열한 투쟁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또한 우린 그 착각과 욕심이 집착하는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오늘 내 곁에,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소외시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이웃의 아픔을 외면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소외되고 소외시킨, 너와 나는 그 상처와 불안을 달래려고 더 화려한 상품을 소비한다. '악순환'의 후렴구는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들려주는 노래의 곡조를 따라 내 일상의 푸석한 껍질이 부서지고, 내 알몸 위로 흐르는 눈물에 젖어든다. 마치 태초의 혼돈과 공허가 빛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듯이, 이제 생명의 잉태를 위해 폐허가 된 우리의 삶을 마주한다. 두렵고 떨리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이 모든 것을 비워 선사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어두운 땅 밑에서 생수를 빨아올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뿌리가 된다. 좀 덜 먹고 덜 입으면 어떠리. 이제 화려한 미래에 붙들린 눈길을 거둬 사랑하는 이와 나 자신의 죽음을, 그 통곡의 소리를 들어야 하리. 그렇게 죽음의 정감어린 곡조를 따라 삶을 춤추면, 투박하지만 풋풋한 춤사위를 따라 사람냄새가 베어나오고, 지금 내 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그렇게 마음도 몸도 가득해 넘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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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구승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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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관점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가 신뢰가 있는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그 반대는 그렇지 못하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제시하는 예들에는 문제가 있다. 그런 예들에서 그는 성공한 결과와 신뢰라는 두 축을 단순하게 이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역시 다양한 다른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모든 요인들 중에서도 특히 신회라는 요인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단정짓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논의 전개는 너무 느슨하다. 이는 성실하면 성공한다는 명제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동시에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 불성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단순함의 문제를 지니게 된다.

사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에게 신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치일 뿐이다. 그의 논의 전개에서 현대사회가 경제활동을 통해 사회성을 획득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성취한다고 보는 것 역시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의미라는 것도 역시 사치일 뿐이기 쉽다.

사실 문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논제고 또한 중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을 논하면서 신뢰라는 가치관을 강조하게 되면, 정치와 역사의 역학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신뢰라는 가치관은 사실 문화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반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국이란 사회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기업주들에 의해 짙밟혀왔고, 지금도 IMF 아래서 신뢰는 설 땅이 없다. 즉, 신뢰라는 윤리적 가치관이 자리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역사, 정치적 상황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삼켜버렸다고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신뢰는 오히려 착취를 합리화하는 기만이 되기 쉽다. 그리고 박정희의 정치가 이룬 경제성장은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상실케 했다. 이런 정황에서는 경제적 발전과 신뢰는 대립되어있다. 이처럼 신뢰는 전통으로 잘 전해지는 가치관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적 정황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파생되는 면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신뢰라는 이념은 효율과 발전, 비용절감 등을 통해 보다 경제적 이익을 많이 보려는 목적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이익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한정된 이익이다. 결국 이것은 전체를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한 부분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집단이기주의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면을 지닌다. 물론 신뢰라는 가치관이 전체를 담으면 되겠지만, 현대가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일등과 나머지 모두는 꼴찌가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중산층이 사라지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민으로 사회가 구성되어가는 흐름을 고려할 때, 전체를 고려하는 신뢰가 자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볼 때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는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경제영역에 있어서 문화와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자본인가를 보여준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문제점도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이젠 모든 것이 경제적인 영역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강력한 흐름 앞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멋드러진 급류타기를 해내려면, 한 쌍의 노를 가지고는 역부족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몇 십 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 벼랑 끝에서 오열을 토하는 가족들의 모습, 특히 그런 아빠, 엄마의 모습을 당황스러워 하며 바라보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요즘은 계속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들의 눈물이 실은 우리 모두의 몫이기에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끈임없는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거대해서 저 지평선 너머로 늘 물러난다고 해도. 이렇게 조금씩 고민하는 마음들이 모이면 이런 추락이 멋진 비행으로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땅위로 떨어진다고해도...

(비판의 부분은 강준만 님의 비평을 적극수용한 부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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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구승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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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던져진채로 떠밀려가는 상황에 자신도 모를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그 속 깊은 곳에 스스로를 던지려 하는 강렬한 힘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추락을 비행으로 바꾸려는 강렬한 집착. 마치 이유도 모른채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그냥 발버둥치는 것만으론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만의 곡선을 그리며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과 같은 집착에 붙들려버린 것이다. 이렇게 피투적 기투의 의지인 인간은 열려진 가능성의 존재로서 빛과 어둠 사이에서 어느 극단으로든 뻣어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두가지 대립적인 실존은 여러 방면에서 그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인해 인간의 가능성 가운데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중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일이 쉬벌어진다. 경제의 영역에서도 이런 일 일어난다.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중상주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합리적 이성과 이기적 자아를 지닌 인간이 자유로운 시장 경제체제에서 경쟁할 때 경제는 발전할 수 있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서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는 중상주의 경제학은 경제발전에 대한 중요한 관점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후쿠야마는 이 두 관점이 실제적인 성공의 사례를 통해 그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문화 특히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통해 그 사이를 비껴나가려 한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 이른 현대에서는 거대 담론이나 거시 경제학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고, 이젠 문화간의 충돌을 통해서 창조적 변화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갈등으로 치닫는가의 기로에 서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어떤 제도라도 그것이 적용되는 곳의 문화가 강력한 변수로 작용해왔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문화와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메카니즘을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다 근본적인 방식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그는 신뢰라는 문화적, 사회적 자본과 경제활동의 역학관계를 분석해 나간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나 중상주의 경제학의 관점은 사실 너무나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려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 사회의 경제나 정치의 현상은 복잡성과 다원성의 다양한 요인들의 긴장 속에서 상호 작용을 통해서 변해가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서 볼 때 그 대안으로 문화를 언급한 것은 문화가 지닌 다면성과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그 안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과 복잡성의 상호작용을 문화라는 한 축으로, 그것도 신뢰라는 한 가지 측면만으로 경제적 발전을 틀지우려 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어보인다.

후쿠야마는 이 책에서 어떤 경제적 제도도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문화가 신뢰라는 문화적 자본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성공여부가 달라졌다고 논증해간다. 결국 신뢰라는 전통적이고 윤리적 가치가 역설적이게도 경제 영역에 작용할 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정보화의 발달로 사업이나 사회가 소규모화로 치닫는 경우에도 그 단위들 간의 유기적 연결에 중요한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 진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기업의 경우에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모두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할 때 투자 비용이 줄어들고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갈 힘을 지닐 수 있는 장점이 된다고 본다. 사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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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 혁신성, 현실에 관한 진리에 집착하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도외시하는 천재의 이야기. 그 천재는 결국 독창적인 이론으로 능력을 인정받지만, 정신분열증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약을 끊고 환상을 이겨내려는 고된 노력과 이를 돕는 부인의 사랑으로 결국에는 말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와 부인은 해답이 머리에 있지 않고, 가슴에, 아름다운 마음, 사랑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참된 논리는 수학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이 영화는 수학, 논리, 독창성, 현실에 관한 진리에 집착하는 천재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상징을 생각해보게 한다.

수학은 가장 명확한 논리와 진리의 세계이다. 현실의 우연과 혼돈, 복잡성은 수학의 순결한 세계에 발딛일 틈이 없다. 늘 유일하고 정확한 정답이 있는 세계. 그 세계의 힘으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원자폭탄으로 전세를 역전했고, 우리가 누리는 현대의 문명들도 수학이라는 굵은 뿌리로 지탱되어있다.

하지만 수학적 논리는 현실과 너무나 큰 간격을 지니고 있다. 현실 속 어디에도 순결한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인 원도, 직선도, 삼각형도 존재하지 않고, 1+1이 2가 아닌 현실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수학적인 논리로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진리로 작용하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수학이 진리로 작용하는 우리의 일상은 결국 너무나 강력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정신분열증의 환상이 아닌가?

이런 수학적 논리에 집착하는 주인공은 스스로의 대단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적 욕망에 짙눌려, 허상의 인물과 사건들을 현실로 보기 시작한다. 뭔가를 소유하려는 강박적 욕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도구를 찾게 한다. 바로 수학적 논리가 그런 도구가 아닌가? 그 강력한 도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환상임에도, 우리의 욕망은 그것을 통해서 현실을 재단하고 측정하며 계산하게 한다.

실존인물인 주인공이 노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오다가 정신분열증으로 보게 되었던 환상의 인물들을 여전히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평생 그 환상을 제거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 붙들린 수학적, 경제적, 소비적 논리로 그려진 환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보다 더 큰 문제는 주인공처럼 "환상임을 알고, 보여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환상임을 아예 모르기에 그것이 참된 진실인양 쫓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분열증, "참된 진실을 구별해내지 못하고, 우리 욕망이 투사된 환영들에 붙들린 마음의 병"을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 욕망과 환상은 우리 삶에서 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이 평생 정신분열증을 안고 살아가듯이. 하지만 그 환상을 구별해내고 무시하는 길을 치열하게 찾아보고, 연습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너무나 힘겹고 고되겠지만, 우리에겐 그 길을 가야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참된 현실의 진리란 우리가 서로를 만나고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터이다. 서로가 보는 현실이 제 각각의 욕망일 뿐일 때 우린 서로를 파괴할 뿐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들이 있기에 그들과 함께 숨쉬며 아름다운 생명을 누릴 현실을 되찾아야 한다.

또한 우리 눈를 가린 환상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기에 힘겹겠지만, 우리에겐 가녀리나마 희망이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한 존재 한 존재가 이미 온 우주와 하나로 이어져 그 모든 존재의 사랑스런 흐름이 잠시 한 몸으로 맺혔다 스러질 뿐임을 깨닫는 사랑, 그 아름다운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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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그제 홍삼수 감독의 [오! 수정]이란 영화를 뒤늦게 봤습니다. 흥미로운 묵상꺼리와 우리 일상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화두도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1,2, 3,4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영화에서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종일 기다리다:", "어쩌면 우연","1","2"...등- 1,2와 3,4부가 같은 시간에 있어난 사건인데, 전반부는 남자 주인공, 후반부는 여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점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들이면서 사건 그 자체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그건 남, 여 주인공의 기억에 다르게 각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미난 발상은 우리 일상의 기억들과도 닮아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함께 겪고도 다르게 기억하는 일들이 종종 있죠. 제 안사람과 연애시절얘기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앞에 나왔던 장면인데 후반 이후에 다시 나오면서 뭔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한 후에 확인하려고 되돌려보니까, 그것을 영화로 방금 본 제게도 조금씩 다르게 기억되어 있더군요. 영화의 두 주인공의 기억과는 또 다른, 저의 기억이었던 거죠.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도 한 사건을 나름대로 각색하여 다르게 기억하는 재미난 상황을 경험했죠.

하지만 이런 재미난 경험은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경험들도 기억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죠. 그 기억들이 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재구성된 왜곡들이고, 의미들은 이런 왜곡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비릿하고 역겨운 우리의 모습들은 지워버리고, 필요한 부분만을 곱게 다듬어서 집어넣죠. 우리의 약속과 희망, 만남들은 그렇게 각색된 장면들을 배경으로 숨쉬고 있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억의 왜곡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런 각색과 왜곡들이 우리 일상의 연애와 사랑 속에도 별다르지 않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만듭니다.

얼마전에 메멘토라는 영화도 바로 사실(fact)와 기억(memory)이라는 문제를 천재적인 구성으로 다뤘었죠. 그 영화는 근대철학의 주객 이원론의 문제의식을 퍼즐 맞취기에 기댄 추리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매혹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오! 수정"은 사실과 기억에 관한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담담하고 때론 씁씁한 미소에 담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메멘토는 끝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 천재적인 구성에 감탄이 터지게 하죠. 이와 달리 "오! 수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기초한 의미"같은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맞닥드리게 합니다. 그리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만나게 하죠. 맛있지만 뒷맛이 씁씁한 커피맛 같은 영화죠.

"사실과 기억", 그리고 "이것에 기초한 의미들"의 문제는 신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죠. 신학을 배우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이 단순하게 모두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속에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더 깊고 넓게 맛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내용 중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의미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복음서를 배우다보면, 각 복음서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모순되고 상반되기도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는 심각해 지죠.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신학적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화두적인 단서를 던져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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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y814 2004-03-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약이해 숙제 할 책 읽다가 꾸벅꾸벅.. 잠 깰려고 감신대원 까페에 들어왔다가 원우님의 알라딘 서재 소개하는 글을 읽고 링크했더니... 우와 대단하십니다. 지나번 신약이해 시간에 역사적 예수를 읽고 교수님께 하셨던 질문( 뒤에 앉아서 원우님 질문의 처음 부분을 잘 못들었습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을 듣고.. 음 범상치 않군 했는데 진짜 범상치 않으시군요.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저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요즘은 흔한 말로 포스터 모더니즘이라고 하지요.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 지난주 종교사회학 시간 도입부에 교수님께서 루이 암스트롱의 "

"what a wonderful world'를 틀어주시며 교수님은 음악에서 신을 느낀다고, 이런 감정도 종교가 아니냐고  했을 때 전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저에게 있어 그 음악은 절연한 '저' (이생이 아니라 말그대로 속세죠) 세상에 대한 향수 내지는 그렇게 버리려 애쓰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확 엄습해 오는 걸 느끼기 때문이죠. 교수님이 너무 순수하신 것인지 제가 너무 세속적인 것인지.. 저것도 종교냐.. 하고 속으로 투덜대다가 제가 종교사회학이라는 과목을 기독교 사회락이라는 과목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여튼 하나의 현상에 이렇게 다른 느낌을 갖는 세상, 진리나 원칙은 사라져 가고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세상-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을 구원해야 하죠 거창하게 말하면..

무슨 말하다가 이렇게 삼천포로 빠졌나.. 아 오 수정..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도 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별로 안좋아 합니다만. 그래도 영화는 관객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는게 제 지론이라서..

숙제에 묻혀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화이팅..

추신. 잠 깼습니다. 그것도 확-

 

 


물무늬 2004-03-2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신지 이렇게 흔적을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아직은 혼자 노는 곳이라 누군가 찾아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군요. 혹시 또 오시면 누구신지 알려주세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 학교에서 직접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루이암스트롱 노래....사람마다 주관적인 직관이 다르니까 님처럼 느끼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 생각에도 교수님께서 그 감정을 종교라고 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보는 종교라면 뭐든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참 님께서 제 글들을 보고 잠이 확 깨셨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보통은 잠않올때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인데....^^::

kjy814 2004-03-2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피드백이 빠르다니.. 자주 들러야 겠는 걸요.. 내가 누구게..알아맞혀 보세요.
낄낄
저도 1/6 학기 18번 김진연 이랍니다. 이제야 신약이해 숙제가 막 끝났어요. 어찌보면 조교가 휙 보고 나눠주는 것 같은데, 미련인지 집착인지 일주일 내내 신약이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다른 과목들이 좀 불쌍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다른 과목들에게 된 통 당할 것 같기도 하고. 내일은 교회사가 있는 날이죠. 할렐루야 열심히 부르고(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성가곡(?)을 반복해서 부르면 정말 신비한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나요. 저도 개인적으로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계속 외우고, 그것이 기도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교수들이 말하는 영성이 어떤건지.. 왠지 가톨릭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일도 기대가 되네요

오늘 신학 입문,, 재밌지 않았나요. 신창원 교수님은 아들에게 창조신학하는 교회 가지말라고 하셨다죠. 우리 엄만 조직 신학은 듣는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라고 신신당부 하셨는데... 그냥 이런 저런 이유로 웃었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었어요. 교수님이 창조신앙과 진화론의 공통점을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그 공통점이 원창조/계속창조/공명적 일치라는 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왜 구체적인 입증은 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공통점의 구체적 사례랄까..1)수업시간이 모자라서 2)신학의 임무는 자연과학의 구체적 사실을 입증하는게 아니라 입증할 수 있는 담론/가설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과학자의 몫이기 때문에 3)다른 이유가 있다.

자야 겠네요
good night

물무늬 2004-03-24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넘 놀랍고 기쁩니다. 이렇게 빨리 님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요^^
김진연님...이제 얼굴과 맞춰보면 되겠습니다. 내일 꼭 찾아야쥐....
대부분은 그냥 대충해서 내기 급급한 것 같은데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만큼 신약 과목에 대한 통찰력이 익어갈거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성가곡이요?...박익수 교수님께선 우리 나라의 독송문화가 무의미하다고 보시죠. 한 구절을 봐도 깊이 제대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시니까요. 하지만 누천년 내려온 독송문화의 저력을 체험해보지 못하신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원 전통의 영성 훈련법은 또 다른 깊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맛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반복되는 노래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영성 훈련을 맛보신 개신교인 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쉽게 무시하지 못하게 되더군요. 겸손히 배우고 경험해본 후에 판단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학입문 시간, 창조론과 진화론 문제라....글쎄요. 교수님께서 제가 듣기엔 워낙 불명료하고 산만한 설명으로 일관하셔서 그 이유를 정확히 추측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추측으로는-실은 더 궁금해서 서점에 가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그 교수님 글이 실린 책까지 읽어 봤습니다-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더 이상의 입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창조신앙과 진화론 사이에 공동점은 단지 진화적 발전과 계속-창조를 통한 완성의 과정과의 유사성 자체인 것 같습니다. 유사한 발전의 운동 방향을 가졌다는 것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죠. 단지 모순되거나 대립된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유사성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계속-창조니까 진화론이 모두 옳다거나, 진화론이 옳으니까 계속-창조가 입증되었다는 식의 단순한 일치가 아니라, 서로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통해서 서로가 새로운 관점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공조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공명적 일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나? 사실 잘 모르겠군요. 괜히 모르는 것 아는척 했나봅니다. 제 추측일 뿐입니다. 과학과 종교에 대해서는 저도 처음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