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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구승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6년 10월
평점 :
품절
이런 관점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가 신뢰가 있는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그 반대는 그렇지 못하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제시하는 예들에는 문제가 있다. 그런 예들에서 그는 성공한 결과와 신뢰라는 두 축을 단순하게 이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역시 다양한 다른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모든 요인들 중에서도 특히 신회라는 요인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단정짓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논의 전개는 너무 느슨하다. 이는 성실하면 성공한다는 명제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동시에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 불성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단순함의 문제를 지니게 된다.
사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에게 신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치일 뿐이다. 그의 논의 전개에서 현대사회가 경제활동을 통해 사회성을 획득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성취한다고 보는 것 역시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의미라는 것도 역시 사치일 뿐이기 쉽다.
사실 문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논제고 또한 중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을 논하면서 신뢰라는 가치관을 강조하게 되면, 정치와 역사의 역학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신뢰라는 가치관은 사실 문화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반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국이란 사회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기업주들에 의해 짙밟혀왔고, 지금도 IMF 아래서 신뢰는 설 땅이 없다. 즉, 신뢰라는 윤리적 가치관이 자리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역사, 정치적 상황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삼켜버렸다고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신뢰는 오히려 착취를 합리화하는 기만이 되기 쉽다. 그리고 박정희의 정치가 이룬 경제성장은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상실케 했다. 이런 정황에서는 경제적 발전과 신뢰는 대립되어있다. 이처럼 신뢰는 전통으로 잘 전해지는 가치관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적 정황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파생되는 면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신뢰라는 이념은 효율과 발전, 비용절감 등을 통해 보다 경제적 이익을 많이 보려는 목적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이 이익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한정된 이익이다. 결국 이것은 전체를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한 부분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집단이기주의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면을 지닌다. 물론 신뢰라는 가치관이 전체를 담으면 되겠지만, 현대가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일등과 나머지 모두는 꼴찌가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중산층이 사라지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민으로 사회가 구성되어가는 흐름을 고려할 때, 전체를 고려하는 신뢰가 자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볼 때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는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경제영역에 있어서 문화와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자본인가를 보여준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문제점도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이젠 모든 것이 경제적인 영역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강력한 흐름 앞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멋드러진 급류타기를 해내려면, 한 쌍의 노를 가지고는 역부족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몇 십 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 벼랑 끝에서 오열을 토하는 가족들의 모습, 특히 그런 아빠, 엄마의 모습을 당황스러워 하며 바라보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요즘은 계속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들의 눈물이 실은 우리 모두의 몫이기에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끈임없는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거대해서 저 지평선 너머로 늘 물러난다고 해도. 이렇게 조금씩 고민하는 마음들이 모이면 이런 추락이 멋진 비행으로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땅위로 떨어진다고해도...
(비판의 부분은 강준만 님의 비평을 적극수용한 부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