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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정현 지음 / 문이당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기술이 그려주는, 꿈같은 미래를 온갖 광고들에서 만난다. 아니 육감적인 그녀는 우리의 일상을 겁탈하고 있다. 그 세계를 향유하기 위해 질주하다가 어느 새 쫓끼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끊임없이 쫓기는, 힘겨운 일상이지만 그녀는 온갖 재미와 즐거움으로 피로를 풀어준다. 가끔씩 고개를 드는 공허함이나 불안도 문제되지 않는다. 좀 더 열심히 살고, 더 즐기면 괜찮을 거라는 격려가 주변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저 밑바닥에서 가난에 찌든 이들은 성실하지 못해 그 댓가를 받는 낙오자들일 뿐이지. 나의 사랑스러운 가족이 그 멋진 미래를 향유할 수 있으려면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품는 희망이요, 꿈이다.
그러나 온갖 광고들이 계시(啓示)하는 희망을 불경스러운 눈길로 의심하게 되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노력할수록 그들의 슬픔과 작은 기쁨들로 부터 멀어지고,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버린다. 그것들을 함께 나누기에는 너무나 바쁘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나를 만나게 된다. 세련된 문명의 소비재를 가족에게 뱉어내는 자판기가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안돼 이런 의심은 이 경쟁사회에선 낙오자가 되게 하는 덫일 뿐이다. 더 열심히 살면 여유가 생기고 괜찮아 질거야. 그러나 그럴수록 자기 합리화와 자위의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바쁜 일상은 그 냄새를 날려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려준다. 주인공 정수가 자신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환상과 기만의 가면은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알몸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걸인의 동냥바구니, 토악질하는 중년의 굽은 등, 문명의 욕정과 몸부림을 다 받아내는 창녀의 비린 웃음까지 소중한 의미로 부활한다. 그건 요정의 접대부 소령과 포장마치 주인 아저씨가 당당하게 풍겨주던 그 알 수 없는 향기였다. 아련한 기억 너머 어디쯤에선가 잃어버린 사람냄새였다. 그 정감어린 체취의 진원지는 바로 죽음과의 조우(遭遇)였던 것이다. 그래 우린 풍요로운 미래와 진보하는 문명을 위해 이런 '사람냄새'를 대가로 지불했던 것이다.
'죽음을 끌어안은 사람냄새'를 한껏 들이키면 이 화려한 문명의, 썩어가는 알몸을 보게 된다. 이 평등한 사회에서 세련된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나의 개성이고 고상한 취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것을 소비할 수없는 사람을 깔보는 허위의식과 열등감, 더욱 세련된 상품과 문명을 소비해야 나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오해하는 자기기만이 도사리고 있다. 계급투쟁은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여 자신의 상품가치를 충족시키는 소비투쟁으로 바뀌어 있고, 사람다움을 향한 지혜와 예술과 종교도 이젠 이 치열한 투쟁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또한 우린 그 착각과 욕심이 집착하는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오늘 내 곁에,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소외시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이웃의 아픔을 외면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소외되고 소외시킨, 너와 나는 그 상처와 불안을 달래려고 더 화려한 상품을 소비한다. '악순환'의 후렴구는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들려주는 노래의 곡조를 따라 내 일상의 푸석한 껍질이 부서지고, 내 알몸 위로 흐르는 눈물에 젖어든다. 마치 태초의 혼돈과 공허가 빛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듯이, 이제 생명의 잉태를 위해 폐허가 된 우리의 삶을 마주한다. 두렵고 떨리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이 모든 것을 비워 선사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어두운 땅 밑에서 생수를 빨아올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뿌리가 된다. 좀 덜 먹고 덜 입으면 어떠리. 이제 화려한 미래에 붙들린 눈길을 거둬 사랑하는 이와 나 자신의 죽음을, 그 통곡의 소리를 들어야 하리. 그렇게 죽음의 정감어린 곡조를 따라 삶을 춤추면, 투박하지만 풋풋한 춤사위를 따라 사람냄새가 베어나오고, 지금 내 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그렇게 마음도 몸도 가득해 넘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