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그제 홍삼수 감독의 [오! 수정]이란 영화를 뒤늦게 봤습니다. 흥미로운 묵상꺼리와 우리 일상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화두도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1,2, 3,4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영화에서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종일 기다리다:", "어쩌면 우연","1","2"...등- 1,2와 3,4부가 같은 시간에 있어난 사건인데, 전반부는 남자 주인공, 후반부는 여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점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들이면서 사건 그 자체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그건 남, 여 주인공의 기억에 다르게 각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미난 발상은 우리 일상의 기억들과도 닮아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함께 겪고도 다르게 기억하는 일들이 종종 있죠. 제 안사람과 연애시절얘기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앞에 나왔던 장면인데 후반 이후에 다시 나오면서 뭔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한 후에 확인하려고 되돌려보니까, 그것을 영화로 방금 본 제게도 조금씩 다르게 기억되어 있더군요. 영화의 두 주인공의 기억과는 또 다른, 저의 기억이었던 거죠.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도 한 사건을 나름대로 각색하여 다르게 기억하는 재미난 상황을 경험했죠.
하지만 이런 재미난 경험은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경험들도 기억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죠. 그 기억들이 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재구성된 왜곡들이고, 의미들은 이런 왜곡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비릿하고 역겨운 우리의 모습들은 지워버리고, 필요한 부분만을 곱게 다듬어서 집어넣죠. 우리의 약속과 희망, 만남들은 그렇게 각색된 장면들을 배경으로 숨쉬고 있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억의 왜곡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런 각색과 왜곡들이 우리 일상의 연애와 사랑 속에도 별다르지 않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만듭니다.
얼마전에 메멘토라는 영화도 바로 사실(fact)와 기억(memory)이라는 문제를 천재적인 구성으로 다뤘었죠. 그 영화는 근대철학의 주객 이원론의 문제의식을 퍼즐 맞취기에 기댄 추리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매혹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오! 수정"은 사실과 기억에 관한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담담하고 때론 씁씁한 미소에 담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메멘토는 끝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 천재적인 구성에 감탄이 터지게 하죠. 이와 달리 "오! 수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기초한 의미"같은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맞닥드리게 합니다. 그리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만나게 하죠. 맛있지만 뒷맛이 씁씁한 커피맛 같은 영화죠.
"사실과 기억", 그리고 "이것에 기초한 의미들"의 문제는 신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죠. 신학을 배우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이 단순하게 모두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속에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더 깊고 넓게 맛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내용 중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의미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복음서를 배우다보면, 각 복음서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모순되고 상반되기도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는 심각해 지죠.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신학적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화두적인 단서를 던져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