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생각의창 1
한국종교학회 엮음 / 창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p.73∼99.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된다1)는 의미인 듯하다. 이 잠언은 종교 간의 이해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개종교들은 자기 종교의 교리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타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서로의 모습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고 서로 간의 차이를 통해 배우며, 이를 통해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편견을 근거로 상대를 정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극단적인 반목에 이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문화간, 종교간 충돌의 문제를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에서 서로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의 맥락 속에서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이라는 정승석의 글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이 불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고치고, 이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승석이 다루려는 오해는 '불교가 속세의 고뇌로부터 초연한 삶을 강조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불교가 '죽음이 곧 열반'이라고 보기 때문에 죽음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허무주의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바르게 전함으로서 불교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고자 한다. 불교가 바라보는 죽음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사즉열반의 진리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불교가 이해하는 죽음, 죽음에 대한 접근방식과 극복방식을 '죽음에 대한 붓다의 태도', '죽음의 정의와 상태', '죽음의 종류', '죽음의 과정', '죽음의 극복'을 분석함으로써 살펴본다.

[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 ]
이 책을 통해 불교는 죽음 그 자체의 정체와 정면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시켜 버리려는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특징을 알 수 있다. 즉, "불교는 죽음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서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인가라는 방향을 걷지않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죽음이란 없는 것이라고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5)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에 있어서 죽음은 존재가 변해가는 변화의 한 부분으로써,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 단멸(斷滅)도 아니다. 물론 단순하게 새로운 세계로 도약해 가는 가능성의 과정만도 아니다. 오히려 무상한 변화의 과정인 죽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라보는 체득을 통해서 넘어서야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불교의 이런 관점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 째, 불교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현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죽음에 대한 신화적 이해나 신비한 이해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고, 그 종류는 어떻게 분류되며, 그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것을 대단히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해간다. 이런 측면은 죽음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불교가 얼마나 철저하고 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죽음의 문제를 단순히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나 윤회로 떠넘김으로써 회피하는 방식처럼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공허한 방식들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다.
둘 째, 죽음의 문제를 생명과 삶의 문제와 깊이 연관시키는 점이다. 生卽死 死卽生의 관점에서 드러나듯이 죽음을 생명과 단절되고 대립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볼만큼 죽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파괴하려고만 하는 두려움과 욕심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의 미숙함을 향해서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발전과 확대만을 중요시하는 현대의 문명은 죽음을 생명의 적으로만 보면서 파괴하려고만 하여 오히려 모든 생명에 있어서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의 성숙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하여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고, 이것은 생태문제나 소비문화 등의 여러 문제로 전지구적 생명의 그물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있다. 이런 문제 앞에서 불교는 오히려 죽음이 궁극적 의미와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삶이 풍성해지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와 현상에 대해서 철저히 이해하려는 염사(念死)를 중시'한다는 세 번째 특징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문화는 죽음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인 타부로 여기면서 들춰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건물의 4층을 F로 하거나 무덤을 가능한 한 멀리 두려는 등의 모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회피하려고만 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생각한다고 어떤 대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무시한다. 그러나 죽음을 바로 직면하고 마주하는 삶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는 삶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교는 우리 삶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깊이 마주하고 뚫고 나아가는 일이 오히려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네 번째는 이런 복잡하게 보이는 생각의 결이 모두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에 실천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현상, 종류, 과정 등의 내용이나 극복의 방법 등을 얕게 보면 대단히 사변적이고 공허한 듯이 보이고, 죽음과 그 이후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정립하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은 인간이 처한 죽음의 절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집중되어있다. 그래서 지적인 논증이나 설득보다는 내적인 체험을 통한 체득을 강조한다. 물론 이런 면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에게 얼마나 체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그 궁극적 의도의 방향성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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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의 구조는 크게 나누어보자면 똥을 담는 그릇과
똥을 빼내는 구멍으로 되어 있다. 요강은 그렇지 않
다. 요강의 똥은 빠져나갈 곳이 없으므로 쏟아버려야
한다. 그런가 하면 똥통은 요강보다 훨씬 깊다. 그걸
퍼내려면 긴 막대기 끝에 똥바가지를 매달아야 한다.

제대로 된 똥은 천천히 꿈틀대면서 변기 물 속으로 떨
어진다. 똥! 이보다 더 우주적인 말이 있을까. 항문
괄약근은 뱃속 찌꺼기들을 내보낸다. 빅뱅! 오므렸다
펴고 오므렸다 펴는 空의 대설사. 태초에 내보내야 할
엄청난 찌꺼기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한꺼번에 내보
낼 수밖에 없었던 먼지들의 離合集散.

똥, 離合 속의 삶
똥, 集散 속의 죽음

창자에서 똥을 빼내고 돼지 아닌 것들로 빈 창자를 가
득 채워 삶은 것이 순대다. 비 오는 날 순대광주리 옆
에서 헤벌쭉 웃는 돼지머리, 그 돼지이빨 틈에 지폐를
끼워넣고 우리는 길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할 수도 있
을 것이다.

* 최승호 시집 모래인간 중에서 "똥"

 

채워진 것을 비우는 허허로운 여백.
우주적 대설사가 비운 空은 모든 삶과 죽음의 터가 되었다.

그 터에서 나뉘고 흩어진 주검들이 모여 생명으로,
맺힌 생존이 흩어져 죽음으로,
그렇게 고동치며 춤추고 있다.

흩어짐에서 나를 나눠주는 기쁨을,
모임에서 너를 먹는 감사를,
그렇게 채우려 하지 않고 비우려 할 때,
맺힘과 풀림의 춤사위에 몸을 실어
타고 노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난 아직도
그 빔을 견디지 못하고 안절부절 불안해하여
결국은 뭔가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채우곤 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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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계시자인 말씀

1:1 <육신이 되신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1:4 a)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a.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1. 육신이 되신 易: 태초에 易이 계셨다. 모든 것이 易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 안에서 생겨난 것이 생명이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를 통해서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고, 바로 생명도 그의 안에서 생겨난다. 모든 존재와 생명의 어미인 말씀이 예수의 삶과 죽음의 그 투명함을 통해 일상의 자리에 비춰졌다는 것이다. 그 생명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그 생명을 살아있게 하며, 삶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모습을 보여준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의 절대성, 그에 대한 체험의 궁극성에 대한 변증에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자의 존재원리이고 생명이며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원리에는 역설의 힘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가장 참담하고 비참한 죽음을 위해 십자가에 들어올려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성을 드러내는 높임임을 보여주는 역석적 삶과 죽음. 이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이 무고한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자라고 있고, 영생이 오히려 타인을 위한 죽음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 모든 비명횡사와 무고한 죽음들이 어둠 속에 절규로 맺혀 떠돌지 않고, 다른 모든 존재가 살아 숨쉴 여백이 되어주는 사랑으로 우리와 늘 함께 있었음을 탈은폐시킨다.
생명의 뿌리인 말씀은 바로 주역의 易과 통한다. 주역에서 易은 생명을 살리는 궁극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生生之胃易" 주역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易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2. 자신만의 고백, 긴장과 충돌이 잉태한 새로움
로고스로서의 예수는 당시로써는 충격적이고 급진적인 고백이었리라 생각된다. 이전에 없었던 그런 새로움은 요한의 저자 또는 요한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의미를 자신만의 고백으로 담았냈던 결과였게다. 자신의 삶을 근본적이고 궁극적으로 뒤바꿔놓은 그 놀라운 체험을 담은 고백.
그것은 유대종교인들이나 기타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 절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종교 지도자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치부하려는 관점들에 대한 방어였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그 궁극적 변화의 핵심을 지키고자 하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로고스 예수가 너무나 흔한 이야기로 그 급진성과 생동감을 잃고, 오히려 전통이라는 낡은 먼지에 뒤집어 쌓인채 다른 새로운 이해와 체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오직 그것만이 최고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로 강요되고 있다. 이미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나의 입술에서 긴장을 뚫고 고백되는 언어가 아닌, 화석일 뿐인데도.
이젠 그 로고스 기독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로고스 기독론을 잉태하게 했던 그 진실한 체험과 그것을 고백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나래를 나의 일상과 내 입술에 되살려야만 한다. 그 창조적 종교심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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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의 주인공, 아무개의 길없는 길: 키프로스와 구레네 사람 몇

본문 : 사도행전 11:19~26

19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21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 믿게된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
22 이 소식을 듣고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23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아왔다.
25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보통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나바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이 본문 자체가 바나바에게 훌륭한 수식어를 붙여놓은 것으로 볼 때, 그 중심에 바나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여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립시키도록 도와준 중심인물인 바나바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바나바에게서 눈길을 돌려 여백과 배경을 살펴보면 이름없는 아무개들을 만날 수 있다. 기프로스와 구레네 사람 몇 명. 단지 '아무개'로써 새로운 차원의 교회를 개척해낸 이들. 환란에 의해 흩어지는 절망의 상황, 그 어두움의 한 극단에서 오히려 새로운 생명과 빛을 밝혀내는 미세한 음성과 이름없는 손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이 대단한 결실을 맺어가도 아무개됨을 지키고 있다. 대단한 일을 이루고도 자신이 한 일임을 알지못하는, 그렇게 부끄러워 이름과 얼굴을 감추는 아무개들. 그런 그득함은 존재의 깊은 차원에 깊이 뿌리내린 그윽함에서 가능하리라.

바나바처럼 성공과 성장을 이뤄낸 칭송의 대상을 부러워하고 닮아가려는 시선을 키프로스와 구레네의 아무개들에게로 옮겨야 한다. 밝고 명확한 것에서 어둡고 그늘진 곳을 가만히 응시하는 눈길이 어둠 속에 깃든 가능성과 희망을 보게 한다. 그것을 촉발시킨다.
굳어진 주검에서의 일탈, 그것은 가만히 불안을 응시하는 아무개된 눈길에서 싹을 티우는 것이다. 그 눈길은 욕심도 자기도 없는 눈길이리라. 그 눈길이 [길없는 길]로 유유히 걸어들어가게 하고 바로 그 길이 되어 홀연히 그 모습을 감춘다. 또한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게 한다. 물론 그 길이 점점 다져지고 넓어지면 또 다시 단단하게 틀지워진 족쇄가 되어 새로운 생명이 움틀 자리를 앗아간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길이 되면 다시 길없는 길로 나서는 일탈이 필요할 게다.

문제이자 숙제는 "어떻게 그런 자기 충만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지?", "우리는 왜 그런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지?"이다. 아니 그 분량은 [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어진] 것일텐데...
어떤 희생이나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는, 그래서 그런 자기가 의미있어지는 그런 자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 행동에 자기는 없고, 그 대상만이 새롭게 살아나고, 그것으로 족한, 그후엔 아무 흔적도 기억도 없이 사라지는 자리인데....그런 예수님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신비가 우리 삶이 이뤄가야할 분량이자, 모든 아픔과 고통을 풀어내는 열쇠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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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의도없이 무작위로 올렸는데 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보니 어떤 유사한 무늬를 지니고 있네요. 아마도 이 묵상들을 기록하던 때에 제가 착념했던 문제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제게도 묵은 숙제라는 점이군요....글만 그럴듯하고 삶은....ㅜ.ㅜ::
 

모름의 깊이에 머무는

[오늘의 기도]

제법 아는 척,
꽤 된 척 말게 하소서.
모름지기 모름을 지키게 하소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내가 터무니없는 물건임을 알게 하소서.

"박재순님의 삶의 씨앗: 짧은 말씀, 깊은 생각 54호"에서

; 모름지기, 모름을 지킨다는 모름지기는 마땅히, 당연히의 뜻을 지니고 있다. 모름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란 뜻이었을까?
많은 것을 알고, 그 지식을 통해서 타자를 지배하려는 거대한 흐름 속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모름에 머무는 일은 거센 결을 역류해가는 어려운 일일게다.
그러나 아는 일의 뜻함이 성장과 지배가 아니라 성숙과 생명의 변화라면 얕은 수심에 비친 왜곡된 얼굴이 아니라 너무나 깊어 검은 수면에 비친 맑은 자화상을 그대로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너무나 깊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까 두렵고, 무엇이 있는지 알 수없는 모름의 깊은 어둠에 자신과 세상을 비춰볼 때, 참된 자유와 생명을 살아낼 수 있다.
완벽한 정답의 그 단단함은 주검을 닮아있다. 오히려 생명은 끊임없이 변하는 죽음의 부드러움이다. 모름은 바로 그 생명의 변화가 숨쉬는 공간과 흐름이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불안함은 오히려 자유로운 생명력의 나래가 날아오를 여백으로 변하고, 지식의 틀이나 혀끝의 허망한 환상보다 살아꿈틀거릴 생명의 잉태를 바라보게 한다.
바로 모름의 긴장과 불안에 깊이 침잠해갈 때....

쌓아가고 채우는 지식은 힘과 권력을 검어쥔 착취의 칼날이 되기 쉽다. 그리곤 정당한 노력과 공평한 경쟁에서 얻는 당당한 권리라고 합리화된다. 동시에 거기에서 패배한 사람은 열등감과 자괴감 속에서 질투하면서 짙밟혀간다.
그러나 지혜는 오히려 지식을 비워가고 글자와 표면에 비친 소유의 대상들 배경에 검고 깊이 놓여있는 마음의 힘이다. 비워가는 지혜와 채워가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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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름의 깊이에 머무는... 더도 덜도 말고 그렇게 겸허하게,... 모름이 가져오는 긴장과 불안에 나 자신 조용히 담그며 낮아지기를... 물무늬님, 좋은 글 보고 또 한 수 얻어갑니다.

물무늬 2004-04-1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전에 써놓은 묵상이라 올려놓으면서 저 자신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생각의 무늬와 제 삶의 결 사이에는 아찔한 간격이 여전하군요....

2004-04-1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4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jy814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김영민 교수님(한일장신대, 전 감신대교수)의 어느 책에선가 얻었던 도전과도 관련된 묵상이었습니다. 뭔가를 지적으로 파악한 것보다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질문에 붙들려 오랜동안 힘겨워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묵혀지고 발효되고 익어가며 깊어지는 인격의 질...십자가의 성요한의 글이 제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