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육신이 되신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1:4 a)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a.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1. 육신이 되신 易: 태초에 易이 계셨다. 모든 것이 易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 안에서 생겨난 것이 생명이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를 통해서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고, 바로 생명도 그의 안에서 생겨난다. 모든 존재와 생명의 어미인 말씀이 예수의 삶과 죽음의 그 투명함을 통해 일상의 자리에 비춰졌다는 것이다. 그 생명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그 생명을 살아있게 하며, 삶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모습을 보여준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의 절대성, 그에 대한 체험의 궁극성에 대한 변증에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자의 존재원리이고 생명이며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원리에는 역설의 힘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가장 참담하고 비참한 죽음을 위해 십자가에 들어올려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성을 드러내는 높임임을 보여주는 역석적 삶과 죽음. 이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이 무고한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자라고 있고, 영생이 오히려 타인을 위한 죽음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 모든 비명횡사와 무고한 죽음들이 어둠 속에 절규로 맺혀 떠돌지 않고, 다른 모든 존재가 살아 숨쉴 여백이 되어주는 사랑으로 우리와 늘 함께 있었음을 탈은폐시킨다. 생명의 뿌리인 말씀은 바로 주역의 易과 통한다. 주역에서 易은 생명을 살리는 궁극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生生之胃易" 주역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易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2. 자신만의 고백, 긴장과 충돌이 잉태한 새로움 로고스로서의 예수는 당시로써는 충격적이고 급진적인 고백이었리라 생각된다. 이전에 없었던 그런 새로움은 요한의 저자 또는 요한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의미를 자신만의 고백으로 담았냈던 결과였게다. 자신의 삶을 근본적이고 궁극적으로 뒤바꿔놓은 그 놀라운 체험을 담은 고백. 그것은 유대종교인들이나 기타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 절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종교 지도자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치부하려는 관점들에 대한 방어였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그 궁극적 변화의 핵심을 지키고자 하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로고스 예수가 너무나 흔한 이야기로 그 급진성과 생동감을 잃고, 오히려 전통이라는 낡은 먼지에 뒤집어 쌓인채 다른 새로운 이해와 체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오직 그것만이 최고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로 강요되고 있다. 이미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나의 입술에서 긴장을 뚫고 고백되는 언어가 아닌, 화석일 뿐인데도. 이젠 그 로고스 기독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로고스 기독론을 잉태하게 했던 그 진실한 체험과 그것을 고백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나래를 나의 일상과 내 입술에 되살려야만 한다. 그 창조적 종교심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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