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에서 펴내는 반연간지 <연극>(12년 겨울호)에 실은 서평을 발췌해서 옮겨놓는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다루면서 일례로 <리처드 2세>에 대한 '읽기'를 적었다. 김정환 시인의 '영국 민족 사극'이 번역된 게 계기인데, '그리스 로마 사극'도 마저 번역되기를 고대한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읽다

 

셰익스피어 사극 번역
셰익스피어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는 희극과 사극에서도 유례가 드문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4대 비극에 비하면 그의 사극은 국내 독자들에게 아직 생소한 편이다. ‘4대 비극’에 견주어 <셰익스피어 4대 사극>(범우사, 1999)이 이태주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바 있는데, <헨리 4세 1부, 2부>, <헨리 5세>, <리차드 3세> 등이 포함된 선집이다. 해설서로는 이대석 교수의 <셰익스피어 극의 이해 - 사극과 로마극>(한양대출판부, 2002) 정도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2012년은 셰익스피어 사극 수용에 전기가 될 만한 해이다.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에 도전하고 있는 김정환 시인이 3차분으로 사극(잉글랜드 민족사극) 11편을 번역․출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박우수 교수도 셰익스피어 사극 이해의 길잡이가 될 만한 유용한 해설서로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열린책들, 2012)을 펴냈다(이하 <역사극>으로 표기). 김정환 시인은 앞으로 ‘영국 사극’과 함께 셰익스피어 사극의 또 다른 축인 ‘그리스․로마 사극’ 9권, ‘희극과 소네트’ 8권 등을 마저 펴내 40권의 전집을 완간할 예정으로 있다. 완간된다면 현재 나와 있는 신정옥 교수의 전예원판 ‘셰익스피어 전집’(전42권)과 함께 ‘셰익스피어 전집’을 양분하게 된다.


물론 희곡으로 한정하면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이 처음은 아니다. 37편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완역한 사례는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김재남 교수의 번역(휘문출판사, 전5권)과 공동번역(정음사, 전4권)이 더 있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기에(김재남 교수의 번역 가운데 희극과 비극만이 출판사를 옮겨서 재출간돼 있다) 사극을 포함한 셰익스피어 희곡의 전모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역자의 노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부분적으로는 두 전집 번역자의 번역 외에 이덕수 교수가 <헨리 4세 1부, 2부><헨리5세><리처드2세><리처드3세>(형설출판사) 등을 옮긴 사례가 있고, 강태경 교수도 <리처드 3세>(지만지)를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나남 셰익스피어 선집’을 새롭게 펴내고 있는 이성일 교수도 <리처드 2세>와 <리처드 3세>의 새 번역본을 보탰다.


대략 이런 것이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사극, 더 구체적으로는 ‘영국 사극’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여건이다. 김정환 시인은 보통 비극으로 분류되는 <심벨린>을 사극의 서두로 삼아서 총 11편을 ‘잉글랜드 민족사극’으로 분류했지만, 통상적으로 영국사극은 <존왕>에서부터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 2부>, <헨리 5세>, <헨리 6세 1, 2, 3부>, <리처드 3세>, <헨리 8세>에 이르는 10편의 희곡을 가리킨다. 시기적으로는 13세기 초엽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약 400년간의 영국역사가 이 희곡들이 다루는 범위다. 이번 서평란에서는 셰익스피어 사극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마련된 김에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의 해설을 참고하여 <리처드 2세>를 셰익스피어 사극의 일례로 읽어보려고 한다. 참고한 번역은 신정옥 역 <리처드 2세>(전예원, 1991), 김정환 역 <리처드 2세>(아침이슬, 2012)와 함께 이성일 역 <리처드 2세>(나남, 2011)다.   

 

 

 

영국 사극과 <리처드 2세>
10편의 영국 사극 가운데 <존왕>과 <헨리 8세>는 작품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며 나머지 8편은 두 가지 4부작으로 묶인다. 먼저 쓰인 <헨리 6세>(1, 2, 3부)와 <리처드 3세>이 제1사부작이라고 불리지만, 연대기적으로 <리처드 2세><헨리 4세>(1, 2부><헨리 5세>로 이어지는 제2사부작이 앞서며 <리처드 2세>는 그 첫 작품이기에 역사적 사실의 흐름을 좇아가자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사극인 만큼 <리처드 2세>를 읽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지식이 약간 필요하다. “리처드 왕의 치세 말기 3년간(1398-1400)의 영국 정치적 갈등을 극화한 일종의 정치극”(<역사극>, 57쪽)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갈등이란 물론 왕권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이다. 존왕의 맏아들이었던 헨리 3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 에드워드 2세(재위 1307-27), 에드워드 3세(재위 1327-77)가 차례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은 어려서 죽고, 다섯이 왕가의 가계를 형성한다.

 

에드워드 3세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이는 첫아들 웨일즈 공 에드워드(1330-1376)의 아들 리처드 2세(1367-1400, 재위 1377-1399)다. 곧 에드워드 3세의 장손인 셈인데, 어려서 즉위하기에 숙부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존 오브 곤트)이 섭정을 한다. 리처드 2세는 1389년에 돼서야 성인으로서 독자적인 통치에 나선다. 리처드에게는 곤트의 존 외에 클라런스 공작 라이오널과 요크 공작 에드먼드, 그리고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 우드스톡이 숙부로 있었는데, 1397년 글로스터 공작이 그의 사주로 살해당한다. 남은 숙부 가운데 <리처드 2세>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이는 곤트와 요크 공작이다. 전체적으론 리처드 2세가 곤트의 아들로 후일 헨리 4세가 되는 볼링브루크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는 이야기가 5막으로 이뤄진 <리처드 2세>의 골자다.


일단 막이 오르면 리처드 사촌이기도 한 볼링브루크가 글로스터 공작의 암살죄로 노포크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를 고발한다. 모브레이는 결백을 주장하며 오히려 볼링브루크가 ‘가장 위험한 반역자’라고 맞서며 둘은 결투를 통해서 자기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1막 1장) 글로스터 공작부인은 시아주버니인 곤트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간청하지만 곤트는 신의 대리인(왕)에 대한 복수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는다.(1박 2장) 이어지는 결투 장면에서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가 막 결투에 임하려는 순간 리처드가 중지시키고 볼링브루크에게는 10년, 그리고 모브레이에게는 영구추방령을 내린다. 하지만 숙부인 곤트가 상심하는 걸 보고서 리처드는 볼링부르크의 추방 기간을 6년으로 줄여준다.(1막 3장) 요크 공작의 아들로 또 다른 사촌인 오멀이 리처드에게 볼링브루크가 추방의 길을 떠났다고 알리고 리처드는 볼링브루크에 대한 경계심을 표한다. 이어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직접 진압하러 나서고자 하지만 재정이 바닥난 상태다. 숙부 곤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듣자 리처드는 그가 빨리 죽어서 재산을 몰수해 전비를 충당하고자 한다.(1박 4장)

 


1막에서 보여주는 건 리처드 2세의 군주로서의 모습이다.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의 분쟁을 중재하려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인은 명령하도록 태어났지 간청은 못하오”(신정옥) “짐은 탄원하러 태어나지 않고, 지배하러 태어났나니”(김정환) “내가 할 바는 간청이 아니라 명령인 것을-”(이성일) 즉 리처드는 자신이 ‘내추럴 본 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왕이기 때문에 왕”이라는 물신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그가 권력을 남용하는 전횡적 군주 행세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대는 점차 더 이상 그러한 ‘왕권신수설’이 용인되지 않는 쪽으로 넘어간다.

 

리처드는 곤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잇속만을 챙길 궁리를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신 가운데 왕권의 신성불가침에 대한 가장 충직한 믿음을 지닌 이가 곤트였다. 제수인 글로스터 공작부인이 동생의 복수를 탄원하면서 “아주버님의 아우가 살해당한 걸 눈감아주시는 건/ 아주버님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거와 같아요./ 무도한 살인자에게 아주버님도 살해하라고 일러주는 거잖아요./(...)/ 아주버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도는 제 남편 글로스터의 죽음에 대한 복수뿐이에요.”(이성일)라고 말하지만 그는 신의 대리인에게 맞설 수는 없다고 답한다. 만약 왕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심판은 신의 몫이지 신하나 백성들이 나설 일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곧 시험에 처한다.


리처드가 아들 볼링브루크에게 추방령을 내리자 곤트는 크게 상심한다. 비록 그 결정에 자신도 참여하긴 했지만 아들의 죄를 묻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는 평판을 염려해서 적극적으로 두둔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아들에 대한 가혹한 징계였다. 비록 추방기간이 10년에서 6년으로 4년이 감형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견주어 그는 아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왕의 말 한마디에 “네 번의 지루한 겨울과 네 번의 흐드러진 봄”이 사라져버리지만 그런 신적인 권능도 유한한 수명을 연장해주거나 죽은 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전하는 시간을 무거운 슬픔으로 내 살 날을 줄이고, 내게서/ 밤을 앗을 수는 있으나, 단 하루아침도 더해 주진 못하오.”라는 게 곤트의 깨달음이다.


2막은 그러한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을 보여준다. 임종의 병상에서 리처드를 맞이한 곤트는 정작 죽어가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리처드라고 말하며 왕의 처사를 무겁게 비판한다. 그가 가장 크게 문제삼는 것은 리처드의 할아버지(에드워드 3세)의 눈으로 볼 때 ‘아들의 아들’이 ‘아들들’을 해한 것이다. ‘아들의 아들’이란 물론 리처드 2세이고, ‘아들들’은 글로스터 공작과 자신을 가리킨다. 글로스터는 리처드에 의해 암살당했고 자신 또한 병상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죽어갈 운명이다. 그는 조카 리처드에게 왕으로서의 한계를 직시하라고 충고한다. “폐하는 이제 잉글랜드의 지주일 뿐, 왕은 아니십니다. 폐하의 법적 지위는 법의 노예일 뿐.”(신정옥) “잉글랜드의 지주이다, 지금 그대는, 왕이 아니라,/ 그대의 법적인 지위는 법으로 묶인 노예에 다름 아니야”(김정환) “이제 그대는 영국의 지주이지 임금은 아니오./ 통치권은 이제 토지 상거래법에 종속되고.”(이성일) 곤트의 이러한 충고는 그가 더 이상 왕권신수설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더불어, 곤트의 충고를 묵살하는 리처드의 운명이 결국은 파멸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점을 미리 암시해준다.


곤트가 세상을 떠나자 전쟁에만 정신이 팔린 리처드는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곤트의 재산은 의당 아들인 볼링브루크에게 상속돼야 하지만 리처드는 그러한 상속권 자체를 일소해버린다. 봉건제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는 리처드의 처사에 당장 곤트의 동생인 요크 공작은 “내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오? 아, 얼마나 오래, 신하 된 처지 때문에 잘못된 일을 내 참아야만 하오?”라며 분통을 터뜨리며 귀족들은 동요한다. 무거운 과세로 평민들의 인심을 잃은 리처드는 이제 귀족들에게도 인심을 잃게 된다. 볼링브루크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영국으로 들어오자 민심은 자연스레 그에게 쏠리고 리처드의 몰락은 시간문제가 된다.


3막에서도 리처드와 볼링브루크의 대치는 계속되지만 리처드의 주변에는 칼라일 주교와 몇몇 충복만이 남는다. 칼라일은 “두려워 마소서, 전하. 전하를 군왕으로 만드신 바로 그 힘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하를 군왕이시게 할 힘을 갖습니다.”라고 리처드를 위무하려고 하지만 힘의 현실은 냉혹하다. 그럼에도 리처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다시금 왕권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매달리려고 한다. 그것은 곤트조차도 임종을 앞두고 부인한 왕권신수설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거칠고 난폭한 바다 물 전체로도/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성유를 씻어 낼 수 없는 법./ 세속 인간의 숨으로는 폐위시킬 수 없다/ 주님이 뽑으신 대리인을./ 볼링브루크한테 징집되어/ 짐의 황금 왕관에 사악한 쇠를 겨누는 각각의 한 사람마다/ 하나님은 그분의 리처드를 위한 하늘의 원군을 두고 계시느니,/ 영광의 천사 한 명씩을, 그렇다면 천사들이 싸울 때에/ 연약한 인간은 필멸이라, 하늘이 항상 정의를 수호하시는 까닭이다.”(김정환)

더불어, 그는 왕이란 이름 하나가 2만 명에 버금간다고 스스로를 일깨운다. 하지만 위안은 잠시뿐이고, 국법을 어기는 걸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망설이던 요크 공작까지 포함하여 귀족들이 속속 볼링브루크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전의를 상실한다. 결국 자기 몫을 돌려달라는 볼링브루크와 마주한 리처드는 “사촌 자신의 것은 사촌 것이야, 나도 사촌 것이고, 모든 게 그렇지.”라고 말하며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왕위를 넘기겠다는 뜻을 표한다.


4막은 리처드가 왕관과 왕홀을 볼링브루크에게 넘겨주는 ‘탈관식’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무능력하고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왕이지만 리처드는 왕위를 벗어던지는 이 탈관식 장면에서 오히려 ‘시인’처럼 말하고 주인공의 위엄을 보여준다. ‘슬픔의 왕’이라고 자칭하면서 리처드는 왕관을 물려주는 데 동의하느냐는 볼링브루크의 물음에 “그렇소, 아니오. 아니오, 그렇소.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므로 아니오, 그대를 위해 난 물러나니까./ 이제 날 보시오. 내가 어떻게 날 무화하는지.”라고 답하면서 왕관과 왕홀을 그에게 넘긴다. 그러고는 거울을 가져오게 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하지만 그 얼굴에 슬픔이 충분히 새겨져 있지 않은 걸 보고서 거울이 자신을 속인다고 바닥에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두시오, 이장난의 의미를,/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뜨렸는지.” 리처드는 거울을 깨뜨리면서 스스로 자명하게 생각했던 ‘리처드=왕’이라는 등식도 깨뜨리게 된다. 그는 그 스스로 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왕이었다. 따라서 왕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서 자의적인 것이다. 이것을 왕이란 기호가 갖는 자의성에 견줄 수 있을까.


박우수 교수는 <역사극>에서 <리처드 2세>을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를 좇아 ‘언어극’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대립되고 있는 것은 언어가 특정한 대상을 일대일로 지칭한다고 보는 ‘언어적 실재론’과 언어란 자율적인 기호체계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는 ‘언어적 유명론’이다. “언어적 실재론과 언어적 유명론은 역사적으로 늘 공존해 왔지만 거칠게 구분하자면 중세에는 실재론이 우세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유명론이 우세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인 리처드왕과 볼링브루크는 각각 실재론과 유명론을 대변하는데, 극중에서 볼링브루크가 승리함은 중세에서 근대로, 봉건제에서 초기 자본 축적기로 역사적 힘이 전이되고 있음을 상징한다.”(<역사극>, 59쪽)


언어적 실재론과 유명론의 대립은 4막에서 리처드가 거울을 깨뜨리는 장면에서 무화된다. 언어와 세계 사이의 자명한 대응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언어 게임 혹은 연기의 산물이다. 5막에서 폼프레트 성에 유폐된 리처드의 모습은 언어 유명론자의 그것이다. “이렇게 난 혼자서 여러 사람 노릇을 하는데,/ 그 어디에도 만족하지를 못해./ 어떤 때는 왕이 되는데, 반역 행위들을 떠올리면, 내가 거지였더라면 하는 마음 들고,/ 실제로 거지인 걸- 그러다가 견딜 수 없는 궁핍 앞에선/ 역시 임금이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면 다시 왕이 되고-” 결과적으론 죽어서 평온함을 가질 때까지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에 그는 도달한다. 마치 그러한 결론에 부응하듯이 그는 볼링브루크에게 환심을 사려는 엑스턴에게 곧 살해당하고 만다. 비록 자신의 암시를 실행한 암살이었지만 볼링브루크는 엑스턴을 보상에게 내리지 않으며, 속죄를 위해 성지 순례를 떠나겠다고 밝히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

 

13.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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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가장 눈에 띄는 문학 신간은 영국 시인 필립 라킨(1922-1985)의 <필립 라킨의 시전집>(문학동네, 2013)이다. 필립 라킨? "2008년 타임스가 선정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전후 작가'에 조지 오웰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T. S. 엘리엇에 이은 20세기 영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시인. 몇달 전에 나도 타임스 선정 '전후 최고 작가 50'의 리스트 프린트까지 한 적이 있는데, 2위가 조지 오웰, 3위가 윌리엄 골딩, 4위가 테드 휴즈, 그리고 5위가 도리스 레싱이었다(톨킨이 6위로 뒤를 잇는다. 살만 루슈디 때문에 찾아본 것인데, 루슈디는 13위).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시인이 1위여서 다소 놀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번역돼 나왔다. 번역은 김정환 시인이 맡았다. 이번주에 오웰의 평론집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이론과실천, 2013)도 출간된 김에 이 베스트5 작가의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골딩과 휴즈, 레싱의 작품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대표작으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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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송받은 책 가운데 고고학 관련서가 두 권이다. 하나는 현대 고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고든 차일드(1982-1957)의 대표작 <인간은 인간 자신을 만든다(Man makes himself)>의 번역서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주류성, 2013). 고든 차일드란 인물이 생소한 사람도 '신석기혁명'이란 말은 익숙할 텐데, 바로 그 말을 만들어낸 학자가 고든 차일드이다.

 

 

뒷표지에 실린 저자소개를 보면(한국위키백과사전에서 가져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명한 고고학자"로 "선사 시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또한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유럽과 범세계적인 선사시대 이론 개발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위대한 고고학자였다."

 

이번에 나온 책은 1936년에 영국에서 초판이 발간됐고 1941년과 1951년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개정판이 나왔다. 한국어판은 <인류사의 전개>(정음사, 1959)라고 아주 일찍 나온 적이 있지만 일어본을 옮긴 중역판이었고 원문을 상당 부분 누락한 것이라 한다.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도 완역은 아닌데, 역자에 따르면 '8장 인류지식의 혁명'은 수학과 기하학에 관한 어려운 내용이어서 요약/정리로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온 <인류사의 사건들>(한길사, 2011)과 함께 고든 차이들의 기본적인 생각과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요긴한 책이라 생각된다.

 

 

 

국내에도 고고학 관련서들이 출간되고 있지만 보통은 학술서나 학술보고서이고 교양서로 읽을 만한 책은 드문 편이다. 이선복 교수가 쓴 <고고학 개론>(이론과실천, 1999), <고고학 이야기>(뿌리와이파리, 2005)가 모두 절판돼 쉬운 입문서는 없는 듯하고, 지금은 한국고고학회에서 엮은 <한국 고고학 강의>(사회평론, 2010)가 입문서 아닌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듯싶다(초급 전공서라고 해야 할까). 고고학의 매력과 모험을 다룬 책으론 C. W. 세람의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스티븐 버트먼의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루비박스, 2008)이 눈에 띄는 정도다.

 

 

한국고고학회에서 펴내는 책은 대부분 학술서이거나 학회발표문 모음집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몇 권의 책은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있다. <한국 농경문화의 형성>(학연문화사, 2002), <계층사회와 지배자의 출현>(사회평론, 2007), <국가형성의 고고학>(사회평론, 2008) 등이 거기에 속한다. 고고학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건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 같은 책을 읽으면서 국가의 탄생 혹은 형성 문제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류학 관련서는 드문드문 읽었지만 사실 고고학은 나와 무관한 분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장담할 수 없는 게 세상이며, 하여간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고든 차일드의 책과 함께 배송받은 건 웨난의 <진시황제의 무덤>(크림슨, 2008)이다. 웨난의 책은 꽤 많이 번역됐지만 다수가 절판된 걸로 보아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듯싶다(그래도 <손자병법의 탄생>까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진시황제의 무덤>은 제목대로 진시황릉 발굴을 다룬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중국 최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고문학가"이다. 고고학자가 아니라 고고문학가(웨난은 62년생으로 생각보다 아주 젊다). 우리에게 이런 책이 없는 건 고고학자가 드물어서가 아니라 고고문학가가 없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현장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그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짚어주는 저자가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싶다.

 

<진시황제의 무덤>의 머리말을 쓴 저우다커란 인물은 고고학이 학문임과 동시에 막대한 경제적 효과 또한 갖는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우선 지역 관광산업을 발달시킨다. 진시황제의 병마용이 발굴되자 이 지역의 관광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그리고 둘째가 출판업과 영상업의 발전이다. 중국에서는 하이난출판사의 <고고중국(考古中國)> 시리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화 르네상스'로까지 이어졌다고. 우리도 참고해볼 만한 사례다.

 

 

<고고중국>이 중국의 10대 유물 발굴을 다룬 시리즈라고 하는데,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은 패트릭 헌트의 <역사를 다시 쓴 10가지 발견>(오늘의책, 2011)이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들'이 부제. 그 10가지 발견이 각 장의 테마다.

제1장 로제타스톤 - 고대 이집트의 비밀을 풀어준 열쇠 
제2장 트로이 - 호메로스와 그리스 역사의 열쇠 
제3장 아시리아 도서관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열쇠 
제4장 투탕카멘의 무덤 - 신격화된 이집트 왕의 비밀을 푸는 열쇠 
제5장 마추픽추 - 잉카 건축의 비밀을 풀다 
제6장 폼페이 - 로마인들의 삶을 보여주다 
제7장 사해문서 - 성서 연구의 핵심 
제8장 티라 - 에개해 청동기 시대의 중심 
제9장 올두바이 협곡 - 인류 진화의 열쇠 
제10장 진시황릉 - 증국 최초의 제국을 세우다

흠, 고고학 입문서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한국 고고학의 10대 발견은 무엇일까...

 

13. 01. 28. 

 

 

 

P.S. 고고학과 함께 고고학사도 일람해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찾아본 바로는 <브루스 트리거의 고고학사>(사회평론, 2010)이 교과서격의 책인 듯싶다. 국내학자들이 엮은 <인물로 본 고고학사>(한울, 2007)도 거기에 보탤 수 있다. 한국 고고학사에 대해서는 <일곱 원로에게 듣는 한국 고고학 60년>(사회평론, 2008)이 가장 유력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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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맡에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과학저술가 베르너 지퍼의 <우리 그리고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소담출판사, 2013)이다. 저자의 책은 공저를 포함해 몇권 더 번역돼 있고 <범인은 바로 뇌다>(알마, 2010)는 나도 갖고 있다. 내친 김에 <재능의 탄생>(타임북스, 2010)도 구해놓으려고 한다. 이 정도 분량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의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으로선 꽤 잘 쓰였다는 인상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생물학으로 학위를 받은 저자답게 지퍼는 이렇게 정리한다.

인류는 지성에 있어서 아이작 뉴턴이나 파블로 피카소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다. 인간은 인터넷으로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배양액 속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존재다. 인간이나 박테리아나 모두 자신의 세포를 점점 더 빠르게 번식시키고 점점 더 많은 영양분을 소비하다가 결국 자신의 종말을 재촉하게 된다. 더 이상 먹을 게 없는 배양액 속에서 자신의 배설물로 인해 질식해 죽게 되는 것이다.(16쪽) 

인간이란 종의 특별한 능력과 그로 인한 성공이 한정된 생태계에서는 재앙이 될 수 있다(자본주의의 글로벌한 성공이 파국적 위기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개괄적인 방향과 함께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다. 가령 스탈린시대의 생물학자 일리야 이바노프 얘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소비에트 독재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생물학자이자 말의 품종 개량에 관심을 가졌던 일리야 이바노프에게 인간과 유인원을 교배시켜 보다 힘이 센 군인, 즉 신체적으로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사람보다 식량과 잠을 덜 필요로 하는 '실패하지 않는 신(新)인간'을 만들어내라고 명령했다. 이바노프는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암컷을 인간의 정자를 이용하여 임신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조지아에 연구소를 설립해 인간 여성을 침팬지의 정자를 이용하여 임신시키는 실험 또한 진행했다. 실험이 모두 실패하자 스탈린은 이바노프를 추방시켰고, 이바노프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37쪽)

궁금해서 검색해봤더니 지난 2005년 12월에 관련기사가 짤막하게 보도된 적이 있다. 내가 과문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닌 셈.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이 반은 사람이면서 반은 원숭이인 ‘반인반원’의 슈퍼전사를 만들어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영국 일간 스코츠먼이 20일 보도했다. 모스크바 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비밀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1926년 당시 러시아 최고의 동물육종학자였던 일리야 이바노프 박사에게 ‘살아 있는 전쟁기계’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스탈린은 20만달러를 주며 이바노프를 서아프리카로 보내 첫 실험으로 침팬지를 임신시키도록 하고, 자신의 고향인 그루지야에는 원숭이들을 키우기 위한 실험센터까지 세우는 등 고군분투했으나 ‘신인류 창조’의 야심찬 계획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이바노프 박사는 원숭이 정액을 사람에게 주입해 수정하는 실험을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스탈린은 마지막으로 쿠바에서 원숭이를 들여와 실험을 계속하려 했으나 이 같은 사실이 미국에 알려지면서 좌절돼 ‘반인반원 개발 프로젝트’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세계일보)

 

실험에는 실패했지만 인간과 챔팬지의 합성체를 '휴먼지'라고 부른다. 가상의 이미지가 곧바로 <혹성탈출>의 유인원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스탈린시대의 생물학 실험으로 일리야 이바노프의 실험보다 더 유명한 사례는 트로핌 리센코의 육종 실험이다. 얼마전 존 그레이의 <불멸화위원회>(이후, 2012)에 관한 프레시안 좌담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추종했던 리센코는 "노력과 의지만 있으면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는 생물학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과는 재앙이었다. 지퍼는 이렇게 정리한다.

리센코는 수확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보리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며 기후와 전혀 맞지 않는 보리를 대량으로 심었다. 리센코는 그 보리가 낯선 환경에서 자라면서 의도한 대로 강한 면역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은 대대적인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마오쩌둥이 리센코의 아이디어를 도입하는 바람에 중국도 큰 낭패를 보았다. 결국 리센코도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지식보다는 신념이 더 중요했던 사회에서는,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하찮은 희생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38쪽)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독일의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의 <인간 이력서>(을유문화사, 2013)도 눈길을 끈다. "<만들어진 승리자들>, <위대한 패배자>의 저자 볼프 슈나이더가 고발하는 무책임한 인간의 역사"로 "지구에 남긴 최초의 가족사진이라 할 수 있는 세렝게티 변두리의 발자국 화석에서부터 불의 발견, 농업의 발명, 세계 최초의 도시 건설과 제국주의 시대, 산업혁명과 세계 대전을 거쳐 오늘날의 소비문화 확대에 이르기까지의 200만 년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테마의 책들을 자주 손에 드는 편이다. 생각나는 대로 몇 권 떠올리자면 이런 책들이다.

 

 

보통은 인간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 인간들이 싫어질 때 관심을 갖게 되는 책이지만 상시적으로 읽어도 좋겠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끔 해주니까...

 

13.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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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간 동안 PC가 놓인 책상의 책들과 복사물을 정리하여 겨우 공간을 좀 마련했다. 탁 트인 시야에 모니터가 바로 눈에 들어와서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들을 책상 가까이에 배치했는데 이들이 말하자면 얼마간 '측근' 노릇을 할 책들이다. 무게감을 갖는 책은 아니더라도 측근이 주는 편안함은 있다. 몇 권의 책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써도 좋겠다 싶지만 여유가 많지 않은 까닭에 일단 한 권만 거명하면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가 부듯한 독서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역사는 픽션인가'가 원제다.

 

 

번역본 제목보다는 원제가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더 잘 집약하고 있는데, '역사는 허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니 반응은 세 가지였다고 한다. (1)당근이지.(역사는 물어보나 마나 허구라는 반응) (2)말도 안돼.(역사는 역사이고 허구는 허구이며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반응) (3)글쎄... 역사가 허구인가요? 이런 반문이 가장 많이 보인 반응이라는데, 한편으론 그렇고 또 한편으론 그렇지 않다는 저자들의 답변에 양다리 걸치지 말고 확실하게 답하도록 요구했다고. "역사는 허구인가,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복잡한 답을 요구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필요할 것이다."(8-9쪽)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저자들은 서두에서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던진 질문보다 '역사는 허구인가'란 질문이 훨씬 제한적이긴 하지만, 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진실의 문제, 역사가와 과거의 관계, 사실과 가치, 해석의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우리는 언어와 서술, 상징, 수사법, 풍자를 통해 형성되는 역사의 문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 형태와 역사적 진실을 향한 열망 사이의 관계를 카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7쪽) '역사의 문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흔히 일컫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지칭하는데, 이 두 사조는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역사의 생존을 위협했다." "과거는 결코 복원될 수 없고 역사연구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는 그 자체의 허구에 의해, 다시 말해 역사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다"(13쪽)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역사라는 학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경우가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1991)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번역서의 제목이고 원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history)>다.

 

하지만 저자들은 젠킨스와 같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불어 자신의 연구결과와 해석이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주장 또한 거부한다. 리처드 번스타인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가 이들의 입장이라고 할까. "우리는 역사서술에서 허구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때 진실 탐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14쪽)은 진술은 역사학의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으로도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현재와 과거의 연관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인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이 현대의 '포스트모던' 문학과 철학 이론의 발명품이 아니라 서구 최초의 역사서술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부터 이미 나타난다는 저자들의 주장이다. 헤로도토스야말로 '포스트모던 역사가'의 원조라고 할까.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저자들은 '이야기꾼 헤로도토스'를 첫 장에서 다루고, 2장에서는 헤로도토스와 함께 서양 역사학의 토대를 만든 투키디데스를 다루며, 마지막 장에서는 <총, 균, 쇠>와 <문명이 붕괴>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까지 다룬다. 역사학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일주이자 일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수준의 독자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일주에 동행할 수 있을 듯싶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꺼내들고 이제 1장으로 넘어가는 일이 남았다...

 

13. 01. 27.

 

 

 

P.S.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가 그래도 좀 이론서적인 성격의 책이라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손에 들어볼 수도 있다. 남경태의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메디치미디어, 2013), 박신영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페이퍼로드, 2013), 그리고 원종우의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역사의아침, 2012) 등이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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