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저널, 혹은 좌파저널 '레디앙'에 가끔 들른다(유감스럽게도 '레디앙Redian'이란 신조어(?)는 진보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다. 화장품 이름 같기도 한 그 단어가 내게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은 '폼'이다). 두어 번 기사를 옮겨온 것 같기도 한데, 이번에 옮겨오고자 하는 건 윤재실 기자의 '세계의 사회주의자' 연재 중 에리히 프롬(1900-1980)에 관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에서부터 시작된 이 연재는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에까지 이르렀는데, 기자의 품팔이에서 나온 거라고 보기엔 너무 발이 넓어서 무슨 '출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한다(기밀사항일까?). 여하튼 읽어볼 만한 연재이다. 프롬의 책들도 한번쯤 챙겨둘 겸 읽어보기로 한다. 기사의 원타이틀은 '인간적 사회주의 꿈꾼 정신분석학자'인데, 보다 단순하게 '에리히 프롬과 사회주의'로 고쳐단다.  

레디앙(06. 07. 18) 인간적 사회주의 꿈꾼 정신분석학자

"교회는 아직도 대체로 내면의 해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진보주의자들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정당들은 외부의 해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유일하게 현실적인 목표는 총체적 해방인데, 이러한 목적을 근본적(혹은 혁명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존재의 기술> 중에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는…최대 이윤의 욕구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장과 자본의 비인간적 힘의 법칙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스스로 계획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는 사회 체제이다."(<불복종에 관하여> 중에서)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책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우리에게 심리학자 혹은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신프로이드 학파의 거장이었던 프롬이 마르크스의 초기사상과 프로이드의 이론을 융합해 인간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꿈꾼 인물이었고 미국 사회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폴 로빈슨이 <프로이트 급진주의>에서 꼽고 있는 프로이트 좌파는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 등이다. 신프로이드주의 혹은 프로이트 수정주의는 정신분석학의 계보에서 보자면 '프로이트 우파'에 해당한다. 프롬은 포지션은 '프로이트 우파 +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다).

 

 

 

 

-프롬은 1900년 3월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보모는 독실한 유태교 신자였다(*<정신분석과 종교>가 나올 만한 배경이다). 아버지인 나프탈리 프롬은 와인상을 하는 중산계급이었다. 프롬은 1918년 프랑크프루트 대학에 입학해 2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한 뒤 하이델베르크대로 옮겨 사회학을 공부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은 "유태교의 두 종파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였다. 그때까지 유태교가 프롬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1926년에 그는 유태교와 작별한다. 

-그후 베를린정신분석학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하던 그는 1931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활동근거지이던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에 참여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예상치 못했던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지였던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퇴조하면서 독일의 좌파지식인들은 곤경에 빠졌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돌파구 중의 하나는 "과거의 오류를 규명하고 새로운 행동을 강구하기 위해 마르크스 이론의 근본적인 토대를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좌파지식인 서클이었다.



-1923년에 정식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는 초기에는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노동계급을 상정했지만 "산업사회의 기술적 합리화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거세했다"고 판단하고 현대사회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 연구활동의 초점을 옮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의 도입이 요구됐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1년, 3명의 정신분석학자를 맞아들였는데 그들은 칼 란트아우어, 하인리히 멩,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었다.

-프롬이 합류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융합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다. 1932년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의 기관지 <사회연구>지에 '정신분석학적 사회심리학의 방법과 과제'를 발표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프롬은 1933년부터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나치가 득세를 하기 시작했고 독일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처럼 프롬도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먼저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가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콜럼비아대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교류를 지속했던 그는 1939년 프로이드 해석과 평가에 관한 연구소와의 의견차이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결별했다. 프롬은 이후 정통프로이드주의와도 멀어져 갔다.



-서구의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의 공산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프롬은 이때부터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주목하며 인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소외론의 마르크스이다). 1955년 펴낸 <건전한 사회>는 이러한 그의 사회변혁의 이론과 사상이 제시된 책이다.

-프롬은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식의 공산주의도 인간성을 짓밟고 관료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소외’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담겨 있는 사상을 더욱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었다. 프롬의 사회변혁방법론은 '개인의 내적 변화를 통한 자기 해방과 사회변혁이 동시에 추진돼야한다'는 것과 '사회변혁운동이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영역에서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생각은 <마르크스의 인간개념>,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로 이어졌고, 이론뿐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그는 그가 발딛고 있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에 몸담으면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프롬은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 미국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했고 베트남전 시기에는 평화운동, 반전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전을 기치로 내걸고 민주당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예비후보 경선을 도왔던 프롬은 닉슨의 당선 이후 정치적 활동을 접었다.



-1965년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정년 퇴직한 뒤에도 <소유냐 존재냐>, <희망의 혁명>등 7권의 책과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프롬은 1980년 3월18일 스위스에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뒤 1981년 <불복종에 관하여>가 출간됐는데(*이 책은 번역돼 있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책에 실려있는 미국 사회당의 강령 초안은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이 흥미롭다.

06. 07. 26.

P.S. 프롬의 저작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건전한 사회>가 일찌감치 세계사상전집 등에 들어가 있었을 만큼 국내에는 많이 소개되었고 많이 읽혔다(짐작에, <소유냐 존재냐>나 <사랑의 기술> 같은 책들이 그의 베스트셀러이다. 제목이 '선정적인' 만큼 가장 많은 종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기도 하다. 대입논술문제로도 나오고). 그건 그의 주장이 그만큼 상식적이라는 뜻도 된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롬에 관한 저작은 아주 드물다. 박홍규 교수의 <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필맥, 2004)과 박찬국 교수의 <에리히 프롬과의 대화>(철학과현실사, 2001)가 국내 저자가 쓴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길잡이로서 유일하다. 번역서로는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2000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논문집을 옮긴 <에리히 프롬의 현대성>(영림카디널, 2003)이 전부이다. 그걸로 충분하다면 사실 아주 경제적인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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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06. 07. 23)에서 학술동향 기사를 옮겨온다. 이정모(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가 쓴 '인지과학과 제3의 움직임'이 기사의 제목이고 '뇌·신체·환경의 종합…정서와 의식 넘어선 움직임'이 그 부제이다. 인지과학쪽 책들을 교양수준으로는 갖고 있고 더러 읽어본지라 '업계'의 동향에 대해서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로 여겨진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탐구에서 등장한 인지과학이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동안의 인지과학을 지배해온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려는 그러한 움직임이다.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인지과학은 그동안 두 단계의 중요 패러다임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첫 단계는 마음에 대한 컴퓨터 은유를 바탕으로 한 고전적 인지주의 또는 계산주의의 시기로, 인간 언어의 추상적 구조에 바탕하여, 심적 내용은 표상, 심적 과정은 계산으로 개념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한 시기였다. 둘째 시기는 이러한 고전적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등장한 연결주의와 신경과학의 전개다. 이 시기에는 생물적 뇌의 추상적 구조(연결주의)와, 실제적 구조(신경과학)에 바탕하여 마음을 탐구하되, 언어의 통사적 구조에 바탕한 표상주의는 배격하고, 기호(상징) 이하 수준의 계산, 신경적 계산을 강조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통적 인지주의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격하시켜 뇌의 탐구를 소홀이 하였다. 심신동일론 관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연결주의나 현재의 신경과학도 근본적으로는 현상을 경험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두뇌=마음’의 개념 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지과학에서 제3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심신이원론이건, ‘두뇌=마음’의 심신동일론이건 현대 과학에서 지지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두뇌 내부의 작용만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두뇌, 신체, 그리고 세계가 연결된 집합체 상의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거슬러 올라가면, 윌리엄 제임스, 듀이, 로티 등의 실용주의 철학자들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대륙의 철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것이었지만, 현대 인지과학에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먼저 강하게 드러내준 사람들은 철학자들보다는 인공지능 및 로보틱스 연구자들 그리고 발달심리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이었다.

-인공지능학자인 로드니 브룩스(Rodney A. Brooks, 사진)는 1990년대 초에 그 당시를 풍미하던 내적 표상 조작 중심의 인공지능시스템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표상이 없는 지능시스템이 앞으로의 로보틱스 연구가 지향하여야 할 방향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한편 발달심리학 연구자들은 어린아이가 걷기를 학습하는 행동 등을 내적 표상 개념이 없이 동역학체계적 틀을 적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함을 보였다. 마음이란, 특정 지식이 표상으로 뇌에 내장됨 없이,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개체가 환경에 주어진 단서구조들과의 상호작용하는 실시점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비표상적 활동이라고 본 것이다.

 

 

 

 

-한편 신경과학자들은 뇌와의 연결이 단절된 척추체계가 통증 감각과 학습에서 일종의 인지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과, 신경계가 아닌 전신에 퍼져있는, 호르몬 관련 세포 수용기들이 정서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정서적, 의식적 사건이 뇌만의 사건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음=두뇌’ 식의 단순화된 생각의 위험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인지과학 내의 경험과학에서의 이러한 논의나 연구 추세는, 철학이 개입하기 이전에는 데카르트적 틀에 대한 산발적 압력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 초, 현 시점에서 철학이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인지과학의 경험과학적 연구의 새 변화들이 어떤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묶일 수 있는가 하는 개념적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마음은 뇌를 넘어서, 비신경적 신체, 그리고 환경, 이 셋을 포함한 총체적인 집합체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으로 개념화하여 인지과학의 기초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자연과학적 인지과학과 인문학의 철학을 연결하여 새로운 틀을 이루어 내려는 이러한 작업은 마음의 문제를 협소한 주관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개념화한 듀이 등의 고전적 실용주의철학자들의 계승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주체와 객체가 괴리되지 않은 세상속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상적 인지를 강조한 하이데거적 재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동역학체계’ 틀로의 변화를 주창하는 것을 본다면, 과거의 ‘계산의 언어’에서 ‘뇌의 언어’로, 그리고 이제 ‘동역학체계의 언어로’ 개념화하는 작업이 인지과학의 여러 분야에 앞으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뇌, 신체, 환경의 총체로서 마음을 개념화 한 인지과학의 새 틀이 신경과학, 심리학 등에서 생산적인 연구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되려면, 앞으로도 자연과학으로서의 인지과학과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을 연결하는 추가적 작업이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06. 07. 26.

P.S. '마음=뇌'가 아닌 뇌로부터 분리된 마음(혹은 마음으로부터 분리된 뇌)이라... 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농담만은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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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지과학의 현황과 조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8 23:47 
         교수신문(09. 04. 06) “생각 교환할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 필요해요” 한국의 인지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이정모 성균관대 교수가 얼마 전 『인지과학』(성균관대 출판부)을 펴냈다. 종합과학이자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이 책을 통해, 이 교수는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심성을 과학을 통해 해명하자는 야심찬 취지를 바탕으로 한
 
 
2006-07-26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26 14:59   좋아요 0 | URL
**님이 AI에 저보다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인지과학이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제기하는 도전에 관심을 갖고 있는 편입니다. 지젝이 <신체 없는 기관>의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구요...

2006-07-2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비주간논평(06. 07. 25)에 젊은 소설가 김애란씨가 나섰다. '야간비행'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논평의 제목으로 쓰였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페이퍼의 제목은 '김애란의 야간비행'이라고 단다. 아울러 작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올 정초에 이루어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도 자료 차원에서 옮겨다 놓는다.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가 현단계 한국문학의 듬직한 기대주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단에 '김애란'이란 이름이 떠돌 때 나는 문단 마케팅의 일종이겠거니 하고 얕잡아봤었다. 하지만 얼마전에 읽은 그녀의 단편 '성탄특선'(<문학과사회> 여름호)은 마케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파워'를 느끼게 해주었다. <달려라, 아비>(창비, 2005)를 몇 주 전에 사다놓고 아직 손에 못 들고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그녀는 현단계 '계급문학'의 가장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논평 '야간비행'은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의 계속적인 질주를 기대한다.

-상경 후,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의 날씨를 기억한다. 8월이었고, 숨막히게 무덥던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비지땀을 흘려가며 낯선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서울 물정이라면 둘 다 무지했고, 가진 돈은 터무니없이 적고, 날은 대책없이 덥기만 했던 어느날. 그럴듯한 방을 얻지 못해 소가지를 부리고 있던 나를 길가에 한참 세워두고, 작열하는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땀과 파운데이션이 뒤범벅된 탓에 진흙처럼 금방 흘러내릴 듯했다. 우리는 너무 지친 나머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다. 이상하리만치 천장이 높은, 깊고 서늘한 방이었다.

-다행히 조건이 맞아 어머니는 내게 몇평의 애잔함을 떼어줄 수 있었다(*단편 '성탄특선'도 방, 이번엔 성탄을 맞아 그에 걸맞는 근사한 섹스를 남들처럼 해보려고 하는 커플의 여관방 구하기 이야기이다. 나는 작가적 체험의 밑바닥에 깔린 정서가 이 '지상의 방 한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산 전망대에라도 올라가서 서울의 야경을 보노라면 그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 사이에 정작 '나의 집' 한칸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한 일이던가!).

-그날의 기다랗던 정오, 이 땅의 지난하고 유구한 상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방을 구한 뒤, 머리를 맞대고 함께 팥빙수를 먹었다. 깊은 피로 사이로 투명하게 부딪치던 얼음 소리, 하얗게 질려 있던 여름 하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수도(首都)의 볕은, 누군가를 미워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강렬했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연신 땀을 훔쳐댔다. 나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셋방을 스무번도 넘게 옮겼다는 아버지의 일기(日氣)도, 그날의 20세기 태양도, 저렇게 크고 어지러웠을까?’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날 우리들 머리 위로 떠 있던 크고 둥근 해를, 그 대낮의 따가웠던 서울의 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매일 몸을 뉘었던 방은 어둡고 선득한 곳이었다. 작은 문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세로로 놓인 관처럼 깊은 내부가 시원하게 나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방에 책상과 컴퓨터 등 참으로 학생다운 가재를 들여놓았고, 네모난 가구들이 만들어내는 깔끔한 각을 보며 흡족해했다. 나는 자주 밥을 거르고,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셨지만, 스무살의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해 아무 때고 벌떡벌떡 일어나 놀러 나갈 수 있었다. 음악은 잘 듣지 않았고, 책은 늘 엎드려서 읽었다. 빨래를 자주 미뤘고, 어머니에게 가끔 세금을 속였던 것도 같다.

-내 몸엔 아직 읽고 쓰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았지만, 이따금 나는 대가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보곤 했다. 시인이신 나의 스승이 좋은 문장이라도 한번 칭찬해주는 날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작고 불편한 방에 신을 벗고 들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쉬러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방을 구하던 날 이후 영원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던 태양,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고향을 떠나오긴 했지만 나는 내 몫의 그 작은 어둠과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그 육면(六面)의 어둠 안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하늘에서 닻처럼 내려온 형광등 줄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다. 딸깍이는 스위치 소리 한번에 세계는 일순 조용해졌고, 나는 반듯하게 누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나간 빛을 한껏 빨아 통통해진 야광별들이 천장에서 총총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도, 루카치의 별도 아닌, 납작 엎드려 가까스로 빛나던 형광색 스티커들.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무더기였다(*나의 집 베란다 유리문에도 그런 별무더기가 붙어 있다). 나는 이사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이 닿지 않았고, 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고 생각하며,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나만한 크기의 몸을 가졌을 허약한 자취생들,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들, 월급과 적금, 어디론가 송금할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젊은이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많은 사람들. 몇년째 책장에 꽂아둔 채 절대 읽지 않은 오디쎄우스는 아직 내게 '떠난다'는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 언제 이렇게 많이 떠나오고 또 떠나갔던 것일까?'

-모처럼 찾아온 고요 속에서, 아늑한 어둠을 방해하는 발광물질을 보며, 나는 퍽 심란해했다. 아무래도 좋을 마음으로 '야광별 따위라니!'라며 투덜거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나의 독립과 사생활의 의미는 어떤 통속성 안에서 저 별빛처럼 자꾸만 초라해지는 듯했다. '당신들의 계급'이 아닌 '우리들의 취향'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고, 이 방이 내 방도 당신의 방도 아닌 우리들의 방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들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라고 안도할 수 있는 어떤 범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잘도 기어들어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루카치를 비틀자면, '야광별과 계급의식' 정도 되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결국 나는 별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약하고 조금쯤은 천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빛 가까이에 있으려고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빛 역시 내가 알아야 할 빛 중에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곳을 떠난 지 몇해가 지났고, 그 방은 이미 헐려 사라졌지만, 이따금 나는 내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어느 부분들은 그 별들의 영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우울한 기질의 학자들처럼, 빛을 흡수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 야광별빛의 영향을 받으며, 나는 길을 걷고, 물건을 사고, 가끔은 그 대가리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전화가 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놀러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김애란, 혹은 '야광별의 영향 아래 있는 작가').

한국일보(06. 11. 06)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씨 인터뷰

“누군가에게 어리다고 말하면, 나이가 아니라 그 말이, 그를 정말 어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이 뒤로 숨고싶을 때 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25)씨. 그는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타며 등단해 이제껏 9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것들을 묶어 곧 첫 작품집을 내게 될 신인이다(*물론 그 단편집이 <달려라, 아비>이다). 그리고 그는,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가장 일찍 한국일보문학상을 탄 작가가 됐다. 그 결정은 파격이었고, 사건이었다. 4시간여의 격론 끝에 그를 낙점한 본심 위원들조차 자신들의 결정에 잠시 숙연했고, 한 심사위원은 “카메라 뒤에 숨어있어야 할 우리가 이 결정으로 하여 카메라 앞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쟁쟁한 선배들 틈에 끼어 본심에 올랐던 당선자 역시 놀랐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첫 반응을 먼저 전했다. “말씀을 드렸더니 ‘누가 장난전화 건 거 아니냐. 제대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해라’하시더군요.” 정작 본인의 첫 느낌은 놀랍고 기쁘고…, 뭐 그런 것보다 먼저 ‘찡하더라’고 말했다. 호명된 자신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거느린 가난한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받은 기분’이라고도 했다. “그 질문이 온당한 것이라면 이제 제가 온당한 대답을 해야 할 차례지만, 그 대답을 오래 아껴두고 싶어요. 어쩌면 평생 두고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렇더라도 서두르고싶진 않아요.” 그가 염두에 둔 질문은 대화의 다른 맥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왜 쓰는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때문에’나 ‘~위해서’로 이어지는 많은 대답들, 너무 완벽하고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거짓말 같은 대답들을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답을 구하고 그것을 정답이라고 믿다 보면 결국 속게 될 것 같아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궁금해 하면서….”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화법도 얼굴 화장도 걸음걸이도 담담하다. 그의 소설도 대체로 그렇게 읽힌다. 당선작 ‘달려라, 아비’에서, 그는 아버지 부재와 가난의 상처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고통에 신음하지도 통증을 내색하지도 않는다. 자위하듯 농담으로 얼버무리지도 않으며, 상처의 맥락을 사회화 역사화하지도 않는다. 그 상처는 극복의 대상도 화해의 상대도 아니다. “아픔을 농담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극복하려는 의지가 개입된 거겠죠. 제가 작품에서 말하게 된 상처는 대결이나 화해의 정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어쩌면 처음부터 농담처럼 주어진 상처일 겁니다.”

-일각에서는 그 낯선 전술을 세대적 감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탈사회, 탈역사적 세대의 감수성이라는 게 그것이다(*김애란의 어떤 소설들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는 예민한 사회학적 시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이 작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탈역사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99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왔고, 지금껏 7년을 살았어요. 그 경험들이 저의 글 어디에든 묻어있겠죠. 곧 제 일상의, 동시대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게는 세대적 공감보다는 계급적 공감이 컸어요.”(*바로 그것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계급적 공감! 이럴 때 작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군.) 

 

 

 

 

-그는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보여준 담담한 잔인성,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 지닌, 제시에 충실하면서도 뭘 제시했는지 모르게 만드는 은근함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객관적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름 조숙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전달하는 태도가, 어깨에 힘주지 않고 핏대 세우지 않는 진지함이 부럽다고 말했다(*나는 <달려라, 토끼>의 작가 존 업다이크가 언급될 줄 알았다). “김수영의 시의 치열하면서도 범박한 느낌과 아득한 유머감각…, 그런 거요.”

-그는, 뭔가를 써야겠다는 생각 없이 무의식이 던져주는 한 문장을 옮겨놓고,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면 계속 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중반부쯤 이르러서야 작품의 구성과 결론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당선작도 그렇게 썼어요. 쓰다 보니 아버지가 뛰어들더군요. 말도 안 붙이고 계속 내버려뒀는데 계속 뛰기에 아버지 이야기가 된 거죠.”

-그는 초등학교시절 동시 숙제를 베껴 냈다가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있고, 그 부끄러움과 뿌듯함의 야릇한 감흥이 오래 남아 소설을 쓰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낯가림이 심한 그는 등단하던 해 겨울 현대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인연으로 시상식에 초대돼 멋 모르고 나갔다가, 그가 좋아한다는 성석제(당선자) 씨에게 인사도 못하고, 먹고 싶은 떡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다는 얘기를 웃으며 했다.

-그는 여행을 싫어한다고 했다. 귀찮다는 것이다. “이번에 상도 타고 했으니 그 싫어하는 일을 해볼까 해요. 상금으로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여행할 생각입니다. 장소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관계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여행!” 문예지 겨울호에 발표할 단편 2편을 끝낸 뒤 써볼 생각이라는 첫 장편소설, 그 첫 문장을 던져줄 ‘무의식’ 공간으로 떠나겠다는 말일까(*그녀의 첫 장편소설을 기대한다).(최윤필 기자)

▲ 김애란씨는

1980년 인천생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입학

2003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소설부문) 수상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한겨레(06. 01. 01) 김애란씨는 해가 바뀌어 세는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 됐다. 스물일곱이면 확실히 어린 연배는 아니다. 김승옥씨가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무진기행> 같은 소설을 쓸 때 나이가 스물댓 살에 불과했고, <광장> 역시 최인훈씨가 비슷한 연치에 쓴 작품이다. 현대문학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적잖은 작가들이 20대 초에 자신의 대표작을 발표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조숙한 천재들’의 시대도 아니고 미숙한 만큼 온갖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던 현대문학 초창기는 더더욱 아니다. 30, 40대에 등단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마흔 언저리의 작가에게도 언필칭 ‘젊은’이라는 관형어가 얹혀지는 시기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씨는 문단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지난해 한국 문단이 거둔 최대의 수확 중 하나가 소설가 김애란의 등장이라는 데에 토를 다는 이는 많지 않다. 김씨는 물론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했지만, 그의 이름이 문단 안팎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해 11월 하순에 출간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에서부터였다. 표제작을 비롯해 아홉 개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불과 한 달여 만에 판매부수 1만 권을 훌쩍 넘어서면서 연말 문단과 독서계를 달구었다.

 

 

 

 

-책 출간 이후 연말까지 그는 신문과 잡지 인터뷰 10여 차례에 방송 출연도 예닐곱 번을 하는 등 누구보다 바쁘게 세밑을 보냈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한동안은 전화기를 꺼 놓기도 했다. “그리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말을 반복하고 다니는 게 쑥스러웠어요. 작품보다 이미지가 더 많이 소비될까 봐 걱정도 됐구요. 여러분의 관심은 과분하고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감탄하거나 투정할 일은 아니고, 조용히 책상 앞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었죠.”

-첫 소설집을 낼 때만 해도 그의 생각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서 직장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 출간 이후 청탁이 밀려들어오면서 가을까지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감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취업 계획은 당분간 접었어요. 하지만 언젠가 취업은 정말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 제가 건강했으면 해서예요. 소설이란 혼자 쓰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쓰는 거라고 믿거든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유명해져서) 날 받아 줄 직장이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그는 웃었다. 젊은이답게 잘 웃고 감정에 솔직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면모도 뚜렷하다.

-지나간 2005년이 자신에게 어떤 해였는가 묻자 “질문을 많이 받았던 해”라고 재치 있게 받아 넘기더니 이내 진지해진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 잘 알게 된 해였던 것 같아요. 마치 연애할 때처럼요. 왜, 연애할 때면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이 잘 보이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년은 내가 나 자신을 많이 바라본 해였어요. 때론 흥미롭게, 때론 걱정스럽게. 하지만 상황 한가운데 있어 보니까 내가 생각보단 약하지 않구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2006년의 계획은?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요.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구경하고도 싶구요. 정해진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서는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에 타서 모르는 곳으로 가고 하는 식으로요.”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정해진 주제나 구상이 없이 일단 써 가면서 소설을 완성시키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제 작법을 낭만화하거나 신비화시키려는 건 아니고요, 처음부터 무얼 쓸지 알고 시작하는 것보다는 쓰면서 주제를 ‘발견’해 가는 게 더 즐거워요. 물론 다른 방식으로, 가령 취재를 해서 쓰는 경우도 있죠.”

-선입견과는 달리 니체를 비롯한 철학서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이 당돌한 신인은 “독자에게서 ‘마음의 답장’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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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6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2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조정했습니다. 따붙이기를 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기인 2006-07-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첫번째 코멘트 중 '집들 사시에'라는 오타 발견했습니다. 저도 지금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는 중인데, 시적인 문장에 계속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퍼갑니다.

로쟈 2006-07-2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 덤으로 야경 이미지도 하나 더 집어넣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최초인 듯싶은데, 미국의 젠더/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단행본 연구서가 출간됐다. 임옥희의 <주디스 버틀러 읽기>(여이연, 2006)이 그것이다(출판사 '여이연'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약칭이다). 그간에 쌓인 마일리지로 어제 책을 주문했기에 내일쯤 받아볼 책인데, 아직 언론의 리뷰가 전혀 뜨지 않아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의 게시판에 떠 있는 (출판사측) 소개글을 옮겨온다.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은 책의 부제이다.

 

 

  


● 출간 의의: 최근 한국사회에도 젠더 인식의 변화 조짐이 보인다. 친밀감의 행위였던 여학생들의 팔짱끼기, 남학생들의 어깨동무를‘수상쩍은’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군대에서도 동성애 사병에 대한 공식인정을 검토 중이다. 광고, 대중매체, 드라마, 영화 등 이미지 산업에서 성적소수자 이야기가 유행처럼 흘러넘친다. 한국사회의 퀴어한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가?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 이론을 꼼꼼히 살펴봄으로써 변화하는 한국적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을 시도하는 최초의 책이 될 것이다.

● 책의 특징
1. 버틀러 이론의 토대가 되는 수많은 서구철학, 정신분석학, 젠더이론의 역사 그리고 버틀러의 텍스트 일곱 권에 나타난 철학적 주제들을 세밀하게 설명해내고 있다.
2. 한국적 퀴어 상황들, 군대내 동성애, 호주제폐지, 트랜스젠더 등의 논의를 통해 젠더에 관한 모든 문제들에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3. 영화, 문학뿐만 아니라 9.11, 애니타힐 사건, 아프간 여성 안주만의 명예살인 등의 다양한 사회적 주제들에 이론을 접목함으로써 이론서의 난해함에서 벗어나 있다.

● 책의 내용
-버틀러의 젠더 철학이론은 과감하다. 한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절대 묻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허를 찌르는 질문들을 해댄다. 이성애 친족구조, 재생산, 근친상간금지, 동성애금지 등에 대해 의심하고 조롱하며 지속적인 탐색작업을 펼친다.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건들인 국가, 법질서, 젠더, 섹슈얼리티 등을 ‘더 이상 묻지 마, 다쳐’라고 할 지경까지 끌고 나간다(*버틀러의 책으론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안티고네의 주장>이 번역돼 있으며,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의 한 장이 버틀러에게 할애돼 있다).

 

 

 

 

-우리나라의 유림들이 호주제 폐지를 악착같이 반대했던 까닭은 ‘근본’의 훼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모름으로써 근친상간을 범 하게 되면 소위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하게 된다. 천륜과 인륜의 근간이 되는 것이 근친상간의 금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림들의 공포는 근친과 친족을 만고불변인 것처럼 간주하는 데서 온다. 반면 버틀러는 근친상간금지에 앞서 근친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질문의 초점을 맞춘다. <안티고네>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이성애 핵가족이라는 오이디푸스 가족 자체가 근친상간을 부추기는 핵심공간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역설을 그녀는 지적한다.

-동성애를 병리적인 것으로 보는 교황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이성애가 지배적인 우리사회에서 버틀러의 이론은 분명 난감한 지점들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노동(성노동, 감정노동, 가사노동), 모성, 재생산에 관한 페미니즘 논의는 가부장제를 수리, 보수, 유지하려는 논의들이지 근본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이에 반해 버틀러는 가부장적인 제도와 법, 국가의 보호 자체를 철저히 거부한다. 이성애 재생산보다는 퀴어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그녀의 이론은 불온하다. 그녀의 이론은 위안을 주지 않는다. 기댈 언덕 없는 벼랑 끝에서 생존의 전략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으므로.



● 주디스 버틀러는?
-1956년 미국 출생.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수사학과 비교문학과 교수. 퀴어 이론 분야의 창시자로 <젠더 트러블>(1991)이라는 저서를 통해 단숨에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1990년대 아카데미아의 슈퍼스타이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1993년 <주디!>라는 팬진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난해한 강단 철학자가 마돈나와 같은 마니아층을 거느리는 것, 대중문화와 본격철학의 경계가 해체되는 것, 그 퀴어한 포스트 현상의 중심에 서 있는 이론가이다(*본의와 무관하게 버틀러의 책들을 언제가 여러 권 구하게 되어 나는 덩달아 관심을 가진 척하고 있다. 세어보니 그녀의 책을 6권 갖고 있다).

● 저자 임옥희는?
-버틀러와 같은 해 1956년 태어났으며 수년간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많은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한국적 상황들을 고민해 왔다. 10여 년 동안 여성문화이론지 <여/성이론> 외 수많은 여성이론관련 서적 출간에 앞장섰다. 현재 한국의 문화를 여성적 시각으로 읽어내고, 이를 이론화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공저서에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뫼비우스 띠로서 몸>, <모더니즘 문학론>, <여성과 광기>, <보이는 어둠(우울증에 대한 회고)>외에 다수가 있다(*빠진 건 가장 최근에 출간된 번역서 <레닌의 연인 이네사>이다. 소재가 흥미로워 나는 바로 구입했다).

06. 07. 25.

P.S. 참고로 버틀러의 저작 목록이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이 출간되었거나 근간예정인 책).

2005: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2004: Undoing Gender

2004: 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2000: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with Ernesto Laclau and Slavoj Žižek)(*도서출판b에서 근간예정이다.)  

2000: Antigone's Claim: Kinship Between Life and Death (<안티고네의 주장>)

1997: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1997: Excitable Speech: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1993: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oursive Limits of "Sex"(<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1990: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그녀의 출세작.)

1987: Subjects of Desire: Hegelian Reflections in Twentieth-Century France (*버틀러의 박사학위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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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5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25 20:15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확인을 안 하고 쓰면 꼭 실수를 하죠.^^
 

내 기억에는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1931-1994)의 영화전집 출간 소식을 몇달 전에 한 영화잡지에서 읽은 듯한데, 교수신문에 이에 관한 동향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필자는 양창렬 특파원이며, 내용에 맞는 제목은 '기 드보르의 영화전집 DVD 세트와 저작집 발간의 의미'이다. 보통은 '의의'에 대해서 적게 마련이지만 필자는 그 '아포리아'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다. 제목은 그냥 평범하게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라고 달아놓는다(상황주의는 신좌파 아나키즘의 일종이다). 

교수신문(06. 07. 23) "하나의 유령이 문화를 배회하고 있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이." 이것은 68년 1월의 ‘마가진 리테레르’, "상황주의자" 특집호에서 장-피에르 조르쥬가 했던 말이다. 기 드보르의 ‘영화 전집’ DVD 세트와 ‘저작집Œuvres’이 잇따라 발간됨에 따라, 대중들 사이에 40년 전의 아방가르드 유령들이 또 다시 출몰하고 있다. ‘영화 전집’은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이 기 드보르가 연출한 여섯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복원하고(*아싸야스는 한때 아내이기도 했던 장만옥을 주연으로 영화 <이마베프>와 <클린> 등을 찍은 엘리트 비평가 출신의 감독이다), 서한집에서 영화 관련 구절들을 발췌한 책자를 끼워 넣음으로써 전집으로서의 구색을 갖추었다.

‘저작집’은 기 드보르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한 바 있는 뱅상 카우프만의 책임 하에 간행되었으며, 1천9백 쪽에 이르는 이 책에는 연대기 순으로 정렬된 기 드보르의 저작, 발표문, 기사, 편지, 사진 등이 담겨 있다. 이 두 도구 덕분에 기 드보르 및 상황주의자들에 대한 연구는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싸야스와 카우프만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야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이 작업들은 기 드보르의 전략의 아포리아를 제기한다(*물론 한국은 이러한 아포리아와 다소 무관하다. 기 드보르의 저작으론 <스펙타클의 사회>(현실문화연구, 1996)이 전부이기에. 이 책의 영역은 http://library.nothingness.org/articles/SI/en/pub_contents/4 참조. 국역본의 글 두 꼭지는 말미에 옮겨놓았다).

-오늘날 DVD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비 매체다. 상품이자 소유물이며, '사적 사용'에 제한된 자본주의 교환 법칙 및 소유권 이데올로기까지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는 DVD(혹은 비디오)라는 매체는 스펙터클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극장(홈씨어터)으로 대변되는, 스펙터클의 일상생활 장악에 대한 고민 없는 복원은 반쪽에 불과하다.

-기 드보르가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1952)에서 시도했던 실험들―백색 화면 위를 표류하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voix off)와 검은 화면의 침묵의 교체, 그리고 영화 시작 3분 뒤에 들려오는 "영화는 없고, 시네마는 죽었다. 더 이상 영화는 있을 수 없다. 원한다면 토론으로 넘어가자"라는 도발적 선언―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목소리'와 '이미지'의 분리는 미학적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바깥의 삶과 스펙터클의 대립을 표현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바깥의 목소리, 꺼진 목소리―이 둘은 모두 voix off이다―는 스펙터클과 외양에 의해 박탈된 '언어 소통 가능성'을 되찾기 위한 봉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영화 클럽'에서 그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쏟아졌던 관객들의 반발과 상영 중단 해프닝은 오히려 기 드보르의 反-영화, 영화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도구로서의 영화가 성공을 거둔 사례다. 화면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키우고(voix on)―극장, 그리고 스펙터클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된다― 삶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상황을 구축"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씨릴 네이라가 지적하듯이, 드보르에게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스펙터클의 작동에 참여하므로, 영화는 스펙터클의 전복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DVD에 담긴 매끈한 영상들은 이제 하나의 영화 '텍스트'이자, 이미지-표상으로서 분석 대상이 될 것이다.

-1984년에 친구, 편집자, 영화 제작자였던 제라르 레보비시가 암살된 이후, 기 드보르는 자기 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금지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만에 다시 개봉된, 소문만 무성했던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에 씨네필들은 열광했고, 그들은 그 서정주의적 이야기 속에서 '모던 영화(cinema moderne)'의 기운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 현상은 드보르의 영화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미학을 발견하려는 시도이긴 하지만, 예술로서의 삶이나 삶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종말과 폐지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드보르의 전망을 흐리게 만든다.

-동일한 현상이 ‘저작집’에서도 나타난다. 필립 솔레르스는 드보르에 대해 "읽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저자"라고 말했다. 드보르의 구문은 혼란스럽지도 않고, 특별히 새로운 단어들을 담고 있지도 않지만, 그의 논조 자체가 글 속에서 파괴 과정에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글 속에서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계에서 드보르를 연구 대상으로 '전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작집’은 드보르의 아포리즘들 사이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 독자들의 전용(detournement) 가능성을 줄인다.

 

 

 

 

-‘르 피가로’의 서평은 "‘저작집’이 드보르의 저작들을 하나의 '고전'으로 만든다"라면서, 이 상황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한 편으로, 이제 드보르가 학계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드보르는 이제 아카데미에 포획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이미 드보르가 죽기 전에 가장 '스펙터클한' 케이블 채널인 카날 플뤼스(Canal+)에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도록 허락하고, 가장 '부르주아적인' 출판사인 갈리마르에 자신의 저작의 재간행을 맡긴 것에서 시작된다.

-장 보드리야르는 상황주의자들이 체계 바깥에 위치한 삶과 상황을 구축하려는 "관념적인 (그러나 이미 통속적인 것이 되어버린) 유토피아"를 추종한다고 비판하며 스펙터클 개념을 지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말년의 기 드보르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은, 보드리야르의 평가와는 정반대로 드보르가 스펙터클 체계 내에서 그 체계 자체를 이용, 보다 정확히는 "전용"함으로써 그 체계를 해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납득할 만한 행동이란 얘기인가? 한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 그리고 그러한 실패가 예견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면, 적어도 '현명한' 행동은 아니지 않을까? 나로선 보드리야르의 견해를 쉽게 기각하지 못하겠다).

-기 드보르의 마지막 내기에도 불구하고, 스펙터클이라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은 (정치적) 급진성마저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소비해버렸다. ‘영화 전집’과 ‘저작집’을 보면서, 우리가 한번쯤 아니 여러 번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략적' 질문들이다. 체계 안에서 체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06. 07. 25.

P.S. 아래는 <스펙터클의 사회>의 글 두 꼭지이다(인터넷상에 떠 있는 걸 퍼온 글인데, 더러 눈에 띄는 오탈자들은 국역본과 대조하여 교정했다. 원문의 출처는 국역본 참조).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피터 마샬)

-상황주의자들은 다다, 초현실주의, 문자주의에 의해 영향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및 지식인들의 소규모 모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와 음악을 융합시키고 도시경관을 변형시키고자 했던 무자주의 인터네셔널은 1957년 잡지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을 창간했던 집단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예술의 폐지"에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이전의 다다이스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분리된 활동으로서의 예술과 문화라는 범주를 대체하여 그것들을 일상적 삶의 부분들로 변형시키고 싶어했다.

-문자주의자들처럼 그들은 노동에 반대하고 완전한 여흥을 옹호했다(*사진이 문자주의 작품). 자본주의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창조성은 엉뚱한 곳에 소모되고 억압받으며 사회는 배우들과 구경군들, 생산자들과 소비자들로 분할된다. 그리하여 상황주의자들은 다른 종류의 혁명을 원했다. 그들은 일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모든 이들이 시와 예술을 창작하기를 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선언했다. 노동과 권태따위는 지옥으로나 가라! 

-처음에 그 운동은 주로 예술가들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아스거 욘(*사진)은 가장 저명한 이였다. 1962년 이래, 상황주의자들은 점파 그들의 비판을 문화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측면에 적용했다. 기 드보르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문자주의 인터네셔널에 참여해 왔었고 <사드를 위해 절규함>을 포함한 몇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었다. 상황주의자들은 해방 저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고취되어 특히 1차 인터네셔널 시기동안의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를 재발견했으며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크론슈타트, 마크노주의자들Makhnovists(역주 : 마크노주의자는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였던 네스터 마크노의 지도 하에 1차 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해 활동했던 우크라이나의 혁명 반란군을 말한다. *'네스토르 마흐노'가 맞는 표기이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적 관료제로 묘사했으며 노동자평의회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특히 일상적 삶의 소외에 대한 앙리 르페브르의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혁명운동이 임금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포함할 "확장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비록 추종자나 지도부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이견을 갖는 소수를 추방하는 것에 의해 차이를 다루었던 엘리트주의적 전위집단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최대한의 쾌락을 산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67년이 끝나갈 부렵, 기 드보르와 라울 바네이겜은 각각 <스펙타클의 사회>와 <일상적 삶의 혁명>에서 상황주의 이론의 가장 정교한 해설을 제시했는데, 그것들은 1968년 학생반란 동안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원저자주: <아나키 매거진>은 매 호 바게이넴의 책 각 장들을 실어왔다. 가장 최근호에는 16장 「시간의 매혹」이 실려있다. - 퍼온이 주; 언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책에서 소개한 웹문서 출처는 워낙 오래되어 들어갈 수 없었다.)

-파리의 담벼락에 휘갈겨졌던 가장 유명한 구호들 중 다수가 그들의 테제로부터 나왔는데, 이를테면, "열정을 해방하라" "노동하지 말라" "죽은 시간 없이 살라" 등등이 그것이들이다.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구성운들은 영구 모임에서 결성된 회의체인 소르본느 점거 위원회에서 낭테르 대학의 성난 젊은이들과 공동작업했다. 1968년 5월 17일, 그 위원회는 소련 공산당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와들와들 떨며 기다려라 관료들 노동자 평의회의 국제적 힘이 곧 너희들을 쓸어낼 것이다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최후의 관료의 목을 매달때까지 행복치 못할 것이다 트로츠키와 레닌에 대항한 크론슈타트 수병들과 마크노주의자들의 투쟁 만세 1956년 평의회주의자들의 부다페스트 봉기 만세 국가를 타도하라." 스트라스부르, 낭트 그리고 보르도에서의 성난 젊은이들의 집단들 또한 상황주의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캠퍼스에 '혼돈을 조직' 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결코 12명을 넘지 않았다.

-자신들의 분석을 통해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모든 관계들을 상거래 관계들로 바꾸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삶이 "스펙타클"로 환원되었다고 주장했다. 스펙타클은 그들의 이론의 핵심적 개념이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마르크스의 초기저작에 개진되어있는 소외관을 개정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과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시회되어 자신이 소원한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는 독립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 생산의 성공, 그것의 풍요는 생산자에게 박탈의 풍요로 되돌아온다. 그의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의 그의 소외된 생산물의 축적과 함께 그에게 소원한 것이 된다..."

-점증하는 분업과 전문화는 노동을 무의미한 고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게이넴은 "컨베이어 벨트에서라면 창조성의 희화화를 기대하는 것 마저도 무익한 일이다" 라고 평한다. 그들이 마르크스게엑 덧붙인 것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소비를 증대시킬 사이비 욕구들을 창출한다는 인식이다. 의식이 생산의 지점에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그것이 소비의 지점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자 사회, "스펙타클적" 상품 소비의 사회이다. 오랫동안 생산자로서 극심한 경멸을 받아왔지만 이제 노동자는 소비자로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유혹당한다.

-동시에 현대 과학기술이 자연적 소외(자연을 상대로 한 생존을 위한 투쟁)를 끝장내기는 했지만 주인들과 노예들의 위계라는 형태를 취한 사회적 소외는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능동적인 주체들이 아니라 수동적인 객체들인 양 취급된다. 존재를 소유로 퇴행시킨 후 더 나아가 스펙타클 사회는 소유를 한갓된 외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경제적 부와 문화적 빈곤 간의 존재하는 것과 가능한 것간의 소름끼치는 대조이다. 바게이넴은 "누가 기아로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권태로 죽을 위험을 수반하는 세계를 원하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상황주의자들의 탈출구는 먼 시간 저편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상적 삶을 재창안하는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형시키는 것과 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사람들은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권력관계를 병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사회를 변형시킬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을 습관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으로부터 떠밀어 내기 위해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것을 뒤흔들어 놓을 상황들을 구성하고자 했다(독창적인 시도는 아니지만 화각제 복용에서 선禪 등에 이르기까지).

-화석화된 삶을 대신해서 그들은 행위들과 우연한 만남의 흐름인 표류와 사건들과 이미지들을 재배치하는 전용을 추구했다. 그들은 제조되는 스펙타클과 상품경제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반달리즘, 자의적 파업과 사보타주를 지지했다. 그러한 거부의 몸짓은 창조성의 징표들로 고려되었다.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역할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이미 함축적으로 하고 있던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혁명과정 내에서 촉매로 작용하고자 했다. 일단 혁명이 도상에 오르면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소멸할 것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대신 상황주의자들은 화폐, 상품생산, 임금노동, 계급, 사적 소유, 그리고 국가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사이비 욕구들은 진정한 욕망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며, 이윤의 경제는 퇘락의 경제가 될 것이다. 노동과 적대 간의 분업과 적대는 극복될 것이다. 그것은 지도받고 희생하고 역할을 수행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특징지어지는, 자유로운 유희에 대한 사랑에 기반을 둔 사회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든 개인이 적극적이고도 의식적으로 삶의 모든 계기들의 재건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들이 상황주의자들이라고 자칭한 것은 바로 모든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잠재력을 발현하고 그들 자신의 캐락을 획득할 수 있는 삶의 상황들을 구성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사회의 기본적 단위들에 관한 한 그들은 노동자평의회를 권고했는데, 그것들은 "기업과 이웃공동체에서의 최고 풀뿌리 회의체"를 의미했다.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코뮨과 마찬가지로, 그 평의회는 직접 민주주의의 한 형태를 실천할 것이며 일상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핵심적인 결정사항을 의결하고 집행할 것이다. 대의원들은 위임을 받은 것이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 그 평의회들은 그리하여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국제적으로 연합할 것이다.

-국가와 모든 종류의 소외 공동체들의 구체적 초극을 요구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전망한다는 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근접해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구조들과 관료제를 공격하면서 바쿠닌에 준거했을 뿐 아니라 드보르 자신은 "1936년 무정부주의는 사실 하나의 사회혁명,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적 권력의 모델을 지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주의자들은 배타적 집단으로서의 엘리트주의와 이론과 실천의 정합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라는 양 면에서 전통적 무정부주의와 다르다. 협소하게 프롤레타리아트를 유일한 혁명 계급으로 강조하는가운데 그들은 다른 사회집단들, 특히 학생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간과했다. 그들은 도한 그들이 3월 22일 운동을 이들과 같은 주의주의자들이 아님을 주장했으며 노동자들에게 또 하나의 제한적 이데올로기로 부과되었던 한에서 무정부주의의 이데올로기도 거부했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상황주의자들은 전후 프랑스에서의 일시적인 경제호황을 자본주의 사회들에서의 영구적인 경향으로 간주하는 실수를 범했다. 경제적 풍요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이제 무모하리만큼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선진 산업사회들에서는 과소생산뿐 아니라 과소소비 또한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세계의 많은 지역들, 특히 남반구에서는 사회적 소외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자연적 소외마저도 아직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상황주의자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 창조성에 대한 열망, 일상적 삶의 직접적 변형에 대한 강조를 통해 무정부주의 이론을 풍부화했다. 비록 상황주의 인터네셔널 집단은 1972년 전술을 둘러싼 격렬한 내부 논쟁 끝에 해체되었지만, 그들의 관념은 무정부주의 및 페미니즘 서클들에 지속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때때로 거의 잠재의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펑크 록의 내용 및 스타일의 많은 부분에 영감을 주었다.

=한 상황주의자의 죽음(죠슈아 글렌) 

-아방가르드 영화 제작자이자 선동적인 지식인 기 드보르가 지난 1994년 11월 30일 62세의 나이로 권총자살했다. 마침 그가 드디어  - 그에게는 당황스럽게도 - 유명인사의 대열에 오르고 있을 때 쯤이었다. 1968년 파리에서의 학생봉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단적인 예술가들과 좌익 작가들의 범유럽적 연합체인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창립자이자 아마도 가장 널리 읽혀진 논쟁가였기 때뭉에 그는 오랫동안 집중적인 검토의 대상이었다(*아래는 만년의 드보르 부부).

-그러나 그런 자리에 있었던 많은 다른 예술가들, 활동가들, 혹은 지식인들이 그랬을 법한 것과는 달리 드보르는 매채의 조명을 회피했고 1968년 이후의 자신의 생애를 그림자 속에서 보냈다. 왜 그랬을까? 이는 그의 가장 저명한 에세이 선집인 <스펙타클의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서 그는 매체와 유명인사 숭배가 우리 모두를 최면상태와 수동적인 상태로 가둬 두라는 기존 질서의 명령을 실행하는 도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드보르는 그 도구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링구아 프랑카> 1995년 3/4월호는 자신이 "스펙타클" - 우리의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흡수하고 우리를 우리 노동의 과실들, 동료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광고, 매체 이벤트, 오락, 그리고 의사소통 기술의 무한정한 분출 - 이라고 칭한 것에관한 드보르의 이론들 대부분이 술집 단골들, 범죄자들, 그리고 그 상당수가 어느땐가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된 적이 있는 유토피아적인 음모가들 등의 그늘진 이들의 세계 속에서 안출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범죄자들 및 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면서 드보르는 필사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현실을 추구했던 것이리라. 왜냐하면 그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현대적인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들에서는 직접 삶에 속해있는 모든 것이 표상으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삶"이 잡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진실한 것"은 한 개비의 담배이며, "현실세계는 MTV 위에 펼쳐지는 끔찍하도록 매혹적인 무차별적인 다큐멘터리가 될 정도로 현실 자체는 스펙타클에 의해 전도되고 말았다.

-매개 그 자체가 - 단순히 쇼비지니스나 TV가 아니라 - 드보르가 진정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존재는 항상 도처에서 수동적인 소비를 고무하도록,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부터 직접적인 경험, 정서, 그리고 관계를 박탈하도록 디자인된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다. 우리는 스펙타클이 입 안에 넣어준 낱말들로 말하고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동작으로 제스츄어를 취한다. 한때 우리는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시청한다.

-드보르가 <스펙타클 사회에 대한 논평들>(Verso, 1990)에서 썼듯이 매체를, 가끔 과도하기는 하지만, 의사소통을 촉진하기 때문에 어떤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 혹은 최소한 중립적인 - 공공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드보르에게 있어 매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전자메일과 인터넷을 예견하면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드보르는 "이 사회의 모든 행정업무와 인간들간의 모든 접촉이 이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힘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이 의사소통이 본질적으로 일방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국가로부터 우리 모두에게로의 일방적인 의사소통이다.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타클은 대화를 허용치 않을뿐더러, 바로 대화의 대립물이다. 그것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대한 담화이다.

-<아나키 : 무장한 욕망을 위한 저널> 1994-95년 가을/겨울호의 사망 기사에 따르면, 드보르는 자서전 <찬사>(Verso, 1991)에 자신의 비명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 생애 내내 나는 파란만장한 시대, 극단적인 사회적 분열, 그리고 거대한 파괴만을 보았다. 아무런 박사 학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성적이라거나 예술적이라고 통했던 서클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철저히 회피했다." 

Beneath the Underground - Click Image to Close

-밥 블랙의 저서 <언더그라운드 밑에서>(Feral House, 1994)를 보면 드보르는 1961년 런던 현대 예술 연구소의 상황주의 전시회에서 "상황주의"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우리는 그따위 좆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라"라고 응답하고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나가버렸다고 한다. 자신들의 저작이 상품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황주의자들은 사포로 책을 재본했고(이렇게 하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같이 꽂혀 있는 다른 책들이 손상된다) 외화작품들은 자로 재서 판매했는데, 이후 이런 시도는 광범위하게 모방되었다. 물론 이것들이나 그들의 그 밖의 전략들 중 어떤 것도 오래도록 유효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들 중 많은 것은  - 켄넵이 편집한 <상황주의 인터네셔널 선집>(1981)에 잘 나와있는 것처럼 - 매체에 대항하기 위해 매체를 활용하는 매혹적인 시도들이다.

-개입과 비판의 지점으로서 (미술관이나 화랑 따위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상황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예증이라도 하듯 상황주의자들은 1966년 스프라스부르 대학에서 프랑스 학생 엽합에 침투했고 그것의 기금을 2년 후의 사건에 한 몫을 했다고 믿어지는 풍자적인 소책자인 <학생의 삶의 빈곤에 대하여>를 인쇄하고 배부하는데 지출했다. 1968년의 봉기는 세계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실로,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한 논평들>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스펙타클로 하여금 새로운 방어기술을 습득하게 했을 분이다(재니스 조플린의 반물질주의적 노래 '메르세데스 벤츠'가 메르세데스사의 광고에 이용되는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1968년 5월은 상황주의자들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 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들은 바로 자신의 그 점증하는 인기에 1972년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을 해체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드보르는 그후 죽 은거를 해 왔는데, 1984년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제라르 르보비치가 살해된 후에는 자신의 영화들이 상영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드보르가 무엇보다도 유명해지지 않길 바랬다면, 그는 도대체 왜 영화를 만들고 책을 썼던 것일까? 확시리 매혹하거나 쾌락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대부분의 검은색 화면에, 흐릿하고 되풀이되는 사운드 트랙의 드보르의 첫 영화 <사드를 위해 절규함>(1952)을 실제로 본 사람이라면, 혹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쫒아내는 데 목적을 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지면을 넘길수록 불투명성이 증대되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으려고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드보르의 작품이 항상 극도로 반스펙타클적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 말미에서 썼던 것처럼, 현대 통신기술에 의해 통일된 세계에서 우리는 추방자가 될 수 없다. 1990년대 초, 그는 자신의 책들의 재출판을 허용했고(이 책들은 - 슬프게도!  -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4년에는, <아나키 : 무장한 욕망를 위한 저널>에 따르면, 심지어 그의 삶과 시대에 관한 기록영화에 참여하는 것까지 동의했다. 스펙타클은 마침내 그를 손아귀에 넣은 것일까?

-<린구아 프랑카>는, "자신의 작품이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드보르를 자살로 내몰았으리라고 추정하며,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드보르는 자신이 그토록 정밀하게 기술한 세계 혹은 자신의 이론들이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식자들에게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스펙타클의 사회의 증대하는 권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참애낼 수 없었던, 한 명의 회한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 듯 할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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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7-2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에 대해서는 저도 소시쩍?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죠..^^ 특히 그들의 일상적 삶을 혁명화하는 방식의 참신함과 아나키즘과의 만남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지금 다시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에 대한 글을 읽어봐도 그들의 주장에는 아직도 유효한 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통찰들이 대단히 급진적이면서도 너무 앞서나간 탓에 몇몇 소수의 전복적인 엘리트들에 의해서만 전유되었다는 문제점을 노출하긴 했지만요. 근데 사실 그게 문제점인지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본주의사회내에서 얼마나 일상의 차원에서 전복적일수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어보니 인용문에 로쟈님의 코멘트는 별로 없으신 것 같은데.. 님은 문자주의나 상황주의식의 변혁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로쟈 2006-07-2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메트로 맑스주의>에서 기 드보르 장을 읽고 있습니다. 다른 일들이 많아서 진득하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지만. 물론 저도 공감하는 바가 있고 번뜩이는 통찰력에도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한데, 기본적으론 일종의 '예술운동'이 아닌가라는 것이죠. 새로운 예술운동을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전화시켜보려고 했던. 하지만, 모든 아방가르드들의 운명과 전철을 되밟게 되는(펑크 록으로의 귀결!). 소위 '들뢰즈 맑스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는데, 정치적 전위주의, 혹은 정치적 엘리트주의에 대해 저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멋있는 것과 믿을 만한 것은 좀 다른 것이죠...

yoonta 2006-07-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과적으론 예술운동이었죠..^^ 예술을 일상화하기 혹은 삶을 예술화하기..본문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었던것 같네요. 하지만 그의 예술작품?에 대해 그의 추종자(혹은 배신자?)들이 열광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드보르의 노선에 역행하는 현상..이런 현상은 모든 사람들이 드보르만큼 통찰력과 감수성이 뛰어날수 없다는 어쩔수없는 현실에서 오는 결과죠. 그렇지만 그들의 실천들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포획되어버린 일상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포획이 매체나 매개 혹은 대리등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계속 그들의 이야기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특히 예술과 일상의 삶이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요. 단 그것이 정치운동에서의 전위주의나 엘리트주의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에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