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06. 07. 25)에 젊은 소설가 김애란씨가 나섰다. '야간비행'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논평의 제목으로 쓰였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페이퍼의 제목은 '김애란의 야간비행'이라고 단다. 아울러 작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올 정초에 이루어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도 자료 차원에서 옮겨다 놓는다.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가 현단계 한국문학의 듬직한 기대주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단에 '김애란'이란 이름이 떠돌 때 나는 문단 마케팅의 일종이겠거니 하고 얕잡아봤었다. 하지만 얼마전에 읽은 그녀의 단편 '성탄특선'(<문학과사회> 여름호)은 마케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파워'를 느끼게 해주었다. <달려라, 아비>(창비, 2005)를 몇 주 전에 사다놓고 아직 손에 못 들고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그녀는 현단계 '계급문학'의 가장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논평 '야간비행'은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의 계속적인 질주를 기대한다.

-상경 후,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의 날씨를 기억한다. 8월이었고, 숨막히게 무덥던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비지땀을 흘려가며 낯선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서울 물정이라면 둘 다 무지했고, 가진 돈은 터무니없이 적고, 날은 대책없이 덥기만 했던 어느날. 그럴듯한 방을 얻지 못해 소가지를 부리고 있던 나를 길가에 한참 세워두고, 작열하는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땀과 파운데이션이 뒤범벅된 탓에 진흙처럼 금방 흘러내릴 듯했다. 우리는 너무 지친 나머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다. 이상하리만치 천장이 높은, 깊고 서늘한 방이었다.

-다행히 조건이 맞아 어머니는 내게 몇평의 애잔함을 떼어줄 수 있었다(*단편 '성탄특선'도 방, 이번엔 성탄을 맞아 그에 걸맞는 근사한 섹스를 남들처럼 해보려고 하는 커플의 여관방 구하기 이야기이다. 나는 작가적 체험의 밑바닥에 깔린 정서가 이 '지상의 방 한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산 전망대에라도 올라가서 서울의 야경을 보노라면 그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 사이에 정작 '나의 집' 한칸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한 일이던가!).

-그날의 기다랗던 정오, 이 땅의 지난하고 유구한 상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방을 구한 뒤, 머리를 맞대고 함께 팥빙수를 먹었다. 깊은 피로 사이로 투명하게 부딪치던 얼음 소리, 하얗게 질려 있던 여름 하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수도(首都)의 볕은, 누군가를 미워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강렬했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연신 땀을 훔쳐댔다. 나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셋방을 스무번도 넘게 옮겼다는 아버지의 일기(日氣)도, 그날의 20세기 태양도, 저렇게 크고 어지러웠을까?’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날 우리들 머리 위로 떠 있던 크고 둥근 해를, 그 대낮의 따가웠던 서울의 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매일 몸을 뉘었던 방은 어둡고 선득한 곳이었다. 작은 문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세로로 놓인 관처럼 깊은 내부가 시원하게 나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방에 책상과 컴퓨터 등 참으로 학생다운 가재를 들여놓았고, 네모난 가구들이 만들어내는 깔끔한 각을 보며 흡족해했다. 나는 자주 밥을 거르고,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셨지만, 스무살의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해 아무 때고 벌떡벌떡 일어나 놀러 나갈 수 있었다. 음악은 잘 듣지 않았고, 책은 늘 엎드려서 읽었다. 빨래를 자주 미뤘고, 어머니에게 가끔 세금을 속였던 것도 같다.

-내 몸엔 아직 읽고 쓰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았지만, 이따금 나는 대가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보곤 했다. 시인이신 나의 스승이 좋은 문장이라도 한번 칭찬해주는 날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작고 불편한 방에 신을 벗고 들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쉬러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방을 구하던 날 이후 영원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던 태양,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고향을 떠나오긴 했지만 나는 내 몫의 그 작은 어둠과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그 육면(六面)의 어둠 안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하늘에서 닻처럼 내려온 형광등 줄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다. 딸깍이는 스위치 소리 한번에 세계는 일순 조용해졌고, 나는 반듯하게 누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나간 빛을 한껏 빨아 통통해진 야광별들이 천장에서 총총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도, 루카치의 별도 아닌, 납작 엎드려 가까스로 빛나던 형광색 스티커들.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무더기였다(*나의 집 베란다 유리문에도 그런 별무더기가 붙어 있다). 나는 이사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이 닿지 않았고, 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고 생각하며,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나만한 크기의 몸을 가졌을 허약한 자취생들,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들, 월급과 적금, 어디론가 송금할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젊은이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많은 사람들. 몇년째 책장에 꽂아둔 채 절대 읽지 않은 오디쎄우스는 아직 내게 '떠난다'는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 언제 이렇게 많이 떠나오고 또 떠나갔던 것일까?'

-모처럼 찾아온 고요 속에서, 아늑한 어둠을 방해하는 발광물질을 보며, 나는 퍽 심란해했다. 아무래도 좋을 마음으로 '야광별 따위라니!'라며 투덜거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나의 독립과 사생활의 의미는 어떤 통속성 안에서 저 별빛처럼 자꾸만 초라해지는 듯했다. '당신들의 계급'이 아닌 '우리들의 취향'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고, 이 방이 내 방도 당신의 방도 아닌 우리들의 방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들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라고 안도할 수 있는 어떤 범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잘도 기어들어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루카치를 비틀자면, '야광별과 계급의식' 정도 되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결국 나는 별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약하고 조금쯤은 천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빛 가까이에 있으려고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빛 역시 내가 알아야 할 빛 중에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곳을 떠난 지 몇해가 지났고, 그 방은 이미 헐려 사라졌지만, 이따금 나는 내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어느 부분들은 그 별들의 영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우울한 기질의 학자들처럼, 빛을 흡수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 야광별빛의 영향을 받으며, 나는 길을 걷고, 물건을 사고, 가끔은 그 대가리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전화가 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놀러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김애란, 혹은 '야광별의 영향 아래 있는 작가').

한국일보(06. 11. 06)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씨 인터뷰

“누군가에게 어리다고 말하면, 나이가 아니라 그 말이, 그를 정말 어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이 뒤로 숨고싶을 때 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25)씨. 그는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타며 등단해 이제껏 9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것들을 묶어 곧 첫 작품집을 내게 될 신인이다(*물론 그 단편집이 <달려라, 아비>이다). 그리고 그는,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가장 일찍 한국일보문학상을 탄 작가가 됐다. 그 결정은 파격이었고, 사건이었다. 4시간여의 격론 끝에 그를 낙점한 본심 위원들조차 자신들의 결정에 잠시 숙연했고, 한 심사위원은 “카메라 뒤에 숨어있어야 할 우리가 이 결정으로 하여 카메라 앞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쟁쟁한 선배들 틈에 끼어 본심에 올랐던 당선자 역시 놀랐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첫 반응을 먼저 전했다. “말씀을 드렸더니 ‘누가 장난전화 건 거 아니냐. 제대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해라’하시더군요.” 정작 본인의 첫 느낌은 놀랍고 기쁘고…, 뭐 그런 것보다 먼저 ‘찡하더라’고 말했다. 호명된 자신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거느린 가난한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받은 기분’이라고도 했다. “그 질문이 온당한 것이라면 이제 제가 온당한 대답을 해야 할 차례지만, 그 대답을 오래 아껴두고 싶어요. 어쩌면 평생 두고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렇더라도 서두르고싶진 않아요.” 그가 염두에 둔 질문은 대화의 다른 맥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왜 쓰는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때문에’나 ‘~위해서’로 이어지는 많은 대답들, 너무 완벽하고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거짓말 같은 대답들을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답을 구하고 그것을 정답이라고 믿다 보면 결국 속게 될 것 같아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궁금해 하면서….”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화법도 얼굴 화장도 걸음걸이도 담담하다. 그의 소설도 대체로 그렇게 읽힌다. 당선작 ‘달려라, 아비’에서, 그는 아버지 부재와 가난의 상처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고통에 신음하지도 통증을 내색하지도 않는다. 자위하듯 농담으로 얼버무리지도 않으며, 상처의 맥락을 사회화 역사화하지도 않는다. 그 상처는 극복의 대상도 화해의 상대도 아니다. “아픔을 농담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극복하려는 의지가 개입된 거겠죠. 제가 작품에서 말하게 된 상처는 대결이나 화해의 정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어쩌면 처음부터 농담처럼 주어진 상처일 겁니다.”

-일각에서는 그 낯선 전술을 세대적 감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탈사회, 탈역사적 세대의 감수성이라는 게 그것이다(*김애란의 어떤 소설들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는 예민한 사회학적 시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이 작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탈역사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99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왔고, 지금껏 7년을 살았어요. 그 경험들이 저의 글 어디에든 묻어있겠죠. 곧 제 일상의, 동시대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게는 세대적 공감보다는 계급적 공감이 컸어요.”(*바로 그것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계급적 공감! 이럴 때 작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군.) 

 

 

 

 

-그는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보여준 담담한 잔인성,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 지닌, 제시에 충실하면서도 뭘 제시했는지 모르게 만드는 은근함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객관적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름 조숙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전달하는 태도가, 어깨에 힘주지 않고 핏대 세우지 않는 진지함이 부럽다고 말했다(*나는 <달려라, 토끼>의 작가 존 업다이크가 언급될 줄 알았다). “김수영의 시의 치열하면서도 범박한 느낌과 아득한 유머감각…, 그런 거요.”

-그는, 뭔가를 써야겠다는 생각 없이 무의식이 던져주는 한 문장을 옮겨놓고,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면 계속 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중반부쯤 이르러서야 작품의 구성과 결론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당선작도 그렇게 썼어요. 쓰다 보니 아버지가 뛰어들더군요. 말도 안 붙이고 계속 내버려뒀는데 계속 뛰기에 아버지 이야기가 된 거죠.”

-그는 초등학교시절 동시 숙제를 베껴 냈다가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있고, 그 부끄러움과 뿌듯함의 야릇한 감흥이 오래 남아 소설을 쓰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낯가림이 심한 그는 등단하던 해 겨울 현대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인연으로 시상식에 초대돼 멋 모르고 나갔다가, 그가 좋아한다는 성석제(당선자) 씨에게 인사도 못하고, 먹고 싶은 떡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다는 얘기를 웃으며 했다.

-그는 여행을 싫어한다고 했다. 귀찮다는 것이다. “이번에 상도 타고 했으니 그 싫어하는 일을 해볼까 해요. 상금으로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여행할 생각입니다. 장소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관계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여행!” 문예지 겨울호에 발표할 단편 2편을 끝낸 뒤 써볼 생각이라는 첫 장편소설, 그 첫 문장을 던져줄 ‘무의식’ 공간으로 떠나겠다는 말일까(*그녀의 첫 장편소설을 기대한다).(최윤필 기자)

▲ 김애란씨는

1980년 인천생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입학

2003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소설부문) 수상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한겨레(06. 01. 01) 김애란씨는 해가 바뀌어 세는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 됐다. 스물일곱이면 확실히 어린 연배는 아니다. 김승옥씨가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무진기행> 같은 소설을 쓸 때 나이가 스물댓 살에 불과했고, <광장> 역시 최인훈씨가 비슷한 연치에 쓴 작품이다. 현대문학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적잖은 작가들이 20대 초에 자신의 대표작을 발표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조숙한 천재들’의 시대도 아니고 미숙한 만큼 온갖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던 현대문학 초창기는 더더욱 아니다. 30, 40대에 등단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마흔 언저리의 작가에게도 언필칭 ‘젊은’이라는 관형어가 얹혀지는 시기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씨는 문단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지난해 한국 문단이 거둔 최대의 수확 중 하나가 소설가 김애란의 등장이라는 데에 토를 다는 이는 많지 않다. 김씨는 물론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했지만, 그의 이름이 문단 안팎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해 11월 하순에 출간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에서부터였다. 표제작을 비롯해 아홉 개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불과 한 달여 만에 판매부수 1만 권을 훌쩍 넘어서면서 연말 문단과 독서계를 달구었다.

 

 

 

 

-책 출간 이후 연말까지 그는 신문과 잡지 인터뷰 10여 차례에 방송 출연도 예닐곱 번을 하는 등 누구보다 바쁘게 세밑을 보냈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한동안은 전화기를 꺼 놓기도 했다. “그리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말을 반복하고 다니는 게 쑥스러웠어요. 작품보다 이미지가 더 많이 소비될까 봐 걱정도 됐구요. 여러분의 관심은 과분하고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감탄하거나 투정할 일은 아니고, 조용히 책상 앞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었죠.”

-첫 소설집을 낼 때만 해도 그의 생각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서 직장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 출간 이후 청탁이 밀려들어오면서 가을까지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감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취업 계획은 당분간 접었어요. 하지만 언젠가 취업은 정말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 제가 건강했으면 해서예요. 소설이란 혼자 쓰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쓰는 거라고 믿거든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유명해져서) 날 받아 줄 직장이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그는 웃었다. 젊은이답게 잘 웃고 감정에 솔직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면모도 뚜렷하다.

-지나간 2005년이 자신에게 어떤 해였는가 묻자 “질문을 많이 받았던 해”라고 재치 있게 받아 넘기더니 이내 진지해진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 잘 알게 된 해였던 것 같아요. 마치 연애할 때처럼요. 왜, 연애할 때면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이 잘 보이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년은 내가 나 자신을 많이 바라본 해였어요. 때론 흥미롭게, 때론 걱정스럽게. 하지만 상황 한가운데 있어 보니까 내가 생각보단 약하지 않구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2006년의 계획은?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요.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구경하고도 싶구요. 정해진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서는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에 타서 모르는 곳으로 가고 하는 식으로요.”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정해진 주제나 구상이 없이 일단 써 가면서 소설을 완성시키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제 작법을 낭만화하거나 신비화시키려는 건 아니고요, 처음부터 무얼 쓸지 알고 시작하는 것보다는 쓰면서 주제를 ‘발견’해 가는 게 더 즐거워요. 물론 다른 방식으로, 가령 취재를 해서 쓰는 경우도 있죠.”

-선입견과는 달리 니체를 비롯한 철학서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이 당돌한 신인은 “독자에게서 ‘마음의 답장’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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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6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2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조정했습니다. 따붙이기를 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기인 2006-07-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첫번째 코멘트 중 '집들 사시에'라는 오타 발견했습니다. 저도 지금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는 중인데, 시적인 문장에 계속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퍼갑니다.

로쟈 2006-07-2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 덤으로 야경 이미지도 하나 더 집어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