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교시에 강의를 위해서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연거푸 타고 출근한다.  시간강사로서 주제넘게 '시간표'를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9시 '문학'수업을 비인간적이라고 내내 툴툴거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1시간 반을 보내게 된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언제나 그렇듯이 조간신문을 읽어나가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키워드는 '커밍아웃'인 모양이다. 19면의 기명칼럼 제목이 '커밍아웃'이고, 같은 면의 두번째 사설에도 '커밍아웃'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물론 둘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망언'에 대한 것인바, "이번에 친일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충격적인 글은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다시 한번 커미아웃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황대권칼럼>); "그런 그의 주장은 한 개인의 갑작스런 돌출 의견일 수 없다. 그는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공유해온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닌 그들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사설>) 종합하면, 이번 한교수의 기고발언은 친일파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커밍아웃'이다.

영한사전에서 coming out은 '데뷔'란 뜻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어쨌든 지난 주말 이후 '한승조'란 이름은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므로  데뷔로서 화려하고 성공적이다. 더구나 그는 반일 민족감정/정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용기있게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고, 끄집어냈다. 나는 그의 발언이 몰고온 물의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자세 자체는 지극히 치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자면,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거의 본능적인 욕망(기득권 보존욕과 일본에 대한 충실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니, 이 얼마나 윤리적인 것인가!

 

 

 

 

정신분석의 윤리란 무엇인가? “Wo es war, soll ich werden; Where it was, I shall come into being.” 즉, 보통은 “이드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생성되어야 합니다.”(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강의>, 열린책들)로 해석되는 이 문구는 보통 '이드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아'로 해석되는데, 라캉/지젝은 뒤집어서 '이드의 자리에서 이드화되는 자아' 쯤으로 해석한다. 이드, 그러니까 '그거' 혹은 '거시기'에의 충실성이 정신분석의 윤리가 되는 것. 이전에 이런 류의 윤리를 십분 발휘했다가 고초를 겪은 이로 마광수 교수를 떠올려볼 수 있다(아마도 그는 원조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 '커밍아웃'의 유사-저작권은 홍석천에게 있지만). '즐거운 사라'에의 충실성을 모토로 하여 그는 뭐라고 공언했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그것이 바로 커밍아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한승조 교수의 발언 또한 그러한 윤리적 사명감에 들려 있는 건 아닐까? 대낮에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혹은 "일본 만세!". 나는 이런 류의 윤리적 행위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우리는 '하나된 한국인'이란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전선은 보다 분명해지고 대오는 보다 정연해질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점잖은 체하면서,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친일파 이상으로 남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말아먹는 쪽들보다는 얼마나 고마운가!(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사꾸라꽃처럼 말이다.)  해서, 한 교수의 망언에 대해 여기저기서 모욕하고 규탄하는 태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려까지는 못하더라도, 좀 참아두어야, 나머지 '친일파'들도 모조리 '커밍아웃'을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이 '두더지'들의 면면을 제대로 다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닌가?  

하여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간신문의 다른 면에서는(물론 어제 TV뉴스에 이미 보도된바 있다) 그가 "적절치 못한 단어와 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힌 걸로 돼 있다. 여론에 떠밀려 슬쩍 꼬리를 내린 셈인데, 한 교수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의 친일 망언이 아니라 이 사과성명에 두어진다. 그런 성명이란, 자신의 윤리(커밍아웃)를 한갓 해프닝 정도를 격하시키는 비윤리적인 행위 아닌가? 안티고네의 고전적인 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요구되었던 '윤리'가 아니었을까? 흔한 말로,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인가?

 

 

 

 

귀국해서 지난 달에 빌려다 본 비디오들 중에는 <바람의 검 - 신선조>와 <라스트 사무라이>도 들어있었는데,  일본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둘 다 사무라이 시대가 마감되는 시기의 '마지막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연민을 느끼면서도(그들은 인문학 시간강사를 좀 닮았다) 그들의 사무라이다운 고집에 눈물을 흘렸다(가령, <바람의 검>에서 주인공이 할복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회한의 말들을 읊조리는 장면 등).

물론 요새 내가 눈물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사무라이의 윤리로서의 고집(충실성)은 숭고한 여운을 님긴다. 그리고 그건 정신분석의 윤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해석에도 그런 게 좀 들어가 있다. 미시마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지만, 그건 '윤리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 충동의 붙들린. 명분이 아무리 시대착오적이더라도. 물론 그런 죽음은 실용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죽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요컨대 한 교수가 진정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감사하고 그 정신에 감화받은바 있다면, 마땅히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고집/의지를 표명할 일이다.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고 수습할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그의 신념이란 것은 사꾸라꽃만도 못한 것이다. 야쿠자는커녕 양아치 수준밖에는 안되는 것. 한국 친일파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인가?(적어도 반세기 이상 이 남한 땅에서 떵떵거리며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의 기개와 윤리가 그 정도라면 창피하고 남세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이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를.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하는 불명예를 감수함으로써 꼬리를 빼지 말고 '명예'교수로서 당당하게 처신하기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교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친일파를 위해서라도(이들도 동족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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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가도 될까요?

종이 2005-03-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교수 건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된 글을 보니 시원합니다.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5-03-0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물론입니다... 종이님/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시아일합운빈현(?)님/환경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집으로 택배 하나가 왔는데, 바로 열린책들에서 보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마지막 권이었습니다. 전집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출판사측에서 이 문제에 성의껏 대응하여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책을 새로 찍고, 교열지까지 만든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차후에 다른 출판사례들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좋은 책만들기의 기본은 저자와 역자의 몫이겠지만, 책'만들기'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중 초고를 교정하는 일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게 평소 제 생각인데, 우리의 출판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맨 뒷면에 저자/역자와 함께 교정자의 이름이 표기된 걸 보곤 하는데, 어느샌가 그런 전통(?)은 없어져 버리고, 교정일이 마치 허드렛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일단 교정일에 대한 품삯이 기대 이하인 까닭에 유능한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어렵고 또 제대로 된 교정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대충 오타나 고치고 마는 것인데(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것도 제대로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좀 무성의하게 나온 책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책이나 저자에 대한, 또 출판사에 대한 경의의 마음이 사그라들게 마련입니다.

 

 

 
 

제가 근래에 읽은 책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라는 대담집이 있습니다. 13개의 대담 중 7-8편을 읽었는데, 우리 시대 지성들의 열기가 느껴지는 좋은 책이지만(그래서 뛰어난 기획이라고 칭찬을 많이 들은 책이지만) 역시나 교정은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를 지적하면,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표기된 것(233쪽, 226쪽에는 <구름과 장미>로 바로 표기돼 있음에도), 소설가 최인호의 약력에서 1945년생이 1954년생으로 표기된 것(115쪽),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표기하면서 '(집)가'자 대신에 '(거리)가'자를 쓴 것(312쪽, 카라마조프 거리의 사람들!) 등.

이런 실수들이 분명 '죽을 죄'는 아니나, 책의 만듦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철학자 박이문 교수의 신간 <이성의 시련> 앞갈피에(저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실린 저자의 약력과 저서에서 <자비의 윤리학>이란 책명이 <비애의 윤리학>이라 표기돼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성의 시련'이자 '비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학 출판사 두 곳과 두 권의 책에 대해서만 예를 들었지만,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된다는 데 문제의 (사소하지 않은!) 심각성이 있습니다. 좋은 책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만듦새에서도 정성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제가 '교정'의 문제를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앞으로 더 많은 좋은 책들이 나왔으면, 그리고 더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거기엔 '감시'의 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보다 좋은, 보다 완벽한 우리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꿈꿔 봅니다...

01.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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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은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적 여정의 첫 번째 이정표이다. 이미 작가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통해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공리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공박하면서, 진정 '살아있는 삶'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죄와 벌>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2×2=4의 수학적 공리의 세계(합리적 이성의 세계)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으로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이때 비범인은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역사상의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은 이와 같은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

가난한 전직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이 비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어로 '(범)죄'의 어원적인 뜻은 '한 발작 넘어섬'인데,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장애를 딛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후에 그는 줄곧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발작 넘어서서 첫 번째 걸음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종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데, 학대받는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던 유년시절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럽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 라스콜니코프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러시아와 유럽의 분열을 함축한다.

사실 주인공의 이름에서 '라스콜'은 러시아어로 분리/분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리/분열이 해소되는 것은, 루터가 '악마의 창녀'라고 부른 이성의 대변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하고 성스런 창녀 소냐의 권유대로 광장에서 대지에 입을 맞추게 됨으로써이다. 하지만,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은 라스콜니코프가 진정한 갱생에 이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나폴레옹 모방이 아닌 그리스도 모방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의 삶,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고통과 수난을 통한 삶의 구원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고투는 이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에 이르는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죄와 벌>의 현재적 의의란 어떤 것일까? 라스콜니코프의 이론과 그 실행을 소비에트 러시아(1917-1991)의 건설과 파산에 견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가 유난히 강조한 바, 결코 변증법으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삶'은, 모두가 합리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정치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요구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우리에게 남겨진 삶은 바로 이 갱생의 삶이다.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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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같은 페테르부르크가 나에게 역겹지 않다고, 거리에서 욕설과 밀고 사이에서 사는 것이 나에게 즐거우리라고 그대는 정말 생각하는가?”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던 푸슈킨은 한편으로 “너, 표트르의 창조물을 나는 사랑하네, 너의 엄격하고 균형잡힌 모습을 나는 사랑하네.”라고 페테르부르크를 예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가 이중인격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이중성이란 것은 표트르의 도시이자 성 베드로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본성(!)이자 페테르부르크 신화의 모순적인 중핵일 따름이다.

 

  



 

2003년이면 이 제정러시아 시절의 수도 페테르부르크가 탄생 300주년을 맞는다. 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그때까지 유럽사의 주류에서 이탈돼 있던 러시아를 서구화․근대화의 길로 이끈, 러시아란 말의 앞다리를 채찍으로 힘차게 들어올린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핀란드만과 네바강 어귀의 늪지에 건설되었다. 즉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의 머리가 잉태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계획도시이며, 늪지에 건설되는 바람에 15만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킨, 무덤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도 하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대공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의 황제께선 도시 전체를 건설하신 다음 그것을 땅위에 내려놓으셨소.”라는 전설이 이에 대한 답변이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는 기적의 도시이자 적그리스도의 도시, 악마의 도시이다. 여기서 페테르부르크는 자연스럽고 가장 러시아적인 도시, 아니 ‘커다란 시골’ 모스크바와 대비되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러시아적인 도시로서의 신화적 의미를 획득한다.

 

 

 

 

페테르부르크의 이러한 신화적 의미장을 재현/변주시키는 일련의 문학작품들을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아예 ‘페테르부르크 텍스트’로 분류한다. 페테르부르크 텍스들에서 이 인공도시는 환상적이고 유령적인 공간이라는 성격을 부여받으며 ‘환영성’과 ‘극장성’을 그 본성으로 거느린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믿을 수 없는 환영들이며 동시에 가식적인 연극들이다. 그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의 머리에 푸슈킨의 <청동기마상>(1833)이 자리한다.

네바강가에 세워진 도시답게 돌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주기적으로 대홍수라는 자연의 재난을 겪게 되는데, 이 작품의 배경은 1824년의 대홍수이다. 가난한 하급관리로서 약혼녀 파라샤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던 예브게니는 대홍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미치광이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헤매다가 표트르 대제의 동상인 청동기마상과 마주치게 되고, 그에게 증오의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곧바로 이 청동기마상에게 쫓기는 환상에 사로잡히며 끝내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작품에는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예찬과 한 ‘사소한’ 인간의 비극적인 죽음이 공존하는데, 그것이 바로 페테르부르크의 이중적인 진실이다. 페테르부르크는 서구화된 문명의 상징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끔찍한 묵시록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고골의 이야기들 역시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넵스키 거리>(1835)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은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중심가인 넵스키 대로이다(우리의 종로쯤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인물, 피스카료프와 피로고프는 넵스키 거리를 걷다가 각기 한 여인씩의 뒤를 쫓는다. 화가인 피스카료프가 쫓아간 미지의 여인은 유곽으로 사라지는데, 그녀가 매춘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피스카료프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편과 환상에 의지하다가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다. 반면에 속물적인 장교인 피로고프는 뒤쫓아간 유부녀와 밀회를 하다가 그 남편에게 들켜 흠씬 두들겨맞는다. 무엇이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페테르부르크의 악마성을 대표하는 넵스키 거리의 환영적인 불빛들이다. 그대, 페테르부르크에 가려는가, 부디 넵스키 거리의 불빛을 믿지 말지어다!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의 정점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 동시에 유럽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그의 작품들은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의 표준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 사전’으로까지 불린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대학생과 하층민들의 병든 일상과 과장되고 병리적인 심리를 치밀하게 해부해냄으로써 이 도시가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19세기의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 가운데 사망률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더불어 여성 인구에 비해 남성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점이 특징적인데, 여성은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해서 이 도시에는 매춘업과 비합법적인 성문화가 성행했다. 때문에 전체 아이들의 1/4이 비합법적인 아이들이었고(1870년대), 성병, 정신병, 폐병, 알콜중독, 자살자 수에 있어서 단연 러시아 1위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866)의 배경 또한 바로 그러한 도시 페테르부르크란 사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공리주의라는 서구 사상에 ‘감염되어’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 하지만 그의 살인에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은 찌는 듯한 더위와 숨막힐 듯한 악취로 넘실대는 한여름의 페테르부르크이다. 그를 뒤쫓는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리코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신선한 공기’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의 새로운 삶은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이 빚어내고 있는 페테르부르크 신화는 20세기초 작가들에게까지 계승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05)이다. 하지만 그러한 페테르부르크가 요즘은 자본주의에 물든 화려한 모스크바와 비교하여 러시아적이고 ‘시골스런’(!) 도시의 인상을 풍기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 이 글을 쓰는 데 참조한 글은 로트만 등이 쓴 <시간과 공간의 기호학>(열린책들)과 이덕형의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책세상)이다. 몇몇 인용문구들은 그 책들에서 얻어온 것이다. 그밖에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에서 이 주제와 관련한 유익한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분량상 이 글에는 참조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형이상학>이라는 단행본 엔솔로지도 나와 있다.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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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20 17:34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둔다. 두 주 전 기사인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내친 김에 오래전에 쓴 글도 찾아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한겨레21(09. 12. 04) 환각의 도시를 떠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
 
 
2006-08-01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 2002)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유태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유작이다. 아렌트는 말년에 <정신의 삶> 3부작으로 <사유>(1권)와 <의지>(2권)에 이어서 3권 <판단>을 집필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1970년 가을에 뉴스쿨에서 행한 강의를 제자인 로널드 베이너가 편집/해설을 맡아서 1982년에 출간한 것인데, 그의 <판단>의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칸트가 체계적인 정치철학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이 과연 '활동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냐, '관조적 삶'에 속하는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지만, 나로선 칸트 정치철학을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재구성해내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의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렌트의 유작을 읽는다는 것은 좀 무리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통해서 판단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감하지 않고서는 이 '강의'에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들이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와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이다. 전자는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한 부분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8쪽)이고, 후자는 아렌트의 사적인 삶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전기이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다룬 책으로 김비환의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한길사, 2001)도 있지만 좀 부담스런 분량이고, 아렌트의 전기로는 영-브륄(Young-Bruehl)의 것이 더 자세하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렌트에 대한 무게있는 연구서로는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가 있다. 아렌트의 저작으로는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과 함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 <폭력의 세기>(이후, 1999)가 번역돼 있다(80년대에 번역된 <공화국의 위기>와 <혁명에 대하여>는 절판됐다). 물론 그녀의 출세작인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과거와 미래 사이>(1961), <정신의 삶>(1971) 등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viva activa)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나누는데 거기서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 흔히 번역돼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이란 말은 '정치적 동물'이란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 말을 사회적 동물(animal sosalis)로 처음 번역한 이는 세네카이다. 그리고 이어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즉 사회적이다"라고 말한다.(<인간의 조건>, 74쪽) 하지만, '정치적=사회적'이란 동일시가 오역만은 아닌데,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중세 봉건 사회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중세에는 영지 내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구조와 직결돼 있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와 같은 사적인 것(사적 영역=경제적 생산관계)과 공적인 것(공적 영역=정치관계)의 구별이 중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렌트의 의도는 중세 이후로 사장된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중요한 행위능력인 정치적 행위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정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임(being animal)으로부터 구제되어 비로소 인간임(being human)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이란 말은 인간적이란 말과 동일시돼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경우, "저 인간은 정치적이야"란 말이 "저 인간은 참 인간적이야"란 말과 동일한 함축적 의미를 갖는가? 우리의 '정치인'이란 말은 과연 '(동물이 아닌)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란 뜻을 갖는가?(혹 우리는 정치인들은 소 닭 보듯 하지는 않는가?) 이렇듯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은 그만큼 우리가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being together)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권력이나 지배-예속 따위를 정치의 기본개념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은 모두 함께-삶(living together)이라는 원리/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부수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정치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정치는 결코 수단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기에 정치적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정치의 영역을 계속 보존하고 영속화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아렌트는 정치적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정치'철학'에 비판적이다). 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진리란 본성상 단수의 영역이며 따라서 대화나 타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acting together)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닮았다. "판단, 특히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강의>, 132쪽) 예컨대, 미군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인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복수적 인간이 갖는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이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전적으로 사적이고 소통불가능하게 보이는 나를-즐겁게-또는-불쾌하게-한다는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 감각에 뿌리내리고 있다."(<강의>, 139쪽)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는 일이다.(그리하여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이거나 여기저기서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와 경제가 확실히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정치의 전제로서 객관적 가난의 해결을 중요시했다. 진정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치는 '사회문제'로, 즉 궁핍한 사람들의 생존과 생계의 문제로 환원되며, 이것은 아렌트가 볼 때, 공적 자유라는 원래의 이상을 개인적 행복의 이상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는다(Z. 바우만, <자유>, 이후, 2002, 171쪽). 우리의 경우 4.19라는 자유의 공간, 정치의 공간이 왜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최인훈의 어법을 빌면, 5.16군사 쿠데타 이후 우리는 민생문제 해결이란 명분으로 정치의 광장을 상실하고 오직 비대해진 밀실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현대 정치사의 주류적 행태는 '둥근 사각형'이란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밀실정치'였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러한 객관적 가난 못지 않게 주관적 가난, 즉 상대적 박탈감인 듯싶다. 이 박탈감은 결코 소외계층만의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영역으로서의 밀실이 공적 영역으로서의 광장을 대신할 수 없으며, 원래 사적(private)이란 말 자체가 공적 영역이 '박탈된'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사적인 생활만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인간의 조건>, 112쪽) 따라서 아무리 100평이 넘는 아파트에 바닥엔 대리석을 깔고 살아도, 풀장과 골프장까지 갖추고 살아도 그러한 사적인 삶은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먼 박탈된 삶이고 결여된 삶이다. 그래서 현대 소비사회에서 정치의 적은 주관적 빈곤감과 이에 따른 공적 자유에 대한 관심의 쇠퇴(<자유>, 171쪽)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정당하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02.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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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eis 2004-05-1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갑니다. 건강하세요.

미귀 2005-02-1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과쟈쥬세요v 2005-07-1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