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경향신문의 '뉴 파워라이터' 연재는 철학자 진태원 교수(알라딘 발마스님)와의 인터뷰다. 예전에 진 교수가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4360795). 그 뒷얘기도 질문에 포함돼 있기에 옮겨놓는다. '더 비관적'이란 견해가 눈길을 끄는데, 사실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진 않다. 예비 철학도들에게는 유감스럽겠지만, 자신이 어떤 길 위에 놓여 있는지는 알고 들어서는 게 좋겠다.   

진 교수는 2010년 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라는 공개 편지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K군에게 서울대 학부 출신이 아니거나 영미권 유명 대학원에 진학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인문학, 특히 철학은 하지 말기 바란다며 다른 길로 가라고 조언했다.

 

- 지금도 같은 조언을 하겠는가.

 

“더 비관적이다. 한국 대학원에 가는 것은 외국 대학원에 가기 위해 외국어 배우는 과정에 불과하다. 석사과정만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깊이 연구하고 서로 경쟁하는 학풍, 학파가 생길 수 없다. 서양에서 공부한 분들은 미국, 독일, 프랑스가 내 나라인 것처럼 착각한다. 독일 철학은 그 나라의 역사 흐름, 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나라 현실 문제를 신음하다 나왔다. 그것을 ‘나의 철학’, ‘우리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또는 삶 문제에 무관심하게 된다. 학문 공론장이 없다는 게 문제다. 문제를 사고하고 실천적 해법을 제안하는 일이 힘들다. 대학 교수도 기업 직원 같은 처지가 됐다.”

 

 

진 교수는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논문을 더 보완해 책으로 내야 한다. 2007년에 출판사와 계약했는데 아직 못 썼다(웃음). 스피노자, 데리다 연구나 번역을 더 하고 싶다. 발리바르 책도 3권을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진 교수가 옮긴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절판된 지 오래 됐다.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14.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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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내과에 갔다가 대기 시간에 핸드폰으로 뉴스기사들을 읽었는데, 오늘의 '특종'은 한국일보 기사다. '농협, 이명박 상금 세탁' 충격적 내막'(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401/h2014011107321521000.htm). 기사가 사라지기 전에 일부를 옮겨놓는다(추정만 하던 일의 실상이 밝혀진 데 의의가 있는데, 법의 심판까지 가려면 아직도 긴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기사가 어느새 사라졌다).

 

기사 이미지

농협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상금세탁'을 도운 정황이 드러났다. 농협은 이 전 대통령이 해외에서 수상한 상금의 수표가 채 입금도 되기 전 이를 매입해 이 전 대통령 계좌로 송금했다. 해외에서 받은 금품을 신고해야 하는 공직자법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분석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전산기록이 돌연 종적을 감첬다는 점이다. 금융기관은 전산 자료를 10년 동안 멸실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불법이다. 결국 대통령을 위해 편법과 불법을 동원한 셈이다. 윗선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농협 안팎의 공통된 견해다.

그리고 주요 기사내용.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해외 원전수주 과정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정부로부터 '자이드 환경상' 상금 50만달러(한화 약 5억5,000만원)를 받았다. 녹색성장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신성장 동력을 육성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후 아랍에미리트연합이 지불해야 할 186억원 중 절반 이상인 100억달러를 국내 수출입은행이 28년간 대출해주는 내용의 이면 계약이 드러났다.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이 상대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대가로 수상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당시 정부는 이 상금에 대해 이 전 대통령이 환경 분야 등에 기부하거나 쓸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언론은 이를 그대로 지면에 옮겼다. 국민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돈은 전액 이 전 대통령 개인 통장으로 입금됐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2012년도 고위공직자 정기 재산변동 사항'을 공개하면서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의 재산은 2011년 54억9,659만원에서 2012년 57억9,966만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예금 증가분이 컸다. 예금이 1억2,022만원에서 6억5,341만원으로 5억원 이상 급증했다. 예금 급증 원인은 자이드 환경상 상금 수령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개인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에 상금 역시 이 대통령 개인에게 지급된다고 허둥지둥 해명했다.

 

당시 '상금세탁'을 도운 게 바로 농협이다. <주간한국>이 입수한 내부문건에 따르면 농협 청와대지점은 2011년 3월23일 외화수표 추심전 매입승인을 요청했다. 매입 품목은 아랍에미리트 은행 'Emirates NBD'에서 발행한 50만달러 수표, 매입신청인은 이 전 대통령이었다. 이를 통해 농협 청와대지점은 아직 입금되지도 않은 수표를 매입하는 조건으로 이 전 대통령 계좌에 5억원 이상의 현금을 송금했다. 복수의 농협 내부직원들은 외화수표 추심 전 매입은 농협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농협 내부문건 중 '2011년 승인신청 접수 총괄대장'을 보면 2011년 3월23일까지 접수된 외화수표매입건은 이 전 대통령의 50만달러가 유일하다. 공직자는 해외에서 일정 이상의 금품을 받을 경우 이를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한 행보로 분석된다. 문제는 이후 해당 전산기록이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시기는 2011년 4월11일 전산사태를 전후해서다. 전산사태 당시에도 여신관리시스템은 정상작동했다. 그러나 돌연 시스템이 먹통이 된 뒤 이 전 대통령의 기록이 삭제됐다. 농협 여신관리부의 한 직원은 "이 전 대통령의 외화수표 추심전 매입 전산기록이 '청와대지점 여신관리시스템 장애 복구 중'이라는 메시지가 뜬 직후 삭제됐다"며 "이 기록만이 유일하게 사라졌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삭제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금융거래법과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은 전산 자료를 10년 동안 멸실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전산기록에 문제가 있다면 취소 혹은 정정은 가능하다. 그래도 여전히 기록은 남는다. 기록 자체를 삭제에는 농협 내 IT인력이 동원돼야 한다는 전언이다. 따라서 농협 안팎에선 수표 매입과 전산기록 삭제가 '윗선'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고 있다. 특히 농협 내부에선 이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고위층 인사의 개입을 의심하는 시선이 많다. 한 농협 내부 직원은 "청와대의 청탁이 있었는지 농협의 자진 과잉충성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이 전 대통령 수표 추심 전 매입건에 대해 알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선 최 고위층이 관련됐을 것이라는 말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이명박과 그의 무리가 벌인 일이 신화는커녕 '대국민사기극'이었다는 게 물증을 통해서 들춰진 데 의의가 있다. <이명박 리포트>를 넘어서 <이명박 백서>가 나오길 기대한다...

 

14. 01. 11.

 

P.S. 이명박과 농협이 벌인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나꼼수의 '추정'이 있었다. '나는 꼼수다 11회' 농협사태의 비밀(http://www.youtube.com/watch?v=wPAHB_HFWFk)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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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이번 주는 국외 거물급 비평가, 철학자들로만 골랐다. 프레드릭 제임슨, 노엄 촘스키, 피터 싱어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 이름들이다.

 

 

먼저 제임슨. '세계 지성 16인과의 대화'를 담은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창비, 2014)과 함께 <맑스주의와 형식>(창비, 2014)이 출간됐다. <맑스주의와 형식>은 <변증법적 문학이론>(창비, 1984)의 원제이자 개정판이다(30년만에 나왔다!).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의 소개는 이렇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있는 문학·문화비평가의 한 사람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1982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적 지식인 16인과 진행한 10개의 인터뷰를 시기순으로 엮은 책으로, 20세기의 온갖 문화적 산물에 대한 제임슨의 왕성한 탐구와 ‘문화적 맑스주의자’로서 그가 열정적으로 수행해온 지적 작업의 면모를 생생하게 확인해볼 수 있다.

제임슨 '가장 영향력있는 문학·문화비평가'로 호명되던 시절은 짐작컨대, 1990년대가 아니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쏟아지던 때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고 비판하면서 소위 '문화적 맑스주의' 입장을 대표했었다. 아쉽게 생각하는 건 당시 그의 대표작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1992)가 번역되지 않은 점. 지금 생각해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창비의 책임 방기인가?), 그 때문에 지금까지 다수의 책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느낌을 갖게 된다.  

 

 

더불어 미스터리한 건 초기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1982)이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 이 또한 예고된 지 10년이 넘은 듯싶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간 소식을 접할 수 없는 희한한 책이다. 결과적으론 이 두 권이 빠진 모양새라 제임슨 수용은 앞니 두 개 빠진 형국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제임슨의 단독 저작으론 철학책 <후기 마르크스주의>(한길사, 2000)와 영화책 <보이는 것의 날인>(한나래, 2003)과 <지정학적 미학>(현대미학사, 2007) 등이 더 나와 있다. 제임슨의 악명 높은 문체 탓에 정말로 읽기 어려운 책들이다(내가 읽은 이론가들 가운데 최악이 제임슨이다). 이번에 나온 <맑스주의와 형식>을 원서와 함께 다시 읽어보고 싶다. 제임슨이야 별로 달라진 게 없겠지만, 나의 독해력이 십수 년 전보다 좀 나아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촘스키. 이름은 '노엄' '노암' '놈' 등 제각각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래서 그냥 촘스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세계>(시대의창, 2014)가 신간으로 나왔는데, 원저는 2010년에 나온 <미래 만들기>다. 촘스키 '근황'을 말해주는 책. '만화로 읽는 21세기 인문학 교과서'를 표방한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김영사on, 2013)도 최근에 나왔는데, 고등학생이나 예비대학생이 읽기에 적당한 입문서로 보인다.

 

 

 

촘스키 책을 언급하는 김에 잔소리를 붙이자면, 국내 출간된 촘스키의 거의 모든 책이 제목에 '촘스키'를 달고 있고, 표지에도 더 크게 박혀 있다. 제목이 그냥 다 '촘스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정도면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란 제목과는 반대로 '묻지마 촘스키'라고 해야 할까. 어떤 주제의 책이고, 전작들과는 어떤 연관성 속에 놓이는지 등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촘스키에게 물어봐'식밖에 되지 않는다. '닥치고 촘스키' 독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독자는 내용을 가늠하기 어려워 좀 불만스럽다. 

 

 

 

끝으로, 피터 싱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시대의창, 2014)가 재번역돼 나왔다. 마치 <실천윤리학>(연암서가, 2013; 철학과현실사, 1991)이 작년에 재번역돼 나온 것처럼.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니 이 또한 20년 된 책이다. 어떤 책인가.

 

전 세계에 동물 해방 운동의 불꽃을 지핀 피터 싱어의 책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피터 싱어는 철학과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만 논의가 한정된 듯한 ‘윤리’의 문제를 구체적인 삶의 실천 영역으로 끌어당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생각을 ‘대자보’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피터 싱어는 서두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궁극적 질문’을 던질 것을 요구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은 어떤 삶일까?” 이것이 바로 궁극적 질문이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각자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개개인이 자주 잊고 지내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리적 삶의 가능성’을 돌아보게 하는 화두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 ‘좋은 삶’이 현실에서 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식적인 증명이다.

곧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를 '안녕들 하십니까?'란 질문과 겹쳐서 읽어도 좋겠다는 것. 주로 개인윤리 차원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싱어가 한국의 현실을 좀 안다면 이런 제목의 책도 쓰게 되지 않을까. '정부가 이렇게 막 나가도 괜찮은가'. 또다른 갑오년도 근심과 함께 시작하게 돼 유감스럽다...

 

14. 01. 11.

 

 

 

P.S. 촘스키 얘기가 나온 김에 절판된 책에 대한 아쉬움도 적는다. <언어지식>(아르케, 2000) 얘기인데, <언어에 대한 지식>(민음사, 1983)의 개정판이었다. 나는 후자를 갖고 있어서 구해놓지 않았는데, 어느새 절판된 지 오래됐다. '언어학자' 촘스키의 기본 생각을 알려주는 책(초기 저작인 <데카르트 언어학>이란 책도 같은 부류인데,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전문서를 제외한다면, 현재로선 <촘스키, 사상의 향연>(시대의창, 2007) 같은 앤솔로지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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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의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 출간을 계기로 번역자 공진호 선생과 번역과 번역비평을 주제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다. 대담의 기획자이자 사회자였던 김신식 편집자가 정리한 글이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라왔는데, 그중 일부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40110130653 참조). 공진호 선생은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2013) 등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14. 01. 10) 오역 '지적질'로 그칠 것인가? 더 좋은 독서를 원한다!

 

(...)

 

읽기, 번역 비평의 출발점

김신식 : 번역 비평을 하려면 일단 책을 읽는 게 순서겠죠. "이 책 번역 참 좋네" 혹은 "덕지덕지 붙은 번역투 참 거슬리네" 하는 반응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성실한 사람들은 원서도 장바구니에 담고 책이 도착하면 비교해가면서 읽어봅니다. 곧 인상을 찌푸리거나 '오~' 하는 반응도 보이겠죠. 두 분이 번역서를 '따져 읽기' 시작했던 때와 그 경험을 밝혀주신다면.

 

이현우 : 저의 경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면서 공부하는 방식의 특성상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해서 읽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인문 번역서들을 주로 읽다가 번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요. 대학원 시절에 움베르토 에코나 폴 리쾨르를 영어본으로 읽고 번역하는 스터디 모임을 꾸린 적이 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상당히 안 좋은 경우가 있었어요. 오역이 눈에 띄면 아무래도 더 주의 깊게 읽게 되니까 결과적으론 번역서 '독해력'을 많이 키우게 됐지요.

 

공진호 : 저는 사실 미국에서 살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원서와 번역서 간 비교 독서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다만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번역을 하기 시작하고 한국에 와서 번역서를 접했을 때 많은 오역이 눈에 띄더군요. 대개는 제가 잘 아는 작품의 첫 단락에서 제가 아는 것과 다른 내용을 발견할 때가 많았어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열면 첫 문장에 "the clocks were striking 13."이 나옵니다. 시중에 나온 번역을 보면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혹은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웰은 첫 문장부터 자기 소설 속의 세계가 정상적인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13시"라고 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군대에서나 철도 시간표 같은 경우 24시 시스템으로 시간을 말하잖아요. 시계들의 종소리가 13번 울리고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을 13번 치는 시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일제히 여기저기서 시계들이 그 종소리를 울리는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문구나 실수라면 기억을 못해서 알아채지 못할 텐데, 작중 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구절이라 기억하는 것이죠. 그런 게 의외로 많더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현우 선생님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소개된 관련 포스트를 접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론 문학 작품 번역에 문제점이 많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김신식 : 공진호 선생님이 '로쟈의 저공비행' 이야기를 잠깐 해주셨지만, 이현우 선생님은 예전부터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꾸준하게 번역 비평을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또 번역학 관련해 학계 일도 맡으시면서 학술적인 참여도 하셨구요. 일반 독자와 학계 사이를 오가면서 번역 비평이 어떤 모습으로 정리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셨을 듯합니다.

 

이현우 : 마땅한 번역 비평의 모델이란 게 아직 정립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번역 비평에 관한 연구논문을 찾아보시면, 비평의 모델을 고민하는 결과물들이 있습니다. 연구자 스스로 논문 안에 번역 비평을 실천해 적합한 형식과 내용을 제시하는 형태가 많죠. 꼭 학계 사람이 아니더라도 블로그 등 일반 독자가 '뜨겁게' 참여하는 번역 비평 공간도 종종 발견됩니다.

 

김신식 : 번역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까.

 

이현우 : 어느 정도 지식은 필요하겠죠. 특히 독해력. 그런데 번역 비평이라고 해서 소수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독자라면 누구나 관여할 수 있는 서평보다는 문턱이 높을 테지만, 어떤 번역이 좋다, 나쁘다 정도를 식별하고 판별할 수 있다면 자기 몫의 번역 비평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더불어 '번역을 하는 사람'과 '번역을 비평하는 사람'이 꼭 분리돼 있는 것도 아니고, 대립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사실 현장 번역가들이 가장 훌륭한 번역 비평가가 될 수도 있지요. 가령 영화 쪽에도 영화감독과 영화비평가를 겸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서로에 대한 조언과 건강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신식 : 현장에 계신 공진호 선생님은 번역 비평을 유익하게 받아들이시나요?

 

공진호 : 공개적으로 어떤 비평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번역이론을 공부함으로써 제 자신의 번역과 거리를 두는 경우는 있습니다. 거기에는 '번역밥'을 먹고사는 입장에서 유익한 점이 분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에 대한 교정 수단으로 삼고 있지요.

 

번역 비평은 '헐뜯음'이 아니다

이현우 : 번역 비평이라 하면 혹자는 꼭 '번역 비판' 심지어 '번역 비난'으로만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는 않지요. 찬사와 경탄도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번역 비평을 오역 시비로만 여기고, 좋은 번역의 가치를 알리고 번역가 노력과 성취를 평가해주려는 비평은 마치 주례사 비평인 양 치부한다면 아쉬운 노릇이죠.

 

상식적인 말이지만, 비평이 옳다/그르다 식의 재단만 일삼는 건 아니죠. 물론 아직은 번역 비평이라고 하면 오역 비판이 주종이 되곤 합니다. 원론적으로 번역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고 그런 만큼 또 이견을 허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좋은 번역 vs 나쁜 번역'이라는 구도보다는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의 구도로 가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바람직하죠. 우리 번역문화도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겠어요.

 

김신식 : 본디 비평이란 요물의 타고난 업보인지 모르겠으나, 날 선 비평문 자체는 읽는 사람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때론 당사자에게 엄청난 서운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 서운함이 간혹 오해를 낳으면 물리적이거나 법적인 충돌로 일어나기도 하죠. 이현우 선생님은 몇 년 전 한 인문서의 오역을 짚다가 번역가 당사자에게 고소를 당하신 적도 있습니다. 번역 비평을 둘러싼 사람들의 정서라고 할까요. 그런 걸 한번 생각해본 기회도 되셨을 법한데요.

 
이현우 : 번역 비평을 둘러싼 호오(好惡)가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를 꺼냈지만 번역 비평은 아직 '오역 지적질'로만 생각되는 듯해요.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번역자나 번역 비평자의 입장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가령 이런 거죠. 번역자 입장에서는 일부 오역에 대한 비판이 작은 잘못은 크게 부풀린다는 인상을 받을 거예요. 1퍼센트의 흠이 99퍼센트의 노력을 가려버린다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일 테니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죠. 물론 그렇더라도 자신이 잘못 옮긴 부분이 있다면 흔쾌히 수용하고 정정하는 게 더 성숙한 태도이긴 합니다. 번역에 대한 신뢰감도 심어줄 수 있고요.

 

한편으론 독자 입장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리콜'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지만, 책은 좀 특수합니다. 쇄를 다시 찍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상식 이하의 번역서라면 반품하면 될 테지만(그런 반품이 사실 가능하진 않지요. 내용상의 파본이라고 해서 교환해주진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오류의 문제라면 저로선 독자들끼리라도 교정해서 읽자는 생각입니다. 만약 1퍼센트의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걸 고쳐서 읽자는 겁니다. 오역 문제를 시비 거리로만 끝낼 게 아니라, 더 나온 번역문화, 독서문화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드는 게 생산적이죠. 출판사나 역자는 한 번 더 확인해보는 계기가 될 터이고, 독자로선 번역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면서 읽게 되겠죠.

 

공진호 : 번역 오류가 지적되어도 잘 팔리는 책은 여전히 잘 팔리더라고요. (웃음)

 

이현우 : 제가 들으니 인문서의 경우 구매 독자의 5퍼센트 가량이 완독한다고 해요. 구매 독자와 실제 독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거죠. 그 5퍼센트 독자 중에도 책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가면서 읽는 독자는 극소수일 성싶어요. 번역 비판이나 비평은 그런 제한된 독자들만의 관심사처럼도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좋은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요건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죠. 인문출판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인 상황에서 좋은 번역서,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나오게끔 해줄 수 있는 분위기나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죠. 이를 위해서라도 '좋은 번역을 위한 감시' 같은 번역 비평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신식 : 번역 비평이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많겠지만 그래도 '오역'을 지적하고 더 적합한 번역을 찾아보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배제할 순 없을 듯합니다. 번역 비평은 원문과 번역문이라는 두 텍스트가 있는 상황에서 '오류' '잘못됨'이라는 부분을 드러낼 수밖엔 없을 듯한데요.

 

 

 

공진호 : 오류와 오역은 좀 더 달리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대하는 반응도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원작보다 나은 번역을 했다고 말한 두 문학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레고리 라밧사와 이디스 그로스먼. 둘 다 당대 최고의 남미 문학 번역가로 불립니다.

 

 

그로스먼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영어로 옮길 때였어요. 번역을 하고 나서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실수에 애착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세르반테스는 경제적으로 늘 쪼들리고 이 때문에 혹사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판본에 오류들이 눈에 띄었나 봐요. 어떤 번역가는 역사상 가장 부주의하게 쓰인 걸작으로 <돈키호테>를 꼽기도 했습니다. 허나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부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주목하고 원본에 다가가기 위한 친근한 정서로 해석했죠. 이처럼 오류 혹은 오역도 때론 작품의 일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현우 : 원작의 오류를 어떻게 교정해서 옮길 것인가, 그대로 옮길 것인가, 하는 것도 흥미로운 문제지요. 공진호 선생의 말처럼 문학 작품상에서 오류와 오역은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문서 번역, 특히 이론서 번역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론서 번역은 쉽게 말하자면 진위 여부를 따져야 하니까요. 마땅한 사례는 아니지만, 가령 슬라보예 지젝을 읽다보면 헤겔 철학이나 라캉 정신분석학의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직 합의가 돼 있지 않은 용어들이 많습니다. 같은 개념을 번역서마다, 번역자마다 달리 옮기게 되면 일반 독자로선 좀 당혹스럽게 되죠.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단어도 영어로는 쾌락(pleasure)과 구분해서 'enjoyment'라고 옮기는데, 우리말로는 '주이상스' '향유' '향락' '희열' 등으로 다양하게 옮겨지고 있어요.

 
스피노자나 칸트, 들뢰즈의 철학 개념들도 마찬가지로 번역어상으로는 아주 복잡합니다. 교통정리가 필요할 정도에요. 그렇게 되면 사실 소통에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문학적 표현의 번역에서는 유연함이 발휘될 수 있지만 인문서 번역에서는 개념을 어느 정도 고정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제각각이라면 독서에 부담이 됩니다. 번역자들도 이런 점은 좀 감안해주었으면 싶어요.

 

(...)

 

14.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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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고전 가운데 하나가 번역돼 나왔다.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의 <실재의 사회적 구성>(문학과지성사, 2014). 26년 전에 들은 사회학 개론 시간에 책 이름을 처음 접한 듯싶으니까(피터 버거란 이름도 그때 알았지만) 정말 오래 되긴 했다. 원서는 1966년에 나왔다('실재' reality'의 번역이다). 부제는 '지식사회학 논고'.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피터 버거와 현상학을 통해 사회학을 재정립하고자 했던 토마스 루크만이 지식사회학을 재정립하고 나아가 사회학을 보는 시각을 뒤바꿀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상학적 접근법을 기반으로 기존의 사상, 이데올로기, 세계관을 대상으로 삼던 지식사회학을 혁신하고, 일상생활의 지식에 기대어 사회와 인간 정체성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1966년 그 결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20세기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회학 고전이자, 18개국에 번역되어 가장 많이 읽힌 사회학 서적 중 하나로 꼽힌다.

 

피터 버거의 책으론 <사회학에의 초대>(문예출판사, 1995)와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책세상, 2012)와 함께 사회학 입문 3종 세트로 묶음직하다. 예비사회과학도들이 입학을 앞두고 읽어볼 만하겠다(좀 어려우려나?) 원서는 펭귄판으로도 나와 있다.

 

 

한편 토마스 루크만의 또다른 주저는 알프레드 슈츠와 공저한 <생활세계의 구조>다. 제목에서부터 후설 현상학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주는데, 슈츠는 현상학적 사회학 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다. <사회세계의 현상학> 같은 주자가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회학이론서에서 자주 접하던 이름이다.

 

이번주 신간 중에는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국가 간의 정치>)나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저자로서의 인류학자>) 등의 책도 보인다. 내주에 다룰 '이주의 고전' 후보들이다...

 

14.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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