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공지다. 이번 7월에 4주간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12시한우리 독서토론논술 광명지부(한우리독서 작은도서관)에서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다. 유료 강의이며 관심이 있는 분들은 누구든 참여하실 수 있다(문의는 02-897-1235/ 010-8926-5607). 교재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이며,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가 참고도서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 7월 02일_ 가장 위험한 철학자

 

2. 7월 09일_ 9.11과 실재의 사막

 

3. 7월 16일_ 호모 사케르와 생명정치

 

4. 7월 23일_ 네 이웃을 사랑하라

 

 

15.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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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월간 '오늘의 도서관'(234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디지털 시대의 책 추천, 서평쓰기'라는 특집의 한 꼭지다. 아무래도 서평에 관한 글이어서 <글쓰기의 힘>(북바이북, 2014)에 실린 '서평 쓰기는 품앗이다'와 내용이 일부 중복된다. 그밖에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메디치미디어, 2015)에 실린 인터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서평 쓰기 가이드북으로는 김민영, 황선애의 <서평 글쓰기 특강>(북바이북, 2015)이 있다.

 

 

오늘의 도서관(15년 7-8월호) 독자를 위한 서평, 독자에 의한 서평

 

비평과 서평, 그 간격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좋은 서평’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그러자면 먼저 서평이란 무엇인가부터 정의해야 할 듯싶다. 서평은 책에 대한 품평을 이르는 말로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하지만, 용도에 있어서 비평과는 구분된다. 비평이 독자들이 같은 책을 두 번 읽게끔,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라면, 서평은 어떤 책을 한번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 재독의 권유라면, 서평은 일독의 제안이다. 비평과 서평은 상대하는 독자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비평은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를 상대한다. 반면에 서평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라면 비평은 서평으로 읽히고, 한번 읽은 독자에게 서평은 비평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독자에 의해서 비평과 서평이 나뉜다면,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하면서도 오늘날 비평의 점차적인 위상 하락과 대비되어 서평의 역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비평을 떠받쳐야 할 독자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점점 줄고 있다면 비평이 상대할 독자가 엷어지는 것이니 그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서평의 부상은 비평의 쇠퇴의 이면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 하더라도 해마다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의 숫자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현재의 독서 현실이다. 점점 많은 책들에 대해 우리는 ‘읽지 않은 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의 독서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할 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대한 가려서 읽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늠해두는 게 최선일 것이다. 서평은 바로 그러한 필요에 대응한다.

 

좋은 서평의 기준을 이야기하다
서평의 기능은 이러한 필요에서 도출된다. 어떤 책을 읽고 싶도록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서평의 기준은 이러한 기능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즉 어떤 책을 읽고 싶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하는 데 기량을 발휘하는 글이 좋은 서평이다. 또 어떤 책을 안 읽어도 읽은 척할 수 있을 만큼 핵심을 잘 짚어준다면 이 역시 좋은 서평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먼저 ‘이건 읽어보고 싶다’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라는 판단이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 서평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서평의 가치는 독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독자가 처분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평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서비스(봉사) 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철저한 독자 지향성이 서평의 핵심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말해, 서평의 효과를 유발하는 한 서평은 어떤 종류이건 무방하다. 어떻게 써도 좋다는 말이다. 단 한두 문장의 언급으로도 좋은 서평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거나 그 반대로 독서의 필요로 제거해준다면(수준 미달의 책까지 우리가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으므로) 서평으로서는 충분하다.


어떻게 써도 무방하다면, 서평 쓰기의 노하우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독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주관적 서평이건, 객관적 서평이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읽은 척하게 해주는 용도라면 몇 가지 요건은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서평자가 책을 제대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평은 책에서 자신이 읽고 소화한 것을 글로 적는 것이니 일차적으로는 독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읽고 소화한 만큼 쓸 수 있으며, 서평의 몫은 그것을 다른 독자에게 요령껏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이 어떤 주제의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있으며 주요한 메시지는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또 무엇인가를 짚어주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서평이 그러한 요건들을 꼼꼼하게 다 갖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책의 성격이나 필요, 그리고 서평의 분량 등을 고려하여 적당하게 조절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 서평의 다양화와 다변화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이고, 책의 형태가 변화하는 만큼 독서의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화된 책, 곧 전자책을 단말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읽는 독자도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 달라진 독서 풍경일 텐데, 서평 역시 지면에 실리는 ‘오프라인 서평’의 형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인터넷 서평은 일반화되어 있으며, SNS를 통한 독서정보의 공유도 서평과 그 역할이 겹친다. 그뿐 아니다. 글이 아닌 말로 이루어진 서평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방송이나 팟캐스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책 소개도 서평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서평이 다양화, 다변화되고 있다.


하지만 형식은 다양화될지언정 서평의 핵심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 싶다.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거나 책에 대한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서를 가장하게 해주는 게 그 역할이라면 말이다. 다만 서평의 구성이나 주안점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글로 된 서평이 어느 정도 체계와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에 비하면 SNS나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서평은 그러한 요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구성방식에서도 선조적(순차적)이지 않고 병렬적인 방식이 채택될 수 있다. 책의 인용에 있어서도 훨씬 넓은 허용범위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운 방식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책이 놓여 있는 맥락이다. 책이 놓여 있는 자리, 혹은 책들 둘러싼 맥락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저자에게서 그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작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다음 시대. 책이 발표된 시점이 오래전이라면, 그 시점에서 가졌던 의의와 현재적 의의를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겠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책들과의 연관성 속에 자리매김함으로써 책이 갖는 시의성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제. 전무후무한 책은 세상에 많지 않다. 대부분은 앞뒤의 책들과 연결돼 있으며 주제에 따라 계보를 형성한다.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읽었다면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두세 권 더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일 수 있지만 좋은 서평은 서평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서평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 과도하게 흥분할 필요가 없으며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도 좋지 않다. 멋진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이 바람직하며 화려한 수사에 대한 고민도 자제하는 게 낫다. 예술적인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읽을 만한 책을 감별하고 권장하는 게 서평의 주된 역할이라면 그것은 한두 사람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자라면 모두의 일이고 모두가 나서서 자기 몫을 거들어야 하는 일이다. 서평은 자발적인 품앗이에 가깝다.


서평쓰기에 대한 부담은 줄이는 대신에 더 자주 서평을 쓰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비평과 달리 서평은 그 질 못지 않게 양이 중요하다. 한편의 공들인 서평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공을 나누어 여러 편의 서평을 작성하는 일이 더 권장할 만하다. 간혹 불멸의 가치를 갖는 일들이 있다지만 서평은 예외이며 ‘불멸의 서평’이란 말은 모순이다. 우리에겐 늘 읽어야 할 또 다른 책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서평은 독자로서 우리가 책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생존투쟁이다.

 

15.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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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수용소문학의 거장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을유문화사, 2015)가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방대한 분량의 시리즈인지라 완역은 어려운 작품인데, 여하튼 그 가운데 한권이라도 번역되었기에 반갑다. 언젠가는 번역돼 나오겠거니 했지만 예상을 조금 앞질렀다.

 

일찍이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도스토옙스키다"라는 찬사를 받은 바를람 샬라모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17년 동안 콜리마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고 석방된 뒤에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1954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비교적 짧은 단편들로 이뤄져 있으며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주제가 신랄하고, 밝고 생생한 언어로 쓰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처럼 수용소를 배경으로 다룬 수용소 문학이면서도 내용과 형식면에서 이들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콜리마라는 수용소가 만든 지옥을 기록한 단순한 회상이나 회고록을 넘어서서 새로운 산문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내친 김에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도 완역판이 다시 나왔으면 싶지만, 기대해도 될지는 의문이다. 언제 러시아의 강제 수용소와 나치의 절멸수용소를 다룬 작품들만 모아서 비교해가며 읽어봐도 좋겠다 싶다(강의에서 다뤄볼 만한 아이템이다). 샬라모프에 대해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격찬도 참고해보시길.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천재적인 작가다! 그가 이 소설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읽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나서 온갖 참혹한 일을 겪고도 어디서 그런 순수한 감정이 나오는지 놀란다. 샬라모프는 여러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타협할 줄 모르는 진실ㅡ유일한 무기ㅡ로 지옥에 빠진 사람을 동정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인다.

15. 0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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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주제로 한 책은 드물지 않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계속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쏟아지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좋은 죽음>, <일본인의 생사관> 같은 책이 청년사에서 한꺼번에 나왔고,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의 '타나토스 시리즈'도 아홉 권이 채워졌다.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저명한 의학 저술가인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 2015)도 이 주제에 관한 신간.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해줄 만한 책이다. 이들 가운데 다섯 권을 관심도서로 묶어놓는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16,500원 → 14,850원(10%할인) / 마일리지 820원(5% 적립)
2015년 06월 23일에 저장
구판절판
좋은 죽음
다테이와 신야 지음, 배관문.정효운 옮김 / 청년사 / 2015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5년 06월 23일에 저장
품절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세계 종교는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는가
케네스 폴 크레이머 지음, 양정연 옮김 / 청년사 / 2015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5년 06월 23일에 저장
품절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이현진 지음 / 글항아리 / 2015년 7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30원(1% 적립)
2015년 06월 23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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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40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후마니타스, 2015)을 다뤘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지난 금요일에는 강연을 진행하기로 했다.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안을 다루고 있지만 서평은 분량상 불안과 환상의 차이에 집중했다. 번역본으로는 먼저 나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는 <불안들>의 후속작이기에 순서상으로는 그렇게 읽어도 좋겠다.

 

 

시사IN(15. 06. 27) 당신과 나의 본질에 대하여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살레츨은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등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관념론 및 비판이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공통의 이론적 지주로 삼는다. 이들 저작이 소개될 때마다 흥미롭게 읽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지만 <불안들>은 좀더 널리 읽힐 만하다. 우리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말이다.


물론 불안이 어제오늘의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살레츨은 우리가 앞선 시대의 불안과는 다른 새로운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그 주원인이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바꾸려는 끊임없는 욕망, 행동의 지침 부재 등과 더 관련된다고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불안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행복의 장애물로 여기고 통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관점이지만 살레츨은 정신분석의 관점을 빌려 불안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시킨다.


불안에 관한 정신분석의 이론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불안은 리비도의 억압이나 거세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뒤를 이어서 라캉은 불안을 주체와 대타자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를 정교화했다. 대타자란 주체가 ‘말하는 존재’로서 진입하게 되는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이 ‘상징계’로 진입할 때 주체는 상징적 거세를 겪는다. 이 과정을 거쳐서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며 권력이나 지위를 얻는다. 가령 경찰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가도 제복을 입는 순간 권력을 가진 자가 된다.


문제는 대타자 자체도 비일관적이며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대타자의 욕망에 비추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대타자의 결여에 대해 주체는 자신의 결여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안은 바로 주체가 자신의 결여나 대타자의 결여를 다루는 방식이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며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일반적인 사례로 신경증자들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결여를 가리고자 한다. 환상이란 주체에게 일관성을 제공해주는 시나리오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과 특정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준다. 환상을 통해서 주체는 자기 삶이 일관적이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 질서 또한 아무런 적대 없이 일관적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말해 환상은, 주체가 전적으로 결여를 특징으로 하며 사회는 여전히 적대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렇게 불안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환상이 우리는 편안하게 만든다면, 불안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안은 우리를 잠식하며 마비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불안은 환상이 갑작스레 깨질 때 우리가 봉착할 수 있는 파국에 미리 대비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불안을 외상으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려는 신호로도 간주하는 이유다. 대중매체는 흔히 불안을 주체의 안녕을 방해하는 궁극적인 장애물로 그리지만, 불안을 없애거나 통제하는 일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살레츨은 주체가 불안을 경험하는 것은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안한 사회도 문제지만 불안이 배제된 사회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않는 병사들이 더 공포스럽다는 한 미군 지휘관의 말은 불안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잘 시사한다. 곧 불안이 없는 사회도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똑같이 위험한 곳이다. 이렇듯 불안의 정체와 구조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환상과 불안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5.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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