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붙여놓으니까 무슨 이야기거리가 될 법도 하지만, '덧없는 행복'과 '섹스와 공포' 각각은 근간 예정인 책 제목들이다. 아침에 나오다가 우편함에 <문학과 사회>(2006 가을호)가 꽂혀 있길래 밥먹으러 갈 때마다 끼고 가서 여기저기 들춰보고 있는데(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대한 서평이다), 근간 소식을 전하는 문학과지성사측 광고란의 한 단락이 이렇다.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로 루소 사상의 현대성을 짚어보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고봉만 옮김)이 역시 9월초에 나올 예정이다. 또한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과 함께 2부작으로 집필한 에세이로, 기독교가 우리의 성(性)과 쾌락을 어떠한 방식으로 청교도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는지를 고대 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섹스와 공포>(송의경 옮김)가 오랜 번역 작업 끝에 10월경에 선보일 예정이다."

 

 

서지에 좀 밝은 독자라면 토도로프(1939- )의 <덧없는 행복>의 경우 이미 <환상문학서설>과 같이 묶여서 한국문화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1996년에 초판이 나왔고 작년에 판을 다시 찍었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억에는 영어(혹은 일어)에서 중역된 책이기 때문에 새로 깔끔한 번역이 나온다면 반가운 일이다. 영역본도 갖고 있는 김에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라고 해서(그 탓인지 <세상의 모든 아침>은 가장 먼저 번역된 키냐르의 책이다) 눈길이 갔던 작가 파스칼 키냐르(1948- )의 책들은 '키냐르 전문번역가'로 나선 송의경씨의 수고 덕분에 우리말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전공자에 따르면 키냐르는 '어려운' 작가군에 속한다). 그간에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만 사서 꽂아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섹스와 공포>가 출간되면 나란히 읽어봄 직하겠다(*2007년 2월에 책이 나왔다!).

 

 

특별히 <섹스와 공포>를 거명하는 것은 주제에 대한 흥미 이전에 재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러시어어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미지로 띄운 건 좀 고급스러운 판본이고 내가 갖고 있는 건 클래식 문고본이다. 참고로 키냐르는 러시아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막심네 가게에서 샀던가? 그런 까닭에 잊고 지내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10월이 오면 다시 만나게 될 친구...

 

참고로, 키냐르에 관한 약간의 전기적 사실을 옮겨오면, "1948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두 차례의 자폐증을 앓았고, 20대에는 68혁명의 열기와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다." '함께'? '밑에서'가 아닐까? 3-40년의 나이차가 나는데 말이다.


"1969년에 <말 더듬는 존재 L'etre du balbutiement>를 출간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하기도 했다. 1967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고 심사 위원으로 발탁되고 199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94년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현재 파리에 살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요컨대,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에 속하겠다. 미셸 투르니에 같은...

 

06. 08. 24.

 

 

 

 

 

 

 

 

 

 

P.S. 주문받은 원고를 마감을 놓치고도 미적대다가 잘 안 풀린다는 이유로 잠시 머리를 식힌다. 키냐르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오래전에 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1991)인데(제라르 드파르디유 부자가 출연했었다), 마지막 대사가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였던가?(시인 유하는 이를 패러디한 <세상의 모든 저녁>을 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오늘도 두 지인의 초상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세상을 뜨신 분들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갓 꿈이런가 하겠다. 덧없는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P.S.2. <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 2007)의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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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모스크바 통신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과 부조리극의 기하학'이란 제목으로 올린 글을 옮겨놓는다. 그해 9월 서울에서 몇 권의 책을 소포로 받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하여 예전에 써둔 걸 정리한 글이기도 하다.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오후에 후배가 다른 방 호수로 주소가 잘못 적힌 우편물 수령증을 (다행히도) 갖다 주어서, 구내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찾아왔다. 소식이 감감하던 다른 소포와 함께(알고 보니, 이곳 중앙우체국의 실수인지 배송카드에 수신자 방 번호를 빼먹은 바람에 2주 넘게 우체국 창고에 자고 있었고, 나는 엉뚱하게 ‘보관료’까지 물었다). 후배는 무슨 먹을 게 왔을까 봐 수령증을 건네주며 “오빠, 좋겠어요!”라고 했지만, 두 덩이 소포는 모두 책소포였다(매일같이 책을 사들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책소포까지 받는다!). 하나는 지인에게 논문 관련으로 부탁한 책 3권이고, 다른 하나는 선물로 온 책 2권이다.

 

 

 

 

선물로 받은 2권은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b출판사)과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이다. 책을 받고서 나는 약간 놀랐는데, 그건 책의 부피 때문이었다(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부피 있는 책들을 좋아한다).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쯤은 더 두툼했다.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고진의 책을 모두 갖고 있는 나로선 이번에 나온 책도 다른 책들과 비슷한 분량의 것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 ‘가라타니 고진 종합선물세트’는 가볍게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두 책은 본문 분량이 엇비슷했고 책값도 똑같았는데, (러시아 책값에 좀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는 부담스러울 만한) 상당히 ‘거액’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이었다. 적어도 액면가로는 내가 모스크바에 와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러시아어판보다도 더 비싸다(나는 그 책을 헌책방에서 500루블, 즉 20,000원을 주고 샀는데, 이 가격이 현재까지 내가 산 600여권의 책 중에서 최고가이다). 거기에 물론 배송료도 만만치가 않다. 해서, 보내주신 분들의 ‘성의’에 (다시금)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내가 당장에 답할 수 있는 일은 두 권의 책을 애써 읽고 그에 대한 소감을 띄우는 것이리라. 분량상, 그게 가까운 시일 안에 가능할 듯싶지는 않지만, 일단 시작은 하고 본다. 이 글은 그 시작이다.

저녁을 먹고 내가 잠시 읽은 건 <언어와 비극>의 4장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이다. 사실 유사한 내용을 이미 <탐구>에서 읽었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고진 이전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강의할 때면 그 부분을 빼놓지 않았다) 그에 대한 논문을 써볼 생각도 한 적도 있었다. 오래 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관련 참고문헌으론 수십 년 전에 <콘티넨트(Kontinent)>란 저널에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룬 논문 한편이 실린 바 있다(당시에 그 저널을 구할 길이 없어서 나의 ‘관심’이 흐지부지됐었다). 참고로, 내가 후기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구원의 변증법’이다.

고진의 논의에서 새로운 건, 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 즉 경제학비판을 비유클리드적인 세계, 폴리포니적인 세계에 평행한 것으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경제학에 대해서 다소 문외한인 나로서는 (고진의 강연을) ‘경청’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강연에 대한 ‘수업료’로 나는 나대로 생각했던/정리했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대학원 시절에 나는 '러시아 부조리극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다닐 하름스의 경우'란 리포트를 쓴 적이 있는데, 주로 하름스(D. Kharms)의 부조리극 <엘리자베타 밤>을 자세하고 분석하고 있는 본론을 제외한(*작품이 번역돼 있지 않기 때문에, 라고 적었었는데, 반갑게도 <작가세계>(2006년 겨울호)에 번역/소개되었다) 서론(“부조리극에서의 곡률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과 결론(“부조리극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교육적 의의”)에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편의상, 각주와 표 등은 생략한다. 참고로 2005년은 하름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글-읽기는 러시아 부조리극의 주요 작품들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상의 반영으로 보고자 하는 전체 그림의 한 조각이다. 소비에트 NEP(=신경제정책) 시기의 마지막 ‘좌파’문학그룹 오베리우(1927-1930)의 리더, 하름스(1905-1942)의 <엘리자베타 밤>(1927)과 베젠스키(1904-1941)의 <이바노프네 크리스마스>(1938), 그리고 이 ‘마지막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부록’과도 같은 아말릭의 <우리 아줌마는 볼로콜람스크에 산다>(1963)와 망명작가 브로드스키의 <대리석>(1982) 등에 대한 글-읽기가 전체의 나머지 조각들을 이룬다(*이 조각들을 다 맞추는 일 또한 나의 ‘하고 많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러시아 부조리극의 ‘원조’ 고골과 그의 <검찰관>(1836)이다. 이때의 <검찰관>은 19세기 풍자 드라마가 아닌 20세기 아방가르드 드라마로서의 <검찰관>이다. 1920년대에 메이어홀드-버전(1926년)과 테렌치예프-버전(1927년)으로 새롭게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메이어홀드의 공연은 러시아 연극사상 가장 훌륭한 공연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베리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경우, 고골과 오베리우는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들은 동시대 작가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깨동무하게 해주는 새로운 연극적 세계, 새로운 세계비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비유클리드적 세계상’이라 주장하고 싶다.

그러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글은 먼저 부조리극에서의 비유클리드적 곡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간략하게 전개한 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와 그것의 의의를 소개할 것이다(서론). 그런 이후에 하름스의 부조리극 <엘리자베타 밤>에 대한 ‘비유클리드적’ 다시-읽기를 통해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본론), 결론에서는 보다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부조리극=비유클리드적 연극의 의의를 제시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개념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은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클리드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뚤어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비뚤어짐을 통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한번쯤 반성해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고골부터인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은 자신이 ‘희극’이라고 명명한 <검찰관>의 이마에 “자기 낯짝이 비뚤어진 건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러시아 속담을 붙여놓고 있는데, 여기서 거울 밖(=현실)의 비뚤어진 낯짝과 비뚤어진 거울상의 대비는 우리에게 유익한 암시를 던져준다. 왜냐하면 부조리극의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세계야말로 순진한 관객/독자들이 질타하는 ‘비뚤어진 거울’에 다름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뚤어짐’의 정도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곡률’이라고 부른다.

비뚤어진 거울, 즉 곡률≠0인 거울은 동어반복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반영(reflect)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굴절(refract)시킨다. 그러한 굴절 행위를 통해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지각, 다시 말해서 유클리드적 지각세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거나 억지로 지워져 있는 어떤 굴곡들을 복원해낸다. 이때의 굴곡들은 한결같은 굴곡이란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영속성이 아닌 순수한 시간성과 유연성으로 되돌린다.



바로 그러한 세계가 비뚤어진 거울의 세계, 비유클리드적인 세계이다. 고골은 바로 이 곡률≠0의 세계를 러시아 문학에 도입한 작가이며, 나보코프의 말대로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문체(=스타일)에도 곡률이 존재한다”는 걸 입증한 작가이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푸슈킨의 산문이 3차원적이라면, 고골의 산문은 적어도 4차원적이다. 그는 동시대의 수학자인 로바체프스키에 비유될 수 있다. 로바체프스키는 유클리드를 뒤집어 엎어놓고 이미 한 세기 전에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발전시키게 될 이론들을 발견했다. 만약에 평행선들이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만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걸 밝혀놓은 것이다.”

두 가지를 지적하기로 하자. 먼저, 여기서 러시아 문학에서 푸슈킨과 고골의 문체적 전통을 3차원적/4차원(혹은 n차원) 세계의 대비로 본 나보코프의 견해는 비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고골의 계보를 따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몇몇 장식체 산문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조리극 작가들을 이 4차원적, 비유클리드적 작가의 계보 속에 넣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곡률≠0인 세계의 작가들이며, 고골은 그들의 원조이다.

다음, 나보코프는 로바체프스키란 이름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완전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가우스의 제자인 리만에 의해서이다(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 사용한 것은 리만의 기하학이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크게 보아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는 각각을 L-기하학(=로바체프스키 기하학)과 R-기하학(=리만 기하학)으로 구분해서 부르고자 한다. 그럼 이 두 기하학은 표준적인 기하학인 E-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먼저 이들의 내용과 차이를 정리해보기로 하자(*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얼마간 식견이 있는 독자라면 이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유클리드의 저서 <기하학의 원리>는 서구 문명의 전 역사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중의 하나이다. 이 기하학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2천 년이 넘도록 경탄을 금치 못할 대상이었으며, 수천 개에 이르는 유럽의 정교한 대성당들은 이 기하원리에 따라 축조되었다. 그리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은 일종의 종교가 되어, 그것과 다른 기하학을 얘기하는 이는 미친 사람이나 이단자로 몰렸다. 그러나 차츰 몇몇 수학자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와 씨름해오면서 평면적인 3차원 공간을 대상으로 한 이 기하학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품고서 새로운 기하학의 가능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빌미가 되어준 것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공준 중에서 제 5공준이었다.

공리 또는 공준이라는 용어는 자명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진리, 증명없이 수용된 진리를 뜻한다. 하지만 “평면 위에 놓여 있는 두 직선이 제 3의 직선과 만나고 한쪽 방향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은 방향으로 충분히 연장하면 그 두 직선은 만난다.”는 유클리드의 제 5공준은 제 1공준: “임의의 두 점 사이에 직선을 그릴 수 있다”나 제 2공준: “임의의 유한한 직선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등과 비교해 볼 때, 서술하기 복잡하고 다소 자명하지 않게 보인다.

평행선 공리라고도 불리는 이 제 5공준을 이와 동치관계인 명제로 다시 서술하게 되면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과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플레이페어의 공리)라는 것이 되는데, 이 평행선 공리가 다른 공리들과 달리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수학자들은 발견하였고, 따라서 그에 모순되는 명제를 채택하는 것과 새로운 공리 체계로부터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것이 적어도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수학자 사케리(1667-1773) 등은 이 제 5공준을 부정하고 ‘사케리의 사변형’을 내세우는데, 사케리는 A와 B가 직각이고 ‘변AD=변BC’인 사변형 ABCD를 연구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AD와 BC는 평행이고 각 D와 C는 모두 직각이지만, 제 5공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1. 각 C와 D는 모두 직각이다.
2. 각 C와 D는 모두 둔각이다.
3. 각 C와 D는 모두 예각이다.

여기서 2와 3은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반하기 때문에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케리의 가정에 근거하여 정합적인 새로운 기하학이 성립가능하다는 사실이 19세기에 로바체프스키(1793-1856) 등과 리만(1826-1866)에 의해서 발견된다. 이것을 각각 로바체프스키 기하학(또는 쌍곡 기하학)과 리만 기하학(타원 기하학)이라고 부른다(리만의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 2공준과도 대치된다). 이 두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리에 각각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로바체프스키 기하학: 평명 위에 주어진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에 평행한 직선이 적어도 두 개 있다.
-리만 기하학: 평명 위에 주어진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에 평행한 직선은 하나도 없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리는 세계는 보통 말하는 평면에 비유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세계, 즉 우리 감각에 가장 친숙한 세계에서 직선은 평면 위에 놓여 있는 직선을 말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리는 세계는, 비록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리만 기하학을 채택했고 시각공간에 대한 한 연구는 로바체프스키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다소 상상적인 세계이다.

현재 수학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실은, 세 종류의 기하학과 관련된 세 종류의 세계가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서로 잘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모델의 표면을 이용하여 쉽게 그려볼 수 있다. 먼 거리에서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가짜 구(트럼펫 2개를 연결한 모양)와 진짜 구 그리고 평면들이 서로 혼동되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좁은 시야로 바라보면 이들은 모두 똑같은 평면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우리의 선조들이 곡면으로 된 지구 표면을 평평한 것으로 잘못 판단하였던 추론과정과 일치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유클리드는 현대인이 인식하고 있는 지구에 적합한 기하학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지구는 평평하다는 가정에 따라 건설하였다. 일상적인 용도(거리의 실측 등)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과의 차이는 거의 보잘것없는 정도라 하겠으나 문제의 소재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이 합리적이고 인간경험에 적합하다는 데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마찬가지 정도로 정확하게 물리적 공간의 성질을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은 물리적 공간의 필연적인 기하학은 아닌 것이다. 즉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지 결코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결론은 전통적 세계관뿐만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중대한 도전의 의미를 갖는다. 뉴튼 물리학에 대응하여, 이 세계가 인간의 오성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오고 근대의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한 칸트(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공간은 기하학의 종합적 판단을 선험적, 즉 보편적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만일 공간 그 자체가 경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하학도 선험성을 상실하게 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이것은 우리의 기하학에 관한 상식에 어긋난다. 따라서 기하학이 선험적이기 때문에 이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공간 역시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때 칸트가 말하는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며,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가 선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공간 또한 선험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유클리드 공간의 개념을 결코 경험적인 근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필연성이다.” 즉 그에 의하면, 공간은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체제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의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이며,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새로운 기하학을 제시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험적 공간에 대한 칸트의 확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전혀 다른 기하학이 가능하며,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다. 이럴 경우,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창조의 산물이다. 신이 아닌 우리가 우주의 법칙을 부여하는 자이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서술이지 신의 규정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이교적 성격, 다신론적/무신론적 성격을 짚어볼 수 있다(*혹은 폴리포니적 성격).

공간의 유클리드적/비유클리드적인 이중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때까지 물리학은 기하학의 공리를 물리학의 자연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 자명한 기반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만일에 여러 가지 종류의 기하학이 수학적으로 대등한 것으로서 간주된다면 이 기하학 중 어느 것이 물리적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수학은 물리학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 여러 개의 기하학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적 형태를 제시한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 이후 물리적 공간과 가능적인 공간의 이중성이 인식되었다. 이때 수학은 가능한 공간을 시사하고, 물리학은 그 중에서 물리적 공간에 대응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수학은 인간 정신의 임의의 창조로서 출현하게 되었으며, 수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지시된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을 E. T. 벨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소설가가 저자이자 창조주로서 등장 인물의 성격과 대화 및 상황을 창조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수학자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수학적 체계가 근거할 공준을 고안해낸다. 소설가와 수학자 모두는 소재를 선택하고 취급하는데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자연적이고 불멸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성격을 창조하거나 어떤 체계를 발견하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수학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는 새로운 지적인 흐름을 형성시킨 점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것이 가져온 지적인 비약은 그보다 3세기 앞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는 거만한 지위에서 끌어내린 것처럼, 로바체프스키와 리만은 유클리드 공간을 기하학에서의 절대적 위치에서 끌어내렸다. 공간의 곡률이란 개념을 발명한 리만의 업적은 수학자들에게, 어떤 기하학도, 어떤 공간도 인간의 지각작용의 필연적인 양식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공간에 마지막 숨통을 끊음으로써, 19세기 물리학에서 ‘절대자’의 종말을 고하는 최초의 종소리가 되었다(*여기까지가 서론이다. 언급한 대로 본론을 건너뛰고 결론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러시아 부조리극의 원조는 고골이며, 로바체프스키와 동시대인이었던 고골의 문학세계에서부터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상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앞에서 우리가 이미 던진 것이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에도 L-기하학과 R-기하학의 서로 다른 종류가 구분되듯이, 고골의 계보를 따르는 비유클리드적 작가들의 문학세계도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3차원적 현실세계를 어떤 값으로 굴절시키느냐는 문제인데, 가령 곡률이 양수(곡률>0)인가 음수(곡률<0)인가에 따라서 변환되는 비유클리드적 세계상은 분명 서로 차이가 날 것이다.

나보코프는 고골의 경우를 두 종류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이해했지만, 사실 고골은 비록 두 종류의 양상이 다 드러내 보여주는 듯도 하다. 즉 수축적인 세계와 팽창적인 세계가 그에게서는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납작해진 사람들’(subman)의 테마는 분명 L-기하학(곡률<0)의 세계이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장광설과 과대망상은 R-기하학(곡률>0)의 세계처럼 보인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그의 세계는 상상력과 먹을 것이 남아도는 풍족한 세계이다. 예컨대, <검찰관>에서 흘레스타코프의 과장된 자기자랑과 허풍을 보자.

안나 안드레예브나: 정말로 운치가 있는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리겠죠?
흘레스타코프: 그야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테이블 위엔 수박이, 이를테면 7백 루블짜리 수박이 놓여 있습니다. 수프는 냄비에 담은 채로 파리에서 곧장 배로 가져옵니다. 뚜껑을 열면 김이 확 오르는데 그건 이 세상에서 비길 것이 못 되는 겁니다.(...)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받던 연봉이 4백 루블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백 루블짜리 수박은 대단한 허풍이 아닐 수 없다. 고골의 언어는 이 수박만큼이나 과장되어 있으며 문체적으로 풍족하다. 그래서 수박의 구 모양처럼 양의 곡률을 가진 세계이다. 즉 그의 세계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분명 180°보다 크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는 고골의 비유클리드적 세계를 극한까지 밀어부친 경우라는 점에서 문체적 적자(適者)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을 알고 있었으며(*<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참조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에서 2×2=4(합리주의)의 논리라는 것을 유클리드 기하학의 논리로 본다면 그가 주장하는 2×2=5의 인간적 의지/욕구의 세계는 그러한 의지와 욕구에 의해서 굴절된 비유클리드적 세계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단순하게 합리주의/비합리주의로만 이해하는 것은 미흡한데, 비유클리드적 세계에도 자체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욕망에도 법칙이 있다!).

 

 

 



또한 그의 후기 대작들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시간은 현실시간과는 관계없이 늘어나고 팽창하여 일상적인 시간에서라면 도저히 다 담길 수 없는 사건들까지도 담아낸다. 거기에 인물들의 과장된 감정과 장광설은 문학사에서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골-도스토예프스키의 계보를 R-기하학의 세계상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부조리극의 세계는 축소되고 납작해진 수축된 세계이다. 인물들의 말도 일상적인 경우보다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

이반 이바노비치 (의자에 뛰어오르며): 펜실베니아의 목동이여 영워어-어-하-아!
엘리자베타 밤 (의자에 뛰어오르며): 이반 이바-아-아-아!
아빠 (상자를 보여주며): 상자는 나므-으-으-으-로.
이반 이바노비치 (의자에서 내려오며): 아-아-안-녀-어.
아빠: 와아서 바-아-아.
엄마: 루-우-우-우-우!

언어뿐만 아니라 작품의 파토스에서 우리는 두 세계를 구별할 수 있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가 파토스(pathos)의 거울상인 바토스(bathos)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부조리극의 세계는 (새로 이름을 붙이자면) ‘하토스(xathos)’의 세계쯤이 될 것이다. 하토스의 세계는 웃음(유머)과 공포(경악)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고골이 <검찰관>의 마지막 1분 30초 동안의 정지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기대한 충격적 효과를 원조로 가지고 있다.

<검찰관>의 무대지시에서 특별히 이 장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주의사항: “배우들은 특히 마지막 장면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마지막 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쇼크 같은 것을 주어야 한다. 일동은 한 순간에 자세를 바꿔야 한다. 경악의 외마디 소리는 마치 가슴에서 터져 나오듯이 모든 부인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와야 한다. 이 같은 주의 사항이 준수되지 않으면 모든 효과는 없어질 수 있다.” 이런 효과가 유발하는 정서적 파토스는 잘 정의할 수 없는 x의 세계이고, 기괴한 웃음(xa xa xa)의 세계이다.

이미 우리는 서두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한 가지 이성, 즉 도구적/계산적 이성에만 맹목적으로 의지해온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과 비판의 뜻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굴곡을 지우고 평면화하며, 사고의 편익을 위해 곡선을 직선으로 대체하고, 세계를 엄격한 주-객관의 구별에 기초한 인식론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가져온 폐해를 우리는 여러 역사의 현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의하면, 이러한 근대의 근본과정은 세계를 상(Bild)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말은 이제 표상하면서 산출하는 행위의 총체적 상을 뜻한다. 이 총체적 상 속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에게 척도를 제공하고 원칙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존재자일 수 있는 입장을 마련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입장은 세계관으로 자신을 확실히 하고 분류하고 언표한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사육하기 위해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한다. 연구로서의 학문은 이런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한 형태, 즉 근대가 그 참여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속도로 자신의 본질 성취를 몰아치는 행로들 중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세계관들에 대한 투쟁과 함께 근대는 자신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가장 지속력 있는 국면에 접어든다.”(<세계상의 시대>)

여기서 모든 사물을 표상으로 만들면서 “모든 사물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사육하기 위해 무제한 폭력을 행사”하는 근대적 주체를 우리의 맥락에서 유클리드적 주체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산출한 결과는 그것의 폐해에 대해 눈감아주게 할 만큼 눈부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의 미망에서 깨어나 이 ‘당신들의 천국’의 세계에서 더 이상 지탱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적극적으로 항의해야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서인가?

가령 “m×n수의 무고한 다른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n명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이 가해져도(죽임을 당해도) 옳은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n과 m의 적정한 수치는 얼마인가?” 이런 유의 물음에 대해 잘 근거지어진 이론적인 대답이 존재한다고, 즉 이런 유의 도덕적 딜레마를 푸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R. 로티의 말을 빌면, 그들은 여전히 신학자나 형이상학자이다. 그런 사람은 인간이 존재하는 요점을 결정하며 동시에 책임의 우선 순위를 수립해주는,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어떤 질서를 믿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로부터 파시즘과 스탈린이즘 사이의 거리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알고리즘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라면 반지름이 r인 원의 둘레 C를 구하는 공식은 C=2πr로 간단하게 표시될 수 있지만, L-기하학에서는 아주 복잡한 수식으로 표시되고 R-기하학에서는 아예 공식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대하는 삶의 굴곡들이 낳고 있는 문제들은 이렇듯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고 정답을 가질 수 없는 문제들이다. 2×2=4라는 단순한 알고리즘 하나만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무지와 오만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가져왔으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을 제물로 희생시켜 왔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그러한 어떤 질서가 없다고 믿는 아이러니스트 지식인들이고 작가들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비유클리드적 지식인들이고 작가들이다. 그리고 부조리 작가들은 바로 그러한 아이러니스트 작가, 비유클리드적 작가의 대표적인 한 유형으로서 그 의의가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넌센스의 세계를 말하면서 그들은 센스의 세계, 상식적인 세계가 더 이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가르치고 폭로한다. 세계제작의 유일한 방법(the way)이 있는 것은 아니라 다양한 방법들(ways)이 있다는 걸 그들은 문학적 실천을 통해 예시한다. 그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개념,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훈육자이며 교육자이다. ‘다닐 하름스의 경우’를 통해 그러한 점이 제대로 지적되었기를 희망한다.



하름스는 “시간과 공간, 존재에 관하여”란 자신의 한 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세계의 존재의 문제를 놓고 그는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1.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통합적이고 동질적이며 연속적인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에는 어떠한 부분도 존재할 수 없으며 부분이 없다면 전체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존재하는 세계는 이질적이어야만 하고 부분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자기-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질적, 이종적이어야 하고 또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지만 반드시 부분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과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고집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관, 단의성의 신화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그와는 대비되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다. 부분(조각)들로 이루어진 세계,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장르와 문체들의 병치를 통해 이어적이며 다성적인 말들의 잡화상을 차려놓은 것이다(스탈린-기계에 대항하는 우리의 언어-기계들!) 이들 말들의 충돌과 불일치, 부조화 속에 진정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 리얼한 현실이 담길 수 있다고 그는 믿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러한 현실, 그러한 사회의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혼들’의 세계라는 고골의 예언적인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진정 살아 있는 삶의 세계가 우리 현실에 보다 밀착되지 못하고 극장의 무대라는 공간에만 한정되어 버린 것은 비단 아방가르드 작가들, 혹은 하름스만의 불행은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진정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모든 ‘좌파’ 지식인-작가들의 불행이며 비극이 아니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를 창문에 던지면 창이 깨진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직도 얼마나 적은 것일까! (구부러짐과 굽신거림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일까!)

강물은 오늘도 무서운 속도로 상류의 물들을 하류로 실어나르고
둔덕의 풀꽃들은 그림자 길게 휘어 달빛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은 휘휘 젓는 직선에 괴로워한다
등이 구부러진 과일들, 등이 구부러진 노인들, 등이
구부러진 황소, 야! 아예 온몸이 구부러짐의 시작의 끝인 시작의
둥근 공과도 같은 하루는 있는 것일까
-박용하, <구부러지는 것들>

04. 9. 9./ 06.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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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2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정말 노문과 대학원에서는 이렇게 시적인 (문장도 시적인, 또한 말미에 분석 외적 시도 인용되는) 레포트를 제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노문과 수업을 청강해볼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노어를 못하지만;;;; 역시.. 대학원 수업은 무리이겠죠? ^^;;; )

마노아 2006-08-2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중간에 그림이 하나 안 보여요.

로쟈 2006-08-2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그냥 어느 과나 좀 튀게 쓰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죠...
마노아님/ 로바체프스키인데, 다른 걸로 바꾸었습니다...

yoonta 2006-08-25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칸트가 말한 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이었다는 이야기는 정확히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이야기한 칸트와는 반대되는군요.

님이 인용하신 이부분..

“공간은 기하학의 종합적 판단을 선험적, 즉 보편적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만일 공간 그 자체가 경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하학도 선험성을 상실하게 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이것은 우리의 기하학에 관한 상식에 어긋난다. 따라서 기하학이 선험적이기 때문에 이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공간 역시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 인용문장에서 보시다시피 칸트는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지 선험적 ‘분석판단’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용하신 위 문장은 오독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근데 순수이성비판 몇쪽에서 인용하신것인지 궁금하군요.)공간이 경험적이지 않고 선험적이라는 것 그래서 수학도 선험적이라는 말하는 것이 칸트가 규정하는 기하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고진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할 당시 비유클리드기하학의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하더군요.(트랜스크리틱104~8쪽)

여기서 중요한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분석판단이 아닌 종합판단이라고 본 것인데, 분석판단 즉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져서 형식적 모순율만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 낼수있는 판단이 아니라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지 못하는 즉 모순율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종합판단인 것으로 수학을 규정했죠. 이것은 기존의 수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의미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그의 철학 전체는 근대적 이성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이성의 경계를 너머서는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특히 그는 그런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수학에 있어서의 분석판단적인 ‘공리’의 성격을 비유클리드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통해 규명하였던 것으로 압니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시,공간의 초월적 성격 즉 경험적이지 않고 경험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로 이것 역시 분석적인 수학적 형식의 가능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석판단의 경계를 너머서는 종합판단의 가능근거로 사용되는 것이죠. 다시말하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객관적 대상의 형식이 아니라 순수직관의 형식이라는 겁니다..수학은 그러한 순수직관의 선험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종합판단이라는 것이고요.

때문에 위에서 해석하신 칸트 인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제가 님글에서 재인용한 칸트의 문장 그리고..

“유클리드 공간의 개념을 결코 경험적인 근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필연성이다.”


라는 인용부분도 공간의 ‘선험성’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지 공간의 분석판단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죠. 님은 칸트적 의미의 선험성을 유클리드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칸트가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수학은 유클리드적이고 근대적인 어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의 선험성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어떤 것 혹은 경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경험이전의 순수직관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험성이라는 거죠.

이야기가 좀 장황하게 길어진것 같은데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말을..


“공간은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체제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의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이며,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새로운 기하학을 제시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라고 말하신다면 칸트의 생각을 완전히 오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칸트는 고진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로바세프스키나 리만이 체계화 시켰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점에서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과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이고요.




로쟈 2006-08-25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을 다셨네요. 맞습니다. 옮겨놓으면서 미처 신경쓰지 못한 대목인데 잘 짚어주셨네요. 한데, 제가 페이퍼를 쓴 건 거의 10년전이고 당연히 고진을 읽기 전입니다(물론 2년전에도!).^^ 지금은 고진의 (새로운)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옛날엔 보통 칸트하면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절대적 시공간)을 연결시켰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칸트를 연구했을 리는 만무하고 당시의 상식적인 견해에 의존했던 것이니까 너무 염두에 두시지 않아도 됩니다(그리고 인용문의 출처는 백종현본이 아니라 최재희본입니다)...

yoonta 2006-08-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초월transcendental 철학이 가지는 비유클리드적 성격 특히 수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것에 대한 비판혹은 오해는 당대에(헤르더)도 그리고 후대에(러셀)도 이루어졌던 걸로 압니다. 결국 그의 철학이 가지는 비유클리드적 성격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였다는 것인데 그의 철학의 탁월함은 리만기하학과 괴델의 불완전성증명이 등장한 이후인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을수 있게 되는것 같아요. 칸트철학의 이런면을 지적한게 사실 고진이 최초는 아니죠. 백종현씨같은 경우도 하이데거와의 비교를 통해서 칸트철학이 가지는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비판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칸트의 철학이 근대적 시공간을 개념화한것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는 그동안 얼마만큼 칸트철학이 대중들에게 잘못이해되어왔나를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6-08-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칸트론은 예전에 두어 차례 정리하다가 중단됐는데, 언제 시간내서 마저 정리해놓도록 하지요. 그때 한번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yoonta님도 거드시면 더 좋을 듯하고.^^
 

2002년 가을에 라캉 읽기에 대해서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놓는다. '라캉 읽기의 몇 가지 방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라캉 입문서를 묻는 질의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변화된 사정에 대해서 얼마간 보충하도록 하겠다.

 

 

 

 

현재 라캉 읽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두 주자들이라면, 슬라보예 지젝과 브루스 핑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프로이트 전집 발간 이후 차츰 라캉 읽기쪽으로 독서층의 관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 독서층이라는 것이 몇 줌이나 되랴 싶지만, 푸코나 들뢰즈의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재연할 수만 있다면(그래봐야 1만부 미만일 거라는 제 짐작이지만)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출판계의 요구/관심일 테고, 다른 한쪽에는 서구의 첨단 이론이나 철학을 수입/소개하는 데에 어떤 소명의식을 느끼는 일련의 지식인(지식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라캉은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난해한 저작(들 중의 하나)의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 박사/교수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었듯이 라캉 또한 알 듯 모를 듯한 이론과 도식(수학소)들을 통해서 (라캉을 아는)지식인들과 (라캉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가르는 준거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라캉에 대한 앎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론이 대중화될수록, 그래서 대중에게 라캉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사상가로 각인될수록, 즉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라캉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화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이미 프랑스 정신분석학과 라캉에 대해서는 셰리 터클의 <정신분석적 정치>(<라캉과 정신분석혁명>(민음사, 1995)으로 번역됨) 같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지젝과 핑크로 돌아옵시다. 혹자는 지젝에게서 임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그것이 지젝의 라캉 읽기/해석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라캉 읽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임상입니다. 임상은 임상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프랑스에서 라캉식 정신분석의 자격증을 따온다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 법적으로 그러한 정신분석이 공인되어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국내의 일부 정신분석의들이 라캉식 치료법을 어깨너머로 응용/적용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흉내'이고 대개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젝은 라캉을 임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갔고, 그의 생산성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접근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향락의 전이>에서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는 데 라캉을 이용한 것은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찾듯이, 아니 사례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듯이, 지젝은 (자신이 읽기에도) 난해한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나 대중소설들을 동원한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것은 라캉 이론을 더 풍부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보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주석가' 역할을 하는 핑크는 이러한 지젝의 작업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는 듯합니다(이들은 알렝 밀레르가 모는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쌍두마차의 두 마리 말과는 같아 보입니다). 핑크는 이미 국내에 번역된 <라캉과 정신의학>(원제는 <라캉식 정신분석에 대한 임상적 입문>)과 <라캉의 주체>를 통해서(*국역본이 근간예정이다), 그리고 세미나에 대한 주석서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라캉 읽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새로 번역한 영역판 <에크리>도 다시 나온다고 하지요(*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는 올해 출간됐다).

이 두 마리 말, 지젝과 핑크는 꽤 절친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똑같이 밀레르의 세미나를 통해서, 즉 후기 라캉을 통해서 라캉에 접근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라캉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이들의 작업 때문이고, 이들에 의해서 소개받은 후기(70년대의) 라캉 이론이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캉 이론은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십년간 몇 차례의 탈바꿈, 혹은 이론적 방점의 이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입니다. 단순화시키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 순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 왔고, 밀레르 사단은 실재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중심에 놓고 그 이전의 작업들은 재해석 혹은 '번역'(핑크 자신이 쓴 용어입니다)합니다. 그리고 이 후기의 라캉은 사실 <에크리>(1966) 이후의 라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에크리>가 국역된다고 해서 라캉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구조주의자 라캉!)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후기의 세미나들이 마저 번역돼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 세미나들에 대한 주석서들과 참고서들도 함께 소개돼야 하겠지요.

 

 

 


지젝과 핑크, 그리고 다리언 리더의 만화책(<라캉>)을 제외하면,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라캉 연구서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라캉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진행합니다(<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도 그렇게 한정된 라캉의 상을 소개하고 그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동일한 라캉이 아니라 라캉'들'입니다(*지젝은 '라캉 대(對) 라캉'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 이해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라캉'들'을 윤곽지어줄 수 있는 교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라캉 자신은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라캉에 대한 소개로 이해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그간의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젝과 핑크의 책들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에서 비춰지는 라캉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할 거 같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추어 볼 때, 몇몇 라캉 연구자들의 젠체하는 태도도 충분히 용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마저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그 머리아픈(!) 일들을 해나간단 말입니까?...

02. 09. 30/ 06. 08. 22.

P.S.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 기대어 국내에서 라캉 읽기의 지름길(?)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리언 리더는 라캉의 법적 상속자인 자크 알랭 밀레르(밀러) 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더 읽기(Further Reading)로 라캉의 1차 문헌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해제를 싣고 있다.

라캉의 <에크리>(1966)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데, 영어권에는 셰리단의 발췌 번역(1977)으로 소개돼 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에 의하면 그 번역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고 또 내용도 난삽하다(*지금은 핑크의 완역본이 나왔으니 셰리단의 영역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세미나인데, 밀레르에 의해 20권 가량(?)으로 편집되고 있는 불어본 세미나는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불어를 못 읽는 독자는(그의 책은 웬만큼 불어를 하는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1,2,3,7,11,20권까지 5-6권 정도가 영역돼 있고, 브루스 핑크가 주석서가 2-3권 나와 있다(1,2권, 11권).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에크리>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며 세미나만 5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국어본에만 의존하려고 할 경우 사정은 더 안 좋은데,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이라고 발췌 번역된 라캉의 책은 셰리단의 책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으로(그러니가 중역이다), 50년대 라캉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부분적으로 지나치게 의역하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문예출판사, 1994)은 구조주의 시절의 라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이 책엔 라캉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리더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캉의 초기 논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The Title of the letter: a reading of Lacan'이 있다. 국내 도서관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라캉이 칭찬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전문적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핑크의 'Lacan to the Letter'가 가장 요긴하겠다.  

다리언 리더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은 벤베뉴토의 <자크 라캉의 저작>인데(하나의학사에서 김종주에 의해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역시 우리말 번역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거의 절판된 책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참고서라 할 사전. 딜런 에반스의 <라캉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이 번역돼 있는데, 국내 라캉학자들이나 호사가들이 번역진으로 망라돼 있지만, 편차가 심하고 용어도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컨대 라캉에 대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리스크가 필수적인 것.

 

 

 



그래도 라캉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래도 번역이 괜찮은 지젝이나 핑크의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부분적인 오역과 불성실한 교정에도 불구하고(인간사랑에서 나온 모든 책에 공통적이다) 읽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책은 아니며,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향락의 전이>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지젝의 번역본 가운데 최악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 번역된 브루스 핑크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고, 다이언 리더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 그 책과 짝이 되는 것이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인데,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두껍지 않은 분량이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하다.

라캉의 전기서로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이 가장 자세하다. 하지만, 다소 근거없는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라캉 읽기에서 다행인 것은 적극 추천할 만한 2차 문헌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줌의(?)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

02. 10. 04.

 

 

 

 

P.S.2. 본문에서 언급된 책이지만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이 이번에 출간됐다. 근간 소식은 전부터 듣고 있었는데, 여름이 가기 전에 출간되어 반갑다. 핑크의 책으론 <라캉의 주체>가 마저 나온다면 <라캉의 정신의학>과 함께 '트로이카'가 되겠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까지 지난 봄에 출간됐으니 적어도 '라캉 입문'에 대해서만큼은 기념할 만한 해가 아닌가 싶다. 정작 라캉의 <에크리>도 <세미나>도 나오지 않은 것이 기이한 일이긴 하나 이 또한 '한국적 현상'이 아닐까 싶고...

07.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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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2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퍼갑니다. :) 그래도 한 때 홍준기 선생님께 라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으로서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서^^; 홍준기 선생님께서 '임상'을 실천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쟈 2006-08-2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염두에 둔 건 '법적 공인'입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가가 국내에서 법적인 인가하에 '영업'할 수 있는 건가요? 과문하지만, 그런 케이스는 아니지 않나요?..

기인 2006-08-23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치료실도 개포동인가 쪽에 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비로그인 2006-08-23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

자꾸때리다 2006-08-2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과 의사 아닌 사람이 정신분석치료 영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됩니다.
왜나면 저는 기득권자이기 때문이지요.ㅋㅋㅋㅋ

로쟈 2006-08-2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정신의학과 라캉식 정신분석은 치료의 전제나 목적에서 상당한 의견차를 갖고 있으니까 '똑같은 영업'을 하면 안되겠지요...

열매 2006-08-2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임상을 할 수 있는지 여부가 궁금해 정신과 레지던트를 밟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는데, 분석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다만 약물 처방과 같은 의료행위는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홍준기씨 같은 경우 '정신분석연구원'같은거 차리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것이 연구실같은 것인지 couch 갖다 놓고 임상치료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한국인들은 talking care하러 정신분석원이나 정신과보다 점쟁이한테 간다는 것이겠지요^^

로쟈 2006-08-2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료행위'가 아닌 '분석치료'가 가능한 건가요?.. 야메 같은?..

열매 2006-08-2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의 두명의 정신과의사,레지던트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 '의료행위'는 약물처방을 말합니다. 의사인 분 말씀이, 실제로 talking care는 환자가 원하면 한다고 합니다. 비용도 많이 청구되며 많은 시간과, 특히 환자가 그 과정을 힘들어하기 때문에 쉽사리 권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오히려 약물치료를 더 건장한다고 합니다. 특히 환자들이 '대화치료'에 대해 부정적이며 그 효능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합니다.
제가 궁금했던 것은 (대화)분석치료에 어떤 (의료적) 조건(학위)이란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여부였는데, 그들에게서 들었던 것은 의학대학 정신과 학위등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심리학과 진학 등을 통한 임상심리학, 상담심리학쪽으로도 자격 요건이 있다고 합니다.
상담소를 차릴 수 있다고 하는데, 의료행위에 포함되지 않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한국에선 talking care가 의료행위가 아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쟈 2006-08-2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단히 말해서, 국내의 합법적인 의료행위의 경우, 일정한 자격(의사자격시험 같은) 요건을 갖추고 허가받은 의료기관이나 시설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는 식이지요(세금도 내고요). 국내의 '라캉주의 정신분석' 임상이란 게 그러한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의료행위인가 하는 것이죠. 그런 게 아니라면 '임상'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닐까 하는 거구요...

열매 2006-08-27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답변을 수정하는 중에 답글을 다셨네요^^
마지막 말에 붙였지만, 제가 들은 바로 판단한다면, '라깡주의 정신분석' 임상은 한국에선 '의료'행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한국 사회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사회이며,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비유'일 것입니다.

biosculp 2006-08-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예총문예아카데미에서 강의하시던 이창재 이분이 개설하신 연구소인데.
http://www.freudphil.com/index.php.
의료행위로서의 치료라기보다는 이런정도가 아닐런지요.

로쟈 2006-08-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런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은 여러 분 계시죠.
 
벌거벗은 해 열림원 이삭줍기 5
보리스 필냐크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1921년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 러시아의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20-21년 사이에 볼가강 지역을 휩쓴 가뭄으로 오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죽었다. B. 필냑/필냐크(1894-1937)의 표현을 빌면 말 그대로 ‘벌거벗은 해’였고, “죽음이 삶이나 출생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필냑의 <벌거벗은 해>(1921)는 흔히 소비에트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산문문학은 일단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않은 벌거숭이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해>는 1917년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문화적 혼돈(카오스)과 에네르기를 문학적으로 육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사회현실적 삶과 정신적 삶의 현실이 문학텍스트 속으로 수축되어 들어간 것이 바로 <벌거벗은 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작가 필냑의 고유한 현실관(혹은 세계관)이다. 무엇이 진정 현실적인 것이냐라는 문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헤겔의 말을 비틀자면, 필냑에게선 “반복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복적인 것이다.” 예컨대,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 “이렇게 하여 집과 가게와 성경과 매질과 마누라와 마슈라 사이에서 4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그런 식이었고, 40년이 한결같이 그런 식이었다.”라거나 “인생의 모든 것은 바로 부메랑과도 같아...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나에게 되돌아올 거야.” “백만 년 전에도 밤은 있었어. 지금도 밤이 있고 백만 년 후에도 밤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나일 것이다.” 등등의 구절들.

필냑에게서 ‘고대적인 것’이란 테마는 이때 반복적인 것, 반복할 수 있고 반복되어야 하는 것에 해당한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18세기) 이전의 러시아, 반(半)아시아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한 문학사가의 지적에 의하면, 필냑은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인간 본질의 불변의 요소>에 대해 항상 언급했다. “그는 단지 출생, 사랑, 죽음이라는 기본적인 과정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탁월한 작품은 고독, 이성, 절망의 슬픔과 공포, 자연과의 일체감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사회의 대변혁을 초월하는 고정된 불변의 요소가 있어서 제국의 몰락, 군중의 폭동, 사회개혁이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이나 혼란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필냑은 항상 암시하였다.”(마르크 슬로님)



20년대에 비교적 평탄했던 필냑과 당국의 관계(필냑에겐 자동차가 2대 있었다)가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각되고 급기야는 숙청당하게 되는 사정의 밑바탕에는 그의 이런 세계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벌거벗은 해>에서 ‘볼셰비키’와 ‘코뮤니스트’의 차이. “니체, 로자노프의 사상 및 슬라브주의적 영감을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의 특이한 향취와 혼합한 필냑은 혁명을 부자연스런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종말 및 17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부활로 보고 환영하였다. (그에게서) 혁명적 폭발의 거친 원시주의는 단순하게는 일종의 스키타이인과 같은 삶의 방식의 재개를 선언하는 민족적 에너지의 방출이었다. 야만적인 러시아,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러시아, 필냑은 성적인 열정이나 순수한 애정적 환락의 장면에서 이러한 러시아인의 육체적인 힘을 찬양하고 무력하고 위선적인 유럽과 대비시켰다”(마르크 슬로님) 대략 이런 것들이 필냑이 가졌던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해> 등의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교들과 기법들은 모두 이런 아이디어의 형식적 등가물이 될 것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고대성의 특징적인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물의 상징성, 알레고리성. 이야기 서술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이란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린 근대소설의 발명이다. 근대소설은 이 문제적인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를 득의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 소설의 전통과 엄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필냑은 그의 인물들에게서 심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인물들에 ‘고대성’을 부여한다. 즉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 동기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입장이나 신념, 관점, 주의, 주장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선택된다. ‘누구누구의 눈으로’라는 식의 이야기 토막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에는 고유명사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상황이나 모티브가 반복되는 것처럼 인물의 형상 또한 반복된다. 오르드이닌가의 보리스와 글렙이 성자 보리스와 글렙의 이름을 가지는 것처럼.

둘째로, 이야기의 메시지나 이념적 논쟁이 주로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서 표출된다는 점. 이것은 알레고리적인 인물이 선택될 경우 당연한 귀결이다. 인물에 성격화가 부여되지 않을 경우 상황묘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보완하는 것이 바로 대화인 셈이다. <벌거벗은 해>에서 혁명에 대한 인물들의 입장이나 태도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가령, 1917년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이 마르크스(=유럽)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식을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천년 동안의 믿음이 현실화된 것이냐에 대한 논의. 근대소설의 경우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이런 류의 교술성을 또한 고대문학적 특성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로, 의인화되는 자연. 이 또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가령 <이고르 원정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해>에서의 자연(특히 눈보라)는 이야기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마치 희랍비극에서의 코러스처럼 여기저기 참견하듯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으며 “비유비유가가 샤샤샥”거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범이 되는 것은 동화(=옛이야기)의 세계이다.

넷째로, 연대기적 구성. 사제 실베스트르가 연대기 편찬자로 나오지만, 이미 ‘벌거벗은 해’라는 제목 자체가 연대기적이고 구성 또한 ‘서문’ ‘서술’ ‘결론’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바, 이 또한 연대기의 구성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해>의 작가 필냑은 근대소설의 작가와는 다른 작가적 위치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인데, 연대기 편찬자로서의 필냑은 재료(material)의 편집자(editor)로서만 이야기 속에 개입하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에 대한 필냑 자신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하여간에 이렇듯 나이브한 상태의 재료들이 텍스트에 편입됨으로써(텍스트는 ‘잡화상’이 된다) 야기되는 결과는 현실과 허구간의 경계가 흐리마리해지는 것이다. “빵도 없고, 철제물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기아와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뿐인 1919년, 동시대의 상황, 즉 혁명 이후의 2-3년간의 기간은 일종의 무중력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배적인 체제와 가치의 붕괴가 동반하는 이러한 혼란과 아노미 상태, 카오스모스적인 상태는 일시적으로 역사가 정지된 상태이다. 즉 역사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역사를 꿰뚫어 서술할 수 있는 단일한 시각적 입지(=퍼스펙티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분리파교도, 수구세력 등은 저마다의 시각과 가치관의 코드를 통해 혁명과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모든 현실의 파편들, 재료들을 자신의 단일한 코드로 편집,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적 장르의 지배력은 거의 무력화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 필냑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연대기라는 형식이 어떤 의미에선 그에게 강요된 형식일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의 고대성의 모티브들이 암묵적으로 제시하는바, 혁명의 눈보라가 몰아친 후 드러나게 될 17세기 이전의 러시아, 아시아적 러시아상은 텍스트 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게 정식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문학 중에서 혁명과 혁명에 참가한 주인공을 서사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시도가 B. 필냑의 소설 <벌거벗은 해>였다. 그러나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있지도 않은 현실을 재현하려고 한 바람에 작가는 인간과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고, 혼란스럽고 절충주의적인 관점만 드러내고 말았다.”(V. 부즈닉, L. 에르쇼프)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 정당하기 짝이 없는데, 소비에트 문학사는 소비에트의 승리, 볼셰비키의 승리라는 역사적 결과를 전제로 하여 서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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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3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20년대 자체가 러시아문학에서 그야말로 '문제적인 시대'로 기록될 만하지만, 쟈마친, 올례샤, 필냑, 플라토노프 등의 유수한 작품 중 필냑의 [벌거벗은 해]가 역시나 가장 문제적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온갖 난해성도 늙은 아르히포프가 임종시 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로쟈님이 인용한 부분)를 되새기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네요. 실상, 저 말 때문에 이른바 "가죽 재킷"(=공산주의자) 아르히포프가 결혼을 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겸사겸사, 골룹코프 교수의 책도 1920년대 문학의 틀을 잡는 데 아주 유용함.
 

지젝 입문서 한 권이 출간됐다.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에 이어서 두번째이고, 이안 파커의 책도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조만간 서너 권의 입문서를 우리는 갖게 될 것이다(영어권에서 나온 지젝 입문서가 현재 댓 종 가량이다). 알라딘의 저자 소개는 엉터리로 떠 있기에 참조할 바 없고(사라 케이는 캠브리지 대학의 불문과 교수이다), 번역자는 영문학 전공자이다. 기존의 번역서들을 참조했다면 무리없는 번역서가 나왔을 법하다.

 

 

 

 

표지 이미지가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원서는 아래에서 보듯이 오히려 원색에 가까운 편이다. 원서 'Zizek: A Critical Introduction'(Polity Press, 2003)은 'Key Contemporary Thinkers'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엔 쟁쟁한 동시대 서구 사상가들이 망라돼 있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대로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 등이 이 시리즈의 국역본들이다. 근간 예정인 책으로는 올 12월에 나온다는 레이다 안드레아스 듀의 <들뢰즈>(Polity Press, 2006)가 있다(아마도 국역본 판권이 벌써 입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Deleuze (Key Contemporary Thinkers)

지방대학의 출판부에서 지젝 입문서가 나온 건 좀 의외인데, 경성대출판부는 사실 가장 '전위적인' 책들을 출간하고 있긴 하다. 미술비평가 할 포스터의 책들이 포함돼 있는 '경성대문화총서'가 대표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 총서의 16번째 책이었고, 지난달에 나온 14번째 책이 폴 비릴리오의 <탈출속도>이다. 역자는 이미 <정보과학의 폭탄>은 옮긴 바 있는 배영달 교수. 비릴리오의 난삽함이 얼마나 덜어졌을지는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이런 책들을 출간하는 대학출판부를 '전위적'이라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지방인 만큼 책을 주문하면 거의 열흘 가까운 시일이 소요된다. 태풍이 북상하는 속도보다 몇 배는 느리다. 하니 그걸로 여름을 '탈출'하기는 이미 틀린 듯하다. 독서의 계절에나 읽을 책들이다. 지젝과 함께 가을을?..

06. 08. 22.

P.S. 위의 스틸사진은 Sophie Fiennes의 다큐필름 'The Pervert’s Guide To Cinema'(2006)의 한 장면이다. 지젝은 이 영화에서 나레이션을 맡고 있다고. 말하자면, 그가 영화사의 '가이드'이자 '도착증자'이다. 참고로, 이번 서울영화제에서 상영예정이라는 이 영화의 영문 소개를 옮겨놓는다. 

Is cinema one big Freudian slip? What can the Marx Brothers tell us about the workings of the unconscious? And why exactly do the birds attack in Hitchcock’s masterpiece of horror?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takes the viewer on an exhilarating ride through some of the greatest movies ever made. Our guide is the charismatic Slavoj Zizek, acclaimed philosopher and psychoanalyst, who delves into the hidden language of cinema, uncovering what the movies can tell us about ourselves. Known as ‘the Wild Man of Theory’, Zizek illustrates psychoanalytic theory using examples culled from film and pop culture. From Charlie Chaplin to Ingmar Bergman, from the Wachowski Brothers to David Lynch, Zizek thrills with his formidable insight and provocation. He illuminates the screen with his passion, intellect, and unfailing sense of humour. Conceived and directed by documentary filmmaker Sophie Fiennes,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takes the form of a film essay in three parts. Shot on location and in replica sets, the film creates the illusion that Zizek is speaking from within the films he is discussing.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provides all the tools necessary to read movies in an entirely different way —with Zizek studying his notes in the Psycho (1960) fruit cellar, observing the attempted exorcism in William Friedkin’s The Exorcist (1973), or revealing to The Matrix’s (1999) Morpheus the true meaning behind those red and blue pills. Zizek says: ‘Cinema is often described as a pervert’s art, because cinema tells us how to organise our desires’. This film exposes the very conditions that regulate our desires, inside and outside the mo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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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2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이름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서 보았어요. 그 이상 아는 게 없었는데 이렇게 생겼군요. 호옷...

로쟈 2006-08-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이 카테고리는 전체가 지젝에 관한 것인데요(^^;)...

로쟈 2006-08-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아마도 '사라예보'와 겹쳐 읽으신 듯.^^

푸른괭이 2006-08-22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 열풍 얼마나 갈까요...? -_- 위의 사진은 꼭, 늙은 조지 클루니를 연상시키는군요.

로쟈 2006-08-2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풍'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신에게) 무얼 말해주느냐가 중요하겠죠...

기인 2006-08-2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건, 노인과 바다도 아니고, 갈매기의 꿈도 아니고, 묘하군요. 노인과 바다의 배경에서 조나단이 날고 있었는데,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배따라기를 부르며 집을 나서며 '인형의 집'을 부수는 것? ;;; 헛소리였습니다 ㅎㅎ
그런데 갈매기는 합성이겠지만, 지젝도 합성 같아요 ㅋ

로쟈 2006-08-2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합성입니다.^^

열매 2006-08-2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의 '새'의 한장면 같군요.
실재the real의 중핵으로 들어가는...

로쟈 2006-08-2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부 2006-09-0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 스틸 'Pervert's guide to cinema'라는 영국영화의 스틸 사진으로 알고 있는데요.. '지젝의 신기한 영화강의'인가 하는 제목으로 이번 서울영화제에 상영예정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로쟈 2006-09-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신기한 영화강의> 상영 소식은 들은 바 있는데,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건가 보죠? 덕분에 정보를 업데이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