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뒤지다 보니까 그제 날짜 한국일보가 나온다. 나중에 읽으려고 넣어둔 것인데, 그 '나중 읽기'의 대상이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번에 문학사상사에서 '이어령 라이브러리' 30권이 완간되었고, 또 1956년 한국일보 지면으로 등단한 바 문필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200여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읽은 이어령은 몇 권 되지 않지만(30권으로 줄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저항의 문학>을 읽었던 기억은 생생한 만큼 관련 기사들과 함께 몇 마디 군말을 덧붙여두도록 한다.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한 것은 <저항의 문학>의 서문을 말미에서 읽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을 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사들이다.
한국일보(06. 10. 25) 문필활동 50년 전집으로 정리한 이어령
누군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직함이 무려 15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롯이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할 뿐이다. 00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쉼 없이 창조의 질주를 계속해온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 그의 50년 문필활동을 정리한 전집 <이어령 라이브러리>(문학사상사)가 이 달 30권으로 완간됐다. 1956년 5월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꼭 50년. 그 반세기 동안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저자로 달고 나온 200여권의 책 중 대표 작품들을 골라 묶어낸 전집이다.
-선생님의 다산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난 어릴 때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갈증이 나니까 우물을 파는 건데, 해갈이 되면 그만 파고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계속 팝니까. 창조에 대한 갈증으로 50년간 이 우물 저 우물 파온 거고, 그 속타는 갈증이 날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그러다 보니 직함도 많아졌고.”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책을 200권이나 쓰는 열정적 삶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복된 것, 편저나 공저 등을 빼면 순수한 내 작품은 총 50권 정도인 것 같아요. 문단에 나온 지 50년이 됐으니 1년에 평균 한 권씩 쓴 셈인데,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는 써야죠.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나신과 의상>을 연재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고 6개월 쉰 걸 빼면 글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직업적으로 글 쓰는 게 몸에 밴 거죠.”
-선생님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말의 천재’인데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수필가와 달변이에요. 수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수필과 평론이 구분되고, 난 평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장르를 바꿔버리니 싫은 겁니다.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눌변이라도 말할 값어치가 있는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의 천재라는 말이 참 싫어요. 내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만큼 손해 보는 부분인데, 그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달변의 수필가’라고 했다간 큰 일 나겠군요.
“큰 일 나지.(웃음) 대외활동이 많다 보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안타깝죠. 학계에서는 내 ‘공간기호론’ 같은 것은 정말 독창적이라며 오히려 내가 과소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달변가, 수필가로 안 알려졌더라면 평가 받았을 저작들인데….”
-선생님의 50년 글쓰기가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50년 글쓰기에는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사, 글쓰기의 역사와 담론이 담겨 있습니다. 채집문명에서 농업문명, 산업문명, 정보문명, 이 네 가지를, 즉 인류의 1만5,000년 역사를 한 몸에 축약해 치러냈으니까요. 외국 지성에 비해 내 수준이 떨어질지 모르나 4개 문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이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한 인간이 50년간 글을 쓰면서 네 문명의 체험을 담아내는 건 체험의 밀도 면에서 아주 희귀한 거예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70대 중반에 이른 내 동료들을 대변해 그 가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문학사상>이나 <이상문학상>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매김했는데도 선생님에겐 문학 권력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나는 50년간 글쓰기를 해왔지만 내 패가 없어요. 이런 저런 문학파들이 많지만, 어디에도 ‘문학사상파’라는 것은 없죠. 정치, 경제, 사회 다 패를 이루어 하는 것이지만, 문학만은 외롭게 혼자 하는 것입니다. 문인은 구석기 사람이에요. 제 손으로 도끼를 만들어 저 혼자 토끼를 잡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문단이 아니라 ‘문당’(文黨)이죠.”
-아직 더 파야 할 우물이 있습니까.
“억울하게도 나는 소설을 써도 평론가가 여가로 쓴 소설이라고 폄하됐어요. 사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왜 진짜 하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하잖수.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에 ‘바다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는 게 있잖아요. 내게 시는 그 숨겨진 전복이에요. 50년 글쓰기의 대단원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포에지(시가 가지는 정취), 시가 될 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 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자비 출판을 해서라도 장정부터 다 내 손으로 한 권 만들고 싶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면 이어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그 50년을 단번에 설명해 줄 그런 시집 말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한평생 오해를 받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거만이 뭔지 몰라요. 끝없이 바닥에 있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그걸 언어로 위장하고, 때로는 폭로하고 한 겁니다. 너무 약하고 열등해서 언어라는 갑충의 껍데기를 가지려고 한 겁니다. 나를 찌르는 불행의 화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구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참 재밌는 게 나와요. 모차르트에겐 모든 창조하려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존재의 열등감, 어린아이 같은 나이브함, 사회성이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글쓰기가 안돼요. 성경 <욥기>에 보면 욥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고통을 반석에 새길 수만 있다면’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불행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특권, 그게 글쓰기죠.”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치, 이념이죠. 내게는 끝없는 딜레마였습니다. 정치에 말려들어 이념의 언어에 구속되면 창조적 글쓰기는 안 된다, 신분증 언어밖에 못 쓴다, 다짐하며 그걸 안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문학에서는 하지 말자, 1960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구석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공에 얽매이지 않은 문학을 하자 했죠. 대신 현실과 관계 맺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문명론으로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해를 받아 순수ㆍ참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 외로운 거죠. 정략적 눈길처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없어요. 나는 고독한 창조자로 있고 싶었는데, 인위적으로 패거리 속에 나를 넣어서 보니까 그때처럼 외로운 게 없습디다.”
-글쓰기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십니까.
“끝없는 오해와 자기모순의 50년이에요. 감사하는 건 내 이름의 프리미엄으로 모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영화화했다는 겁니다. 외적 환경은 감사하지만, 콘텐츠를 놓고 보면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로운 50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외화내빈의 50년. 그게 내 50년의 아이러니죠. 글은 쓰는 순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내 글에 만족하면 또 쓰겠소. 전집 30권을 한데 묶어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희열보다 멋쩍음을 느껴요. 숨기고 싶고 꼭 속옷 보여주는 것 같아 창피해요. ‘이게 전부냐? 네가 50년간 쏟아부은 게 이게 다냐’ 싶어 헛헛한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고 남들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저 사람이 언제 또 나한테 부탁을 하랴 싶어 거절을 못해요. 그러다 보니 강연이다, 주례다, 인사말이다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초조한 게, 내 활동기간은 짧아지는데, 전복을 따야 하는데 잠수할 시간이 없어요. 막상 들어가면 숨이 차고.(웃음)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저런 위원장, 고문 직함 다 정리하고 1년간 들어앉아 전복을 딸 겁니다. 시집 꼭 낼 겁니다. 또 대학에서 강연한 것들 묶고, 학술논문들도 정리해서 전집도 40권, 50권까지 이어가야죠. 글쓰기엔 정년도 고령화도 없으니까요.”(박선영기자)
한국일보(06. 10. 25) 이어령 "등단 글 <우상의 파괴>는 젊은 피울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출판기념회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어느 당돌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한 서울대 학생이 서정주, 김규동, 조연현, 백철 등을 두고 그게 시냐고, 문학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짓뭉갰다는 것이다.
소문을 들은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씨가 그 청년에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비분강개를 “설마 신문에 실릴까”싶은 마음으로 썼고, 그것이 <우상의 파괴>라는 제목으로 1956년 5월6일자 한국일보의 한 면에 전재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등장이었다.
“당시엔 추천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기성문단의 동의나 결재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 힘으로 작가가 되겠다, 신춘문예나 추천, 투고 등을 통해 너희들로부터 승인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처럼 글 안 쓴다 하는 선언이었죠.”
그 글은 단지 문단의 우상들을 대상으로만 씌어진 글은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고 선배들을 짓뭉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우상엔 이승만 대통령 등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기성의 모든 억압이 포함돼 있었죠. 한 마디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말살되는 젊음을, 한 번밖에 없는 내 젊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젊은 사람 살려’ 하는 절규였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발로 쓴 젊은이의 피울음, 젊은이들의 첫소리였죠.”
그로부터 50년. 우상을 파괴하며 등장한 이 ‘앙팡 테리블’이 한국 지성사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 거름이 된 50년의 글쓰기를 기념해 31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이어령 교수의 글쓰기 50년>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회가 열린다.(박선영 기자)
중앙일보(06. 10. 27) 시대의 지성 이어령 등단 50년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중앙일보사 고문) 선생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글쓰기 인생이 어느새 반세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직업은 본래 문학평론가다. 그러나 뭇 사람은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그래서 굴렁쇠의 추억을 우리에게 안긴 문화기획자로 그를 떠올린다. 다른 이는 한국 헌정사 최초의 문화부 장관(90~91년)으로, 또 다른 이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은, 오히려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도 있는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을 조명한다. 전후문학 시대 젊은 문학의 기수로서, 60년대 참여-순수 논쟁을 이끈 평론가로서 이어령은 한국 문학사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 50년의 세월을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증언한다. 선생의 육성은 30일 '월요 인터뷰'에서 전달할 예정이다.
선생의 등단 50주년을 맞아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30번째 권인 '나, 너 그리고 나눔'(문학사상)이 최근 발간됐고, 31일 오후 3시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특별 강연회가 열린다. 다음달 2일 정오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중.일 비교문화상징사전 발간 기념 강연회도 열린다.(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6. 10. 27) 권영민 교수가 말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1956년 시작된다. 선생은 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고, 문화 예술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원로이면서도 선생은 언제나 현역 비평가를 자임한다. 칠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 놀라운 지적 통찰력을 통해 우리 문화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러므로 이어령 선생의 글쓰기 50년은 우리 문화 예술의 정신사적 궤적에 해당한다.
이어령 선생의 첫 번째 비평집 '저항의 문학'(59년)은 우리 문학사에서 유별난 자리를 차지한다. 선생의 수많은 저서 중엔 이 책보다 훨씬 화제를 모으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지성의 오설길''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이 있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추적하고 있는 '문화코드''디지로그'와 같은 최근의 화제작도 있다.
그러나 '저항의 문학'이 유별난 이유는, 이 책에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문학 비평이 문학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문학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논리와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문학'은 그 유명한 '우상의 파괴'라는 비평적 명제를 처음으로 내세운 저작이다. 이 명제는 '작품 자체로 돌아가기'란 비평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상의 파괴'란 명제는 50년대 문단에서 기성 작가들의 권위에 대한 신세대의 당돌한 도전으로 오해까지 받았던 테마이다.
이어령 선생은 당시 평단의 거목이었던 백철을 공박하고 조연현을 비판하고, 시단의 주역이었던 미당 서정주를 몰아치고 소설 문단의 김동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전후 문단의 숱한 시인과 소설가들이 아무도 선생의 비평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비평이 논쟁적이긴 했기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명했다. 문학 비평이 더 이상 작가의 주변을 맴돌아선 안 된다는 것, 오직 작품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사회 참여 문제를 저항의 문학이라는 테마로부터 새롭게 제기한 적이 있다. '작가의 현실 참여'(59년)라는 선생의 평문이 던진 이 새로운 과제는 4.19를 거치면서 문단 전체의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비판하는 문학의 정신을 리얼리즘과 연결하며,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참여문학론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문학의 본질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문인들이 반발하면서 쟁점은'순수-참여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 논쟁의 정점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며, 그 상대역이 시인 김수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 김수영은 군사 독재의 사회 문화적 통제를 우려하면서 언론의 무기력과 지식인의 퇴영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참여론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내세운 이어령 선생이 순수론의 옹호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평론가로서 가장 힘을 기울인 연구 중 하나가 '이상 연구'이다. 이상의 문학은 언어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이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속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통해 전체적인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이상의 작품을 신비화된 그의 삶으로부터 분리한 선생의 비평적 작업은 이상 문학의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미적 차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자는 아니다. 선생의 문학 비평은 문학의 개념과 그 범위를 규정하는 방법과 관점에 따라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미시적인 언어 기호론에서부터 거시적인 비교문화론으로 확대된다.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 50년을 정리하고 있는 130여 종의 저작을 살펴보면, 선생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써 자신의 글쓰기를 폭넓게 지속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충동을 함께 아우르는 이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한 시대의 지성이 펼쳐놓는 새로운 '문화적 시학'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독자의 자랑이다.(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사상' 주간)
06. 10.20-21.
P.S. 집에 돌아와 <저항의 문학>을 찾아보니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박스보관 도서인 모양이다. 내가 갖고 있는 <저항의 문학>은 가장 먼저 나온 경지사판(1959)판도 아니고 가장 최근에 나온 문학사상사판(2003)도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판본이 있지만, 기린원에서 지난 1986년에 나온 책이 나의 소장본이다. 책은 지방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서 나중에 <장미밭의 전쟁>(기린원, 1986)과 함께 구했었다. 지금은 모두 '이어령 라이브러리'로 보다 번듯하게 나와 있다.
기억에 표제가 된 평문 '저항의 문학'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절름발이 개구리>를 다룬 글이었다(내가 이 글을 읽은 지 15년이 더 되었다). 궁정 광대의 복수극을 다룬 포우의 단편을 '저항의 문학' 논리로 풀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얼핏 '참여문학론'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글인데, 1960년대 순수-참여 논쟁에서 순수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권영민 교수의 표현을 빌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에 비판적이었던 것이 이어령의 입장이었다면, 사실 참여문학의 본뜻과 멀지 않다. 이어령의 방점은 '문학으로서' 참여하는 데 두어졌던 것이고, 따라서 '참여'에 방점을 둔 이들과는 대립각을 세웠던 게 아닐까.
요컨대, '빤스 입고 덥벼라'가 그의 문학론인 것이고, 이건 '빤스 벗고 덤벼라'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나는 후자의 경우를 '이념문학'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빤스 벗고 덤벼라'는 박광수 감독의 디지털 영화 제목이다). 그러니 전쟁을 하더라도 '장미밭의 전쟁'인 것이겠고. 그런 비유를 좀더 쓰자면, 요즘 한국문학의 '빤스'는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