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리포베츠키의 <제3의 여성>(아고라, 2007)을 잠시 펼쳐들었는데(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0797 참조), 1장이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행복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남녀의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17쪽) 

물론 12세기 때 발명됐다는 사랑, 혹은 사랑의 모체는 '궁정식 사랑'이고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들이 나온 게 있다, 고 적으려고 이러저리 검색해보지만 뜨지 않는다.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기법>(현음사, 1992)만이 생각난다. 문화사를 다룬 책들 중에 더러 이 '사랑의 발명'이란 테마를 다룬 책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궁정식 사랑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지젝의 설명(<향락의 전이>)이 가장 자세하며 깊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둔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http://blog.aladin.co.kr/mramor/974481)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http://blog.aladin.co.kr/mramor/978175)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http://blog.aladin.co.kr/mramor/986399)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http://blog.aladin.co.kr/mramor/986869)

리포베츠키의 이어지는 설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궁정의 유희일 뿐이었다. 사랑은 왕과 귀족들만 하는 특별한 행위였다. 당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성적 충동은 경시되었다. 중세 교회 시대의 사랑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열정이 되었고, 사랑이라는 스스로의 근거만으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첫번째 미주가 붙어 있는데, 바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왜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는지 기이하게 생각되는 책 중의 하나(였지만 번역돼 나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의 한 장인 '사랑의 사회학: 민족주의와 에로티즘의 융합을 위하여'에서 처음 소개받은 듯하니까 어느새 십수 년 전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6)과 함께 필독서로 제시된 책이었다(기든스 책의 원제는 국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다).  

아무튼 이후에 "사랑은 중세의 '완전한 사랑'에서 고전주의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을 거쳐 20세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어져갔다."(18쪽)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이현의 소설 표제가 되기도 한 재크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민음사, 1985)이다,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떠올린 책이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쇠뿔은 단 김에 빼는 성격이어서(물론 책에 대해서만이다) 동네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대출해왔다. 사랑에 대해서 이만한 두께의 문화사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필리프 아리에스 등이 엮은 <성과 사랑의 역사>(황금가지, 1996)도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주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탈리 에니크의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 아니 골드만의 <잃어버린 사랑의 꿈>(한국문화사, 1996), 그리고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민음사, 1995)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크리스테바의 책은 <사랑 이야기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어에서 '이야기'는 '역사'란 뜻을 중의적으로 갖기에). 

다시 리포베츠키로 돌아가면, "그때부터[12세기부터] 이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꿈을 안겨주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이야기'나 '사랑의 문화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나 읽도록 하겠다(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07. 10. 07.

P.S. 작년 봄에 출간된 <사랑의 문화사>에 관한 리뷰를 하나 참고로 읽어둔다.  

매일경제(06. 05. 26) 사랑도 진화해왔다 '사랑의 문화사'

첫키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좀더 친밀한 사이로 나아가는 과감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키스를 할 때는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지만,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 키스 역사를 살피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학작품에 묘사된 장면들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피츠 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을 보면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키스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이편'의 연인 아모리와 로잘린드는 만난 지 단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 빅토리아시대에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남녀간 예의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히스클리프는 5분에 걸친 격렬한 키스 끝에 캐서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다시 입맞춤을 해주오. 그러나 그 눈은 보게 하지 말아 주오."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사랑의 문화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사랑과 연애 역사다. 빅토리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문학과 미술작품을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의미와 변천사를 분석한다. TV 드라마와 통속소설, 실용적 연애 지침서에 이르기까지 흔히 접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파묻힌 건조한 성찰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의 다양한 일차 자료를 곁들여서 생생한 실감을 전해주는 성찰이다.

책은 사랑의 성립과 소멸에 이르는 단계를 '기다림-만남-조우-육화(肉化)-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힘-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맞는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며 시대별 모습을 살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700여 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담스럽다.

미리 숙지해야 할 소설과 그림들도 많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씨' '레 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들과 연인' '전망 좋은 방' '위대한 개츠비' 등 저자가 분석한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미술에 대해 말하자면 마네 드가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대가들의 대표작 정도는 머리에 담아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박학과 깊이가, 재미있고 발랄하되 누구나 아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인 시중 연애지침서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내공'을 쌓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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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22 04:41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hemiola 2007-10-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사랑의 문화사) 굉장히 재밌어요. ㅎㅎ^^ - 얼마전에 이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와우, 대단합니다. 즐겨찾기 했습니다~

로쟈 2007-10-07 22:54   좋아요 0 | URL
<희생>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쓰시네요. 반갑습니다.^^

섬나무 2007-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의적절한 유익한 포스트입니다.^^ 하지만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에 입 닥치고 책이나 읽는 일이 어떻게 유익한 지 이해되는 처지에선 굳이 기대지 않아도 좋겠습니다.ㅎㅎ
 

중앙일보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글로벌 책읽기'는 몇 주전부터 찾아 읽는 코너이다('세계의 책' 범주에 딱 들어맞는 연재이기도 하다). 이번주에 다루어진 책은 우리에게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는 사카이 나오키이다('국민주의 비판'이 그의 주된 이론적 화두이다). 그의 신작이 <일본/영상/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인 모양인데, 얼른 소개되었으면 싶은,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다. 나는 소개기사나 챙겨두도록 한다.

중앙일보(07. 10. 06) 영화도 제국주의의 숨겨진 무기였다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다. 미국적 보편주의는 미국산 대중문화를 매개로 확산, 보급되었다. 특히 헐리웃 영화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화의 정치적 작용을 도마 위에 올린다.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 신문기자와 중국·유럽 혼혈의 홍콩 여성의사의 사랑을 그린 영화 ‘모정(慕情)’(1955)은 그 해 골든글로브 국제이해 공헌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국여성 역으로 백인 여배우 제니퍼 존스를 등장시킨 것은 오로지 타인종과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시하는 ‘양식 있는’ 백인관객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동양인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 점에서 그녀는 미국인 해군장교에 버림받고 스스로 자결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여성 ‘초초상’의 후예이다. 여기에는 여성은 백인 남성의 ‘인지’를 통해서만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남성(서양)우월주의가 작동한다. 반면, 비서양인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백인 남성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만드는 연애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식민지 상황의 국제 연애를 그린 영화의 압도적 다수는 식민지지배 질서를 전복할 수 없는 여성의 종속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생산해왔다. 다시 말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인종간 연애영화는 국제관계의 알레고리 그 자체이며, 이 경우 영화는 국제간 권력관계를 획정하고 추인하는 장치가 된다. 1940년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 및 동아시아 각지에 배급된 영화 ‘지나(支那)의 밤’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일본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가 남경학살(영어로는 ‘남경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으로 일컬어진다)의 3년 후에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한다. 강간은 강제적인 종속을 의미하며 피지배자의 의지에 대한 폭력적인 침해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양국 남녀를 낭만적인 연애관계 속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중국 지배가 양자 간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정상적이고도 제도화된 정치현실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을 적용하면,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일본 보수층의 태도 역시 ‘강간이 아닌 연애로서 식민지 역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또 ‘반전 영화’로 알려져 있는 ‘디어 헌터’가 실은 미국(서양)이 비서양세계에 행사한 폭력의 역사를 부인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집단 심성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국인에게 ‘러시안 룰렛’과 같은 비인간적 고문을 강요하는 베트남인을 등장시킴으로써 ‘피해자 의식’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에 의한 공감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적 ‘반전영화’라 할 수 있는 ‘버마의 하프’ (1956) 역시 사카이식 비판적 감수성의 여과지를 거치면 일본판 ‘디어 헌터’가 된다.



한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미국의 헤게모니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내전의 상처라는 시각으로 접근한 제4장에서 내내 유지되어왔던 비판적 사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은 아쉽다. 그 역시 일본인 지식인으로서 숙명처럼 직면해야 하는 이른바 ‘제국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전후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공범관계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관점은 자위대를 ‘타위대’로 표현하는 등 더러 극단적인 주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국외자적 감수성을 토대로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현존하는 일본·미국의 국민주의 및 식민주의적 정치·문화현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하는 저자의 작업은 ‘밖으로부터의 사유’에 취약한 국내 인문학계에 의미있는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윤상인_한양대 교수)

07.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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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1-10 17:45   좋아요 0 | URL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들이 제국주의적 징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책이 있었군요^^ 참고되겠슴다^^
 

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인문학서평'을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445). 서평 대상은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다. 책의 출간소식은 지난 7월에 페이퍼로 올려놓은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398654). 아래는 아마도 그에 대한 가장 자세한 리뷰가 아닐까 싶다.

 

컬쳐뉴스(07. 10. 05) 폭력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사회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 관리권은 이제 박탈되어야 마땅합니다. 노동계급의 1백50만 명이, 나머지 노동계급 사람들을 포섭해서 합세시켜 가지고 여러분으로부터 관리권을 빼앗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용주 여러분,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죠.”

미국 소설가 잭 런던(1876~1916)의 『강철군화』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부르주아계급의 사교클럽인 필로머스 클럽에 초대를 받자마자, 자신의 연인 애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고용주들을 흔들어 놓는 데는 실패했었지요. 당신은 단지 그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돈주머니를 위협할 거예요. 그건 그들의 원시적인 본능의 밑뿌리까지를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맨 앞에 인용한 것처럼 말했고, 결국 고용주들을 뒤흔들어 놓는 데 성공한다.



『폭력에 대한 성찰』의 지은이 조르주 소렐(1847~1922)은 사상계의 런던, 아니 어니스트라고 할 만하다(공교롭게도 『폭력에 대한 성찰』과 『강철군화』는 모두 1908년에 출간됐다). 소렐이 이 책을 쓴 목적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의회사회주의자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부르주아계급,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얼이 빠져 있는 유럽의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활력을 되찾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임을 노동계급 자신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1908년은 노동총연맹(CGT)이 아미앵 헌장을 발표해 기존 정당의 존재를 부정하고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 실현,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과 분배의 조직을 선언한 지 2년이 되던 해이다. 요컨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힘이 부쩍 성장하던 해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은 『강철군화』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성장해가던 사회주의운동의 자신감이 반영된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성찰』이 ‘지금’의 우리에게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 현대 사상들의 ‘폭력’ 개념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대’란 대략 1968년 이후의 시기로서, 학문적으로는 구조주의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 1968년은 신좌파 운동이 전세계를 휩쓸던 해이자 온갖 도시 게릴라 단체들의 등장을 부추긴 해이기도 하다. 요컨대 민권운동이나 플라워무브먼트 등으로 대변되는 비폭력이든, 독일의 적군파나 이탈리아의 붉은여단으로 대변되는 폭력이든 폭력/비폭력을 둘러싼 담론과 실천이 전면에 부각된 해인 셈이다.

1968년경부터 구상을 시작해 1970년 그 결실을 책(국내에는 『폭력의 세기』로 소개되어 있다)으로 낸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확연히 구분한다. 권력은 곧 폭력이므로 그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좌파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아렌트는 권력을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한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즉,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언제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와 같은 인간의 능력에 조응하는 한 권력이란 영원히 파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렌트가 이와 같은 폭력과 권력의 구분을 무시한 채 폭력을 옹호하는 좌파 사상가들의 선조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소렐이다. 그러나 소렐이 말하는 폭력(더 정확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이와 다르다. 혹은 아렌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다면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소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고 있는 총파업을 일종의 ‘신화’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소렐에게 신화로서의 총파업은 거대한 사회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대의가 어김없이 승리할 전투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그려보는 임박한 행동, 혹은 불특정한 시점에서 그려보는 어떤 미래에 대한 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로서의 총파업이 가져올 효과는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눈앞의 결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장기적 영향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즉, 소렐에게 폭력이란 아렌트가 비판하는 강제력/무력(force)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이란 프랑스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L’impossible­ - ­possible)과도 유사한 기능을 한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또 다른 형태로 가능해지는 그 무엇이 곧 ‘불가능의 가능’인데, 르페브르가 즐겨 예로 드는 것은 유토피아 사상이다.

예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없는’[ou-]+‘장소’[toppos])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 사상은 분명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망이지만,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개념은 1968년 프랑스 5월 운동 당시의 구호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을 요구하자”를 통해 대중화됐다). 따라서 소렐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대혁명의 진정한 결과가 혁명 초기에 가담자들을 열광시켰던 매혹적 청사진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사리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청사진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신화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를 역사의 흐름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모든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신화 자체이다”라는 주장을 염두에 두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말한 바 있는 ‘순수 수단’(reine Mittel)으로서의 폭력, 즉 ‘신적 폭력’과도 비슷하다.

앞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렌트가 폭력을 권력과 구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이라는 수단을 써도 무방하다(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정당한 수단이 된다)는 당대 좌파들의 인식을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 때의 폭력이라도 그것이 수단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벤야민의 질문을 바꿔서 말해보자면, 억압적이라고 판명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그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둘 다 수단적 폭력일 뿐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수단이긴 수단이되 ‘목적 없는 수단’이다. 즉, 신의 폭력이란 뭔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나약한 인간이 그것을 허구적으로 이해하고자 그 사건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폭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의지나 목적 같은 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렐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이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특이한 사건 자체, 혹은 그것의 출현이다. 그래서 소렐은 총파업, 벤야민은 혁명이라는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결국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활력’(vis)에 더 가까운 것이다. 무릇 생명력을 지닌 생물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그 활력 말이다. 어니스트의 사자후가 필로머스 클럽의 고상한 양반들을 들쑤실 수 있었던 것, 또한 소렐의 주장에 당대의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의회사회주의자들까지 불편해했던 것은 어니스트와 소렐이 노동계급의 활력을 전면에 부각했기 때문이다. 필로머스 클럽의 회원들(혹은 당대의 지배계급)이나 의회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길들어져야할 것이었지 분출해야 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소렐의 폭력론이 무솔리니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러시아에서는 혁명적이었던 미래주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과 결합하게 된 것과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였을까?(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07.

P.S. '폭력'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시피 방대한 참고문헌이 존재한다. '20세기의 정치적 폭력'으로 시야를 좁히더라도 견적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때문에 갈피를 잡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이 경우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 그래도 요긴한 로드맵이 되어준다(http://blog.aladin.co.kr/mramor/1486267, http://blog.aladin.co.kr/mramor/1538039 등의 페이퍼 참조). 특이하게도 벤야민의 '폭력론'과 이에 대한 데리다의 읽기를 생략하고 있는 게 흠이지만(저자는 벤야민의 폭력론을 언급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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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뒤랑의 주저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출간된 김에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꼽아본다. 품절된 책이 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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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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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
송태현 지음 / 살림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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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절판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
진형준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4,000원 → 3,6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품절
뒤랑 전공자의 입문서. 기억에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지금은 다 절판됐지만 저자의 평론집들에서도 뒤랑의 상상력 이론에 대한 해제들을 읽을 수 있다.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
질베르 뒤랑 지음 / 살림 / 1997년 12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품절
소개된 뒤랑의 이론서들이 생각만큼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건 바슐라르도 마찬가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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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퍼슨웹 주최의 북포럼에 패널로 참여해 작가 장정일씨와 흥미로운 만남을 가졌다. 화제는 <공부>(램덤하우스, 2006)와 <장정일의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 두 권의 책이었고 나의 몫은 "단순한 작가 강연회나 독자와의 대화 수준이 아닌 독특한 지점의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는데, 어젯밤에 KBS에서 지난 1월에 방영된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시 보면서(이 방송분에서 작가의 답변은 <독서일기7> 말미에 수록돼 있다) <공부>에 대해 '재탕' 질문을 던지는 건 별로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작가 장정일의 지난 20년'에 대한 독자로서의 감회부터 먼저 적기 시작했는데, 토론문은 그걸로 그냥 분량이 다 차버렸다(하기야 오전에 쓴 것이니 더 쓸 시간도 없었다). 그걸 약간 간추려서 옮겨놓는다. 

 

먼저, 이 자리에 패널로 초대해주신 퍼슨웹과 북포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책’이나 ‘공부’라면 늘 접하는 것이고(“당신이 그거 말고 잘 아는/잘하는 게 뭐있어?”라는 게 자주 듣는 소리죠!) 특히 오늘 독서토론의 대상이 평소 제가 즐겨 읽고 좋아하는 작가 장정일 선생님이라고 해서 제 역량과는 무관하게 초대에 흔쾌히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시작하겠습니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개인사부터 들추게 되는데(^^), 사실 장정일의 첫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부터가 ‘파격’이 아니었나요?(게다가 이 시집은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품집입니다. 수상자의 면면을 보자면 장정일은 이성복, 황지우의 뒤를 잇는 ‘우리시대의 시인’이었던 것이죠). 그때가 저로선 대학 1학년 때인데 ‘근엄한’ 시들만 읽어오다가 이런 시를 맞닥뜨렸을 때의 ‘쾌감’은 요즘 다시 맛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는 이런 식이었지요.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 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 컵
소금 2 작은 술
후춧가루 ¼작은 술
상추 4 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그렇게 해서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로 마무리되는데,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이 보다 더 유익한 시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장정일은 제게 문학의 모든 아우라를 제거한 말 그대로 ‘포스트모던’ 시인이었습니다(제 생각에 장정일은 시작(詩作)의 패러다임을 ‘시쓰기’에서 ‘타이핑하기’로 바꾼 ‘혁명가’입니다). 앞에 적은 이성복, 황지우의 ‘모더니즘’과 비교해보아도 그 차이는 확연합니다(*작가의 흥미로운 전언에 따르면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실린 몇몇 시편들 덕분에 북한에서 '장정일'은 '반미시인'으로 문학사에서 거명되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시인 장정일을 언제나 <무림일기>(1989)의 시인 유하와 나란히 떠올리게 됩니다(장정일 & 유하). 두 사람은 진작에 ‘시의 종언’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연찮게도 두 사람은 모두 시를 떠나게 됩니다(한 사람의 소설은 자주 영화화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영화를 만드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도 친연성은 없지 않네요). 


어쨌든 처음 두 권의 시집 이후로 저는 장정일의 책을 대부분 사들여서 읽은 것 같습니다. 그게 80년대말 90년대초인데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가는 장정일도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였죠. 개인적으로 매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서 읽은 두 작가여서 언제나 두 사람을 짝으로 떠올리게 됩니다(장정일 &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도 유행이었지만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서일기>를 통해서만 간접독서를 하게 됩니다. 해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쿤데라-하루키-장정일’이란 계열을 떠올리게 되는데 앞의 두 사람은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 아닙니까?(장정일은 “내 소설을 쓰레기”라고 토로하지만, 개인의 기억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좀 다른 것이죠.)

 

 

 

 

 

 

 

 

 

 

21세기가 시작하자 ‘행복한책읽기’란 출판사에서 ‘우리시대의 인물읽기’라는 기획서를 내는데, 그 첫권이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2001)였습니다(그 이전에 <작가세계> 1997년 봄호가 ‘장정일 특집’이었습니다). 장정일 문학에 관한 아주 유익한 자료가 되는 책이고 저는 바로 사서 읽은 책입니다(그 사이에 ‘거짓말 사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때문에 빚어진 필화가 있었는데, 분량상/시간상 생략합니다. 이때의 프레임은 ‘장정일 & 마광수’입니다. 이른바 ‘사회적 공모에 의해 암살’된 ‘수난자 장정일’인 것이고, 그가 마광수에 비유한 표현을 빌면 “우리시대의 모차르트”였던 것이죠).  

 

그 책의 기획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렇게 낯설었으면서도 또 그렇게나 빨리 새로운 세대에게 전파된 것이 장정일이었고 장정일의 문학이었다. 장정일 이후의 문학은 독자적으로 이미 상당히 세를 굳힌 듯하다. 그리고 어느새 그가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듯한 이즈음 우리가 그에 대한 책 한 권에 이르는 조명을 새삼 시도하는 것은 그가 일으킨 파장이 아직도 한때의 소동이 아니라 제대로 탐구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구광본_소설가)

요는 그가 세기말/세기초 한국사회의 ‘문제적 인물’이었다는 것이죠(‘우리시대의 인물’이었다는 것이고요). 그건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2002)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아시다피시 그는 그해 겨울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리하여 ‘장정일 & 노무현’이 되는데(대단한 거 아닙니까?), 장정일이 노무현과 함께, 노무현보다 먼저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혹 <공부>로 장정일을 처음 만나는 (87학번이 아닌) 87년생 독자들은 실감할 수 있을까요?


아무려나 두 사람은 ‘비주류’의 코드를 공유하는 우리시대의 화두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아시다시피 이 비주류성은 ‘장정일 & 김기덕’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공부>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런 책을 내게 된 것은 2002년 대선 때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집필실을 얻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옆 사무실의 중년들이 ‘노무현 그거 빨갱이 아닌가?’라며 성토하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장정일의 ‘공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우리사회의 ‘상식 혹은 희망’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닐까요?(출판사 문구로는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고 돼 있지만, 우리 사회에 언제 ‘인문학’이 만개하고, ‘상식 혹은 희망’이 만발했었는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그건 작가 자신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게,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그의 문학이 아니라 그의 <공부>입니다!

 

 

 

 

 


 

 

 

 

<공부>로 아주 넘어가기 전에 ‘소설가 장정일’도 잠깐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나 <보트하우스> 같은 작품을 좋아하고(<보트하우스>는 특히나 러시아문학과의 관련성이 많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온 편지>를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데(소위 장정일을 읽기 위한 코드를 다 ‘드러낸’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소설 대부분은 이젠 <선집>을 통해서만 읽어볼 수 있습니다(그래도 그는 ‘2만부 작가’였는데 말입니다!).



 

 

 

 

 

 

 

<중국에서 온 편지> 이후에 뜻밖에도(아주 뜻밖은 아니었지만) 작가는 <삼국지>로 나아갑니다(그는 “40세 때부터 <삼국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중년이라는 나이와 <삼국지>라는 역사 장르가 저의 독서 습관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적는다). 문화일보에 연재되는 걸로만 가끔 읽었을 뿐 저는 그의 <삼국지>를 완독하지는 않았습니다만(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려 10권이고, 저로선 꽂아둘 만한 서재가 없습니다), 이게 기본적으로 80년대 주류 작가였던 이문열의 <삼국지>를 겨냥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장정일 vs 이문열).

 

이 구도에 황석영의 <삼국지>가 끼어드는 바람에 작가로서는 ‘물 먹은’ 경우가 된 게 아닌가 싶지만(판매가 상당히 저조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시대의 삼국지 작가로서도 장정일은 앞 세대의 두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이문열-황석영-장정일). 하지만, 다른 작가들이 가지 않은 장정일만의 길을 그는 개척했는데, 그건 바로 ‘의사pseudo 저자’로의 길입니다.

 

 

 

 

 

 

 

 

 

지난 1994년 <독서일기> 1권을 처음 내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시인․소설가라는 꿈에도 원치 않았던 개똥 같은 광대짓과 함께 또 한권의 책을 출간하고자 머리말을 짜내고 있는 나는 ‘불행한 저자’이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pseudo 저자가 된다. 막연하나마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누가 얼굴을 똑바로 하고 자기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단어가 가진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강조는 나의 것)

 

 

 

 

 

 

 

 

그러한 그의 독서관은, 하지만 변화하게 됩니다. 재즈에서 클래식으로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이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일기> 10년째인 2004년에 낸 6권의 서문은 이렇습니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臆見)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대립쌍은 ‘시민 vs 우중’ 혹은 ‘좋은 시민 vs 나쁜 시민’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쾌락주의적 독서’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교육을 위한 ‘계몽(주의)적 독서’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의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거 같습니다. <공부>와 <일기7>에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두 가지 집필계획은 두 가지입니다(저로선 가장 관심을 갖는 대목입니다). 

 

(1)선정해놓고 못 다 쓴(혹은 날려먹은) 30여 가지 주제로 <공부>를 한권 더 쓰기(하지만 그는 “공부는 저의 평생 친구입니다. 이 말은 무지가 평생 저를 따라다닐 것이란 뜻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공부>의 길로 가는가, 다시 <일기>의 길로 가는가, 혹은 둘 다인가? 그는 또 "한 주제로 묶는 게 성실로 여겨졌다“라고 적었다. 가령 그가 “의식적으로 포기했던” 문학작품 읽기는 다시 시작되는가?) (2)2002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관찰한 소설(가제는 <서울 금병매>로 돼 있다. 그에게 2002년과 곧 있을 2007년의 대선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공부>의 마지막 마무리 또한 우연찮게도 2007년의 ‘아마겟돈’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독서/공부론과 인문서평의 자리에 오게 되면 작가의 경쟁상대는 달라집니다(흔히 리뷰어로 통칭되지만, 여기엔 ‘서평가-서평자-서평꾼’의 급이 있다). 장정일과 유사한 포지션을 점유하는 이는 도서/출판평론가 ‘표정훈 & 이권우’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2005)의 강유원입니다(둘은 62년생 동갑내기이다). 요컨대, ‘장정일 & 강유원’. 작가도 읽어보았을 텐데, 먼저 포문을 연 건 강유원입니다. 그는 96년에 나온 <장정일의 독서일기2>에 대한 독후감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그의 비판은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작가에 대한 사전이해가 거의 백지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두 번째 독서일기를 읽고 난 후 계속해서 독서일기를 사는 것은 책을 모으는 취미는 만족시켜 줄지언정 더 이상의 지식은 줄 수 없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독서일기를 읽었을 때나 두 번째 독서일기를 읽은 지금이나 놀라운 것은 장정일이 참으로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먹고살기에 별로 어려운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독서는 아주 폭넓은 듯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진 않다. 자신이 소설가이므로 당연히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다. 가끔 인문사회과학이 끼어 있다. 어쩌면 인문사회과학서적은 ‘젊은 시절’에 많이 읽었을 테니까 이제는 별로 안 읽는지도 모르겠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이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구슬은 많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또한 인문사회과학 서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내용 요약만을 하고 있는 것도 그가 책읽기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정일은 객관적인 데이터에 상당히 무관심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책>)

 

물론 우리는 <공부>와 <일기7>의 장정일이 더 이상 강유원이 비판하고 있는 장정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그 변화의 분기점은 <삼국지>인가, 혹은 2002년 대선인가?)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하지만 그 공부 때문에 부당하게 폄하되는 것은 없는 걸까요?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서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공부>, 머리말) 

그럼으로써 장정일은 지식인으로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그의 공부론과 지식인론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토론을 시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겨우...

07. 10. 06.

P.S. 곁가지 멘트들이 빠져서 토론문이 다소 싱겁게 읽힐 수는 있겠다. 작가에 따르면 시는 더 이상 쓸 수가 없고(그가 어느 책에선가도 적어놓은 것이지만, 그가 보기에 모든 시인에게 첫시집이 곧 '유고시집'이다. 이후엔 그보다 더 뛰어난 시집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고로,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부터 시인은 '현역'이 아닌 '명예시인'이 된다. 전세계의 12마리쯤인가 있다는 시마(詩魔)가 빠져나간), 생계 때문에 쓰기 시작한 소설은 그나마 괜찮을 걸 쓰게 될 때쯤 문학판이 파장 분위기가 돼 버렸다. 그가 가장 욕심을 부리는 건 '정식'으로 데뷔한 부문이기도 한 희곡쪽(언젠가는 걸작을 써주길 기대한다).

나는 장정일의 이 세 가지 자기상이 모두 의미가 있고 우리문학에 기여한 바가 있으며 따라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나도 우표 수집가를 존경하지는 않지만 시인은 존경한다. 명함에 '시인'이라고 새겨서 다니는 시인들 말고 진짜 시인들). 포럼이 끝나고 잠시 나눈 사담에서 작가는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희곡들에 대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경우 러시아에서는 연극으로도 공연된다고 알려주자 놀라워하기도 했다(이 작품은 곧 새 번역본이 출간된다). 그가 한번쯤 러시아에서 불가코프의 작품들이 어떻게 무대화되는지 볼 수 있기를 기원하지만(사실은 나도 못본 거 아닌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하니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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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정일판 우익청년 탄생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5 00:30 
    문학 신간을 자주 검색해보지 않아서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작가 장정일의 신간이 출간됐다.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2009). 제목만 봐서는 9월에 나왔어야 하는 책. 여하튼 오랜만이어서(10년만이란다!) 반갑다.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먼저 스크랍해놓는다.      연합뉴스(09. 11. 04) 10년 만에 새 소설 낸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 '아담이 눈뜰 때'
 
 
변호사A 2007-10-0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차에,
아주.. 아주.. 아주 잘 읽었습니다 ^_^

로쟈 2007-10-0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참에 몇 권 읽어보시길...

2007-10-07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7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07 22:56   좋아요 0 | URL
같은 '애독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