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의 양심: 지드와 윤동주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뒷부분은 아이스킬로스(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것이다.  

Α. 티탄족(거인족)과 올림포스 신들(제우스 패) 간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의 입장에 있었다(혹은 제우스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티탄족들이 패했어도 그들만은 지옥행을 면할 수 있었다. 현명하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들이 싸움에서 패배할 줄 알았기 때문이고, 무엇이든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에피메테우스는 누가 이길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프로메테우스가 티탄족인지라 올림포스 신들은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Β. 제우스 대신을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에게 어떤 제물을 어떻게 바치느냐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는 자진해서 조정의 역할을 맡고 나섰다. 커다란 소를 한 마리 잡아 인간의 몫과 신들의 몫을 만들어 놓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들을 골탕먹이려고 맛있는 살코기와 내장은 가죽에 싸서 거기에 곱창을 씌어놓고 또 한편에는 뼈를 기름진 비계로 덮어 맛있게 보이게 한 뒤 제우스에게 한쪽을 선택하라고 했다. 제우스는 겉만 보고 기름기가 덮여진 뼈를 골랐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속은 제우스는 화가 났다. 그렇잖아도 인간들의 타락과 비행을 언짢게 여겨왔던 제우스는 이번에야말로 인간들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인간들에게서 불을 빼앗아버렸다(제우스는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Γ. 평소에 제우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은근히 제우스를 무시해 왔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또 곯려주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들을 위해 신들의 화덕(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의 화덕)에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글쓰기, 셈하기, 가축 기르는 법, 집짓는 법,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법 등등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는 문화와 지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감히 신의 지위를 넘겨다보고 신과 대등하게 된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디오니소스의 재로 인간을 만들어서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자이다.       

Δ. 올림포스의 대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한 짓이 마땅치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벌을 주기로 하고 오케아노스 강 끝에 있는 코카서스 산으로 끌고가 바위에다 쇠사슬로 묶어 놓고, 그의 간을 독수리가 매일 와서 파먹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밤이 되면 간이 새로 돋아 나왔으니 프로메테우스는 수 세대에 걸쳐 독수리에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Ε. 한편 제우스는 여러 신들에게 부탁하여 에피메테우스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판도라를 만들어 그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신들의 선물을 담은 상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절대로 뚜껑을 열어 봐서는 안된다고 했다. 해서는 안된다는 일을 더하고 싶은 법이어서, 판도라는 기어이 뚜껑을 열어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속에 들어 있던 갖가지 질병, 재앙 등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닫아버려서 가장 게으른 희망만은 그 상자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Ζ.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첫째, 신이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해 죽어야 하고, 둘째, 신이 아닌 인간이 독수리를 죽이고 쇠사슬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켄타우로스 케이론이 그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했고,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여 그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화해하고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고문 겸 예언자로 존경을 받았다(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패망의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상이 대략적인 프로메테우스 신화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나 <일과 나날>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신화에 새로운 문학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이후 진정한 ‘신화’로의 길을 열어놓은 이는 아이스킬로스(B.C.525-455)이다.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도입부에서 제우스의 부하인 ‘힘’이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에게 건네는 말은 최고신(=절대권력)에 대항한 자의 죄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헤파이스토스, 아버님의 분부대로 이 악한을 철석 같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저 높은 낭떠러지 바위에 꼼짝 못하게 해놓으시오. 이놈이 훔쳐다 저 인간들에게 준 것이 바로 그대의 꽃, 만물을 뜻대로 이루게 하는 기술의 빛인 불이었으니까. 그 죄 때문에 이놈은 신들에게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거죠. 제우스 신의 권력에 굴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26쪽)   

전체 이야기 중에서 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장면은 징벌/고통(Δ)의 장면이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신들의 징벌은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신의 권력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은 그래서 ①신에 대한 반항과 ②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징한다. 아이스킬로스가 영웅적으로 그려내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면서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 “나는 제우스의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견뎌볼 테다.”(37쪽)  

그가 온갖 회유의 유혹을 물리치며 제우스의 권위에 맞서는 무기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제우스 패망의 비밀이다. 이 비밀은 제우스의 부친인 크로노스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기면서 아들에게 내린 저주이기도 한데, 오직 프로메테우스만이 그걸 알고 있다. 때문에 이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사자인 헤르메스에게 이렇듯 분격하여 말할 수 있다: “나를 이 무서운 쇠사슬에서 풀어주기 전에는 제 아무리 고문을 하고 꾀를 부려 봐야 내 입을 벌릴 수는 없을 걸. 그러니 멋대로 벗갯불을 뒤흔들어 보라지.(...) 그래도 나를 굽히진 못할 걸. 저를 왕좌에서 몰아낼 자가 누군지를 내 입에서 알아내진 못한다니까.”(54쪽) 그리하여 아이스킬로스의 이 비극은 프로메테우스를 응징하는 제우스의 무서운 번개와 벼락으로 마감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원래 올림포스 최고신인 제우스의 권위와 지성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도전의 부질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장중한 비극으로 재해석하면서 가져온 결정적인 전환은 바로 이러한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가치전도이다. 최고신인 제우스는 이 비극에서 절대권력의 폭군으로 그려지며,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반항적/박애적 행위 때문에 고통받는 영웅으로 부상한다. 그래서 관객으로부터 동정과 공감을 받게 되는 이는 단연 프로메테우스이며 그가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실현되지 않지만, 제우스와의 화해의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프로메테우스를 무작정 고통받는 영웅으로만 그리고 있지는 않다. 절대권력도 언젠가는 붕괴된다는 비밀을 프로메테우스가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언젠가는 해방될 프로메테우스를 우리는 예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중에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불의 운반자, 프로메테우스」는 몇몇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온전하게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게 된다.   

09.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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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간강사의 사회
강사 내모는 대학의 품격

이번주 신간 국내서 중에는 작년에 비정규 교수(시간강사) 문제를 다룬 프레시안의 연재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을 묶은 책도 포함돼 있다. 해가 바뀌어서 제목은 <비정규 교수, 벼랑끝 32년>(이후, 2009)이 됐다. 따로 서평이 뜨지 않아서 프레시안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9. 04. 25) 32년 동안 모두 알면서 말하지 않은 정답 

때때로 묻는 이도, 듣는 이도 답을 전혀 모르는 질문이 있다. 예를 들어 최근 강원도에서 잇따르고 있는 젊은이들의 자살에 대해 언론은 이렇게 보도한다. "도대체 왜일까?"

반면, 누구나 그 답을 알면서 아무도 답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2007년 2월, 한국에서 만4년 동안 비정규 교수(시간강사)를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한경선 씨. 비정규 교수의 자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며칠 전, 서울대 불문과 한 시간강사가 대학 화장실에서 자살했고, 2006년에는 한 서울대 강사가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많은 이들은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여서 학위를 따기 위해 십 년을 넘게 공들이고도 목숨을 끊는 것일까"라고. 우리는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이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걸까. 최근 출간된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김동애 외 31인 지음, 이후 펴냄)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쉽고도 충실히 답하기 위해 나온 책이다.

누구나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 책은 지난해 10월부터 <프레시안>에 실렸던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 연재를 추려 묶은 것이다. 비정규 교수는 물론 대학생, 학부모, 변호사 등 다양한 이들이 증언하는 비정규 교수들의 절망적인 현실, 그리고 예고된 어두운 미래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게 만든다.

대학에 다녔던 이들이면 한번쯤 들어봤을 비정규 교수의 비애. 누가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어떤 짓을 했고, 교수가 된 뒤 어떻게 바뀌었다더라 하는 류의 이야기, 그 뒷면에는 비정규 교수에 대한 상식 이하의 처우가 있다. 전국 각지로 뛰어다니며 강의를 하고도 차비와 밥값에도 못 미치는 연봉(공식 통계는 999만 원·실제 추정액 500여 만원)을 받고 연구실 하나 없는 '교수 아닌 교수'가 한국에는 7만 명 가량 있다.

시작은 3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7년, 지식인을 길들이고 저항 지식인을 제도권 밖에 두려던 박정희 정권은 대학 교원 범주에서 시간강사를 제외했다. 개정된 교육법 75조는 강사의 정의를 끝내 전임강사로 바꿨고, 전임자가 아닌 강사의 교원 지위를 빼앗았다. 결국 대학 강의의 절반을 맡으면서도 아무런 신분 보장도 받지 못하는 수 만명의 계약직 강사가 생겨났다.

책 곳곳에 나오는 문구처럼 누구나 '이대로 둬선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비정규 교수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지식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들의 교원 지위를 회복해야 하는 당위성은 사실 굳이 이렇게 많은 필자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언제든 계약이 해지될 수 있는 비정규 교수 본인들은 발언 자체가 생계와 직결돼 있었다. 전임 교수들은 이제 자신의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정규 교수의 처우 개선은 자신들의 밥그릇과 연결되는 문제였다. 교수와 대학 당국에 학점과 졸업을 맡겨 놓은 학생의 처지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비정규 교수를 채용하는 대학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리 만무했다.

배움의 추락, 해법은 간단하다

결국 변화를 외치는 비정규 교수들은 학교 밖으로 나섰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 소속된 비정규 교수들은 2007년 10월부터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농성 600일이 다되가는 현 시점에도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입법 발의를 했던 국회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 된 오늘도 이들은 언제 천막이 철거될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현실에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대학이 그 답으로 내놓는 핑계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바로 '돈'이다. 적립금이 수천 억원이 넘어가고, 그 돈으로 펀드를 굴리는 대학이 '돈이 없다'며 발뺌하고, 정부가 이를 옹호하는 가운데 더 이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최근 대학들은 보다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겠다며 계약 해지를 무기로 점점 더 많은 교원을 내몰고 있다. 그래야만 교수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과 연구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도 한다. 대학 자율화를 하겠다는 교과부는 지난해 기존에 교원 지위가 인정됐던 전임강사까지 교원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밝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학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는 정반대에 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시간강사와,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을 악용하며 청탁과 뇌물이 오가는 부조리한 교원 임용을 일삼는 교수와 대학의 만행 속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학문이 이뤄질 수 있을까. 대학 진학률 85%를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이뤄지는 배움의 실상에 대해서는 나몰라라하는 사회. 이제 악순환을 끊을 때다.(강이현 기자)  

09.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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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
    from Back To Basic 2009-04-26 13:39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 - 김동애 외 31인 지음/이후 작년 봄 에서 시간강사 특집을 준비할 때 관여한 뒤로 항상 마음의 짐이 되어온 것이 시간강사 문제이다. (언제부턴가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란 말이 좀 떠돌게 된 듯 한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제목은 내가 작년 봄에 교열보면서 지은 제목이다.) 공부를 계속 하려고 생각중이다보니 당장 미래의 생계와 관련되었을 뿐더러, '학생'의 입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비정규직..
 
 
빵가게재습격 2009-04-25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오랜만에 알라딘에 왔다가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 잘 지내시죠?^^ 글을 보고 있노라니, 박사 학위까지 따 놓고는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가 생각나서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책이 나왔다고 하더라, 대학이 무덤이라는 이야기인 것 같더라, 읽어봤냐 했더니, '난 이미 장례식 끝내고 탈상까지 마쳤다. 행복하다' 이러더군요. ^^;;;;
날씨만큼 좋은 소식도 드뭅니다. 늘 건강하세요.

로쟈 2009-04-26 10:32   좋아요 0 | URL
'습격' 나오셨군요.^^ 이왕 박사들이 많아진 김에 중고등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안일 듯싶은데(핀란드가 그렇다잖아요) 이것도 '재정' 운운하겠죠...

konstant 2009-04-25 23: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줄곧 오랫동안 눈팅만 하다가 댓글을 남겨봅니다.

몇년 전에 이와 비슷한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거기에 인터뷰한 한 시간강사가 강의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어서
아침마다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강의도 하느라
정작 자기가 하고픈 연구는 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빠듯한 삶 때문에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을 느낀다는 기사였어요.

제 주변에는 대학원을 다니는 선배들도 많고,
저 역시도 대학원 진학을 바라는 상황에서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학생은 그저 돈주머니로만 여기고,
시간강사는 노예처럼 다루면서
배때기만 채워 나가는 학교와 거기에 순응하고 나아가
앞장서 대변하는 많은 한심한 교수들.
비단 학교 내로만 국한될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기사에 나오듯이 해결책은 참으로 단순하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에 분노만 느끼게 돼요.

아, 그리고 이런 부패한 교수 사회를 볼때마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 오버랩 되네요.

로쟈 2009-04-26 10:34   좋아요 0 | URL
저도 동료 강사들이나 대학원생들 보면 좀 착잡할 때가 있습니다. '학문후속세대'는커녕 학문에 대한 환멸만을 키워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군자란 2009-04-26 16:33   좋아요 0 | URL
제 대학다니던 시절만 해도 대학원을 나와 시간강사를 하면 나름대로 희망이 보였는데 정말 지금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문제가 약간 마음이 미안할뿐 결코 자기 밥그릇을 조금이라도 나눌생각을 안하는 것이 솔직한 그들의 속내가 아닐까요.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쳐버릴 것 같은데 세상사가 다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아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로쟈 2009-04-26 20:09   좋아요 0 | URL
사실 거액의 대학등록금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도 '당하는 입장'인데, 계속 방치되고 있죠. 대학졸업장만 가지고선 취직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아직도 '수혜자' 논리가 횡행하는 게 기이한 노릇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26 21:28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면 우리나라 사학재단 이사장은 전부 탐욕스런 자들로 그려지더군요.학생과 학부모를 화수분 단지로 생각하나봐요.

로쟈 2009-04-26 21:53   좋아요 0 | URL
실제로 비리 재단들을 보면 전형적인 '포식자'들이죠...
 

중대 대학원신문에 번역과 관련하여 두 문학비평가의 '만담'이 실렸기에 옮겨놓는다(두 사람은 모두 지행네트워크의 멤버다). 첫머리에 '로쟈'란 이름도 나온다. 특별히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라는 문제의식에는 전폭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09. 04. 19)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

학문의 기반이 되는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학문은 번역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번역과 관련된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번호에는 번역이 갖는 의의와 한국 번역물 출판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오창은(이하 오) : 최근에 번역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어요.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랑시에르 논문의 번역을 두고 인터넷 논객 로쟈가 문제제기를 한 거죠. 그런데 진태원씨가 좋은 선례로 남을만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오역을 인정하고, 로쟈에게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독자에게는 사과를 했어요. 뿐만 아니라 정오표를 만들어서 인터넷에 뿌린 거예요. 물론 3쇄부터는 바로 잡겠다는 약속을 했고요.  

이명원(이하 이)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얼마 전에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는데, 그 책에서 김현은 김윤식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지라르 책의 번역을 문제 삼고 있더군요. 일단 김윤식 교수가 지라르의 프랑스어 저작이 아닌, 영문판 저작을 참고로 번역했고 게다가 발췌번역을 해놓은 터라 아주 심각한 오역이 발생했다는 비판이었어요. 그러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김현의 바슐라르 번역에 대해 동료교수인 불문과의 곽광수 교수가 비판한 것입니다. 김현의 번역 역시 오역 투성이라고 말이지요.  

오 : 번역과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죠.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등이 오역 논의가 전개된 바 있고, 2004년에는 자크 데리다의 <불량배들>이, 2003년에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논쟁에 휩싸였고요.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혹은 <천의 고원>도 번역과 관련된 대표적인 논쟁 사례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런 논쟁이 개별적 사례로 갑론을박하는 형태였고, 번역 문화 전체의 논의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 :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 상의 근본적인 문제―가령 번역불가능성의 문제―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작업의 힘든 과정이나 이를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역과 같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겁니다. 대학원생시절에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번역자 취급 방식이 사실 더 큰 문제에요. 제가 <악기사전>을 번역했다니까요. 글쎄. 

오 : 하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충분한 대우는 받으셨어요? 

이 : 천만에요. 역자도 딴 이름으로 나가고(아마 감수자였겠죠), 번역료 역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책이 제대로 출간되었는지도 확인해 본 바가 없고요.  

오 : 그렇군요. 이명원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문구의 <관촌수필>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1960~70년대 풍경인데, 조그만 쪽방에 앉은 두세 명의 번역자가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사기행위예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을 윤문해서는 새로 번역한 것인양 장사를 해 먹는 거죠. 한국의 번역문화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출판시장으로부터 박대 받으며 성장해 온 것 같아요. 번역이 언어의 문제이고, 두 개의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오한 지적 사유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어요. 출판사는 인부 부리듯이 번역자를 다루려고 하고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 언젠가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된 영미작품의 번역수준을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의 최초 번역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다 최초번역본을 토대로 베껴쓴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요는 출판학술계가 번역을 무슨 덤핑사업 취급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도대체 전문학자가 그 힘든 작업을 하면 뭐합니까. 소모되는 것은 시간뿐인데. 그런 점에서 보면 발터 벤야민 전집을 십수 년 동안 번역하고 있는 이화여대 최성만 교수는 그야말로 존경할 만한 분이죠. 

오 : 교수업적 평가나 임용에서도 번역은 전공논문, 단행본 저술, 학술활동과 창작 및 공연, 지적재산권 다음에 위치해 있는 실정이죠. 현실이 이렇다 보니 상업적 번역만 성행하고 의미 있는 번역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 전문학술서 및 고전에 대한 엄밀한 번역을 ‘박사학위’로 인정한다고 해요.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 한국에서도 미국ㆍ일본 등과 같이 주목할만한 학술적 번역을 높게 평가하는 학술문화적 풍토가 조성돼야 해요. 그래서 한국 학문의 자생성이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 이러한 사실과 함께 ‘번역어’의 성립에 깃든 근본적인 어려움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habitus’같은 개념은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습속’ 정도로 할 수도 있지만, 그랬을 때 이 개념의 생성적인 의미를 포함시킬 수가 없죠. 네그리와 하트의 ‘multitude’의 경우도 지금은 일반적으로 ‘다중’이라고 사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확정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오역의 문제에서 이런 개념의 근본적인 번역불가능성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을 형성하는 게 아닐까요. 

오 : 한 연구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국 번역의 문제는 ‘정확성과 가독성’에만 치우쳐있다는 것이라며 번역의 창조성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상투적인 번역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번역어를 개발한다든지 닫힌 언어가 아닌 열린 언어를 통해 의미를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요.   

이 : 사실 번역자들은 새로운 표현을 창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언어체계 바깥의 언어를 체계 안의 언어로 치환시키는 매우 고달픈 작업이지요. 그러면서도 원저작의 언어에 깃들어 있는 의미론적ㆍ뉘앙스적 퇴적물을 옮겨오는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저작을 번역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국어 번역어들이 다 상이합니다. 가령 들뢰즈 번역을 둘러싼 차이들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죠. 그러니까 어떻게 표준번역어를 설정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 : 그게 바로 근대학문 체계의 핵심인 ‘개념사’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한국적 개념의 창출이나, 한국 학문의 토대라는 것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번역’이라는 화두를 통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학계는 전반적으로 원전ㆍ원어 중심주의가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엄연히 번역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인용이 권장되고 있고 심지어 몇몇 교수ㆍ연구자들은 원서를 번역해 놓고도 학문적 공유를 위해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으로 소유한 채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시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번역의 가치보다 원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후진 학문사회예요. 한국 학문의 종속적 풍토가 ‘번역의 가치 재설정’을 통해 극복되지 않는 한 관성화된 수입 학문의 유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 번역작업은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의 토대입니다. 종교혁명 당시 자국어 성경번역도 그런 성격을 갖고 있었죠. 학자들 역시 자신의 번역행위가 학문적 축적의 중요한 매개고리역할을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식의 독점이 아니라, 그것을 접근하기 힘든 대중들에게 개방하는 일에 번역의 중심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오 :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번역에 대한 연구자들의 검증시스템도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이명원 선생께서 언급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가 그 좋은 예인 것 같아요.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이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러한 학계의 검증작업이 우리 번역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 : ‘번역학’이나 ‘번역론’과 같은 학문적 검토도 필요합니다. 최근에 몇몇 대학에 ‘번역학’ 전공이 개설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동시에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번역자를 존중하는 사회적 상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또 우리가 끝없이 외국저작의 번역에 의존하는 반면, 우리 저작의 해외번역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한계에 대한 자각도 드는군요. 

오 :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요. 

이 : 그래야겠군요. 사실 요즘 같은 때는 서로의 한국어도 번역이 안 되는 듯한 소통불능의 시대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생하셨어요. 

09. 04. 25.   

P.S. 대담 중에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란 말이 나오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내가 알기에 스피박은 예이츠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다(폴 드만이 지도교수였다). <그라마톨로지>로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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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재택하면서 원고들과 씨름하다 보니 시간 감각도 둔해지는 듯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도 아침 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다. 잠시 시간을 내 북리뷰들을 훑어보았는데, 이미 주중에 소개한 책들 외에 한권만 고르라고 하면 볼프강 쉬벨부시(쉬벨부쉬, 시벨부슈)의 <뉴딜, 세 편의 드라마>(지식의풍경, 2009)이다. '문화사의 거장'이라는 저자가 이번에 다룬 주제는 부제대로 '미국의 뉴딜.무솔리니의 파시즘.독일의 나치즘'을 비교한 것이다. 관련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4. 25) 루스벨트-히틀러-무솔리니…당신의 상식을 의심하라

“루스벨트와 무솔리니는 피를 나눈 형제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상식’을 의심할 것이다. “2차대전을 통해 자유주의를 지킨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독재의 대표인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이념의 대극점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딜, 세 편의 드라마>에서 이 말이 루스벨트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음을 확인할 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철도여행의 역사>나 <기호품의 역사> 등을 통해 문화사의 한 단면에 돋보기를 들이대던 볼프강 시벨부슈가 정치학과 역사학의 영역에서 다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 <뉴딜…>은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이 독일 출신 지은이가 1930년대 문헌들을 찾아 루스벨트의 뉴딜과 이탈리아 무솔리니, 그리고 독일 히틀러가 지닌 유사점을 설명해갈 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조롱받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들 체제가 대공황이라는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이용해’ 정권을 잡았고 ‘위기에 맞선’ 거대한 기념비적 사업들을 단행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고 밝힌다. 뉴딜의 상징인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 댐 건설은 독일의 아우토반, 이탈리아의 폰티네 습지 개간과 ‘상징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외에도 리더십, 선전과 언론통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세 체제가 지닌 유사함을 확인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 나라들에서 높은 상징성을 지닌 각종 캠페인이 강압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루스벨트의 블루 이글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그가 집권한 해인 1933년 7월 대공황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됐다. 이 캠페인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블루 이글 배지를 옷에 달고, 가게나 공장들은 포스터를 걸도록 했다. 이 상징물이 없을 경우 ‘우리의 적’이라고 공포됐다. 당시 <데일리 헤럴드>의 한 특파원은 “독일의 스와스티카(나치 갈고리 십자가)보다 블루 이글이 더 많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공통점은 이 체제들이 모두 이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체제’가 주지 못했던 것을 국민들에게 준 것이었다. 지은이는 이 체제들이 모두 ‘시장’이 아닌 ‘국민’을 중심 테제로 놓았으며,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무시받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서 취급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이 점이 이 세 체제가 공히 대공황 이후에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은 이유라고 해석한다. 

물론 지은이는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구축했다는 점도 역시 강조한다. 특히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정치적 자유를 폭력으로 억압했으나, 루스벨트의 미국은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 이들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상식’이 왜 지금은 ‘비상식’이 된 걸까? 지은이는 이를 이탈리아 및 독일과 2차대전을 치른 미국이 ‘유사성에 대한 기억’을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지은이는 실제로 2차대전 이후에는 이 체제들의 유사성을 다룬 글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현재 남북관계를 다루는 정부와 보수 언론의 비이성적인 ‘북한 때리기’를 보면, ‘남북의 평화공존’이라는 ‘우리의 상식’이 어느 틈에 ‘비상식’이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밀려온다.(김보근 기자) 

09. 04. 25.  

P.S. 시벨부쉬의 또다른 책으로 소개됐으면 싶은 건 <패배의 문화>(2004)다. 400여 쪽 분량. 그리고 이번주 나온 책으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외에 한권만 더 고르라면, 마이클 화이트의 <갈릴레오>(사이언스북스, 2009)가 단연 탐나는 책이다(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1587.html 참조).   

그리고 3순위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살림, 2009).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쓴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라 할 만한 책이라고(관련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1590.html 참조). 소개에 따르면, "1994년에 펴낸 이 책의 원제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다. 한국판이 부제로 쓴 것처럼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일종의 교양 역사서라 할 이 책이 가지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밑실은 영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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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 2009-04-25 23:34   좋아요 0 | URL
가끔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얼핏 느낀 점인데,
(특히 헐리웃 전쟁 영화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나지만)
2차대전이 '상식'을 넘어 현대의 또다른 '신화'가 된것 같아요.
마치 극악무도한 무리인 추축국을 상대로 숭고한 자유의 깃발 아래 뭉친
정의로운 연합국이란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저 뿐인가요?

연합국들도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추축국들의 공분할 만한 범죄를 정당화하는 건 아니구요.)
어차피 다 제국주의적이고 반민중적인 국가들일 뿐...

미국이야 2차대전 때 유럽의 상황을 관망하며 군수산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독일이 상선들을 격침시키고,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야 뒤늦게 참전했으면서 전후에 자유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영국은 전쟁 전 사회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해 나치의 팽창을 묵인했고,
소련은 나치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면서 이후엔 '대조국전쟁'이란
명목으로 신화화했잖아요...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전쟁 전엔 추축국들에 우호적이었구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건국 신화화하고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데 악용하구요.)

그러면서 거기에 정의의 이미지를 덧칠하는게 정말 어불성설이라 느껴져요.

그러고 보면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로쟈 2009-04-26 10:37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도 저는 이 책이 '뉴딜 신봉자'들에게 좀 읽혔으면 싶어요. '녹색 뉴딜'인가 뭔가도 있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4-26 21:26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공황기를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라고 규정하면서 자본주의가 파시즘과 뉴딜을 통해 이를 면해보려고 했다고 주장하던데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군요.

로쟈 2009-04-26 20:10   좋아요 0 | URL
소위 '근대의 쌍생아'론인가요.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도 이와 관련하여 필독서인데, 부실한 번역이 아쉽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26 21:25   좋아요 0 | URL
오...벅모스의 책도 궁금하군요.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더러운 포식자들의 사회

요즘은 TV 뉴스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라디오에서 시사뉴스를 듣곤 한다. 오늘 방송된 CBS 시사자키에서 경찰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중간발표에 대한 의견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CBS 시사자키(09. 04. 24) “故 장자연 수사결과,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민주당 김상희 의원


경찰이 오늘 장자연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9명을 형사입건했습니다. 그러나 장 씨의 유족들이 성매매 혐의로 고소했고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조선일보의 임원은 여기서 빠졌습니다. KBS 기자를 포함해서 장자연 리스트를 보도한 언론인들은 모두 불기소 또는 내사중지 처분으로 수사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언론사에도 성매매 예방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겠다고 발언했던 민주당 김상희 의원으로부터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경찰의 수사결과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예상됐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40일 동안 41명을 투입해서 조사한다고 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수사 브리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찰이 수사를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경찰 수사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혹이 증폭되고 경찰에 대한 불신만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장자연 씨 죽음을 경제적 죽음에 우울증까지 겹쳐서 복합적으로 자살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이것은 장자연 씨를 두 번 죽이는 처사입니다. 이런 수사결과를 내놓는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이런 커다란 권력형 비리, 뿌리가 깊었던 관행들을 수술해내야 할 작업이라면 처음부터 분당 경찰서에 맡기기엔 역부족이었네요.

▷ 김상희 의원>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두 개의 성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와대 행정관 성상납 비리이고요. 장자연 리스트라고 하는 소위 연예인 성 착취, 성 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안이 처리되는 걸 보면서 지금 경찰이 이런 걸 수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찰로 넘어가면 검찰에서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국민들은 다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박연차 리스트에서 보면 죽어 있는 권력에 대해선 아주 철저한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 해도 될 것까지 흘려가면서 하고 있는데, 소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공권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언론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막강한지 이번에 여실히 국민들이 깨닫게 됐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언론인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까 물론 언론인들이 제대로 알리바이를 증명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언론도 확실히 권력에 서 있다는 걸 느끼긴 느끼겠습니다. 김 의원님이 보시기엔 언론인 봐주기 같습니까?

▷ 김상희 의원> 언론인들의 수사 하나하나에 대해선 어떻게 수사가 됐는지는 저도 자세하게 모르기 때문에 모든 언론인을 다 봐줬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기엔 지금으로선 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그렇지만 지금 가장 국민들의 의혹이 컸던 부분은 성상납 받은 사람, 누가 성상납을 받았는가에 대한 부분 아닙니까. 성상납을 받았다고 하는 유력 언론사 사주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수사를 했어야 했는데, 제가 경찰 일문일답을 보니까 그동안 수사를 했는진 모르지만, 어제 경찰이 만나서 조사한 걸로 대답을 했는데요. 대답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에 물어보니까 '구체적인 사안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기자들이 알고서 '어제 하지 않았냐, 그런데 어제 하고 나서 하루 만에 불기소 방침을 세우는 건 면죄부 주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그것에 대해! 서는 만나기 전에 이미 수사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언제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니까 '본인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대답을 하는 경찰에 대해서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느낍니다. 경찰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국민들이 그렇게 의혹을 갖고 있는데 수사 못한 것 아닙니까.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 사람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했다는 건?

▷ 김상희 의원> 밝히질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밝힐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결국 그 말은 원하는 만큼만 했다는 거니까 그 사람이 5분만 하자고 하면 5분만 하고 나왔다는 뜻도 되는 겁니까?

▷ 김상희 의원> 그렇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정 중에 보니까 임원의 아들이 술자리에 있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도 수사가 제대로 안 됐습니다. 그런데 왜 중간수사를 하고 이 부분을 불기소 내사중지를 하는 건지 국민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장자연 씨가 오죽하면, 연예인의 꿈을 키웠던 이 젊은 여성 연예인이 오죽하면 죽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경찰이 이런 식으로 수사를 종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장자연 씨가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해 쓰면서 언론인에 관한 건 다 잘못 썼다고 받아들이기도 그렇고, 아무튼 경찰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앞이 안 보이니까 일단 일본에 있는 사람이 안 잡혀서 모르겠다고 하고 중단시켜놓고 차후 눈치를 더 봐야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장자연 씨에 대한 사건이 이번 발표로 어떻게든 큰 틀에서 마무리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파장이 남을 거라고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저는 굉장히 우리 사회가 위험한 사회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사회라는 건 신뢰가 없는 사회입니다.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 기대가 다 무너진 사회야말로 위험한 사회 아닙니까. 그것이 가장 우려할 사안이고, 누구도 자기가 억울한 걸 경찰이나 검찰에 호소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09. 04. 24.   

 

P.S. 알다시피 "<조선일보>는 지난 4월10일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그리고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의 신상철 대표이사를 고소했다. 이종걸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정희 의원은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조선일보>의 특정 임원이 이른바 ‘고 장자연씨 사건’과 관련된 것처럼 공표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였다." 이종걸, 이정희, 두 의원의 인터뷰 기사도 챙겨둔다(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4802.html). 더불어, '미디어오늘'에 실린 박경신 교수의 기고문도 옮겨놓는다.    

미디어오늘(09. 04. 24) 장자연리스트 실명보도는 언론사의 의무

미디어오늘 한상혁 논설위원은 지난 22일자 <바심마당-장자연리스트와 실명보도>를 통해 장자연 리스트의 실명보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내용이고 그 사실관계의 확인이 매우 어려운 반면 보도 결과 그들이 입을 명예의 손상이 심각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며 “언론의 윤리의식”을 칭찬하였다.

언론사들은 충분히 장자연 리스트 실명공개를 할 수 있었다. 현행법상 ‘오로지 공익을 위한’ 진실 공개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면책된다. 헌법재판소는 면책조건으로서의 ‘공익’은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하였고 대법원은 심지어 언론보도는 공익성이 추정된다고까지 판시한 바 있다. ‘국내 유력 언론사 대표가 자살한 연예인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았는가’는 어떤 법적 해석으로도 공적 사안이며 이에 대한 진실의 공개는 당연히 면책된다. ‘실제 성상납을 받았는가’는 ‘사실관계의 확인’이 어렵겠지만 ‘그러한 문건이 있다’는 보도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며 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합법적이다.

혹자는 ‘A가 그러는데 XYZ라고 하더라’ 식의 소위 전재보도도 XYZ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다면 허위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편다. 검찰의 현재까지 기소관행상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XYZ라는 명제 자체가 공적 사안이고 ‘A에 의한 제보’ 자체도 공적 사안이며 제보내용이 틀렸을 가능성과 함께 균형있게 전달된다면 위와 같은 보도는 면책이 된다. 

성상납이 해당 공인의 ‘공적 사안’이 아니라 ’사생활’이라서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단순논리로 따지자면 모든 범죄는 본질적으로 모두 ‘사생활’이다. 도둑은 들키지 않으려고 어둠을 타고 다니고 뇌물은 들키지 않으려고 밀실에서 수뢰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 대한 고발이 사생활침해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범죄행위나 범죄의심행위에 대해서는 ‘사생활’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확립되어 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범죄발생의 개연성이 있는 공간이나 물건에 대해서는 국가는 영장을 받아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익성의 면책을 받아내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실명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사들에 대해서는 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호소하고 싶다. 암흑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권력비리에 대한 고발은 확신을 주지 않는 충분하지 못한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노회찬 의원이 안기부의 불법도청파일 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떡값검사’ 실명을 공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실체적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규명을 해달라는 사회에 대한 요청이었다.

노회찬, 장자연, 이종걸 모두 죽음 또는 형사처벌을 무릅쓰고 공적 비리에 대한 단서를 공개했다. 사람들이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언론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이들 내부고발자들의 단말마 비명과도 같은 아니 유언과도 같은 제보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못한다면 언론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이미 누구인지 다 아므로 실명의 활자화는 실효성이 없고 관음증만을 충족시킬 뿐이다’라는 반문은 무책임하다. 몇몇 네티즌들이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저기 실명을 올렸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알게되어 ‘○○일보 ○사장’라고 그나마 쓰게 된 것이다. 타인들의 용기있는 고발이나 받아먹겠다는 것이 언론의 자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실효성’이 아니라 원칙과 상징의 문제이다.

명백히 공익적인 진실을 타인에게 불리하다고 밝히지 못하는 국가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과연 ‘명예’와 ‘위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언론은 익명보도에 대해 독자들에게 미안해할 일이지 ‘윤리의식’을 운운할 일이 아니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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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4-24 23:51   좋아요 0 | URL
결론 나기 전에 이미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죠. 신기하죠? 웃어야 하나...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쓴웃음이죠..

비연 2009-04-25 13:25   좋아요 0 | URL
우리를 바보로 아나 싶습니다...;;;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졸'로 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