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것도 며칠 늦어졌다. 날씨는 진작부터 여름이었지만, 막상 6월 진입하니 느낌이 또 다르다. 이젠 '땀 흘려' 책을 읽어야 하는 계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그 전에 어떤 책들이 나와 있는지 먼저 둘러보는 게 좋겠다.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추천한 책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내 어머니의 연대기>(학고재, 2012)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일본의 국민작가라 한다. 국내엔 <둔황>(문학동네, 2010), <칭기즈칸>(선영사, 2010) 등이 더 소개돼 있다. <내 어머니의 연대기>는 자전소설로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5월에는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사계절, 2011)가 출간됐었다. 올해 나온 책으론 강제윤의 <어머니전>(호미, 2012)과 <김용택의 어머니>(문학동네, 2012)가 지난달에 나왔다. 물론 5월이 가정의 달이었기에. 카네이션 값 정도로 책 한권 더 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류쨔이푸의 <쌍전>(글항아리, 2012)이다. 제목의 쌍전은 <수호전>과 <삼국지>를 가리킨다. 여느 책과 다르게 이 두 고전을 맹렬히 비판하는 게 특징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상당한 매력이 있어 분명히 사람들을 황홀케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어둡게 하는 매우 위험한 책이라는 것이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우리가 읽은 고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류짜이푸의 책으론 미국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강의하는 딸 류젠메이와 나눈 편지를 옮긴 <삶을 안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글항아리, 2012)도 같이 나왔다. 언젠가 마이리스트에서 같이 묶은 적이 있지만 같은 세대 중국 지식인 첸리췬의 <내 정신의 자서전>(글항아리, 2012)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음 거기에 더 보태자면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문학동네)가 드디어 완간됐다. 작년 여름에 첫권이 나오고 지난달에 마지작 3권이 나온 것. 올 여름 독서의 강력한 '원정군'이지 않을까 싶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책은 줄리언 바지니의 <에고 트릭>(미래인, 2012)다. 국내에 자주 소개되는 대중적인 철학자인데(철학 대중화에 애쓰는 철학자) 개인적으론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에 해제를 붙이기도 해서 더 친숙하다. 제목 그대로 '자아'란 무엇인가를 다룬 책. 자아의 문제를 신경과학, 사회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서 철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간 흥미로운 탐구서란 평가다. 사회학쪽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앤서니 엘리엇의 <자아란 무엇인가>(삼인, 2007)도 같이 떠오른다.

 

 

덧붙여 6월에 읽을 만한 철학자로는 단연 마이클 샌델과 슬라보에 지젝을 들고 싶다.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와이즈베리, 2012) 홍보를 겸하여 현재 방한중이고(개인적으론 이번에 인터뷰할 기회도 가졌다) 지젝은 이달말에 방한할 예정이다. 자주 오는 건 아니므로 이번 기회에 책으로 안면을 터두는 것도 좋겠다. 지젝의 경우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부터 손에 드는 걸 추천한다. 샌델의 데뷔작 <정의의 한계>(멜론, 2012)는 가장 '철학적'인 책인데, 개인적으로 아직 완독을 못했다. 6월엔 시간을 내봐야겠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추천한 책은 맥스웰 맥콤스의 <아젠다 세팅>(엘도라도, 2012)이다. 찾아보니 <현대사회와 여론>(한울, 1995)이란 책이 소개됐던 저자다. 소개에 따르면 "맥콤스 교수는 196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채플힐 연구팀을 주도하여 언론이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아젠다 세팅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저자는 그 후 30여 년간 아젠다 세팅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풍부하게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말하자면 '아젠다 세팅'에 관한 최고 전문가인 셈. 그렇잖아도 연말 대선을 앞두고 아젠다 '세팅'이나 '선점' 문제가 자주 화제에 오를 테니 미리 '선점 독서'를 해두는 것도 좋겠다.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론 미국 사회에 대한 책 두 권이다.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갈라파고스, 2012)와 매트 타이비의 <오 마이 갓!뎀 아메리카>(서해문집, 2012). 모두가 반면교사 거리가 될 만한 책들이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추천한 책은 베스트셀러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의 저자 토드 부크홀츠의 <러시>(청림출판, 2012)다. "도전과 경쟁의 삶이 바로 행복"이라고 설파하는 책. 반대의 입장에서 시장과 자유경쟁이라는 신화를 비판한 저스틴 폭스의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랜덤하우스코리아, 2010)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제목에 이끌려 얼마 전에 구입한 책이다. 덧붙이자면 <죽은 경제학자의 망할 아이디어>(비즈니스맵, 2012)도 같이 구입했다.

 

 

 

6. 과학

 

김웅서 위원이 고른 책은 김병소의 <풀잎 위에 알고리즘>(해마을, 2012)이다. '풀과 꽃들의 디자인 자연 속에 아름다운 수학과 생명의 의미들'이 부제. 풀잎(식물)과 알고리즘(수학)을 같이 다룬 책으로 "들판이나 산에 갈 때 식물도감과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낭만적인 수학책"이라고. 수학 교양서로 장우석의 <수학, 철학에 미치다>(페퍼민트, 2012)도 눈길을 끈다. 개인적으론 로버트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에이도스, 2012)를 이달에 읽어보려고 한다. 측정 또한 수학과 무관한 영역은 아니므로 관련서라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고른 책은 박삼철의 <도시 예술 산책>(나름북스, 2012). 한낮의 땡볕이 아니라면 6월은 걷기 좋은 계절인데, 그에 맞는 책이라고. "지금 당장 걷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미술 안내서가 되어 줄 책".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시를 주제로 한 책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앤 미코라이트의 <도시를 보다>(안그라픽스, 2012),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에서 엮은 <도시 속의 역사>(라움, 2012) 등이 최근에 나온 책.  

 

 

개인적으론 최근에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대한 해설서로 박정태의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말하다>(이학사, 2012)가 나왔기에 읽어보려 한다. 베이컨의 그림도 오랜만에 볼 겸.

 

김수영을 위하여 

 

8. 교양

 

교양분야의 책으로 내가 고른 건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천년의상상, 2012)다. 추천사는 이렇게 적었다.

김수영은 누구였던가. 그의 시는 무엇이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저자는 한마디로 ‘자유’라고 말한다. “김수영을 읽어 낸다는 것. 그것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하는 행위다.”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 그것이 자유이고 자유의 의지다. 남을 흉내 내는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제대로 살아내겠다는 의지. 저자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갔던 김수영의 시와 삶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그러한 삶의 초상을 그린다. 시인의 초상을 통해서 우리들 각자가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살 것을 권유한다.

그렇게 적고 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지난달엔 <김수영> 전집을 다시 구입했다!

 

 

 

9. 실용

 

손수호 위원이 추천한 책은 김용규의 <숲에서 온 편지>(그책, 20120)다. "2009년에는 <숲에게 길을 묻다>를 내기도 한 저자는 충북 괴산의 군자산 자락에 ‘백오산방(白烏山房)’을 짓고 5년째 혼자 살면서 농사와 저술, 강연을 겸업하고 있다" 한다. 조금 뜬금없을지는 모르지만 체호프의 드라마 <숲귀신>(<바냐아저씨>는 <숲귀신>의 개작본이다)과 같이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10. 12세기 혁명

 

내 맘대로 고르는 이달의 주제는 '12세기 혁명'이다. '12세기 르네상스'라고도 부르는 듯하다. 개인적으론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때문에 '급' 관심을 갖게 된 주제다. 그래서 급하게 찾은 책이 로버트 스완슨의 <12세기 르네상스>(심산, 2009)와 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동문선, 1999) 등이다. 이달에 다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생각난 김에 주제로 정해놓는다. 독서 압박용이다.

 

12. 06. 03.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론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고른다. 이유는 딱히 없다. 아니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걸 읽고 다시금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엊그제 일이긴 한데, 그간에 새 번역본이 여럿 더 나온 것도 자극이 됐다. 예전에 읽어보려고 했을 때는 <유령의 집> 같은 제목으로나 번역돼 있었다.

 

 

아,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서도 헨리 제임스에 관해 장이 간주곡으로 하나 들어가 있다. 지젝이 주로 다루는 건 <비둘기의 날개> 같은 작품이지만 헨리 제임스의 문학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첫번째로 고른 책이 <나사의 회전>인 것이고. 사실 더 읽어보고 싶은 건 그의 최고작이라는 <여인의 초상>이지만, 오래전에 절판되고는 나올 기미가 없다. 이 또한 세계문학총서에 빨리 포함되면 좋겠다. 아래는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여인의 초상>(제인 캠피온 감독)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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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에 잠시 누리는 '망중한'이 이주의 책을 고르는 일인데, 이번주엔 눈길을 끄는 책이 많지 않을 뿐더러 중구난방이다. 겨우 수습하는 모양새를 만드느라 타이틀책으로는 김경일의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푸른역사, 2012)을 고른다. '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한국의 풍경'이 부제다. 저자의 전작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푸른역사, 2004)에 이어지는 책이라고.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후스의 <백화문학사>(태학사, 2012)가 그 뒤를 잇는 책이다. "근대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본 최초의 중국문학사"라고 소개된다. 927쪽 분량이니까 짐작엔 이주에 나온 가장 두꺼운 책일 듯싶다.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길, 2012)도 이주의 책으로 골랐다. '이미지의 정치학'이란 부제와 목차에 이끌려 주문했는데, 어떤 책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겠다. 씨네21 필진들이 쓴 <시네마 톡>(씨네21북스, 2012)은 오랫만에 고르는 영화책이고, <최초의 것>(지식트리, 2012)는 독일의 고고학자가 쓴 책이다. 지난주의 <크로마뇽>(더숲, 2012)에 이어서 고고학 책들에도 눈길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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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한국의 풍경
김경일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6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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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백화문학사
후스 지음, 강필임 옮김 / 태학사 / 2012년 5월
38,000원 → 34,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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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의 잔존- 이미지의 정치학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5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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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비꼴라쥬 시네마 톡- 영화가 끝난 뒤 시작되는 진짜 영화 이야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5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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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문지 공간(53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 철학자 슈스터만의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소개된 책들과 함께 언제 통독해보면 좋겠다.

 

 

 

공간(12년 6월호) 삶의 미학

 

<프라그마티즘 미학>과 <몸의 의식>이 국내에 소개됨으로써 이름을 알린 미국 철학자 리처드 슈스터만의 새로운 책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은 제목보다 ‘예술의 종언 이후 미학적 대안’이란 부제가 먼저 눈길을 끈다. ‘예술의 종언’론에 대한 비판과 ‘미학적 대안’의 제시가 저자의 주된 관심사라는 걸 시사해준다. 예술의 종언이란 무엇이고 가능한 미학적 대안이란 또 무엇인가.


예술의 종말에 대한 주장은 19세기초 헤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예술이 더 고차원적인 단계에 그 역할을 인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일종의 바통터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고대의 예술과 중세의 기독교, 그리고 근대의 철학이 그렇게 정신의 역사라는 레이스의 주자들이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한때 예술에 형식적 힘을 부여했던 정신의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기독교를 거쳐 철학의 몫으로 돌려진다. 전성기를 지난 예술은 비록 계속 존속하더라도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곧 예술의 종말이다.


20세기 들어서 새로운 예술의 번성과 함께 잠시 주춤하던 예술의 종말론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다시금 표명되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은 두 가지 종말론적 서사를 정식화하는데,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적 아우라의 쇠퇴를 가져옴으로써 예술이 가치의 숭고한 영역에서 물러나는 것이 종말의 한 양상이라면, 무질서한 정보의 범람 속에서 전통적인 미적 경험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또 다른 종말이다.


분석철학자로서 이러한 종말론에 가세한 이가 아서 단토이다. 단토는 헤겔주의에 입각하되 예술의 독자적인 역사를 해명하고자 한다. 무엇이 하나의 대상을 예술로 만들며 그것이 왜 예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예술사의 진화동력을 ‘미메시스’로 규정한다. 얼마만큼 닮았는가가 예술적 형상화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 복제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닮음을 발전의 척도로 간주할 수 없도록 만들며 이에 따라 예술은 자연스레 종말에 이른다.


역사철학적 관점과는 별개로 제도적 시각에서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예술을 특별한 사회 역사적 제도로 보는 시각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하며 근대성의 기획과 함께 강화되다가 포스트모더니티의 도래와 더불어 종말을 맞는다. 예술이 근대성의 산물인 만큼 근대성의 종언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슈스터만은 이러한 예술 종말 서사를 용인하지 않는다. 제한적으로 규정된 예술의 종말이 예술 전체의 종말을 의미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이 미적 경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도 미적 경험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예술의 갱생 에너지는 다 소진된 것이 아니다. 폭넓은 미적 경험과 미적 가치 개념의 회복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슈스터만의 ‘프래그머티즘 미학’은 미적 경험이 근대성의 구획을 넘어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성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은 그 이후에도 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비식별성’을 비판한다. 단토는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 곧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상품 브릴로 박스를 지각적 속성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적 경험은 예술을 적절하게 식별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지각’이 아닌 ‘해석’의 몫이 되며 감성학으로서 미학은 이제 비평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단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슈스터만은 이 비식별성 문제를 대상이 아닌 주체에 적용해보자고 제안한다. 매우 강렬한 예술작품에 대해서 동일한 해석을 제시하는 두 명의 관람자가 있는데, 한명은 그가 보고 해석하는 대상에 전율을 느끼는 인간이고, 다른 한명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지각 정보를 처리할 뿐인 사이보그이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해서 사이보그가 예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면 핵심은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경험이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양되고, 강렬하며, 유의미하고도 정감적인 경험”으로서 미적 경험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때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거꾸로 미적 경험이 여전히 유효하며 계속 보존될 수 있다면 예술은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T. S. 엘리엇의 말을 빌면, “종말은 또 하나의 시발점이다.”


바로 그러한 견지에서 슈스터만은 자신의 이론적 기획이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예술과 삶을 더욱 밀접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미학적 대안은 ‘프래그머티즘 미학’과 ‘몸미학’이란 이름으로 이미 정식화돼 있으며 <삶의 미학>을 그것을 더욱 확장하려는 시도들을 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에서 컨트리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의 도시미학에 대한 성찰에서 문화다원적 자기창조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실천은 여전히 살아있다.

 

12.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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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인물비평가' 강준만 교수의 신작이 나왔다. <멘토의 시대>(인물과사상사, 2012). 제목이 친숙할 만큼 '멘토'란 말은 우리의 일상어가 됐다. "저자가 언급한 대한민국 대표 멘토는 안철수, 문재인, 박원순, 김어준, 문성근, 박경철, 김제동, 한비야, 김난도, 공지영, 이외수, 김영희 등 12인이다. 멘토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과 철학을 집중 분석하면서 그들이 왜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논한다." 출판쪽만 하더라도 아예 '멘토'란 분류 카테고리를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멘토의 시대>가 나온 김에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멘토'로 분류될 만한 책들을 골라놓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가장 반응이 좋은 책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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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의 시대- 강준만이 전하는 대한민국 멘토들의 이야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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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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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100년- 오연호가 묻고 법륜 스님이 답하다
법륜.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2년 05월 31일에 저장
구판절판
진실유포죄- 법학자 박경신, 대한민국 표현의 자유 현주소를 말하다
박경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2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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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8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을 골랐는데, 생소한 이름이지만 올 상반기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저자다. 데뷔작 <야전과 영원 - 푸코, 라캉, 르장드르>(2008)도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르장드르'란 생소한 이름은 그의 책에서 처음 접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바로 그런 데 있지 않나 싶다. 푸코나 라캉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지만, 프랑스의 법제사가이자 정신분석가 르장드르는 우리에게 소개돼 있지 않다. 사사키 아타루의 글은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 2012)에도 포함돼 있다.

 

 

 

주간경향(12. 06. 05) 문학은 혁명의 힘이다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저자는 낯설고 제목은 오리무중이다(파울 첼란의 시구절이라 한다). 하지만 무심하게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자르기는커녕 책을 집어든 손이 무척이나 대견하게 여겨지는 책, 오랜만에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대체 어떤 책인가. 그나마 단서가 되는 건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부제다. 하지만 넘겨보면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같은 책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과 혁명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 자체의 혁명성을 다룬다. 저자의 주장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건,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닷새 밤 동안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주장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책을 읽어버렸다는 것’으로 다시 새기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야 말았다!”는 느낌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광기와 함께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독서의 즐거움은 신조차도 선망하는 어떤 것이다. 최후 심판의 날에 책을 옆구리에 끼고 온 우리를 보고서 신은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상상한다.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곧 책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에겐 불멸의 영광도 필요치 않다!


책을 읽고 쓴다는 게 어째서 그토록 대단한가. 그 자체가 혁명이고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령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은 한마디로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그가 한 일은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궁극에는 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세계가 그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가 미쳤거나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농민의 아들에 불과했던 루터지만 성서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교황의 방해자가 되었다. 자신이 읽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책을 읽은 이상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루터는 말했다. 대천사에게서 ‘읽어라’는 계시를 받았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그는 신에게 선택돼 읽으라는 절대명령을 받는다. 문맹이었던 무함마드가 결국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고 잉태한 것이 <코란>이고 그로써 이슬람 세계를 만들어낸다. 무함마드의 ‘혁명’이다. 저자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거듭 주장하는 근거다.


이러한 혁명의 ‘본체’로 저자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11세기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망각에 묻혀 있던 이 로마법을 바탕으로 교회법을 대대적으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렇게 해서 집성된 것이 12세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우스의 교령집이다. 이 새로운 법을 기본으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립하고 바로 이 교회가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근대국가만이 아니다. ‘준거를 명시하다’는 실증주의 역사학  또한 법학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다. 더 나아가 12세기 혁명으로 탄생한 법학이 유럽의 첫 ‘과학’이며 모든 과학의 원천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한 변화를 낳은 혁명의 실상은 사실 수수하다. 단지 중세의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들이 홀로 책장을 넘기며 법문을 고쳐 써나간 것이니까. 사사키 아타루는 그러한 혁명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철학이 끝났다거나 문학이 끝났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체온을 약간 상승하게 해주는 책이다.

 

12. 05. 29.

 

  

 

P.S. 아무래도 책의 압권은 '12세기 혁명'을 다룬 부분인데, 내막을 좀더 알고 싶어서 몇권의 책을 더 주문했다. 호르스트 푸어만의 <중세로의 초대>(이마고, 2003)와 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동문선, 1999), 로버트 스완슨의 <12세기 르네상스>(심산, 2009) 등이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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