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한 주가 지난 듯하다. 날도 더웠지만 정신없는 일정의 연속이어서 서재에 글을 거의 올리지 못했다.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는데, 일년에 한두 번 갖는 휴가 때도 이보다 오래 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정신없게도 배송주소를 확인하지 않는 바람에 몇 개의 주문은 엉뚱한 주소로 날아가서 수습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의 일이다. 정신을 좀 가다듬고 '컴백홈'하는 기분으로 이주의 책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제목은 '빅토르 최의 삶과 음악'을 다룬 책, 이대우 교수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뿌쉬낀하우스, 2012)에서 가져왔다. 지난주에 주문한 책인데, 더위를 먹었는지 오늘에야 배송이 됐다. 빅토르 최의 삶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의 노래 가사들이 번역돼 있다. 나처럼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반가운 선물 같은 책. 표제가 된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jQV5VXfKDYc&feature=relmfu 에서 들어보시길.

 

 

나머지 책 네 권은 과학책 두 권과 한국사 책 두 권이다. 마시모 파글라우치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부키, 2012)는 사이비과학의 함정을 비판하고 해부하는 책. 최근 '시조새 논란'과 맞물려서 시의성까지 얻게 된 책이다.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12)은 재번역돼 나온 진화심리학 교과서. <마음의 기원>(나노미디어, 2005)라고 나왔던 책이다. 한성훈의 <전쟁과 인민>(돌베개, 2012)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을 다룬 묵직한 책이다. "한국전쟁과 북한 연구의 개가"(박명림)라는 평가다. 그리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권헌익 교수의 <학살, 그 이후>(아카이브, 2012)는 베트남전의 전쟁 후유증 다룬 책으로 인류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기어츠상' 수상작이다. 언젠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적이 있는데, 입소문으로만 듣던 책이 번역돼 반갑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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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빅또르 최의 삶과 음악
이대우 지음 / 뿌쉬낀하우스 / 2012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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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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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화심리학- 마음과 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데이비드 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최재천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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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민-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
한성훈 지음 / 돌베개 / 2012년 6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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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이긴 하지만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플라톤에서 푸코까지>(세창출판사, 2012)다. 부제는 '철학적 기질 혹은 열정'.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는 서구의 주된 사상에 대해 ‘기질 혹은 열정’이라는 독특한 측면에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서구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19명의 학자를 선택하여 자신의 어휘와 특유한 관점에 따라 비교적 간결하게 그들의 사상을 펼쳐 보이며 철학사를 일별한다." 짐작엔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서는 가장 '대중적'이지 않을까 싶다. 겸사겸사 '슬로터다이크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는다. 2권이 나오기도 전에 1권이 절판된 <냉소적 이성 비판>(에코리브르, 2005)의 '만행'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상기해두고자 한다(그야말로 냉소적 출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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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서 푸코까지- 철학적 기질 혹은 열정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김광명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2년 6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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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반지- 세 일신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제안
패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두행숙 옮김 / 돋을새김 / 2009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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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의 밀착- 지구시대에 대한 철학적 성찰, 다산 기념 철학 강좌 8
패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한정선 엮음, 권대중 외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9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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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페터 슬로토다이크 지음, 이진우 외 옮김 / 한길사 / 2004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2년 06월 1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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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 다섯 권을 고르는 게 식은 죽 먹기일 때도 있지만 간혹 난감할 때도 있다. 눈에 띄는 책이 중구난방일 경우인데, 이번 주가 딱 그렇다.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와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를 제외하고 다섯 권을 추렸다. 아직 주문하지 않았거나 내주에나 배송받을 예정인 책은 빼고 학술적인 책은 보류한 결과다(가령 <개념과 역사, 근대 한국의 이중어사전1,2>(박문사, 2012)과 해럴드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문학과지성사, 2012)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타이틀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마음산책, 2012)에서 가져왔다.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발표한 마지막 작품 <솔로몬 왕의 고뇌>(마음산책, 2012)도 이번에 같이 나왔고, 둘다 오늘 받아볼 예정이다.

 

 

스펜서 웰스의 <판도라의 씨앗>(을유문화사, 2012)은 '농업 문명의 불편한 진실'이란 부제 때문에 고르게 됐다. "농업의 발명과 연관하여 야생 동물의 가축화, 도시화와 계급 구조의 탄생, 변질된 종교 원리와 근본주의, 비만이나 당뇨병과 같은 질병, 불안과 우울과 같은 정신질환, 군대와 전쟁 등을 진화,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인류학자인 저자의 책으론 <최초의 남자>(사이언스북스, 2007),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말글빛냄, 2007)이 번역돼 있다. 윌리엄 피터스의 <푸른 눈, 갈색 눈>(한겨레출판, 2012)은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수업 이야기'가 부제다. '삐딱한 철학자들'의 영화읽기를 모은 <청춘의 고전>(알렙, 2012)은 프레시안과 상상마당이 함께 진행한 강연프로젝트를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독과 도>(북노마드, 2012)는 '파란여우'님의 '인문 공감 에세이'.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라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절망을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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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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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6월 16일에 저장

판도라의 씨앗- 농업 문명의 불편한 진실
스펜서 웰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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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푸른 눈, 갈색 눈-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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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청춘의 고전
이순웅, 김성우 외 / 알렙 / 2020년 2월
11,000원 → 11,000원(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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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두 종의 번역판으로 다시 읽고 오늘 아침에 쓴 글이다. 지면이 약간 개편되면서 다음회부터는 '번역' 문제를 좀더 다루게 될 예정이다.

 

 

 

한겨레(12. 06. 16) 오만이 부른 파멸…그때야 깨달은 ‘행복의 조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제목대로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딸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안티고네>는 안티고네만의 비극을 다루진 않는다. 오히려 초점은 외삼촌이자 테바이의 왕인 크레온에게 맞춰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두눈을 찌르고 방랑길을 떠난 뒤,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놓고 서로 적이 돼 싸우다 둘 다 죽고 만다. 그에 따라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치르게 하되 적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장사는 허용하지 않는다. 원수는 죽어서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의 금지에 맞서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한다. ‘국법’을 어기게 될지라도 그것이 가족의 도리이자 인륜이라고 생각해서다. 그걸 막을 권리가 크레온에겐 없다고 안티고네는 믿는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이러한 대립은 흔히 ‘가족의 법’ 대 ‘국가의 법’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이해돼 왔다. 사적인 윤리와 공적인 법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명령을 어기고 오빠를 장사지내려다 잡혀온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포고보다 ‘신들의 법’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고, 크레온은 그런 안티고네를 오만하다고 비난하며 지하 동굴에 산 채로 가둔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얼핏 ‘동등한 권리를 지닌 두 원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크레온의 법에 끝까지 동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은 필요하지만 모든 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크레온 자신조차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서 그의 처사가 신들의 분노를 살 거라는 충고를 듣고는 마음이 흔들린다. 죽은 자를 짐승의 밥이 되게 함으로써 또 죽이는 건 결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며 저승의 신들에 대해서도 불경한 폭력이라는 게 테이레시아스의 충고다. 자기의 고집을 꺾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자칫 자신의 오만이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크레온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아, 괴롭구나.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한 결심에서 물러서노라. 무리해서 필연과 싸워서는 안 되는 법이니.”

 

하지만 크레온의 회심이 그를 파멸에서 구하지 못한다는 데 <안티고네>의 비극이 있다. “국가는 지배자의 소유”이기에 도시 백성들의 뜻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이 권력자는 결국 자신의 오만에 대한 무서운 대가를 치른다. 동굴 무덤에 갇힌 안티고네가 목을 매 자살하자 약혼자인 아들 하이몬이 분을 못 이겨 자살하고, 연이어 아들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아내 에우뤼디케마저 자살하고 만다.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게 된 크레온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탄식한다. 코로스의 말대로 그는 너무도 늦게야 올바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필멸의 인간에겐 뒤늦은 깨달음도 재앙을 피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의 운명은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비극’이라기보다는 ‘크레온의 비극’이라고 불러야 온당한 이 작품의 교훈은 무엇인가. 말미에서 코로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현명함은 행복의 으뜸가는 바탕이로다. 그리고 신들에 관해서는 아무것에도 불경스럽지 말 것이로다.”

 

12.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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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필순에 변동이 있어서 오랜만에 쓰게 됐다. 아침신문에서 단연 톱기사로 다뤄진, 검찰의 불법사찰 재조사 결과발표에 대한 생각을 꼬투리 삼아 점심때 적은 칼럼이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한번 더 절감하게 해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12. 06. 15) 죽을 각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국민적 여론에 떠밀려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수사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지 3개월여 만에 나온 결과다. 하지만 사찰의 진짜 몸통과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기대는 배반했지만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기대는 희망사항을 반영하지만 예상은 과거의 전력을 고려한다. 대한민국 검찰은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능하거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훨씬 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놀랄 건 없는 관련기사들을 읽다가 검찰은 대체 ‘사즉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보통은 ‘모든 것을 걸고’ 혹은 ‘죽기를 각오하고’ 임한다는 뜻 아닌가. 검찰 수사에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면 ‘사즉생’이란 말의 효과에 넘어간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정작 검찰은 ‘사즉생’이라고 말해놓고 ‘사즉생(詐則生)’이란 뜻으로 새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가. 두 대목이 떠오른다.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대사, 곧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대응관계로 보건대, 햄릿에게 산다는 것은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다. 반대로 죽는다는 것은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장을 내는 것”이다.

 

햄릿에 견주어 보자면, 검찰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일단 죽기를 각오한다면 권력의 핵심에 맞서 끝장을 보는 일이 가능했겠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법사찰 관련자를 모두 철저히 조사해서, 특히 청와대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해명하고 법에 따라 죄과를 묻는 것이 ‘끝장’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초된다 할지라도 검찰은 ‘국민의 검찰’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사즉생’이다.

하지만 검찰의 선택은 청와대 개입 의혹을 지우는 데만 죽기 살기로 매달려 결국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성난 여론의 돌팔매와 화살을 꿋꿋이 견뎌내는 것”을 택한 셈이다. 그것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으나 그 연명은 검찰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게끔 만들었으니 ‘생즉사(生則死)’와 다를 바 없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대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온다. 한 사형수에 관한 에피소드인데, 그는 어느 날 아침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로 끌려가 총살된다는 선고문을 듣는다. 죄수들이 세 개의 기둥이 처형대로 놓인 사형장에 도착하고 첫 세 명의 죄수에게 사형복이 입혀진다. 세 번째 줄에 선 그에게는 이제 생의 시간이 5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하지만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동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 2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남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 불과 수분 후에 들이닥칠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던 그는 만약 자신이 다시 살게 된다면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그런 상념 끝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총살되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갖는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바로 다음 순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면령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정치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이 이야기는 임박한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삶의 시간이 얼마나 확장되고 그 가치가 얼마나 고양될 수 있는지 말해준다. 석 달의 시간을 허비한 검찰이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이다.

 

12.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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