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도 꽤 많은 책들이 출간됐지만 희소성이라는 면에서 단연 두드러진 책은 야콥 폰 윅스퀼(1864-1944)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도서출판b, 2012)다. 일반독자가 윅스퀼이란 이름을 기억하려면 아마도 에른스트 카시러나 들뢰즈를 경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내 경우엔 학부 때 읽은 카시러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처음 '윅스퀼'이란 이름을 접하고 궁금해한 기억이 있다. 책을 펼치자 마자 나오는 이름이 '윅스퀼'이고 '환경세계(Umwelt)'라는 개념이었다. 그 윅스퀼의 주저가 바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다.

 

 

책갈피에 소개된 윅스퀼의 약력은 이렇다. "윅스퀼은 에스토니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80세의 나이에 카프리 섬에서 사망했다. 동물학을 공부한 뒤 근육생리학 연구를 했다. 그는 생산적이고 독창적인 학자였으며 백여 권의 과학서를 썼다. 현대생태학의 창안자라고도 할 수 있는 윅스퀼은 주저인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환경세계(Umwelt)라는 용어를 규정하고, 생태계들에 관한 연구가 생명체들의 행동에 관한 연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핵심은 환경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윅스퀼은 첫 장에서 진드기와 진드기의 환경세계를 다룬다.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환경세계 이론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는 점. 그것은 카시러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철학을 쉽게 풀어쓴 것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카시러에 관한 교양상식은 무엇일까. 신칸트학파에 속한다는 점, 주저가 <상징형식의 철학>이라는 점, 그걸 간추린 책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점, 등등. 내가 열거할 수 있는 게 그 정도이니 딱 그만큼이 교양상식일 것이다(오래 전에 <인간과 문화>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은 이후에 - 이 두 권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 특별히 그를 탐독한 기억이 없으니 나는 전문가적 식견이라고 할 만한 걸 갖고 있지 않다). <상징형식의 철학>은 전3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인데, 국내에는 제1권 언어와 2권 신화적 사고가 번역돼 있다.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돼 표지가 통일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두 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이고 2부는 '의미의 이론'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알고 보니 윅스퀼이 각각 1934년과 1940년에 발표한 책을 합본한 불어본을 옮긴 것이어서 체제가 그렇다. 분량이 많지 않아 합본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다행스럽다. 찾아보니 영어본도 합본 형식으로 돼 있다.

 

다시, 윅스퀼의 관점은 무엇인가. 옮긴이 후기를 참고하면, 그의 의도는 "동물을 단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갖는 하나의 주체로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세계,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환경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은 세계의 그림책'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세계와 동물들의 여러 세계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들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생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무시돼 왔다고 하는데(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엔 기본 관점이 아닌가 싶다.

 

하여 오랜만에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윅스퀼과 카시러를 연이어 읽는 독서계획도 이번 가을에는 세워봄직하다. 거기에 들뢰즈도 덧붙이면 한결 호사스러워운 독서가 되리라. 뒷표지에 인용된 들뢰즈의 말이다.

가령 거미와 거미줄, 벼룩과 머리, 진드기와 포유류의 피부 얀간, 이런 것들이 철학적 짐승이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아니다. 정감을 촉발시키는 것, 변용할 수 있는 권력을 실현하게 하는 것을 신호(signal)라고 부른다. 가령 거미줄은 흔들리고, 머리는 주름지고, 피부는 노출된다. 광막한 검은 밤의 별들처럼 오직 몇몇 기호(signe)들만이 있다. 거미-되기, 벼룩-되기, 진드기-되기, 강하고 모호하고 완고한 하나의 미지의 삶."

 

12, 09.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