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껜가 부산 인디고서원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확인해보니 봄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과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를 빌미로 삼은 자리였는데, 강연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질의응답이 정리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계간 <인디고잉>(39호)에 실린 걸로 돼 있다. 지면에서는 확인하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겠다. <인디고잉>은 최근에 41호까지 나왔다. 품이 많이 드는 게 잡지인데, 대단한 열정이자 지속성이다!..

 

 

 

인디고잉(13년 여름) 청년들이여, 망상하라 
 
우리가 초청한 작가는 ‘로쟈’라는 이름으로 서평을 쓰시는 이현우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국내에 지젝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쓰셨으며, 이는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함께 읽어오기로 한 책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외에도 선생님의 학문적인 전공이신 러시아문학 및 세계 문학에 대한 책인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등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남의 장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지젝 독자로서의 지젝 철학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주셨다. 국내에 지젝이 소개된 시기인 90년대에는 문화이론 입문이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던 분위기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선생님도 주요 문화이론이나 철학에 두루 견문을 넓히셨다. 공부를 해나가던 중에, 라캉이나 헤겔 철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2000년대 초반 지젝의 철학을 접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 선생님이 지젝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라캉과 헤겔을 읽게 해준다는 데서 지젝 철학의 의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젝의 철학 작업은 그러하다. 지젝의 저서 읽기는 선생님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책읽기 중의 하나였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겸손하거나 소심한 작가의 문학보다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 애쓰는 문학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잉여’라 스스로를 칭하고 자조하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는 될 수 있는 것이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 청년세대에게 선생님은 ‘망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돈키호테의 경우, 제정신을 차리며 현실을 자인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왜소해지는 반면, 망상을 가지고 나설 때 무언가를 하게 되고, 무언가가 되어간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가는 에너지는 망상에서 나온다. 

 

망상은 주체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좌표가 정해져 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체’로서의 삶은 실체를 비우고,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피곤하면 자야한다. 반면 ‘주체로서의 나’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피곤함을 모르며, 러시아의 어떤 소설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특별한 인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적 이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네오’와 같이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이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인간은 어찌 보면 미친 인간이지만, 미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젝은 우리의 자기와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 ‘틈새’가 있는 것이며, 그것의 이름을 ‘주체’라고 말한다. 인간이 틈새를 가진 것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실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우리 안의 광기와 계속해서 화해해나가야 할 것이다.

 

 

Q 지젝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시대에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윤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윤리는 원시적 도덕 감정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인데 그것도 변형될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앎은 항상 우리의 윤리적인 반응, 태도를 거기에 맞게끔 변형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한 상황은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마이클 센델의 책에서 등장하는 화차문제도 마찬가지죠. 그 문제를 접한 사람들은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직접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져요. 그 한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생각을 할 때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어요.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스위치를 누른다거나 선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대해서는 별로 저항감이 없어요. 원시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질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도덕적 본능이 작동하질 않아요.하지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피터 싱어의 주요한 주장은 도덕적 직관을 신뢰하지 말라는 겁니다. 도덕적 추론을 따르라고 말하죠. 저는 그것도 어떤 새로운 문제에 대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버튼 하나를 눌러서 수천 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거기에 맞는 거부감, 거리낌 같은 것 대신 이성으로 제어를 해야 하고, 그렇게 제어하도록 훈련을 받거나 해야 합니다.

 

 

 
Q 선생님은 세계문학이 단순히 어떤 ‘책’이 아니라 ‘운동’이며, 민족적인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글이 끝날 때, 아직까지 세계문학은 이념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실현된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A  괴테가 얘기한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의 지양으로서의 세계문학입니다. 이념형의 중간단계, 혹은 빈약한 중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은 앞으로 도래할 어떤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세계문학’이라고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혼동의 여지가 좀 있죠. 세계문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서로 경합하는 국민국가의 단계에서 세계국가나 세계 공화국을 지향하듯이, 세계문학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어떤 단계이고, 우리가 그 단계로 애써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계문학운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성을 보여주거나 그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작품들이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또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공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막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이런 공간이 달성되려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소속이란 게 분명히 있죠. 그것과 거리를 두면서 존재할 때, 우리 안에서 사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교통공간이죠. 한국인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저쪽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어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그 공간이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런 만남이라던가 정체성 같은 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저를 자극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망상들을 하며 저를 토닥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망상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 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돈키호테 얘기를 좀 하자면, ‘맘부리노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게 좀 특이한 광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광기라면 저것은 그냥 이발사의 세숫대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게 어떻게 세숫대야냐. 저건 맘부리노의 투구다. 너는 눈이 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돈키호테는 좀 다릅니다. 그 상대성을 인정하죠. “너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투구로 보인다”는 거죠. 저는 ‘망상’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친다고 할 때,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찮은 존재로 보일 거라는 걸 다 알지만 나는 이런 망상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Q 책에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는 말을 우리가 의존해야할 대타자는 없다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그래서 구체적으로 청년들이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옮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실천적인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대타자의 경우는 하수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하나의 대타자인데요. 과거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대의’라는 대타자의 수행자를 자임했어요. 대문자로 역사라고 쓰는 것, 역사의 수행자라는 거죠. 그래서 잔혹한 고문이나 숙청 같은 것도 다 대타자의, 역사의 명령이라며 했습니다. 지젝은 역설적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대타자가 있고, 우리는 하수인이라는 형식은 보존하되, 대타자만 지우는 거예요. 자끄 데리다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겁니다. 신이 존재하는 선행은 나중에 보상 같은 것도 있죠. 천국에 가면 정산을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도 우리가 똑같이 선행을 할 수 있어요.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가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는 겁니다. 돈키호테에서도 ‘나는 저 세숫대야가 맘부리노의 투구로 보인다. 그렇게 믿겠다’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징계의 좌표를 바꾼다는 것은 경계선을 다시 긋는 것입니다. 보편성의 발견이지요. 그 말은 다르게는 ‘보편적 적대’를 다시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 적대에서 다른 여타의 적대는 무효화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의 선을 다시 긋는 게 실천입니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거죠. 지젝의 경우는 소수자 운동이나 정체성 운동 같은 것에 반대합니다.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내부의 더 세분화 된, 더 협소한 어떤 정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인데요, 지젝은 그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이라는 건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어떤 체제나 움직임을 중단시킨다는 것 자체도 좌표를 바꾸는 일이에요. 닉슨시대의 중소수교 같은 것도 돌파라고 볼 수 있죠. 남북 간에도 가능하죠. 개성공단이 그런 제스쳐에요. 다르게는 인터뷰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죠. 기존의 좌표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옮기고, 가능성의 좌표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바뀌는 거예요.

 

행위의 또 다른 모델로 바틀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어느 날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죠. 나중엔 변호사가 이사를 가도 사무실에 계속 머무르다가 부랑자 구치소 같은 데로 사람들이 데려가죠. 거기서 먹는 것도 거부해서 굶어죽습니다. 이 ‘바틀비적 제스처’라는 표현을 지젝이 씁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의 수혜자 밑에서 일을 하고 그 세계 안에 종속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빠져나오죠. 단지 거부하고 물러나는 겁니다. 그런 게 일종의 행위의 모습이 될 수 있죠.

 

바꾼다는 게 반드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동원하고,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내지는 비폭력 무저항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가능해요. 유명 대학교를 공개적으로 자퇴한 학생이 한명 있었죠? 그것도 일종의 바틀비적 제스쳐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거죠. 

 
Q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생계)과 이성의 간극 속에서 삶으로 그 중요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몬 베이유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자본주의 속에서 타자성을 회복한 진정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A  분명히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게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다 폐쇄시킨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요즘은 여간해선 굶어 죽지 않죠. 우리가 바틀비처럼 전면적인 거부 제스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예요.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타자의 카운슬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몬 베이유가 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우리 안에는 성자가 있고, 그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요. 인간에겐 어떤 비속한 동물성 같은 것도 있지만 특이하게도 성자성도 있어요. 우리는 자신보다 더 지체가 낮은 사람의 발에 키스하거나, 종교 의식에서 발을 씻어주는 그런 거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어요. 그게 불가능한가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해요. 어쨌든 저는 그게 우리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그 결단의 자유, 권리는 축소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캉 식으로 얘기하면, 모든 욕망은 다 타자의 욕망입니다. 나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건 사실 넌센스죠.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모방이 가능해요. 성자의 욕망을 모방하면 성자가 되고, 거지의 욕망을 모방하면 거지처럼 되는 거죠. 내 안에는 뭔가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들여다보면 공백 같은 겁니다. 뇌 과학에서도 불교에서도 얘기하는 거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텅 빈 공허에요. 주체로서의 자기발견이란 그런 겁니다. 진정한 뭔가가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과연 어떤 작품이 세계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자나 사상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문학 극대주의자’ 입니다. 문학은 전체에 관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앎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관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전공자가 왜 철학에도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떤 특이한 견해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철학사 책을 보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철학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면 철학자입니다. 수단은 상관없어요. 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 기원의 철학 개념은 어떤 논변을 갖고 있는 걸 철학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소해도 상관없어요. 관점이 다르죠. 그러니까 철학, 문학이 서로 구분되고, 영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이라는 거죠.

 

그 다음으로 어떤 문학이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번역문학이어야 해요. 가령 영어로 써졌다면, 영어가 아닌 언어로 번역 됐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계문학 공간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호환되는 공간, 내지는 그 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어떤 간극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문학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문학이라는 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우리가 세계문학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과정이 소통의 과정이고, 소통이 좌절되는 과정이기도 한데, 그 사이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경험이라는 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해요.

 

또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까지는 도래하지 않은 공간이기도 해요. 실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건 조금 부실한, 많은 부분이 훼손된 그런 공간인데, 그런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 햄릿만 하더라도 수십 종의 번역본이 있어요. 각각을 보면 또 놀랄 정도로 많이 다르게 되어있어요. 셰익스피어는 좀 심한 경우에요. 그래서 여러 종류를 읽어보시기를 권하는데,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세계문학을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문학이라고도 생각해요.(출처 [인디고잉 39호] 인디고 정원에서_청년 참여형 강의|작성자 인디고잉)

 

14.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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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 네댓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성복 시인이 옮긴 문학과지성사판을 책장에서 찾지 못해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으로만 읽었다. 작가 지드의 말로는 <배덕자>가 배덕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이라면 <좁은 문>은 미덕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배덕자>도 읽을 만한 번역본으로 다시 나오면 좋겠다...

 

 

한겨레(14. 01. 27)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을 막은 것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오랜만에 읽었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얘기다. 알다시피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사촌 관계가 장애물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지드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발단은 제롬이 열네 살 때 벌어진다. 외사촌 누나 알리사는 열여섯 살 때다. 방학 때마다 외삼촌댁에 들르던 제롬이 하루는 외숙모가 자기 방에서 젊은 장교와 희롱하는 걸 엿보게 된다. 알리사의 방으로 가보니 그녀는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알리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제롬은 자기 운명이 결정됐다고 믿는다. 사랑과 연민에 도취되어 그는 인생의 목적이 알리사를 보호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롬은 외숙모가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외숙모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미덕은 갖추지 못했다. 외삼촌 가족과 같이 간 교회에서 제롬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를 주제로 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길은 그에게 외숙모의 방을 떠올려주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알리사의 방문이 되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제롬은 스스로를 축소하고 모든 에고이즘을 비워내기로 한다.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어야 했다. 이것이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의 형상이다. 암시적이게도 제롬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알리사를 찾아보려고도 않고 교회를 빠져나온다. “멀어짐으로써 그녀에게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제롬은 알리사와의 결혼을 원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와 불확실한 미래를 핑계로 결혼은 미뤄진다. 게다가 제롬은 약혼 같은 형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약혼을 재촉하는 사촌동생 쥘리에트의 말에 “서약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답할 정도다. 그런 서약은 사랑에 대한 의혹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롬의 속내를 읽은 알리사가 먼저 약혼은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만남도 자제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에게는 마치 결혼이 ‘좁은 문’처럼 된다. 결혼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한 길이어야 한다!

 

제롬을 짝사랑한 쥘리에트가 잠시 장애가 되지만 쥘리에트가 다른 구혼자와 결혼하자 이제 제롬과 알리사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무 장애물도 없는 상황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된다. 알리사에게 이르는 사랑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리사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포옹도 해보지 못했다. 제롬이 더 적극적으로 구애했더라면 알리사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테지만, 오랜 지체 끝에 결국 알리사는 ‘지상의 행복’ 대신에 ‘성스러움’을 택한다.

 

제롬과의 결혼 대신에 알리사가 선택한 것은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병든 몸으로 집을 떠나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알리사의 운명이 ‘더 훌륭한 것’에 부합할까. 알리사가 제롬에게 남긴 일기는 그녀가 어떤 고뇌에 시달렸는지 알게 해준다. 알리사는 덕성과 사랑이 하나로 합류될 수 있는 영혼의 행복을 꿈꾸지만 결국 덕성이란 ‘사랑에 대한 저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덕성의 함정’이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란 주제를 반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14.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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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듯싶어서 '이주의 저자'로 꼽는 대신에 따로 페이퍼를 적는다. 하긴 나도 이번에야 알게 된 이름들이다. 그렇다고 처음 소개된 저자들은 아니다.

 

 

이번에 <두번째 태양>(혜화동, 2014)이 나온 데이비드 올리버 렐린은 베스트셀러 <세 잔의 차>(다른, 2009; 이레, 2009)의 저자다. 뉴욕타임즈의 82주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는 전설적인 책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국내에선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책이 나왔다가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래서 국내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저자가 됐는데, 미국식 베스트셀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두번째 태양>도 읽어볼 만하다. 무엇보다 감동이 핵심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술'. 히말라야 백내장 프로젝트(HCP) 의사들의 시력 회복 수술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낙후된 환경 탓에 앞을 보지 못하고, 그 대다수는 기본적인 의료마저 제공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히말라야 백내장 프로젝트는 이렇게 보지 못해 병원을 찾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맑은 눈을 되찾아주고 있다. <두 번째 태양>은 이 기적의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두 의사의 이야기다. 가난한 히말라야 산골에서 자란 네팔인 의사와 하버드 의대 출신의 미국인 의사. 마주치기조차 힘들 것 같은 두 사람은 어떻게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았을까? 히말라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그들의 활동은 어떻게 수백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새 빛을 선사한 거대한 프로젝트가 되었을까? 그리고 다시 세상을 보게 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TED 강연에도 나올 법한 감동 사례다. 한국 독자들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스티븐 배철러.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궁리, 2014)이 이번에 나왔다. '환생과 업의 교리를 거부하며 인간 붓다의 삶을 다시 그려낸 어느 불교도의 이야기'가 부제. 소개는 이렇다.

<붓다는 없다> <선과 악의 얼굴>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심오하고도 세속적인 접근을 통해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온 저자의 신작. 한때 승려였고 이제는 재가불자이자 수행자로서 불교와 붓다에 대해 늘 탁월하고 대담한 발언을 해온 그가 이 책에서는 역사적 붓다의 초상을 새롭게 그려내고 있다. 배철러는 붓다 사후 그 제자들이 편찬한 중요한 불교 설법 모음집인 팔리 경전을 근거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바라본 인간 붓다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이런 정도의 소개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추천사가 눈에 띄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실과 맹목적인 믿음은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인본주의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고, 여기에 우리의 유일한 진짜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솔직하고 진지한 자기 성찰과 비평적이고 철저한 검토를 담은 책에서 스티븐 배철러는 이런 많은 분야에 불교의 세계를 더하고 있다.”  

불교적 성찰을 담음 책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길 만한 책이다...

 

14.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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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국내 저자로만 골랐는데, 최근 시집을 낸 몇 명의 시인이 물망에 올랐지만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하고, 역사학자와 문학평론가, 그리고 소설가, 세 명을 고르기로 한다.

 

 

 

먼저, 역사학자 오항녕 교수의 역사 시평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너머북스, 2014). "<조선의 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기록한다는 것> 등을 펴내며, 기억과 기록, 제도와 인간, 국가와 공동체라는 주제를 조선시대 문명 속에서 연구하고 있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 시평"이다. '밀양 인디언'이란 조합이 낯선데,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하워드 진이 ‘역사의 패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켠에서 풍겼던 다소 슬픈 어조는 유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역사의 희망’에 방점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디언 절멸 시도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근대 문명의 가당찮은 오만과 함께 시작하여 간간이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근대 문명에 기죽지 않기 때문이다. 기죽기는커녕 반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천할 적절한 시점에 이른 듯하다. 밀양으로 인하여 미래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밀양의 저항은 인디언의 저항이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깨달음과 진화의 결과이다. 그래서 어떤 길이 낭떠러지인지, 걸어서 안전한 길인지 안다. 밀양과 아메리카의 연기(緣起), 되살아남이다.

그런 깨달음을 저자는 이렇게도 표현한다. “밀양은 인디언이다. 역사의 승패를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밀양 인디언들이 이길 듯하다. 또 이겨야 한다. 한국전력이 이기면 일부만 잠깐 살고 결국 모두 패배할 것이지만, 밀양 인디언들이 이기면 다 같이 살고 그렇기에 모두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역사학자의 냉정한 진단과 신랄한 비판이 오롯한 책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독서에세이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 2014)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초판이 2004년에 나왔으니 10년만이다. 작년 말에는 비평집 <타는 혀>(새움, 2013)도 13년만에 재간된 바 있다. 덕분에 시계 바늘을 10년 전으로 되돌려 추체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흘러간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책 또한 시대의 지표가 된다). 시적인 제목은 아래 대목에서 나왔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서늘한 냄새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제법 ‘오래된 인간’이 되어버린 나, 별 수 없이 ‘무화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그런 향기 없는 젊음의 대피소가 기껏 도서관의 지하서고였다.

똑같이 마음이 소금밭인 독자들에게 담담한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참에 든 생각이지만, 저자의 평론집이 나온 지 꽤 됐다. 이 정도면 과작 아닌가.

 

 

 

그리고 작가 김지원의 소설선집 세 권이 나왔다.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 선생의 딸이자 김채원 작가와 자매 소설가로 문단에선 잘 알려져 있는데,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건 이번 선집 때문에 알게 됐다. 1주기 추모 보급판으로 나온 선집이어서다. "2013년 1월 30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타계했다"고 전하는데, '중년의 여성 작가'라는 이미지만 갖고 있던 터라 '71세'란 나이가 낯설다. 찾아보니 42년생이고 김채원 작가가 46년생이다. 비슷한 연배일 거라고 짐작한 강석경 작가는 51년생. 한 부고기사는 작가의 문학세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75년 ‘현대문학’에 소설가 황순원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77년 동생이자 소설가인 김채원(67)씨와 함께 펴낸 첫 소설집 <먼 집 먼 바다>를 시작으로 2~3년 간격으로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출간했다. <모래시계> <꽃을 든 남자> <소금의 시간> <물빛 목소리> 등이 잘 알려져있다. 이중 <소금의 시간>은 어머니 최정희의 중편소설 ‘인맥’을 이어 받아 소설화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97년에는 단편소설 ‘사랑의 예감’을 발표해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김지원 소설은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풍성한 여성성으로 평가받았다. 뉴욕이라는 타지에서의 삶도 그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어딘가 정착하지 못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쓸쓸한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사랑의 예감’이 대표적이다. 뉴욕과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낯익은 공간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관계의 이면을 섬세하게 다룬다. 거대한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했다는 평을 받았다.(중앙일보)

대표작들이 망라된 이번 선집이 작가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듯싶다...

 

14.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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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2014)를 읽다가 관심을 갖게 돼 고려사 관련서를 모으고 있는데(자료 부족으로 고려사가 연구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어제 배송받은 책은 박종기 교수의 <새로 쓴 5백년 고려사>(푸른역사, 2008)다. 개론서로 김갑동 교수의 <고려시대사 개론>(혜안, 2013)과 함께 구비하게 된 책이다(생각해보니 이제껏 고려사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충선왕의 행적만 하더라도 새로운 '발견'이다). 거기에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2008)도 기본 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몇 권을 더 얹어서 고려사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나의 관심 대상은 주로 무신정권 이후 고려 말기다. 왜 망했는가, 어떻게 망했는가가 역사의 거울이기에. 나는 '고려의 힘'을 믿지 않듯이 '조선의 힘' 또한 믿지 않는다...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박종기 교수의 살아있는 역사 읽기
박종기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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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려시대사 개론
김갑동 지음 / 혜안 / 2013년 12월
16,000원 → 15,200원(5%할인) / 마일리지 46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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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개정증보판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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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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