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면서 읽은 오늘자 한국일보(06. 05. 17)에서 하종오 피플팀장의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은 '하류사회'. 얼마전 같은 제목의 책이 번역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말에 편입된 용어이다(그 이전엔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있었다). '돈 밝히는 아이들'이란 기획기사가 한국일보에는 어제오는 실렸는데, 이건 시간날 때 따로 빼서 다루려고 한다.

 

 

 

 

-한때 한국의 신문이란 신문들이 온통, 소위 중산층 이상을 타깃으로 한 지면 제작에 열을 올리던 때가 있었다. ‘위켄드’ 같은 영문 이름이나 혹은 ‘떠나자’ 어쩌구 하는 타이틀을 달고는, 중산층이라면 적어도 이런 브랜드의 옷은 입어야 되고 주말이면 저런 레스토랑에는 가야 되며 평소에 고상하게 요런 정도 라벨의 술을 들이켜고 틈나면 남국으로 해외여행도 떠나는 삶의 멋이 있어야 한다고 부추기는 별지들이었다.

-한 신용카드회사의 광고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 마디로 신나게 먹고 마시고 입고 놀아라는 것이 그런 지면에 실린 기사의 주요내용들이었는데, 그게 언제냐 하면 10년쯤 전이다. IMF사태 직전이었다. 그러다 한국의 중산층은 망했다.



-일본의 중산층도 망한 모양이다. 일본에서 2005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하류사회(下流社會)>라는 책이 며칠 전 국내 번역됐다. 마케팅 전문가인 이 책의 저자 미우라 아츠시는 2002~2005년 일본인들의 소비행동ㆍ생활패턴 등에 대한 실증적 조사결과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일본을 ‘하류사회’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1950년대말부터의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9할 이상의 국민들이 자신을 중류계급으로 간주하던 소위 ‘1억 총 중류’의 일본사회가 1990년대 이후의 10년 불황을 거치면서 하류사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득 격차로 인해 학력의 격차도 커지고, 그 결과 계층 격차가 고착화되면서 유동성을 잃어가고 있다. 희망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일본의 잣대를 한국에 그냥 들이대기는 어렵다. 원체 신조어 만들기에 귀재로 소문난 일본인들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두 나라의 차이가 여전히 크다. 일본의 이극화(二極化)가 한국의 양극화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눈에 띄는 것은 ‘희망의 격차’라는 현상의 풀이 때문이다. 미우라 아츠시는 하류의 본질을 단지 ‘돈의 유무’가 아니라 ‘의욕의 유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중류에서 하류로 떨어진 인간들을 마르크스처럼 생산수단 즉 소유의 여부에서가 아니라 의식의 측면에서 분류한다. “중류가 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류이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중류 혹은 상류사회에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인간들이 대다수가 돼버린 사회, 소수의 엘리트가 국부를 창출하고 대다수 국민은 별 의식 없이 대충 먹고 놀며 사는 사회가 하류사회라는 이야기다.

 

 

 



-한국은 어떤가. 나는, 당신은 하류일까 아닐까. 의식 혹은 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들은 하류 중의 하류로 쩔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욕을 갖고 삶과 맞닥뜨리기보다는 ‘부자 되기’라는 미명 하에 돈독이 오를 대로 올라 초등학생인 자식들에게 주식투자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젊었을 때 빨리 돈을 번 다음 조기 은퇴해서 편하게 사는 게 꿈”이라는, 하류도 못되는 천민적 사고를 꿈이라고 말하게끔 만든 사회가 지금의 한국이다.

-“~떠나라”던 기업들이 지금은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들으면 기가 찰 문구를 광고로 내건다. 비록 몰락한 재벌 회장의 말이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포부가 요즘 젊은층에게는 “인생은 길고 돈 벌 시간은 짧다”는 금언으로 바뀌었단다. 이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어른이 돼 득시글거릴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의식의 하류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小年易老富難成? 젊음은 오래 가지 않고 돈벌기는 어려우니, 초딩때부터 부지런히 벌어두어야 한다! 데카당스가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06.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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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이 글은 2003년 8월초에 씌어졌다) 소개한 류상욱의 <호모 시네마쿠스>에 대한 지난주 한겨레의 서평중 한 대목. "그러나 비평과 이론을 다루는 장의 무게 중심은 확실히 '텍스트'에 주어져 있다. 미디어 연구로부터 유입된 문화연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최근의 영화연구 추세에 대한 징후적 두려움의 반영처럼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영화이론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우리 영화연구 풍토의 방증이기도 하다."

번역도 아닌 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면 낭패감을 느끼게 된다. 필자는 영화평론가인데, 이론가라면 모를까 자신의 생각을 이런 식의 문장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지 의심스럽고 걱정스럽다. 대략, 이론이 아닌 텍스트에 무게 중심이 놓여져 있는 것은 영화이론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우리 영화연구의 풍토를 반영한다, 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데, 논증 자체도 신빙성이 없을 뿐더러, 도대체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한 것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일반인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쓰는 능력이 평론가의 자질이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일간지 리뷰들을 읽다가 가끔 짜증스러운 경우는 이처럼 요령부득의 서평을 접한다거나 잘못된/엉터리 정보를 읽을 때이다. 이런 일들이 좀 줄었으면 싶다.)

 

 

 



지난 한주 동안 나온 책들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책 몇 권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제일 먼저 들 책은 당연히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이매진)이다(*올해 표지를 바꾼 재판이 나왔다). 제목이 <일본정신분석>에서 그렇게 바뀐 데 대해서는 나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의 비판이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역자는 믿을 만하다는 것. <탐구1>과 <윤리21>의 역자인 송태욱씨인데, 앞서 두 책은 아주 재미있게 읽은 바 있다(*알다시피, 역자는 <트랜스크리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해서, 제목은 멀쩡한 <유머로서의 유물론>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는다. 나로선 '1장 언어와 국가'가 일차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감을 나중에 올려볼 계획이다.

 

 

 

 
처음 책을 내면서 개시부터 핀잔을 먹은 도서출판 이매진이 근간 예정으로 공고한 책들 중에서 관심이 가는 책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다. '부르디외가 본 하이데거'란 제목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복사해 두었던 영역본을 읽을 기회가 곧 생기겠다(*이 책은 2005년에 <나는 철학자다>라는 역시나 '엉뚱한'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테리 이글턴의 신작 <반대자의 초상>(이 책엔 짤막한 지젝론도 실려 있다)도 번역돼 나온단다(*이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역시 두껍지 않은 책이다. 역자는 호머의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의 번역자인데,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제임슨보다는 이글턴이 읽기 편하지만, 책은 나와봐야 알겠다.

 

 

 



두번째 책은 미셀 앙리 르두의 <프랑수아즈 돌토>(숲). 돌토(1908-1988)는 프랑스 국내에서 라캉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돌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얘기될 만큼 저명한 정신분석가이다. 특히 아동 정신분석과 상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두어 권의 저작이 나온 바 있는데, 한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그의 저작선을 낼 계획이라고 하니 기대해봄 직하다.

돌토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프로이트에서 라캉까지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백의)를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번역된 입문서의 마지막장은 '클라인, 돌토, 라캉'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여기서 클라인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이다. 이 현대정신분석의 3인방이 어떻게 합종연횡하면서 서로 갈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이들의 저작들이 서가의 한 구석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클라인의 주저인 <아동의 정신분석>도 출간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별로 기대할 만한 번역자가 아니다. *이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세번째 책은 앞서 3인방에는 못 들어가지만, 나름대로 저명한 정신분석가이자 문학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 연구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문학탐색>(이대출판부)이다. 저자는 크리스테바 연구자이자 전담번역가인 김인환 교수. 하지만, 김교수의 번역은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특히 <시적 언어의 혁명>이나 <사랑의 역사> 등). 그럼에도 국내 필자에 의한 유일한 연구서이기 때문에 일단 참조해 보기로 했다. 크리스테바의 후기 저작들, 우울증에 관한 <검은 태양>이나 민족주의를 다룬 <민족없는 민족주의> 등 다른 책들도 곧 번역되었으면 한다(*<검은 태양>은 2004년에 역시나 김인환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영미권의 크리스테바 연구자로 손꼽을 수 있는 이들은 존 레흐트, 토릴 모이, 켈리 올리버 등인데(프랑스내에서는 그만큼의 평가를 받는 거 같지 않다), 이중 켈리 올리버의 <크리스테바 읽기>(시와반시사, 1997)가 이미 오래 전에 번역돼 나왔다(*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크리스테바가 달랑 바흐친 책 하나 들고 불가리아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지식계의 거물로 성장하기까지의 내막은 프랑수와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나 자전적 소설 <사무라이들>(솔)을 참조하시라.참고로 그녀의 스승이었던 롤랑 바르트는 오히려 이 이방의 제자 덕분에 구조주의자에서 후기구조의자 혹은 탈구조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네번째 책은, 찰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갈라파고스). 이 지적 거인이 자신의 평범한(?) 삶에 대해 겸손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다윈 컬렉션에 들어갈 책이다(*알다시피, 올해는 다윈의 <인간의 유래>가 출간됐다). 또, 이유선의 <리처드 로티>(이룸)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하는'이란 시리즈 타이틀을 달고 나온 만큼 로티의 삶과 생각에 대한 좋을 길잡이가 되어줄 듯. 필자는 김동식 교수와 함께 손꼽을 수 있는 국내의 로티 전문가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 책은 모리스 쿠튀리에가 편집한 <롤리타>(이룸). 피귀르 미틱, 즉 신화적 인물(형상) 시리즈의 네번째 책인데, 이미 <오이디푸스> <로빈슨> <채털리> <앨리스>가 나와 있다. 책에는 저자인 나보코프 자신보다도 유명해진 소설, 그리고 소설속 주인공인 '롤리타'에 대한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푸코나 들뢰즈, 라캉 말고 프랑스 인문학 수준은 어떨까란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글들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앨리스>의 책임편집자이기도 했던 장-자크 르세르클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루이스 캘롤과 넌센스문학 전공자인 르세르클은 알게 모르게 주목할 만한 이론적 작업들을 수행해 왔다. 최근에 사라 코프만과 함께 영역된 그의 책 대부분을 복사했는데, 내년쯤에는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을는지!..

 

 



 

열외의 책으로 홍세화의 <빨간 신호등>(한겨레신문사)도 출간됐다. 홍세화, 박노자의 책들은 일단 사두기 때문에 따로 적지 않겠다. 역사쪽 책들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재앙이겠지만, 최근에 좋은 역사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나보다 더 안목있는 분이 소개를 해주면 좋겠는데,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비판서인 한스 페터 뒤르의 '문명화과정의 신화'(한길사) 시리즈(*가장 최근에 나온 건 <에로틱한 가슴>)나 임경석의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그리고 김호의 번역서 <신주무원록>(사계절) 등이 얼핏 꼽아볼 수 있는, 무게 있는 책들이다. 소개하기도 바쁜 그 책들을 과연 누가 다 읽는 것인지, 다 읽을 수는 있는 것인지?!..

2003.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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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다(*이 글은 2003년 7월초에 씌어졌다). 4박 5일 동안 (부)자유로웠는데, 핸드폰과 인터넷, 그리고 시계와 책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짐들 때문에, 박상륭의 <산해기>나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학Ethics of the Real>을 들고 가려던 계획을 접었고, 덕분에 온전히 바다와 햇살 하고만 지냈다(다른 거 다 제쳐놓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헤어져 보면 안다. 우리가 길들이거나 우리를 길들인 이들이 얼마나 그립고 애틋한가를. 책이 얼마나 그립고 어쩌고, 젠장...

출판계가 유례없는 불황에 허덕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지만(인터넷 서점의 할인폭이 커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책값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건지, 오기인지 잘 모르겠다. 황석영의 <삼국지>(창작과비평사)가 20일새 20만부가 나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식도 있는 거 보면, 활로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참에 황석영은 노후대책을 확실히 마련한 것 같고, 창비는 제2의 '동의보감'을 발판삼아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 반응이 미지근한 <서유기>는 안타깝게도 문지 살림에 아직은 큰 도움이 못되는 거 같다(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이런 즈음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압권은 역시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남) 완역본이다. 정가 38,000원에 867쪽. 내가 알기로는 아직 영어 완역본도 없는 형편이니(기존의 <광기의 역사>는 영어 축약본의 번역이다), 생각보다 빨리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것만은 틀림없다. 알다시피 책은 푸코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출세작이다. 같은 급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것도 번역중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2004년에 출간됐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이것도 축약본이 번역돼 있다) 등이다. 푸코를 읽은 지가 오래됐지만, 신간은 다시금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조금 제한적인데, 데리다와 벌인 논쟁에 국한된다. 기존의 <광기의 역사>에는 논쟁의 빌미가 됐던 텍스트가 빠져 있었다. 이 논쟁만을 다룬 책이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이다. 그리고 김현 교수의 푸코 연구서인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도 한 장을 이 논쟁에 할애하고 있다. 또 그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 3>(동문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단, 김웅권이 옮긴 <구조주의의 역사> 시리즈는 웬만큼 눈이 밝지 않고서야 내용을 짚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참고로, 데리다는 푸코 이외에 리쾨르, 가다머와도 논쟁을 벌인 바 있지만, 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남들 논쟁에 왜 관심이 많으냐 싶을 테지만, 논쟁이란 각기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보다 효과적으로(예전에 많이 쓰던 표현으로 '쌈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책은 얼마 전 세상을 뜬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사회평론)이다. 600쪽이 넘는 신간의 원저는 1981년에 초판이, 그리고 199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다윈 이후에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로 불리던 저명한 고생물학자/진화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이다.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그의 책들에는 <다윈 이후>(범양사), <새로운 천년에 대한 질문>(생각의나무), <판다의 엄지>(세종서적), <풀하우스>(사이언스북스)가 있고, 몇 권의 공저도 번역돼 있다. 나는 <다윈 이후>를 읽고 적어도 그의 단독 저작들은 다 모으고 있는데(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다),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은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이다. 책의 원제는 '도킨스 대 굴드'인데, 진화생물학계의 두 간판스타가 벌이는 한판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할 수 있다.

 

 

 



세번째 책은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신>(동문선)이다. 가까운 시일내 내가 이 책을 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두께이다. 정가 34,000원에 711쪽짜리. 아마도 철학적 신학 계통에서 가장 두꺼운 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바이셰델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철학의 뒷계단>(분도출판사)이란 책 덕분이다. 철학의 '정문'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아주 요긴한 '뒷구멍'을 일러준 책인데, 나중에 <철학의 뒤안길>(서광사)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돼 나오기도 했다(둘다 절판됐지만. *이후에 나온 <철학의 에스프레소>(아이콘C, 2004)는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같은 책이다). 저자가 편집한 책으로 <별이 총총한 하늘아래 약동하는 자유>(이학사, 2002)가 있다. 부제가 '칸트와 함께 철학을 읽는다'인 칸트 철학 발췌서이다. 바이셰델은 실제로 칸트 전집을 편집하기도 했다고.


 


 

 

네번째 책은 <증언으로서의 문학사>(깊은샘)이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문학사/문단사에 대한 11명의 원로 작가/비평가들의 대담/증언을 싣고 있다(*전체적인 문단약사는 김병익의 <한국문단사>가 유익하다). 최근에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 나오고 있는데(강준만 등), 신간 또한 유익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1,2>(한겨레신문사)도 근래에 나온 필독서이다. 나는 이런 책들은 고등학생들이 좀 많이 읽었으면 싶다.

 

 


 


우리 문학 얘기를 좀 덧붙이면, '컬트 작가'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 다시 쓰기'로,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문학동네)가 나왔다. 책은 '(속)산해기'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뒤늦게 <산해기>까지 구입한 것인데, 사실 나는 박상륭 마니아가 아니다(문단에는 생색내는 마니아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이 아닌 '잡설'을 쓰므로(잡설가라 해야 할까). 서양의 경우라면, 쿤데라도 포함되는 에세이 소설 양식이라는 걸 들 수 있을 텐데, 그의 잡설이 그러한 에세이에 견줄만한 것인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는 후기 조이스에 견줄 만한 대단한 작가이거나 아니면 변칙/트릭의 작가이다.

 

 

 

 

다섯번째 책은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낸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여이연이론5). 여이연의 정신분석세미나팀에서 낸 자료집이자 정신분석 주제사전이다(*그 후속작이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2005)이다). 열두가지 개념을 정리하고 있고, 실제비평 5편과 번역 3편을 싣고 있다. 대표필자인 임옥희의 표현에 따르면, '다락방의 미친년들'이 2년 넘게 공부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물론 책으로까지 낸 데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353쪽의 버틀러 번역에서 철자가 틀린 단어가 3개나 나오는 걸 보면, 잘 정제된 자부심은 아닌 듯하다.

5권이 나온 여이연 이론서 가운데, <여사서>를 빼고, 가장 중요한 책은 4권으로 나온 가야트리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이다. 인도 출신의 이 인텔리 이론가는 흔히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와 함께 탈식민주의 3인방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각각을 대표하는 책들이 <오리엔탈리즘>, <문화의 위치>,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이다. <문화의 위치>(소명출판)의 우리말 번역이 좀 부실한 데 비해서, 다행스럽게도 <다른 세상에서>는 최적임자가 번역을 맡은 책이라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잡다한 책들. 김근의 <욕망하는 천자문>(삼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독자들의 호응도 좋은 편이지만, 내가 당장 읽을 책은 아니어서 여기서는 제외했다.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한길사)도 유용한 지식인 사전이지만, 이 책까지 사는 건 재정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굿모닝미디어)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는 매트릭스 현상에 대한 철학자/과학자들의 개입이 얼마나 유효/무효한지는 보여주는 책들이고, 프란체스카 리고티의 <부엌의 철학>(향식)은 간식으로 딱 좋은 책이다.

 

 

 

 

굴드의 책이 아니었다면, 더 주목을 받았을 책이 니콜라스 험프리의 <감정의 도서관>(이제이북스)인데, 원제는 '내면의 눈'이고 부제는 '사회적 지능의 진화'이다. <유혹하는 본능>(참솔)이나 <호모 에로티쿠스>(청어람미디어)도 <비열한 유전자>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다.

 

 

 



끝으로, 김수영 전집이 다시 나온 소식. 민음사에서 품절된 전집이 이번에 하드카바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는데,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듯이 이런 책들도 웬지 사(주)고 싶어진다. 1권(시), 2권(산문)만이 우선 나왔는데, 별권으로 묶였던 김수영론은 좀더 두툼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세기 단 한명의 한국시인으로 고종석은 백석을 꼽았는데, 나는 백석과 김수영 중 아직 결정을 보지 못했다...


 

 

 

참,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도 나왔다. 이쯤되면, 김훈의 지겨움이라 할 만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보는 수밖에. 그의 지겨움에, 그의 비애에 동참하는 수밖에. 얼마전에 나온 <아, 입이 없는 것들>의 이성복과 함께 그는 '비애적 세계관'을 대표한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왜, 어떻게, 어쩌다, 어쩌자고,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쏟아지는 책들을 어쩔 수가 없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앤드루 샌더즈의 <옥스퍼드 영문학사>(도서출판 동인)가 번역돼 나왔다. 정가 38,000원에 968쪽짜리이다. 두껍기로는 <철학자들의 신>이나 <광기의 역사>를 능가한다. 책의 모양새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서평으로 보아 번역된 영문학사로는 가장 방대하며 가장 풍부하다. 번역의 질도 양호하다고 하나, 고유명사들을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한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한다). 같은 출판사에서 <현대문학이론 용어사전>도 나왔다. 사전이야 많을수록 좋다는 건 상식이다. 778쪽이고, 정가는 역시 38,000원. 바야흐로 3만원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김홍경의 <노자>(들녘)도 거기에 속하는데, 880쪽에 정가 32,000원이다.

 

 

 



잡다한 책에서 빠뜨렸지만, 오강남의 <세계종교 둘러보기>(현암사)도 필히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한 책이다. 그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과 함께. 지각있는 기독교인들의 필독서이다. 종교학 관련으로 아주 따끈따끈한 신간은 존 D. 카푸토의 <종교에 대하여>(동문선)이다. 기독교철학쪽 전문가이자 하이데거와 데리다 전문가이기도 한 저자의 책으론 <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시간과공간사, 1993)가 번역돼 있다(절판됐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데리다와 함께 편집한 <호두껍질 속의 해체론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유익한 데리다 입문서이다.

문제는 역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의 번역자이기도 한데(이것도 종교와 관계가 있다고 번역을 맡은/맡긴 것일까?), 우리말 <믿음의 대하여>는 처음 인상만큼 읽을 만하지가 못하다(그래서 이전에 '읽을 만하다'고 한 발언은 취소한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고,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대상 a'가 뭔지도 모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겠고. 그런 역자가 열성적으로 번역에 나서고 있다. 좀 걱정스럽다(*<믿음에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후에 이 같은 내용의 리뷰를 올렸다).

2003.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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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글을 연재한다(*이 글은 2003년 6월말에 씌어졌다. 그해 5월을 건너뛴 것인데, 그때도 요즘처럼 피곤했었나 보다). 두 달이 넘었는데, 한번 틀어진 리듬을 다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4월과 5월 두 달은, 학술지를 만들고, 그와 관련된 일들을 하느라고 '탕진'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시간들이 나를 그냥 통과해 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바쁜 일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있지만, 장마가 시작됐다는 핑계로 잠시 늑장을 부린다. 이럴 땐, 'Crying in the rain' 같은 음악이라도 깔렸으면...



앞으로 새로 나온 책들을 잡다하게 소개하기보다는 내가 정말 읽고 싶은 책(읽고 있는 책), 사고 싶은 책(소장가치가 있는 책)만을 간추려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그 의도는 짐작하시겠지만, 당신도 사서 읽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공범의식은 공고해질 것이다. 나는 책에 발목 잡히지 않은 삶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경멸한다...

 

 

 



아침 신문에(월요일 아침엔 한겨레를 읽는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박노자의 칼럼과 문학란이 연재되기 때문. *요즘엔 읽지 않는다. 그런 란이 빠졌기 때문). 이성복의 신간 시집 기사가 났다.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내가 제일 처음 읽은 그의 시집은 <남해금산>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88년쯤. 이성복은 그때 80년대 시의 시대를 대표하던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그의 모든 책을 나는 갖고 있다. 청춘의 뜨거운 피(그런 강도를 느끼게 하는 시인들은 많지 않다), '나쁜 피'의 시인도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를 먹었고, 시와의 오랜 불화 끝에 10여년만에 낸 시집이 신간이다. 오는길에 서점에 들렀지만, 예상대로 시집은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아마 주중에나 서점에 깔리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꿩대신 닭이라고 집어든 게 그의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문학동네, 2001)이다. 대부분의 글들이 이미 읽은 거여서 사지 않고 미뤄두었던 책인데, 사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까 언젠가 산 거 같다. 불행하게도 기억이 좀더 또렷해지는 걸로 봐서 집에 꽂혀 있을 가능성이 80%이다. 이거 8,000원 짜리인데... 대부분의 글이 이미 읽을 거라고 그냥 장서용으로 꽂아둔 게 화근이라면 화근일 테다(알건 모르건, 산 책 또 사는 게 북마니아의 조건 중의 하나이다). 집에 가서 한번 확인해보고, 그냥 선물용으로 떼놔야 겠다. 요는, 이성복의 신간 시집이 나왔지만, 아직 구경을 못했다는 것이고, 당신도 한번 사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테리 번햄과 제이 펠란 공저의 <비열한 유전자>(너와나 미디어). 이건 어제 강남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우연하게 집어든 책이다.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이 제목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는데, 에드워드 윌슨의 세 줄짜리 추천사가 없었다면, 그냥 싸구려 과학서로 내려놓을 뻔한 책이다. 저자들은 모두 윌슨의 제자들로서 하바드에서 경영학과 생물학 학위를 했다. '유전자 안내서(매뉴얼)'로 분류될 책의 서론에서 저자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찰스 다윈을 연구하는 것이다."(19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정확하게 바로 그런 경로를 밟은 이가 라캉학파에서 진화심리학으로 전공을 옮겨간 딜런 에반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신분석학(프로이트)과 진화심리학(다윈), 둘다에 아직은 매료돼 있다.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슈퍼스타라면, <이기적 유전자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의 슈퍼스타이다. 그리고 <비열한 유전자>란 제목은 명백하게 도킨스의 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신이 진화생물학에 문외한이라면, 나는 이제라도 당신이 이들 책들에 입문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세계관이 조금 바뀔 것이다.

 

 

 



사실 영풍문고에 들렀던 건, 신간 과학서인 <아톰으로 이루어진 세상>(생각의나무)과 <넥서스>(세종연구원)를 들춰보기 위해서였는데, 전자는 아주 잘 씌어진 화학 입문서이고(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땐 이런 책들이 없었다!) 후자는 요즘 뜨고 있는 복잡계과학의 한 분야인 네트워크 이론 입문서이다. 작년에 이미 <링크>(동아시아)란 책이 나오기도 했고, 쉬운 설명은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네트워크 이론도 나의 관심사에 있어서 진화심리학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비열한 유전자>에 밀리고 말았다(모든 책을 다 살 수는 없으니)...

 

 

 



그리고 세번째는 조광제의 <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철학과현실사). 부제는 '몸철학의 원리와 전개'이다. 목차로 봐서는 몸철학의 '전개'를 다 감당하고 있지 못하지만, 국내에 몇 안되는 메를로-퐁티 전공자의 몸철학 입문서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는 이정우와 함께 철학아카데미의 공동설립자이다. 이를테면 강단밖(재야?) 철학자이다. 책이 경어체로 돼 있는 걸로 봐서 대부분이 아마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된 내용을 묶은 것이 아닐까 싶다.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에도 출연한 바 있는 이 '영화배우'이자 철학자의 책은, 그러나 좀 미덥지가 못하다. 그의 영화론인 <쉬르필로소피아: 인간을 넘어선 예술>(동녘, 2000)을 읽고 느낀 소감이 그렇다. 그 책이 좀 실망스러웠던 탓이다. 그래서 이번 신간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메를로-퐁티 전공자로서 변변한 역서 하나 없다는 점도 불만이라면 불만이고(적어도 <행동의 구조> 정도는 번역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메를로퐁티에 입문하려면, 당연히 후설을 거쳐야 하는데, 저자의 학위논문이 "현상학적 신체론: 후설에서 메를로-퐁티에로의 길"이었다. 그 후설에 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아직까지는(그리고 내가 읽은 바로는) 한전숙의 <현상학>(민음사)이다. 메를로-퐁티쯤 오면, 사실 동아시아의 기철학이나 한의학적 세계관과 접맥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심신이원론이 강한 서양철학적 전통에서 볼 때 좀 튀어보이는 것이지, 메를로-퐁티의 기본적 아이디어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게 내 선입견이다. 메를로-퐁티적 이성을 '아줌마적 이성'이라고 바꿔부른 데에는 그런 선입견이 깔려 있다. 물론 <지각의 현상학> 같은 '물건'은 읽을 만하다(*조광제는 서평에서 국역본의 번역이 매우 부정확하다고 비판했다). 철학에서 중요한 건, 문학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디어가 아니라, 논증의 과정이고 육체이니까.

 

 

 

 

네번째 책은 지난 토요일 한겨레에 서평이 실린 박홍규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미토)이다. 저자는 알베르 카뮈와 조지 오웰 평전과 함께 세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출간했다(*그의 평전 시리즈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거의 강준만 수준의 생산력인데, 문체 또한 간결해서 속도감있게 읽힌다. 법학자인 저자는 카프카학자들의 모호한 수사들을 걷어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카프카는 평생 사회주의자, 아나키즘에 가까운 사회주의자였고 동시에 법률가였다. 나는 카프카의 삶은 물론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이 두가지는 핵심적인 열쇠라고 본다."(79쪽) 해서 책은 '카프카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평전이 돼 버렸다. 문제는 그럼에도/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갖는 의의이다.

저자의 조사에 의하면, 책은 국내에서 나온 최초의 카프카 평전이다. 학위논문이 단행본으로 나온 몇 권의 연구서를 제외하면, 국내에는 변변한 단행본 연구서(모노그라피)조차 없는 것이 카프카학의 현주소인데(*그런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학술논문들을 빼면, 조정래의 <프란츠 카프카>(살림, 2005) 정도가 체면치레하는 책이다), 한 법학자의 도전장에 대한 카프카학자들의 대응이 주목된다(물론 아무런 대응도 없을 테지만). 아쉬운 건 좀 급하게 책을 내서인지 오타나 오문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 것. '실존의 비의'(67쪽)란 말을 엉뚱하게 해석한다든가 '꽤나'를 '꾀나'로 쓰는 것, "프리브람의 아버지"를 "카프카의 아버지"(191쪽)로 잘못 표기하고 있는 것 등이다. 그럼에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

 

 

 



끝으로, 다시 나온 책들 패키지. 절판되었던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열화당)이 다시 나왔다. 알다시피, 책은 <서양미술사>와 함께 곰브리치의 주저이다. 그의 대담집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와 함께 곰브리치 퍼즐의 짝을 이룬다. 사실 다른 주저인 <서양미술사>도 원제에 맞게 <미술이야기>로 번역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교양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이미 영역본이 <들뢰즈의 푸코>(새길)란 제목으로 나왔지만 현재는 품절상태이다(인터넷서점이 그렇다는 얘기고, 대형서점들에서는 찾아볼 수 있다). 서두 부분을 비교해 본 결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원저 번역본이 나왔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겠다. 그리고 신간엔 대단히 자세한 들뢰즈 서지가 실려 있다. 물론 들뢰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호락호락하게 읽히지 않는다.

 

 

 



 

소설 가운데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민음사)가 다시 나왔다. 1991년에 간행된 캠브리지 '결정판'을 김욱동 교수가 옮겼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민음사)도 다시 나왔다. 나는 1984년초에 김병익의 번역으로 읽었었는데, 어느새 20년전이 돼 버렸다(!).

 

 

 



기타, 가타리의 마지막 책 <카오스모제>(동문선)도 나와 있는데(*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세가지 생태학>과 함께 나중에 다루고자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들뢰즈/가타리의 기호학 비판이다. 그 비판의 전거로 옐름슬레우가 많이 인용되는데,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저작 <랑가주 이론 서설>(동문선, 2000)의 번역도 신통찮다는 것만 지적해둔다. 한국어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지난함이여!...

2003.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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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 공연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지난달에 이번주 토요일 공연을 예매했기 때문에, 주말 7시간 30분을 이 공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 공연에 관한 글을 한번 띄운 적이 있지만, 며칠전 한겨레에 관련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한겨레(06. 05. 11)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연출가 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 공연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장장 7시간30분에 걸친 공연시간으로 화제지만 중요한 건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작품과 함께 늙어온 배우들은 스타니슬랍스키가 부르짖었던 ‘무대 위의 삶’이 무엇인지를 펼쳐 보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무대에 처음 <형제자매들>이 울려 퍼진 것은 1985년. 그로부터 20년이 넘었지만 관객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작품을 찾는다. 여전히 ‘동시대적’인 무엇이 그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감동은 러시아인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말리 극장 로비에 전시된 세계지도에는 <형제자매들>이 여행한 루트가 표시되어 있다. 1999년 러시아 유학 중 두 차례에 걸쳐 이 작품을 봤으며, 레프 도진을 인터뷰하기도 했던 이진아 숙명여대 교수가 소개글을 보내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주 연극의 위기에 대해, 드라마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인접 장르와의 경쟁 속에서 연극은 서서히 도태되고, 마이너 장르로 밀려나고, 마침내는 사라지고 있다고. 그런데 그런 시대에 20년 이상 객석을 가득 메운 채 상연되는 연극이 있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가장 민족적이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은 연극이 세계인의 공감과 찬사를 얻으며 지구를 몇 바퀴나 돌고 있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형제자매들>은 러시아인들이 ‘위대한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베리아 민중들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새 희망에 부풀지만 삶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가난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사랑하고 노래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삶이 주어진 한 다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극의 씨뿌리기 장면은 그러한 삶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발을 구르고 민요를 부르며 열을 맞추어 씨를 뿌리는 아낙들, 황금빛 조명 아래 찬란한 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씨앗들, 그들이 파종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래요, 희망이다.

연출가 레프 도진의 명성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드라마 극장(이하 말리 극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1980년대 초 도진이 이곳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극장을 말 그대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형제자매들>이라고 하는 금세기 연극사에 길이 남을 작품 만들기에 착수했다. <형제자매들>을 만들기 위해 그는 도시에서만 자란 젊은 배우들을 데리고 원작자 표도르 아브라모프의 고향 시베리아의 시골마을로 갔다. 도시의 평론가들과 연극인들의 경악과 비웃음 속에서 그들은 여름 한철을 몽땅 그곳에서 보냈다. 시골 풍습을 배우고, 북쪽 사람들 특유의 악센트를 익혔으며, 무엇보다 그들 삶의 영혼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들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일소하며 <형제자매들>의 무대 위에서 경이롭게 빛을 발했다.

<형제자매들>의 무대는 예두아르트 코체르긴이 북러시아의 상징적인 재료, 통나무로 디자인했다. 극의 시작은 무대 중앙에 드리워진 통나무 스크린 위로 전쟁 자료화면들이 영사되면서부터다. 이와 함께 무대를 울리는, ‘형제자매들이여~’로 시작되는 스탈린의 연설. 이 프롤로그 직후 나무 스크린이 거두어지면 무대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전장에서 귀향하는 가족을 기다린다. 통나무로 된 두 개의 나무 문이 앞줄에 앉은 관객의 머리 위를 지나 두 개의 반원을 그리며 열어젖혀지면 그들은 힘차게 가족들을 외쳐 부른다. 그들의 애절함과 반가움 속에는 관객들에 대한 마음도 함께하는 것 같다. 이렇게 관객은 <형제자매들>의 전후 민중들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 작품은 본래 이틀 저녁에 걸쳐 공연된다. 세 시간 남짓한 두 개의 공연이 모여 <형제자매들>이라는 하나의 극을 이루기 때문이다. 관객은 자신들의 소중한 이틀 저녁을 고스란히 이 작품을 보기 위해 할애해야 한다.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도진의 작품을 보는 것은 늘 편안한 경험은 아니다. 그는 관객에게 충격과 고통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바로 그 ‘경험’을 통해 극장을 나서면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나 얻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레프 도진의 작업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과 연극적 유산들을 연구하지 않은 진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뿌리와 근원을 잃은 아이디어는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것, 그의 작업은 이러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형제자매들>은 연극이 어떠한 모습으로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적 질문이 되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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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1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7시간 30분이라...밥 먹는 시간도 준다니...그런데 러시아 극단이 와서 직접하는 건가요? 그럼 자막 읽어내랴 어지간히 고생깨나 할 것 같아요. 하지만 호기심이 마구 동한다는...^^

로쟈 2006-05-15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직접 와서 하는 공연입니다. 두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린 바 있으니까 참고하시길. 혹 표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