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번역에 관한 책들을 훑어보다가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 출간 소식을 접했다. 다행히도 중앙일보에 역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중앙일보(06. 08. 02) "'번역론' 번역하느라 1년을 티격태격"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서양철학과 번역학을 각각 전공한 윤성우(39.한국외국어대) 교수와 이향(36.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 박사는 지난 1년간 이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폴 리쾨르의 <번역론>을 우리말로 잘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이들은 팽팽한 샅바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물이 <번역론-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철학과 현실사)이란 이름으로 최근 번역돼 나왔다. 1일 오전 이들을 만나 공동번역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사람의 입장은 원문과 번역문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를 놓고 갈렸다. 리쾨르 철학 전문가인 윤 교수는 원문의 형식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이 박사는 원문의 형식을 다소 파괴하더라도 전체적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자고 맞섰다. 두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 번역의 기준이 될 것인가. 원문 한줄 한줄을 놓고 두 사람의 주장은 평행선을 그렸다고 한다.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인데도 1년이란 세월이 소요된 것은 그 때문이다(*두 사람이 고심한 만큼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아닐까 믿어본다. 한데, 본문 68쪽짜리면 팜플렛 수준이군! 영역본은 'On translation'(2006)으로 국역본과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On Translation (Thinking in Action S.)
이 향="우리처럼 조합이 된 공동 번역은 처음인 것 같아요. 공역 과정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었어요. 적정한 선에서 서로 양보해 번역어를 결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어요. 철학적 개념어의 경우 철학 전공이 아닌 제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개인적으론 해석학과 번역의 관계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됐어요."

윤성우="원문에 충실할 것인가, 원문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가. 무척 오래된 논쟁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결론 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없다고 봅니다. 리쾨르의 책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 고전에 대해서도 다양한 번역본이 나오면 좋다는 것입니다. 번역의 우열에 대한 섣부른 판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공동작업을 통해 두 사람은 리쾨르가 <번역론>에서 제기한 "좋은 번역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는 관점에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각주가 실린 전문가용 번역과 가독성이 높은 대중용 번역이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독자가 자신의 필요와 목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의 번역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번역론>은 리쾨르가 90년대 후반부터 써온 글들을 모아 타계하기 1년 전인 2004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책이다. 부제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리쾨르가 번역을 단순히 외국어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제다. 리쾨르는 번역을 철학의 영역으로 대폭 확장시키며 '번역=철학'이란 견해를 밝힌다. 어떤 사태와 의미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선 늘 번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번역은 다른 문화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대화를 풀어가는 철학 행위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외국어 사이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를 구사하는 동시대인의 문헌이나 대화를 타인에게 전달할 때도 번역 행위가 개입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곧 번역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이처럼 중요한 번역을 경시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까닭은 무엇일까.

윤성우="서양에선 20세기 초반부터 번역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일본의 경우 서양 근대문화를 수용할 때 번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외국어를 주로 취직.승진 같은 실용적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번역의 철학적 의미에 관한 논의가 적은 것 같습니다."

이 향="번역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일은 사실 실무 번역자들에게는 낯선 설명입니다. 번역자들은 실제 구체적 도움이 되는 것들을 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번역자들도 번역의 철학적 의미와 같은 본질적인 물음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됐습니다."



-현재 또 다른 책의 공동번역을 진행하고 있는 두 사람은 논문쓰기보다 번역하기가 더 힘들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전문 번역서를 제대로 평가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러한 지적들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런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 누가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06. 08. 07.

 

 

 

 

P.S. '번역의 문제'에 관련하여 내가 읽었거나 읽을 계획으로 있는 책들을 대략적으로 꼽아보았다. <번역과 주체>, <번역과 제국>이 번역과 철학, 정치학과 관련한 책이라면, <번역은 반역인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는 우리의 번역/오역 현실을 둘러보게 하는 책이다. <번역은 내 운명>은 현장 번역가들의 육성을 담고 있다. 거기에 일본작가 쓰지 유미의 <번역사산책>, <번역과 번역가들>이 내가 이전에 부분적으로 읽은 관련서들이다. 음,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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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07 18:27   좋아요 0 | URL
1년 동안 리쾨르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문학도로서 '악의 상징'이나 '해석의 갈등' 같은 책은 매력적이더라고요. 정치적 입장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윤성우 선생님의 리쾨르 관련 개설서도 잘 읽히고 좋은 한국어 문장들을 구사하시던데, 이렇게 노력을 많이 하셨다니 기대됩니다. :)

로쟈 2006-08-07 18:50   좋아요 0 | URL
만만찮은 책들을 읽으셨군요. 사실 이번에 나온 책은 60여쪽 분량이니까(국역본 166쪽은 좀 부풀려진 것이고) 실제 작업보다는 '티격태격'에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을 듯합니다. 어쨌거나 리쾨르의 책들 가운데 가장 '빨리' 읽을 수 있을 거 같네요. 리쾨르 입문서 가운데 리처드 커니가 쓴 게 있는데, 그런 종류도 소개되길 이 참에 기대해봅니다...

swyun2002 2006-08-08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번 번역에 참여했던 공역자중 하나인 윤성우입니다.로자님의 글 잘 보았읍니다.독서력과 내공이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기인님과 로자님의 댓글도 잘 읽었읍니다.이렇게 찾아서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참고로 제가 쓴 해제와 저자인 리쾨르 소개가 60쪽 정도이고 리쾨르의 글은 실제 약 90쪽 정도 입니다 .  다른 공역자인 이 향 박사께서 작년 학위 준비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조금 길어진 면이 없진 않지만 1년을 내내 "티격 태격"한 것은 아닙니다. 통번역을 전공하는 분이라 불어는 물론이고 한국어 구사가 뛰어나신 장점과 제가 리쾨르 전공한터라 상호 보완성이 있었읍니다.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지만,  장절을 나누어서 번역하여 합친 그런 공역은 아닙니다. 원전을 AZ까지 함께 읽고 문맥과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우리말을 거듭해서 고민하며 옮겨 보았고 역주도 관련문헌을 찾아서 읽고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적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가더라구요. 그렇다고 해도 틀린 불어 철자나 오역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읽어시다가 발견되면 알려주세요.담에 반영하도록 노력해볼께요.야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리차드 커니는 파리에 머물며 리쾨르에게서 직접 배우기도 하고 오랜 교분이 있는 학자라 좋은 입문서가 될 듯합니다.  커니덕에 리쾨르가 종종 강연차 더블린에 가기도 했읍니다. 짧은 글로는 스피겔버그가 쓴 "현상학적 운동 II "'에 나오는 글도 추천할만 합니다.


로쟈 2006-08-08 00:15   좋아요 0 | URL
직접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사실은 낮에 책 주문을 넣었기 때문에 저는 모레쯤 읽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마침 번역 문제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생겼는데, 요긴한 참조가 될 듯합니다. 커니의 책은 'On Ricoeur'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윤선생님 같은 전공자께서 번역해주시면 좋을 거 같네요.^^

swyun2002 2006-08-08 00:28   좋아요 0 | URL
내 그 책은 저도 있어요.볼만 합니다.사실 영어권과 불어권의 세컨드리가 한 권정도씩 번역이 나와야 하는데, 눈은 졸리고 손은 더디어서요. 꾸뻑

기인 2006-08-09 05:51   좋아요 0 | URL
ㅋㅋ 윤성우 선생님 답글에 오타 많습니다 ^^; ㅎㅎ

swyun2002 2006-08-10 11:07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시절에 놀기만 해서 띄어쓰기와 국어 ??실력이 좀 사실 떨어져요.인정.지적에 감사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쓴 글을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었고 한 잡지의 청탁을 받아서 3배쯤 되는 초고를 쓴 이후에 다시 줄인 것이다(초고는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었다). 7월말쯤에 씌어졌지만 9월호에 맞추기 위해서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두이노의 비가>에 대해 몇 마디 주절거리게 되었던 것인데, 책이 기억에는 8월 중순쯤 나왔을 법하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이지만, 조금 앞당겨서 이 글을 호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곧 가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 '가을날'이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시는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이다. 그리고 이 <비가>를 읽어보기 위해서 얼마전 러시아어로 번역된 릴케시 선집을 한 권 샀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속지 군데군데에 들어가 있는 손바닥만한 포켓북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통해서였는데, 그게 벌써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었는데, 가령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같은 시구를 당신은 접해본 적이 있으신지? 당시에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왜 그런가? 일단 처음 두 구절을 옮겨본다(번역은 우리말 번역본들과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조합한 것이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릴케의 시구이면서 동시에 그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에는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건 '천사’인데, 이 시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거라는 것. 천사는 너무도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야한 비유이지만, 가령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인다고 해보자.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왜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할까? 그건 진리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해서, 릴케의 <비가>는 시작부터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허무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시라.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 가을날, 우리의 삶은 그런 울음과 울부짖음 속에서도 딴은 탐스럽게 익어가나니...(<삶과 꿈>, 2004년 9월호)

 

 

 

 

04. 07. 26./ 06.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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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스럽게 익어가는 우리의 삶..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6-08-0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우리도 늦여름의 과일들만큼 열심히 살아야죠.^^
 

어떤 분야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구상자는 그 분야의 간략한 역사서술과 용어사전이다(새로운 역사서술은 새로운 용어를 요구하며, 새로운 용어는 새로은 시각의 역사서술을 요청한다). 미술사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겠다. 물론 현장에서 미술을 '실천'하는 아티스트들의 경우에 이러한 개념적 도구들까지 직접 챙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걸 필요로 하는 건 비평가나 관람자들이다. 혹은 미술 텍스트의 일반 독자들이다.

 

 

 

 

시야를 좀 좁혀서 20세기 현대미술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역시나 필요한 건 이 시기 미술사에 대한 개관이고, 그걸 서술하기 위해 동원되는 개념들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책이 새로 출간됐다.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31>(아트북스, 2006)이 그것이다. 원제는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들(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 Second Edition)>(2003)이니까 말 그대로 '비평용어사전'이며, 국역본 표제로 보아 그게 31가지인 모양이다. 743쪽의 두께이니까 일단은 듬직하다. 빼먹은 것 없이 다루겠구나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니까.

아직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지라, 알라딘이 소개를 옮겨오면, "'기호'에서 '아방가르드', '몸', '미', '예술의 사회사'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주요 용어 31개를 상세히 분석했다. 재현, 기호, 이미지, 시뮬라크룸, 양식, 문맥, 전용, 몸, 젠더, 미, 추, 응시, 정체성, 시각문화 등 미술사 비평용어에 관해 씌어진 31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공저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S. 넬슨은 "2006년 현재 시카고 대학의 미술사 및 문화사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돼 있는데, 확인해보니 작년에 예일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 미술사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시카고나 예일이나 여하튼 명문대학의 미술사 강좌를 엿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해준다는 의미도 된다.

책의 특징? "미술이론을 비롯 다른 분야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는 비평용어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예컨대 '재현'을 기술하고자 하는 경우, 시각예술에서 논의되는 미학적이고도 예술적인 담론뿐만 아니라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담론들을 포괄하여 표상, 관념, 존재, 의미, 상징, 기호 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식이다.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까지 해당 용어에 관한 개략적이고도 세부적인 논의의 역사도 함께 설명한다." 하니, 미술사나 미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될 만하다(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게임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두어 번은 통독해야겠다.


아직 번역본의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역자의 전력상 신뢰할 만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원서는 이런 모양새이다. 2003년에 나온 2판인데, "초판(1996)에는 22편의 에세이가 실렸고, 제2판(2003)에는 새로운 미술사의 학문 추세를 반영한 9편이 추가되었다. 추가된 에세이에서는 양식, 퍼포먼스, 정체성, 몸, 기억과 기념비 등의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2판을 찍었다는 건 교재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되겠다. 이 분야의 전문가나 미술비평가들의 리뷰를 읽고 싶지만, 당장 눈에 띄지 않기에 자리나 데우는 페이퍼를 미리 써둔다.
 
06.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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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6-08-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자의 전력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우려를 저버리지 않았을 듯 합니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로쟈 2006-08-0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상' 주문은 해놓았는데, 걱정이네요.^^

주니다 2006-08-0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실물을 대충 훑어봤는데, 역자가 대학원생 혹은 졸업생들과 나눠서 번역을 했더군요. 그나마 다행인 듯 싶습니다. 이거 어떻게 된게 학생들보다 못한 선생들 걱정을 해야하니 원...

로쟈 2006-08-0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레쯤 책을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도서관에서 초판을 대출해왔는데, 대조해봐서 번역이 양호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2판을 아마존에서 주문해야겠지요. 이중과세...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21세기. 고전읽기'에서 이번주에 다룬 것은 작가 최명희(1947-1998)의 <혼불>(한길사)이다. 흔히 박경리의 <토지>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문학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대하 장편소설에 지극히 취약한지라 내가 작품을 읽게 될 날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작품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아두는 게 자신의 혼을 불살라 작품을 쓴 한 작가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경향신문(06. 08. 05) “제 앞길, 제 혼불로 밝히라” 말한다

-일제 강점기, 종부(宗婦) 3대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다양한 사랑과 욕망의 드라마를 담고 있는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은 여러모로 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 성망은 낮지 않으나 완독한 독자를 만나기 쉽지 않고, 문장의 호흡이 독자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반면 서사의 진행은 한없이 지루하다.

-그런 면에서 <혼불>은 처음부터 ‘사랑’의 대상이었다기보다 ‘경외 어린 소문’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일평생 작가가 독신으로 <혼불> 집필에만 매달렸다는 사실, 혼불 10권 발간 직후 안타깝게 들려온 투병 소식으로부터 사몰(死沒)에 이르기까지…. ‘혼불’은 책의 제목인 동시에 한 예술가의 목숨의 불로 여겨졌다.



-<혼불>은 이미 25년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혼불>이 각광을 받은 것은 길게 잡아야 10년 남짓이다. 이를 부박한 독서 풍토 탓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데에도, 새삼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1980년대와 90년대의 경계, 혹은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5·18과 6·10 등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88 올림픽과 2002 월드컵 사이의 간극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 즉 격심한 이행기에 비로소 ‘혼불’은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단순히 ‘현재는 불안정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니 과거를 돌아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이 같은 평가는 <장길산>이나 <토지> 같은 역동적인 서사 작품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작가 최명희는 만년필로 원고지에 ‘혼불’을 써내려갔다. 그의 글쓰기는 “원고지에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가며 새겨넣는 작업”(시인 고은)이었다.

-10권 작품의 말미까지 끊임없이 언급되는 청암부인은 3권 초입에 이미 널길에 들어섰는데도 다시 나타나고 또 나타난다. <혼불> 마니아층에게마저 악명 높은(?) ‘사천왕’ 대목은 또 어떤가. 마치 전향적(前向的) 시간관에 역행하려는 사명이라도 타고 난 것처럼, ‘혼불’은 반복과 지연의 서사 전략을 고집하고 있다. 남원에서 시작된 강모의 방황은 전주에서도, 만주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작품 초기에 효원이 보여줬던 역동성은 청암부인의 ‘혼불’을 흡습(吸襲)하는 순간부터 마치 과부하에 걸린 것처럼 둔중해진다. 강실이는 그야말로 동구 밖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춘복이의 ‘변동천하’ 역시 당시 시대상을 표상할 뿐, 작품 내의 서사 동력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불>은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이 되었을까?

-그동안 많이 지적된 원인으로는 <혼불>에서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나 심도 있고 다채로운 민속학적 고증을 들 수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라고 했던 생전 작가의 말처럼, 최명희는 ‘아슴찬’ 모국어 사랑을 실천한 작가였다. 일부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던 단어 ‘혼불’을 국어사전에 등재하게끔 만든 일이나, 밤과 새벽 사이 그 희뿌연 시간을 표현할 만한 단어 ‘삭연하다’를 찾기 위해 사흘 밤낮 꼼짝도 않고 먼 산바래기만 했다는 일화, 그리고 전주 ‘최명희 문학관’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는 그 꼼꼼한 수공(手工)의 흔적들…. 민속학적 고증 또한 마찬가지이다. <혼불>을 텍스트로 하여 조선의 복식을 연구한 박사 논문이 나올 만큼 작가 최명희는 고증에 철두철미했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혼불>이 감동을 이끈 요인은 다른 데 있다. “나 홀로 내 뼈를 일으켜 세우리라.” 이는 작품 속에서 청암부인이 몇 번씩이고 되뇌는 말이다. 종부로서의 의무감만으로 청암부인이 어찌 청상의 재 같은 세월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같은 처지인 인월댁과 옹구네를 보면 이는 보다 확연해진다. 무위와 자기 소모, 어두운 열정이 불러오는 파괴성….

-결국 ‘나’는 내가 만든다. 나를 끌어올리는 것도, 내동댕이치는 것도 바로 ‘나’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어렵다. 누군가 얼만큼 내 몫의 짐을 대신 부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허망하지만 그게 인지상정이다. 독자들이 ‘혼불’을 통해 읽는 것은 바로 청암부인, 인월댁, 강모, 강실, 강호, 강태, 오유끼, 옹구네, 춘복, 비오리, 백단이의 ‘삶’이다. 그 사람의 욕망이, 사랑이 자신을 수렁에 빠트리기도 하고, 자신을 도약시키기도 한다. 그야말로 내가 내 뼈를 세우고 내 살을 깎는다.

-결국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남의 생이 궁금하다. <혼불>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대개의 소설에서는 인물의 성격이 선조(線條)적으로 변화한다. 이를테면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진행이 일치되는 경우다. <혼불>은 이와 같은 소설 공식에 반한다. 오직 각 개인의 ‘혼불’에만 무섭도록 집중한다. 자신의 불을 다스리는 사람, 휘황한 불기에 그만 넋이 빠진 사람, 자신의 심화로 자신을 태우는 사람….

-나는 지금 어디 있고, 어디로 가는가. “앞길이 어둡거든 내 안의 불을 보라.” <혼불>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요즘과 같은 폭염에 더 새겨둘 만하다. 이열치열의 혼!). 정말 중요한 충고란 것이 대개는 가장 평범한 원칙을 재삼 일깨워주는 것이다.(김병용|소설가·전주교대 겸임교수)

06.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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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이번에 확인해보니 그렇더군요. 일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출판사의 '혼불'에 기대를 걸어봐야겠네요...
 

개인적으로 판타지 문학에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사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이담(the marvellous)', 즉 초자연적/마술적인 이야기들에 별로 끌리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판타지(환상문학)에 대한 시학을 최초로 정립한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the fantasy)은 초자연적 논리에 근거한 경이담과 자연적/현실적 논리에 근거한 기괴담(the uncanny) 사이에 놓이며, 거기서 긴가민가 망설이게 하는 이야기들을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격찬한 바 있는,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다. 하지만, 근래에 '판타지'란 말은 용례상 경이담을 포함하는 듯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경이담과 동일시되는 듯하다(가령 대표적인 판타지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들을 누가 '현실'과 혼동하겠는가?). 그런 판타지를 즐기기에는 현실 자체가 너무 판타스틱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어슐러 르 귄의 판타지 소설 <어스시 전집>(황금가지, 2006)이 출간된 것은 반갑다. 특별히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소위 '세계 3대 판타지 대작'이 모두 완역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른바 비로소 짝이 다 맞게 된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게 옆에서 보기에도 좋은 법이다. 당장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지만, 판타지 컬렉션이라도 차릴 수 있을지 모르고 요즘 <오즈의 마법사>를 읽는 딸아이가 '나니아'나 '어시스'를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해서, 미리 손을 써두도록 한다. 어스시 시리즈와 곧 개봉될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8. 04) 어스시 시리즈, 마법 통해 자아 찾는 성장소설

-팬터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과 함께 세계 3대 팬터지 대작으로 꼽히는 <어스시> 전집도 마찬가지다. 미국 여성작가 어슐러 르 귄은 이 작품을 청소년용으로 썼지만, 어른들도 함께 열광했다.



 

 

 

-어스시는 용들이 살아 숨쉬고 마법이 일상생활인 환상의 세계로, 푸른 바다와 수많은 섬들로 이뤄져 있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어스시 시리즈는 총 6권 중 4권이다. 나머지 2권도 다음달에 출간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곧 개봉될 일본 애니메이션 <게드 전기: 어스시의 전설>의 원작인 이 시리즈는 팬터지인 동시에 주인공이 마법을 통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제1권 ‘어스시의 마법사’, 제2권 ‘아투안의 무덤’, 제3권 ‘머나먼 바닷가’, 제4권 ‘테하누’로 구성됐다.

 

 

 



-1권은 마법 능력을 가진 주인공 ‘게드’가 실수로 불러낸 그림 자 괴물과 쫓고 쫓기면서 괴물의 이름을 알아낸다는 내용이다. 어스시에서는 등장인물의 고유한 이름을 알아내면 지배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괴물은 게드의 악한 본성을 상징한다.

-2권에서 소녀 ‘테나’는 어스시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3권에서 어스시 세계를 지탱하던 마법이 효과가 없어지자 소년 왕자 ‘아렌’과 이제는 나이가 든 현자(賢者) 게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게드는 해답 대신 아렌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아렌은 이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다.

-제4권에서 어린 시절 모험을 떠났던 르 알비의 절벽으로 돌아온 게드는 늙은 데다가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상태다. 자신의 첫 스승 ‘오지언’의 집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 만났던 테나와 재회하고, 테나와 함께 온 화상 입은 아이 ‘테루’와도 만나 치유와 회복에 힘을 다한다. 사악한 마법사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을 통해 젊음과 힘을 잃어버린 이들이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스시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던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의 힘에 근원한 마법을 설정했다는 점이다. 어스시에서 독창적으로 시도된 ‘언령(言靈)마법’은 이후 수많은 팬터지 작품에 전해졌다.

-이 작품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 게드가 백인이 아 니라 갈색 피부를 가진 유색인이라는 점이다. 서양 팬터지의 주 인공이라면 흔히 백인을 연상하는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장재선 기자) 

경향신문(06. 08. 04) 미야자키 VS 스필버그 ‘이름값 승부’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성을 등에 업은 ‘몬스터 하우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광을 입은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이 오는 10일 나란히 개봉한다. ‘몬스터…’는 스필버그 외에 로버트 제메키스, ‘스튜어트 리틀’의 제작자 제이슨 클라크 등 4명의 제작지휘자가 이름을 올린 여름방학용 기획 애니메이션으로 길 캐넌 감독의 데뷔작이다. ‘게드전기…’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남인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데뷔작으로 동양사상의 향취가 물씬한 작품이다.
 


-하야오 감독 장남 데뷔작… ‘동양적 세계관’ 물씬-

-‘게드전기’는 판타지 소설의 고전인 어슐러 K 르귄 원작의 ‘어스시의 마법사’ 중 3, 4편을 영상화했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숙원사업이었다는 점만 떠올려도 작품 속 세계관을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노장사상을 출발점으로 한 동양적 가치가 중용의 미덕, 물아일체, 음양의 균형, 자연과 인간세계의 현명한 조화 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품 곳곳에 새겨져 있다.

-악의 기운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동하고, 역병이 번지고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인간세계. 자신 안의 또다른 자아로 인해 국왕인 아버지를 살해한 아렌 왕자는 궁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다. 대현자(大賢者) 마법사인 하이타카는 아렌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함께 길을 떠난다.
 
 
 
 
 
 
 
 

-‘게드전기’의 시나리오는 원작의 신화적 상상력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타일에 맞게끔 꽤 적절히 가공된 듯 보인다. 이미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지브리표 작품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는 관객이라면, 화면의 역동성이나 동양적 가치의 미술적 구현 등의 여러 측면에서 실망감을 얻게 된다.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풍부한 상징의 캐릭터들, 긴장감과 여유로움의 절묘한 조화 등 하야오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줬던 미덕을 고로 감독은 보여주지 못한 채 아버지의 작품세계를 계승하려 애쓰는 데에 그치고 있다.
 


-스필버그 제작 참여… 화려한 액션 스펙터클 볼만-

-‘몬스터 하우스’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제작·감독한 로버트 제메키스의 솜씨가 그대로 이어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앞마당에 뭔가가 떨어지기만 하면 집어삼켜버리는 괴물 같은 집. 어른들이 보면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들 눈에만 살아움직이는 게 보이는 기괴한 집과 맞서 한바탕 대결을 벌이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액션 스펙터클의 압도력이 다름 아닌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실력임을 화면으로 증명하고 있는 ‘몬스터…’는 어린이 관객들의 눈을 고정시키는 힘만큼은 부치지 않아보인다.

-‘게드전기’의 문제가 연출력에 있다면 ‘몬스터…’의 문제는 세계관에서 드러난다. 자유롭게 사는 히피 청년들이 몹쓸 존재, 따라해서는 안되는 어른으로 묘사되면서 설교를 늘어놓는가 하면 ‘어린이는 어린이가 꾸는 꿈을 꾸며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미국적 보수성을 드러내는 엔딩은 보기에 거슬린다. ‘포레스트 검프’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드러낸 제메키스식 보수주의의 연장이다. 롯데시네마의 전국 11개 상영점, CJ CGV의 전국 6개 상영점에서는 ‘몬스터…’ 상영관에 3D입체상영 시스템을 도입, 전용 안경을 착용하고 보는 3차원 입체영상으로도 상영할 계획이다.
 
06.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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