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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감사합니다. 현대편 저자인 윤성우입니다.분량이 철학사의 무게와 내용을 담기에는 많이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4권을 시리즈로 구성하고 청소년들이 들고 다니기에도 적합한 모양새를 갖추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읍니다. 많이 사랑해 주시면 또 기회가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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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폴 리쾨르의 번역론

필요 때문에 번역에 관한 책들을 훑어보다가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 출간 소식을 접했다. 다행히도 중앙일보에 역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중앙일보(06. 08. 02) "'번역론' 번역하느라 1년을 티격태격"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서양철학과 번역학을 각각 전공한 윤성우(39.한국외국어대) 교수와 이향(36.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 박사는 지난 1년간 이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폴 리쾨르의 <번역론>을 우리말로 잘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이들은 팽팽한 샅바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물이 <번역론-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철학과 현실사)이란 이름으로 최근 번역돼 나왔다. 1일 오전 이들을 만나 공동번역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사람의 입장은 원문과 번역문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를 놓고 갈렸다. 리쾨르 철학 전문가인 윤 교수는 원문의 형식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이 박사는 원문의 형식을 다소 파괴하더라도 전체적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자고 맞섰다. 두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 번역의 기준이 될 것인가. 원문 한줄 한줄을 놓고 두 사람의 주장은 평행선을 그렸다고 한다.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인데도 1년이란 세월이 소요된 것은 그 때문이다(*두 사람이 고심한 만큼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아닐까 믿어본다. 한데, 본문 68쪽짜리면 팜플렛 수준이군! 영역본은 'On translation'(2006)으로 국역본과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On Translation (Thinking in Action S.)
이 향="우리처럼 조합이 된 공동 번역은 처음인 것 같아요. 공역 과정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었어요. 적정한 선에서 서로 양보해 번역어를 결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어요. 철학적 개념어의 경우 철학 전공이 아닌 제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개인적으론 해석학과 번역의 관계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됐어요."

윤성우="원문에 충실할 것인가, 원문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가. 무척 오래된 논쟁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결론 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없다고 봅니다. 리쾨르의 책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 고전에 대해서도 다양한 번역본이 나오면 좋다는 것입니다. 번역의 우열에 대한 섣부른 판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공동작업을 통해 두 사람은 리쾨르가 <번역론>에서 제기한 "좋은 번역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는 관점에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각주가 실린 전문가용 번역과 가독성이 높은 대중용 번역이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독자가 자신의 필요와 목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의 번역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번역론>은 리쾨르가 90년대 후반부터 써온 글들을 모아 타계하기 1년 전인 2004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책이다. 부제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리쾨르가 번역을 단순히 외국어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제다. 리쾨르는 번역을 철학의 영역으로 대폭 확장시키며 '번역=철학'이란 견해를 밝힌다. 어떤 사태와 의미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선 늘 번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번역은 다른 문화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대화를 풀어가는 철학 행위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외국어 사이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를 구사하는 동시대인의 문헌이나 대화를 타인에게 전달할 때도 번역 행위가 개입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곧 번역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이처럼 중요한 번역을 경시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까닭은 무엇일까.

윤성우="서양에선 20세기 초반부터 번역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일본의 경우 서양 근대문화를 수용할 때 번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외국어를 주로 취직.승진 같은 실용적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번역의 철학적 의미에 관한 논의가 적은 것 같습니다."

이 향="번역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일은 사실 실무 번역자들에게는 낯선 설명입니다. 번역자들은 실제 구체적 도움이 되는 것들을 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번역자들도 번역의 철학적 의미와 같은 본질적인 물음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됐습니다."



-현재 또 다른 책의 공동번역을 진행하고 있는 두 사람은 논문쓰기보다 번역하기가 더 힘들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전문 번역서를 제대로 평가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러한 지적들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런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 누가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06. 08. 07.

 

 

 

 

P.S. '번역의 문제'에 관련하여 내가 읽었거나 읽을 계획으로 있는 책들을 대략적으로 꼽아보았다. <번역과 주체>, <번역과 제국>이 번역과 철학, 정치학과 관련한 책이라면, <번역은 반역인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는 우리의 번역/오역 현실을 둘러보게 하는 책이다. <번역은 내 운명>은 현장 번역가들의 육성을 담고 있다. 거기에 일본작가 쓰지 유미의 <번역사산책>, <번역과 번역가들>이 내가 이전에 부분적으로 읽은 관련서들이다. 음,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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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최근에 나온 책들(60)"

찾아서 까지 읽어주시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윤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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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갈등 -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 e시대의 절대사상 17
폴 리쾨르 지음, 윤성우 옮김 / 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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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갈등-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은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이 사랑이며,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의(正義)이고,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 의미(意味)”라고 말한 폴 리쾨르의 대표적인 저작들 중의 하나인『해석의 갈등』(1969년 출간, 2001년 한국어판) 에 대한 해설서이다.
 또한 한 시대를 규정하려했고 또 풍미했던 사상적 조류와 흐름을 피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한 리쾨르의 지적인 모험과 탐색을 담은 그 역작을 알기 쉽게 풀이한 저서이다. “갈등”이야 말로 새로운 의미 창출의 현장임을 저자는 본 해설서에서 밝혀낸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 1913-2005)는 현상학자, 해석학자라는 명칭이 따라 다니지만 우리는 그냥 그를 철학자라고 부르자. 대화와 참여의 철학자. 인간과 세계라는 피할 수 없는 준거점들 사이에 놓인 많은 징검다리들의 의미를 탐색한 철학자.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더 이상 의지할 수없는 몸이, 때로는 상징이, 때로는 은유가, 때로는 이야기가, 나중에는 타자와 역사가 의미 해명의 징검다리들로 여겼던 철학자. 매개와 절충, 대화와 타협을 혼동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한 철학자. 자신을 maître penseur(우두머리 위치를 점한 사상가)로서가 아니라, maître à penser(생각해보아할 사상가)로서 남기를 희망한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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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omadia > 해석학적 순환은 실천의 유예인가?
폴 리쾨르의 철학
윤성우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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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리쾨르는 낭떼르 대학의 성난 학생들로부터 쓰레기통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겪는다. 이것은 하나의 헤프닝이지만, <그 당시에도 좌파였고 지금도 좌파인 리쾨르>(225)의 면모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사건임에도 틀림없어 보인다. 일군의 아나키스트들과 마오주의자들의 눈에 리쾨르의 <상호성>과 <자기성>이란 단지 혁명적 상황을 끝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유예하고 무력화하는 반동적 계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리쾨르가 어떤 답변을 마련하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혁명적 상황에서 하버마스와 더불어 별난 형이상학자 정도로 치부되었으며, 그러한 결과 그의 철학전체가 정치적으로 폄훼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철학이 온건한 시기에 명제와 그것의 진리치를 가늠하면서 연구실의 마호가니 책상 위에서 꿈꾼다면, 이러한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째서 그 꿈이 평가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 좌파’라면, 그 레떼르에 부합하는 철학을 펼쳐 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가 쓰레기통을 뒤집어썼든, 그 시기에 <구식(舊式)의 왕관을 쓰고 다니는 철학자>(225)로 낙인찍혔든,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팩트일 뿐만 아니라, 그 철학의 진의다.

이 책의 저자 윤성우가 일률적으로 우리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리쾨르를 탐구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저자는 리쾨르의 정치적 성향을 충분히 숙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철학에서 학생과 급진좌파그룹들은 리쾨르보다 푸코와 들뢰즈를 더 선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말해, 그 사실이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인가? 도대체 철학이 역사에 대해 어떤 빚이 있기에 역사는 철학으로 하여금 출생증명을 작성하게 하는 것인가? 시대의 적자를 증명하는 것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철학은 그 시대를 반하는 것도, 순응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거스르는 것이다. 저자가 리쾨르를 보는 시각은 그래서, 다른 방식이다.

 리쾨르는 그때의 학생들에게는 너무도 온건한 좌파였는지 모른다. 철학적 스펙트럼 위에서 급진 좌파에 해당하는 포스트 근대주의자들에 비하자면 리쾨르는 포스트 근대를 살지만 여전히 근대와 총체적으로 결별하지 못하는 너무 점잖은 포스트 근대주의자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 철학과 포스트 근대 철학 사이의 지나친 단절과, 후자에 의한 전자의 공격이 반드시 온당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리쾨르가 보여준 행로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혁명성과 경쾌함에 사유의 중후함과 원숙함이 비스듬히 맞서 있다.(225)

포스트 근대와 근대 사이의 경계를 걸어가는 철학자로서의 리쾨르는 <사유의 혁명성과 경쾌함에 사유의 중후함과 원숙함이 비스듬히 맞서> 있는 철학을 전개한다고 저자는 본다. 왜 그런가? 그것은 리쾨르의 ‘주체사유’와 관계가 있다. 리쾨르에게 포스트모던의 악동들이 저지르는 주체 살해의 잔혹극은 왠지 떨떠름하다. 어째서 주체가 죽었다고 얘기하면서 ‘타자’를 고려해 넣지 않느냐는 것이다. 리쾨르에게 타자는 이때, 바로 <책임성>의 주체를 떠맡기는 <배려>의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주체를 살해하고 그 자리에 끊임없는 생성과 무원칙한 도덕성을 채워 넣는다면, 사실상 모든 윤리는 불가능하다. 리쾨르는 학생들에게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세상의 모든 젊은 것들은 과격하며, 또한 그러해야 마땅하다. 고정된 주체의 실체성이란 가장 먼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리쾨르는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일컫는 폐기될 주체란 ‘자체 동일성’을 가지 주체다. <결국 자체동일성과 자기동일성의 이런 구분은 더 이상 (인간) 주체라는 범주에 근세의 철학이 부여한 불변의 실체성만 고집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205) 저자는 이러한 주체의 이분화가 리쾨르의 가장 뛰어난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리쾨르의 자기 동일성은 어디서 확보되는가? 아마, 이 지점이 가장 미묘할 것이다. 먼저 리쾨르에게 <자기(the self)>는 데카르트적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때 데카르트의 철학은 ‘의식의 철학’이며, ‘반성의 철학’이 될 수 없다.

반성철학은, 리쾨르의 새로운 정의에 따르면 “의식의 철학 - 이 ‘의식’이라는 말을 자기-자신에 대한 직접적 의식을 의미한다면 - 이 아니며”[DIF, 51], “직접적인 것의 철학(une philosophie de l'immediat)”이 아니다. 오히려 “반성은 하나의 해석학”[62]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주체의 자기 파악이나 자기 이해가 더 이상 매개를 거치지 않는 - 이런 의미에서 직접적인(im-mediat) -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낸 언어적 표현물들과 그에 대해 해석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적 표현물들이 리쾨르에게는 다양한 인간활동 영역에서 드러나는 상징들이었고, 언어의 의미 창발적 형태로서의 담화와 살아 있는 은유였고, 이야기로서의 텍스트다.(73)

다시 말해, 반성의 철학은 상징과 담화와 은유 그리고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을 ‘우회’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말함이다. 이때, 주체의 자기 이해는 직접적이지 않고 매개적이다. 직접적 자기의식은 공허하다. 그러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인간활동의 면면들을 파악하는 ‘자기’는 이러한 공허함을 넘어선다. 우리는 리쾨르의 실천적 면모가 여기에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적인가?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변을 좀 미루어 두자. 이 답변에 다가가기 전에 저자는 리쾨르의 윤리학을 설명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배려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존중이 종합되는 지점에 리쾨르 윤리학의 위상이 놓인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에의 배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자기 존중의 강도가 상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의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그 길로 끊임없이 매진하면서, 인간의 욕망이 과연 타자의 배려라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한없이 유약한 시도가 아닌가? 곧 우리는 저자가 리쾨르를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접할 수 있다.

배려의 구체적 형태가 우정이든, 헤겔 식의 인정이든, 연민이나 공감이든, 이 배려는 온전한 자기 존중과 같은 뿌리를 가진 배려이므로 온전하지 않고, 이미 타자로부터 상처받은, 이미 피해와 희생의 흔적을 가진 자기가 어떻게 타자에 대한 배려로 (자기 존중을 통해 그리고 자기 존중을 가지고) 동시적으로 나갈 수 있는지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타자와의 관계가 “좋은 삶의 지향”이라는 윤리적 맥락 속에서는 관심과 배려로 제시되지만, 현실적 맥락에서는 가벼운 폭력에서 심지어는 (타자의) 자기 존중과 자기의 행위 능력의 무화로 이어지는 살인에까지 확대되기에 이제 더 이상 윤리적 지향이 아니라 칸트적인 의미의 도덕적 금지, 규범, 당위가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240)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와 칸트의 의무론적 도덕을 전자 쪽의 ‘좋은 삶의 지향’이라는 개념 하에 종합하려고 했던 리쾨르의 원대한 시도는 저자가 보기에 그 반대의 측면에서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의 지향은 칸트의 의무에 대한 존경심으로 완전히 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리쾨르가 의무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반드시 ‘좋은 삶’의 윤리적 지향에 의존해서 충돌을 해결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테제와는 반대의 방향이다. 재미있는 비유를 들자면, 리꾀르가 만약 저자인 윤성우의 입장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면, 선생에 대한 의무를 좀 더 확고하게 지켜 냈거나, 최소한 자신의 의무에 거스르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어쨌든 68은 ‘의무’가 아니라 ‘좋은 삶’을 지향하는 좌파들의 꿈을 대변하는 것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면, 학생들은 리쾨르의 또다른 테제로서 윤리가 항상 ‘규범의 체’를 통과해서 시험받아야 한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리쾨르의 윤리학에서 ‘좋은 삶’ 그리고 ‘의무’가 종합되며, 주체철학에서 자기자체와 자기자신이 종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다만, 이것은 철학적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을 단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좋은 삶은 의무들의 갈등을 해석하는 와중에 항상 유예되며, 자기성은 텍스트와 상징 해석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그 성취가 유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이 책을 보면서 리쾨르가 추구한 철학적 이념이 봉착한 하나의 아포리, 즉 실천적 유약함이라는 슬픈 테제를 받아 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Noam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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