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지젝의 레닌론에 관한 페이퍼를 쓴 김에 그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을 모스크바통신에서 옮겨둔다. 재작년 9월말에 쓴 것으로 '민주주의와 그 너머'라고 다시 정리해놓은 글의 군말로 덧붙였었다. 주로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오역에 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이 있었고) 당시에 영어본을 갖고 있지 않아서 러시아어본만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고투'한 흔적을 담고 있다. 부수적으론 지젝의 레닌론을 따라가볼 수도 있다. 내용을 따로 업데이트하지는 않으며 일부 불필요한 대목만 지우기로 한다.

문제가 된 건 160쪽에서,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라고 옮겨진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인용 부분은 역자에 따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을 옮긴 것이다(이 대목은 영역본 <국가와 혁명>에 나온다). 나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그것이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의 오역이라고 지적했다(*하지만 내가 제시한 번역도 정확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정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문맥상 번역본의 문장이 오역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역자가 ‘가능한 다른 번역’으로 제시한바,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좀 검토의 대상이 될 만하다(*러시아어 네이티브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러시아어 문장도 이렇게 읽혀야 한다).


애당초 나는 역자가 제시한 영역본의 문장을(원문은 러시아어이다) 일종의 ‘삽입’구문, 즉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으로 읽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번역으로 제시한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생략’구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조금 나중에 들었다. 그럴 경우는 그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라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역자가 새로 제시한 번역,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에 대응한다. 나의 영문 독해력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 문장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 확정해서 말할 정도는 못 된다.
내가 참고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이 말한 러시아어 원문이다(결국은 이게 최종 심급일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chelovek.” 역어 선택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가령, ‘set in motion’/‘작동시키다’로 옮겨진 의 사전적 의미는 ‘끌어들이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러시아어 원문과 영역문을 대응시켜보면 이렇게 된다.
“My(We) mozhem(can) srazu(at once) privlech’(set in motion) gosdarstvennyj apparat(a state apparatus), millionov(million) v(consists of) decjat’(ten), esli(if) ne(not) dvadchat’(twenty) chelovek(people).”(러시아어 원문에는 콤마가 들어가 있다.) 이걸 정리해서 옮겨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 된다. 내가 이해한 러시아어 문장이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장을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라고 옮겼던 것이다(*한데, 러시아어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문제의 인용문은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milionov) chelovek.”처럼 생략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러시아어에 대한 이러한 직관을 사실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하여 영역본과 매치되지 않는 혼선이 빚어졌다).
그런데, 영역본 <국가와 혁명>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라고 직역될 수 있는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라고 옮겼다. 영역본의 문장(=후자)이 오역이 아니라면 이 둘은 같은 뜻의 문장, 즉 동치인 문장이어야 한다. 앞에서 다소 모호하다고 했던 삽입구문과 생략구문을 동치인 새 문장에 적용해보면 먼저, 삽입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고, 생략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다. 영역본의 문장에서와는 달리, 이 경우에도 문제의 문장을 생략구문으로 읽기는 힘들어 보인다(*한데, 생략구문이 맞다!).
나는 본문에서,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20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내각은 20명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라고 적었는데, 실제 영역문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좀 모호하다. 내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나는 ‘if not twenty’ 앞뒤로 콤마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콤마가 빠져도 되는 건지는 알지 못한다. 나의 영문법 지식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실전적인’ 것이어서 사례를 보고 배울 따름이다) 같은 문장을 옮기더라도 역자와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문장의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문맥이고, 이 경우 문맥상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국역은 지지될 수 없다. 그 근거는 본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20명만이 아닌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두번째 대안으로 제시된,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 같은 경우도, 양보구문에 걸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적어도 영문상으로는 그렇다),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으로 직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원문의 번역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한편으로 이천만의 국가기구나 천만의 국가기구나 50보 100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해서, 성실하게 답변해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지만, 아직은 애초의 나의 판단을 번복할 상황이 아닌 듯하다(다만, 가능성만은 아직 열려 있다. 나의 판단이 무오류적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다(*한데, 몇몇 전공자들이 나와 함께 레닌의 난삽함을 탓했던 이 문장의 영어 직역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milion people."이며, 그에 따라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가 올바른 번역이다.)

한편으로, 국역본 <이라크>는 번역 자체에도 의의가 있고, 어느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는 번역서이지만, 여러 차례 지적한바 아쉬움도 많은 번역서이다. 충분한/정밀한 수준의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바인데, 이건 비단 이 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문/이론 번역서에 두루 걸쳐 있는 문제이다. 번역자들의 대우가 상식 이하인 형편에서 교정자들에 대한 ‘상식에 맞는’ 대우를 요구하는 건 ‘비상식적’이겠지만 제대로 마무리된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교정자들의 자질과 대우가 격상될 필요가 있다(출판 관계자들의 관심과 결단을 촉구하고 기대한다).
끝으로, <이라크>를 다시금 뒤적거리다가 상기된 오역들의 일부를 더 지적한다. 대개가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인바, 교정이 왜 필요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10쪽 중간에서 “1987년에 그곳은(=카두노스) 브라질 정부군에 의해 파괴되었다.”에서 ‘1987년’은 ‘1897년’의 오기(誤記)이다(같은 쪽 마지막 줄에는 ‘1897년이라고 제대로 표기돼 있다). 1장의 경우 라캉의 용어 ‘누빔점’이 ‘정박점’으로 번역되었고, ‘향유’는 ‘향락’이라고 옮겨졌다(물론 내가 지지하는 건 ‘향락’이다). 장마다 다른 역자들의 용어가 다 조율되지 않은 것은, 조율의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이 불충분했다는 증거이다. 서로 한번씩만 읽어주었더라도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 아닐까? 아래는 러시아어본 <이라크>. 표지의 인물은 조지 부시이다.

가령, 119쪽에서 “오히려 바울의 요점은 바로 이러한 대립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생과 사의, 구원과 상실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란 문장을 보자. 바울주의(내지는 바울주의적 보편성)는 바디유/지젝에게서 새롭게 강조되는 주제인데, 그 핵심은 ‘투쟁적 보편주의’의 발명에 있다(118쪽). 더 근본적인 적대(적 투쟁) 앞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것이 그 투쟁적 보편주의의 요체이다. 이때의 ‘근본적인 적대’란 ‘생과 사’, ‘구원과 상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하지만, 그 투쟁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삶(=영생)이냐 죽음이나” “구원이냐 멸망이냐”라는 문구로 표현한다(‘구원’의 짝개념은 ‘상실’이 아니라 ‘멸망’이다).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구원과 멸망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라고 옮겨져야 한다.
131쪽,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두 양태로 본다. 스탈린주의자들 자신도 궁극적으로 우파적 편향과 좌파적 편향을 확인한다.” 같은 대목도 읽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문맥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역은 (아마도) ‘identify’를 옮긴 ‘확인한다’. 여기선 ‘동일시한다’라고 옮겨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한 것처럼 스탈린주의자들도 우파적 편향(=부하린)과 좌파적 편향(=트로츠키)을 (똑같이 반동적인 것으로) 동일시했고, 결국은 그들을 제거했다. 140쪽에서 ‘부농(富農)’이란 뜻의 러시아어 ‘쿨락(kulaks)’은 왜 그대로 음역됐을까? 영어에서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그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단어인지? 169쪽의 ‘쿠플레(couplet)’도 마찬가지이다. ‘대구(對句)’라고 옮기는 게 왜 불편했을까? 177쪽의 “보스니아 유엔 보호군”은 “보스니아의 유엔평화유지군”이 아닐까?
176쪽에서 “다중적(多衆的)이고 공들인 정제된 분석”이란 말에서 ‘다중적(multiple)’에 맞는 한자는 ‘다중적(多重的)’이다. 더 적절한 역어는 ‘다수의’ 혹은 ‘다양한’ 정도이지만. 역자들은 다수(多數)란 뜻의 다중(多重; multiplicity)과 네그리의 새로운 ‘유행어’ 다중(多衆; multitude)을 아무런 구별 없이 자주 혼용한다. 이런 혼용은 (언어유희로서) 시적이기는 하지만 좋은 번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들뢰즈의 ‘multiplicity’도 전부 ‘다중’으로 옮겼는데, 과문한 나로서는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게 정말 ‘多重’이면서 동시에 ‘多衆’을 의미하는 것인지?(‘다중주의자’ 들뢰즈는 원조-네그리주의자인가?) 189쪽, “하지만 주인-기표가 퇴조하고 달성(consummation)이 고조되는 오늘날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그 이면이다.”란 문장에서 “달성이 고조되는 오늘날”은 무슨 뜻인지? 적어도 “종말론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오늘날” 정도로는 풀어줘야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189쪽에서, “TV 리얼리티 쇼의 승리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의 오역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다. ‘승리’는 (아마도) ‘triumph’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의 뜻은 ‘성공’이다(리얼리티 쇼의 ‘전쟁’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해서, 승리/실패가 아니라 성공/실패가 짝이다). 178쪽에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패러디한 우디 앨런의 영화 <사랑과 죽음>의 대사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 중 “아, 그는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처벌 받았지요!”라는 것도 (문학작품의 번역에서라면) ‘오역’에 속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건 <범죄와 처벌>이 아니라 <죄와 벌>이기 때문에(우리말로는 그렇게 옮겨져 왔다), “아, 그는 정말로 죄를 범했고, 그래서 벌을 받았지요!"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등등. 이런 수준까지의 정밀한 교정을 요구할 수는 없더라도 하여간에 교정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일급의 번역자도 부족하지만, 일급의 교정자도 더없이 부족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라크>의 다른 역자께서 또한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해명을 주셨다(성의껏 답변을 주신 데 감사드린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227쪽)에 대해서 나는 오역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던 것인데, 역자에 따르면, 원문은 이렇다.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본문에서 적었지만, 원문은 난해하기는커녕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믿을 건 지젝뿐이란 생각이 든다). 해서, 내가 본문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번역(“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은 역자의 지적대로 ‘금지의 금지’에 너무 집착한 것이며, 좀 빗나간 번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한국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절충해서 원문을 상상하다 보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표현 때문에, 원문에 ‘can not’이 들어갔을 거라 짐작하고, 그것이 ‘능력의 can’, 즉 불능/무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금지의 can’(-해서는 안된다)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반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대목의 러시아어 번역은 “o realnost’ obekta nichego nel’zya uznat’”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it is not allowed to know nothing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이다.
내가 ‘금지’의 문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셈인데, 지젝의 원문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 말해 러시아어번역도 오역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하긴 러시아어 번역이라고 해서 단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신뢰란 건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바디우의 들뢰즈론, <존재의 함성>(러시아어 제목은 <존재의 소음>) 서평을 읽어 보니까 이 번역과 들뢰즈 러시아어본들에 대한 불만이 씌어져 있기도 했다(참고로 러시아어로 번역된 바디우는 <철학을 위한 선언>과 <바울>이 더 있으며, <존재와 사건>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들뢰즈의 책으론 지난달에 <영화1,2>가 합본으로 출간됨으로써 들뢰즈의 단독 저작은 모두 번역됐다). 또 이전에 들은 바이지만, <에크리>의 스페인어본에 대해서는 오역을 지적하는 책이 한 권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스페인어와 불어의 친연성을 고려하면 좀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일어나 한국어본이 ‘정상적’일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요컨대, 어느 수준까지의 오역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역자는 국역본의 번역을 원문에 충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흡하다. 일단 나를 헷갈리게 했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서 ‘정황’이란 표현도 나를 헷갈리게 했는데, 굳이 더 삽입될 필요가 없는 말이다). 내가 읽기에 지젝의 원문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금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기 때문에.
지젝의 원문을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해서, 나로선 국역본의 문장이 ‘불가피한 오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역자가 국역본의 문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여전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무튼 역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고무적이다. 적어도 내가 혼자 떠들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 또한 고무되어 눈에 띈 몇 가지를 제안과 더불어 더 지적한다. 가령, 209쪽에서 ‘눈물의 계곡’이란 표현은 ‘눈물의 골짜기’가 더 적합하다. 우리말에서 ‘계곡’과 ‘골짜기’는 동의어이지만, 용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고난이나 시련을 뜻할 때는 흔히 ‘골짜기’란 표현이 사용된다(“백합의 골짜기”, “눈물 같은 골짜기의 외로운 달밤은 싫어” 등). 반면에 계곡은 “물 좋은 계곡”이나 “계곡 산장”이라고 할 때의 계곡이다.

210쪽, “철학은 도시의 신들과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 시민의 충성을 와해시키며”에서, ‘도시의’란 수식어는 ‘신들’이 아니라 ‘에토스’에만 걸린다(다시 확인해 보시길). 해서 “철학은 신들과, 도시의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라는 식으로 된다. 215쪽, <다빈치 코드>에 관한 내용인데, “교회는 필사적으로 무지비하게 그 문서를 억류하려 하고”에서, ‘억류하다’란 동사는 사람에게만 쓰는 동사이다. 문서가 제발로 걸어다는 종류가 아닌 이상 ‘억류하다’란 말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213, 215, 216쪽 등에서 ‘서민’이란 역어가 나오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않다. 우리말에서 ‘서민’은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다. 이해력이 중간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예컨대 나는 ‘서민’이지만, 스트라우스나 지젝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역자들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말할 권리가 있다…
04. 09. 28-29/ 06. 09. 07.

P.S.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오늘 배송받았는데, 서문에 역시나 문제의 구절이 포함돼 있다: "1917년 10월 레닌은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라 10명만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순간의 충동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이다."(27쪽) Neil Harding의 'Leninism'(듀크대출판부, 1996)으로부터의 인용도 <이라크>와 동일하다. 이 인용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본문에서 적은 대로이다(*다시 확인하자면,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더라도 1,000만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로 옮겨져야 한다). 지젝은 이어서 "우리는 이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광기'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하는데, 과연 10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천만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쓴 텍스트의 제목을 빌려 레닌의 이 '광기'와 그로 인한 고립을 '레닌의 고독'이라고 부르는데, 그 고독은 아무래도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06. 09. 09./ 0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