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지젝의 레닌론에 관한 페이퍼를 쓴 김에 그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을 모스크바통신에서 옮겨둔다. 재작년 9월말에 쓴 것으로 '민주주의와 그 너머'라고 다시 정리해놓은 글의 군말로 덧붙였었다. 주로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오역에 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이 있었고) 당시에 영어본을 갖고 있지 않아서 러시아어본만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고투'한 흔적을 담고 있다. 부수적으론 지젝의 레닌론을 따라가볼 수도 있다. 내용을 따로 업데이트하지는 않으며 일부 불필요한 대목만 지우기로 한다.

문제가 된 건 160쪽에서,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라고 옮겨진 문장이다. 이 대목에서 인용 부분은 역자에 따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을 옮긴 것이다(이 대목은 영역본 <국가와 혁명>에 나온다). 나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그것이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의 오역이라고 지적했다(*하지만 내가 제시한 번역도 정확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정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문맥상 번역본의 문장이 오역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역자가 ‘가능한 다른 번역’으로 제시한바,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좀 검토의 대상이 될 만하다(*러시아어 네이티브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러시아어 문장도 이렇게 읽혀야 한다).


 

 

 

애당초 나는 역자가 제시한 영역본의 문장을(원문은 러시아어이다) 일종의 ‘삽입’구문, 즉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으로 읽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번역으로 제시한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생략’구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조금 나중에 들었다. 그럴 경우는 그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라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역자가 새로 제시한 번역,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에 대응한다. 나의 영문 독해력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 문장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 확정해서 말할 정도는 못 된다.

내가 참고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이 말한 러시아어 원문이다(결국은 이게 최종 심급일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chelovek.” 역어 선택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가령, ‘set in motion’/‘작동시키다’로 옮겨진 의 사전적 의미는 ‘끌어들이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러시아어 원문과 영역문을 대응시켜보면 이렇게 된다.

“My(We) mozhem(can) srazu(at once) privlech’(set in motion) gosdarstvennyj apparat(a state apparatus), millionov(million) v(consists of) decjat’(ten), esli(if) ne(not) dvadchat’(twenty) chelovek(people).”(러시아어 원문에는 콤마가 들어가 있다.) 이걸 정리해서 옮겨보면,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 된다. 내가 이해한 러시아어 문장이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장을 “우리는 20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라고 옮겼던 것이다(*한데, 러시아어 화자에게 확인한 결과 문제의 인용문은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milionov) chelovek.”처럼 생략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러시아어에 대한 이러한 직관을 사실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하여 영역본과 매치되지 않는 혼선이 빚어졌다).

그런데, 영역본 <국가와 혁명>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라고 직역될 수 있는 문장을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라고 옮겼다. 영역본의 문장(=후자)이 오역이 아니라면 이 둘은 같은 뜻의 문장, 즉 동치인 문장이어야 한다. 앞에서 다소 모호하다고 했던 삽입구문과 생략구문을 동치인 새 문장에 적용해보면 먼저, 삽입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이고, 생략구문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이다. 영역본의 문장에서와는 달리, 이 경우에도 문제의 문장을 생략구문으로 읽기는 힘들어 보인다(*한데, 생략구문이 맞다!).

나는 본문에서,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20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내각은 20명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라고 적었는데, 실제 영역문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좀 모호하다. 내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나는 ‘if not twenty’ 앞뒤로 콤마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콤마가 빠져도 되는 건지는 알지 못한다. 나의 영문법 지식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실전적인’ 것이어서 사례를 보고 배울 따름이다) 같은 문장을 옮기더라도 역자와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문장의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문맥이고, 이 경우 문맥상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국역은 지지될 수 없다. 그 근거는 본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20명만이 아닌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두번째 대안으로 제시된,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 같은 경우도, 양보구문에 걸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적어도 영문상으로는 그렇다),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people.”으로 직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원문의 번역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한편으로 이천만의 국가기구나 천만의 국가기구나 50보 100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해서, 성실하게 답변해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지만, 아직은 애초의 나의 판단을 번복할 상황이 아닌 듯하다(다만, 가능성만은 아직 열려 있다. 나의 판단이 무오류적일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다(*한데, 몇몇 전공자들이 나와 함께 레닌의 난삽함을 탓했던 이 문장의 영어 직역은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million, if not twenty milion people."이며,  그에 따라 "이천만이 아니라면, 천만의 인민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가 올바른 번역이다.)



한편으로, 국역본 <이라크>는 번역 자체에도 의의가 있고, 어느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는 번역서이지만, 여러 차례 지적한바 아쉬움도 많은 번역서이다. 충분한/정밀한 수준의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바인데, 이건 비단 이 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문/이론 번역서에 두루 걸쳐 있는 문제이다. 번역자들의 대우가 상식 이하인 형편에서 교정자들에 대한 ‘상식에 맞는’ 대우를 요구하는 건 ‘비상식적’이겠지만 제대로 마무리된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교정자들의 자질과 대우가 격상될 필요가 있다(출판 관계자들의 관심과 결단을 촉구하고 기대한다).

끝으로, <이라크>를 다시금 뒤적거리다가 상기된 오역들의 일부를 더 지적한다. 대개가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인바, 교정이 왜 필요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10쪽 중간에서 “1987년에 그곳은(=카두노스) 브라질 정부군에 의해 파괴되었다.”에서 ‘1987년’은 ‘1897년’의 오기(誤記)이다(같은 쪽 마지막 줄에는 ‘1897년이라고 제대로 표기돼 있다). 1장의 경우 라캉의 용어 ‘누빔점’이 ‘정박점’으로 번역되었고, ‘향유’는 ‘향락’이라고 옮겨졌다(물론 내가 지지하는 건 ‘향락’이다). 장마다 다른 역자들의 용어가 다 조율되지 않은 것은, 조율의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이 불충분했다는 증거이다. 서로 한번씩만 읽어주었더라도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 아닐까? 아래는 러시아어본 <이라크>. 표지의 인물은 조지 부시이다.



가령, 119쪽에서 “오히려 바울의 요점은 바로 이러한 대립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생과 사의, 구원과 상실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란 문장을 보자. 바울주의(내지는 바울주의적 보편성)는 바디유/지젝에게서 새롭게 강조되는 주제인데, 그 핵심은 ‘투쟁적 보편주의’의 발명에 있다(118쪽). 더 근본적인 적대(적 투쟁) 앞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것이 그 투쟁적 보편주의의 요체이다. 이때의 ‘근본적인 적대’란 ‘생과 사’, ‘구원과 상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하지만, 그 투쟁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삶(=영생)이냐 죽음이나” “구원이냐 멸망이냐”라는 문구로 표현한다(‘구원’의 짝개념은 ‘상실’이 아니라 ‘멸망’이다).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구원과 멸망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라고 옮겨져야 한다.

131쪽,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두 양태로 본다. 스탈린주의자들 자신도 궁극적으로 우파적 편향과 좌파적 편향을 확인한다.” 같은 대목도 읽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문맥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역은 (아마도) ‘identify’를 옮긴 ‘확인한다’. 여기선 ‘동일시한다’라고 옮겨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한 것처럼 스탈린주의자들도 우파적 편향(=부하린)과 좌파적 편향(=트로츠키)을 (똑같이 반동적인 것으로) 동일시했고, 결국은 그들을 제거했다. 140쪽에서 ‘부농(富農)’이란 뜻의 러시아어 ‘쿨락(kulaks)’은 왜 그대로 음역됐을까? 영어에서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그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단어인지? 169쪽의 ‘쿠플레(couplet)’도 마찬가지이다. ‘대구(對句)’라고 옮기는 게 왜 불편했을까? 177쪽의 “보스니아 유엔 보호군”은 “보스니아의 유엔평화유지군”이 아닐까?

176쪽에서 “다중적(多衆的)이고 공들인 정제된 분석”이란 말에서 ‘다중적(multiple)’에 맞는 한자는 ‘다중적(多重的)’이다. 더 적절한 역어는 ‘다수의’ 혹은 ‘다양한’ 정도이지만. 역자들은 다수(多數)란 뜻의 다중(多重; multiplicity)과 네그리의 새로운 ‘유행어’ 다중(多衆; multitude)을 아무런 구별 없이 자주 혼용한다. 이런 혼용은 (언어유희로서) 시적이기는 하지만 좋은 번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들뢰즈의 ‘multiplicity’도 전부 ‘다중’으로 옮겼는데, 과문한 나로서는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게 정말 ‘多重’이면서 동시에 ‘多衆’을 의미하는 것인지?(‘다중주의자’ 들뢰즈는 원조-네그리주의자인가?) 189쪽, “하지만 주인-기표가 퇴조하고 달성(consummation)이 고조되는 오늘날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그 이면이다.”란 문장에서 “달성이 고조되는 오늘날”은 무슨 뜻인지? 적어도 “종말론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오늘날” 정도로는 풀어줘야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189쪽에서, “TV 리얼리티 쇼의 승리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의 오역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다. ‘승리’는 (아마도) ‘triumph’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의 뜻은 ‘성공’이다(리얼리티 쇼의 ‘전쟁’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해서, 승리/실패가 아니라 성공/실패가 짝이다). 178쪽에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패러디한 우디 앨런의 영화 <사랑과 죽음>의 대사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 중 “아, 그는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처벌 받았지요!”라는 것도 (문학작품의 번역에서라면) ‘오역’에 속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건 <범죄와 처벌>이 아니라 <죄와 벌>이기 때문에(우리말로는 그렇게 옮겨져 왔다), “아, 그는 정말로 죄를 범했고, 그래서 벌을 받았지요!"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등등. 이런 수준까지의 정밀한 교정을 요구할 수는 없더라도 하여간에 교정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일급의 번역자도 부족하지만, 일급의 교정자도 더없이 부족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라크>의 다른 역자께서 또한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해명을 주셨다(성의껏 답변을 주신 데 감사드린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227쪽)에 대해서 나는 오역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던 것인데, 역자에 따르면, 원문은 이렇다.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본문에서 적었지만, 원문은 난해하기는커녕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믿을 건 지젝뿐이란 생각이 든다). 해서, 내가 본문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번역(“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은 역자의 지적대로 ‘금지의 금지’에 너무 집착한 것이며, 좀 빗나간 번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한국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절충해서 원문을 상상하다 보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표현 때문에, 원문에 ‘can not’이 들어갔을 거라 짐작하고, 그것이 ‘능력의 can’, 즉 불능/무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금지의 can’(-해서는 안된다)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반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대목의 러시아어 번역은 “o realnost’ obekta nichego nel’zya uznat’”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it is not allowed to know nothing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이다.

내가 ‘금지’의 문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셈인데, 지젝의 원문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 말해 러시아어번역도 오역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하긴 러시아어 번역이라고 해서 단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신뢰란 건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바디우의 들뢰즈론, <존재의 함성>(러시아어 제목은 <존재의 소음>) 서평을 읽어 보니까 이 번역과 들뢰즈 러시아어본들에 대한 불만이 씌어져 있기도 했다(참고로 러시아어로 번역된 바디우는 <철학을 위한 선언>과 <바울>이 더 있으며, <존재와 사건>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들뢰즈의 책으론 지난달에 <영화1,2>가 합본으로 출간됨으로써 들뢰즈의 단독 저작은 모두 번역됐다). 또 이전에 들은 바이지만, <에크리>의 스페인어본에 대해서는 오역을 지적하는 책이 한 권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스페인어와 불어의 친연성을 고려하면 좀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일어나 한국어본이 ‘정상적’일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요컨대, 어느 수준까지의 오역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역자는 국역본의 번역을 원문에 충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흡하다. 일단 나를 헷갈리게 했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서 ‘정황’이란 표현도 나를 헷갈리게 했는데, 굳이 더 삽입될 필요가 없는 말이다). 내가 읽기에 지젝의 원문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금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기 때문에.

지젝의 원문을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해서, 나로선 국역본의 문장이 ‘불가피한 오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역자가 국역본의 문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여전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무튼 역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고무적이다. 적어도 내가 혼자 떠들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 또한 고무되어 눈에 띈 몇 가지를 제안과 더불어 더 지적한다. 가령, 209쪽에서 ‘눈물의 계곡’이란 표현은 ‘눈물의 골짜기’가 더 적합하다. 우리말에서 ‘계곡’과 ‘골짜기’는 동의어이지만, 용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고난이나 시련을 뜻할 때는 흔히 ‘골짜기’란 표현이 사용된다(“백합의 골짜기”, “눈물 같은 골짜기의 외로운 달밤은 싫어” 등). 반면에 계곡은 “물 좋은 계곡”이나 “계곡 산장”이라고 할 때의 계곡이다.



210쪽, “철학은 도시의 신들과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 시민의 충성을 와해시키며”에서, ‘도시의’란 수식어는 ‘신들’이 아니라 ‘에토스’에만 걸린다(다시 확인해 보시길). 해서 “철학은 신들과, 도시의 에토스를 의문시함으로써”라는 식으로 된다. 215쪽, <다빈치 코드>에 관한 내용인데, “교회는 필사적으로 무지비하게 그 문서를 억류하려 하고”에서, ‘억류하다’란 동사는 사람에게만 쓰는 동사이다. 문서가 제발로 걸어다는 종류가 아닌 이상 ‘억류하다’란 말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213, 215, 216쪽 등에서 ‘서민’이란 역어가 나오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않다. 우리말에서 ‘서민’은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다. 이해력이 중간층 이하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예컨대 나는 ‘서민’이지만, 스트라우스나 지젝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역자들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말할 권리가 있다…

04. 09. 28-29/ 06. 09. 07.

P.S.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오늘 배송받았는데, 서문에 역시나 문제의 구절이 포함돼 있다: "1917년 10월 레닌은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라 10명만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순간의 충동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이다."(27쪽) Neil Harding의 'Leninism'(듀크대출판부, 1996)으로부터의 인용도 <이라크>와 동일하다. 이 인용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본문에서 적은 대로이다(*다시 확인하자면, "우리는 당장 2,000만명이 아니더라도 1,000만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로 옮겨져야 한다). 지젝은 이어서 "우리는 이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광기'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하는데, 과연 10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천만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만드는 게 '광기'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쓴 텍스트의 제목을 빌려 레닌의 이 '광기'와 그로 인한 고립을 '레닌의 고독'이라고 부르는데, 그 고독은 아무래도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06. 09. 0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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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0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소주의 힘'이죠.^^

am 2006-09-2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골골거린다던 식구들은 이제 다들 좀 좋아지셨는지요 

 

위의 글 처음 읽을 때 의문이 들었는데 그때는 글을 쓸 요량까지는 못했습니다. 어떻게 정리를 하셨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읽어 보니 추신이 생겼네요. 그 부분을 읽다가 의견을 나누었으면 해서 글을 써 봅니다.         

 

전 러시아어를 몰라요. 그래서 원문이 영어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어떤 오역이 (혹은 오기가) 생겼을 가능성은 (저로서는 판단이 어려운) 대전제로 삼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점을 분명히 하고서, 저는 주어진 영문의 번역에 대한 로쟈님의 설명에 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읽은 바로는,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라는 문장의 번역으로 1) 이천만 명 대 열 명 (책의 역자), 2) 이십 명 대 천만 명 (로쟈님), 3) 이천만 명 대 천만 명 (역자가 제시한 차후 번역) 등이 제안되었는데, 로쟈님은 1) 은 문맥상/러시아본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오역이며, 3) 은 영어 문장을 생략구문으로 보았을 경우 맞는 번역일 수 있으나 석연치 않고, 마지막 2) 가 러시아본의 문장을 기준할 때 맞는 번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때 제시된 영문을 삽입구문 (if not twenty) 으로 해석하면 로자냠의 러시아본 독해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보다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이 문장은 2) 로 옮겨져야 맞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내 놓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읽어 봐도 3) 의 뜻으로 이 문장이 읽혀요. 전에 읽었을 때는 1)을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보았었는데, 로쟈님께서 러시아어 문장과 영문 대입해 주신 것 보고 (그림 모양 맞추는 수준이기는 했습니다) 더 고려하지 않았고요. 말씀하신 규범적인 설명이 될 지는 자신이 없지만 아무튼 제 눈에는 이 문장 중의 “if not twenty”를 삽입구문으로 파악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추가하려는 문구가 원래의 문장의 뜻과 구조에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아야 삽입구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바로 지금 보고 있다시피 이렇게 여러 해석이 분분하니, if not twenty 가 삽입구문이고자 한다면 혼란을 막기 위한 규칙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if not twenty 가 삽입구였다면 앞뒤 콤마는 절대로 임의적으로 생략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원문을 영어로 옮긴 이가 이런 규칙을 모르고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경우는 원문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의 오역 (혹은 오기) 판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번역자가 일부러” if not twenty 앞 뒤의 콤마를 빼고서 마치 콤마가 있는 것처럼, 혹은 콤마를 생략해도 되는 경우처럼, 혹은 그러니 독자더러 알아서 콤마 있는 것처럼 읽게끔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앞뒤 콤마를 생략하더라도 삽입구가 전체 문장의 구조 및 뜻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하지만 저는 그런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if not twenty million” 까지, people 이라는 앞의 수와 단위 (million 이 그렇게 쓰였다고 생각했어요) 를 받는 명사 앞에서 끊어야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1) 의 번역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문장은ten twenty 가 모두 million + people에 걸리고 이 때 ten million people if not twenty million people 에서 반복되는 수와 단위를 생략해서 쓴 문장인 것 같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천 만이 아니라도 천 만의 인민들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 정도의 뜻이라고 보고요. 혼동을 막기 위해 한 예로 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 아니면We can at once set in motion a state apparatus consists of ten, if not twenty million people식으로 쓸 수 있을까 생각은 해 보았는데 확실치는 않네요.        

 

로쟈님 설명을 읽다가 꼭 그 방향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정도로 별 근거 없이 떠올랐던 생각을 저도 추신처럼 덧붙입니다. 일반적으로 내각은 20 정도의 각료로 구성되는 아닌가?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일반적인 것들에 정반하는 상황이 이 문장이 놓인 문맥이 아닐까, 소수에게 집중되었던 통치권력을 혁명을 통해 인민에게 (물리적 상징적 문화적 등등 전면적으로) 되돌리자는 것이 지금의 주장의 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무 명의 각료로 대리/대표되는 국가기구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그와 비슷하게 미루어 짐작하면 천만과 이천만이 오십보의 차이가 전혀 아닐 수 있고 비록 어떤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게 왜 이천만인지는 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천만의 인민들로 직접적으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기구를 띄워 낼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에 무게를 실을 수 있지 않나 했습니다.

 

맞나 틀리나를 떠나서 이럴 때 좀 확실하게 왜 맞고 틀리는지를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써 보았는데, 의견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아래 언급하신 지젝의 문장에 관해서도 로쟈님과 제가 조금 다르게 읽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시간이 많이 가서 (그나저나 그 문장은 문장 자체가 좀 별로인 것=괜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질문 드리겠습니다.


로쟈 2006-09-2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본문에서 "아직 가능성만은 열려있다"라고 적었는데, 제가 염두에 둔 것은 레닌의 원문 “My mozhem srazu privlech’ gosdarstvennyj apparat, millionov v decjat’, esli ne dvadchat’ chelovek.”을 일종의 생략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러시아어를 저보다 잘하는 이들에게 한번 문의를 해보겠습니다. 만약에 그런 식의 생략문으로 읽힐 수 없다면, 제 의견대로 영역문에서 if not twenty는 삽입구로 읽혀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오역이라고 봅니다(매번 같은 문장이 나오는 걸 보면 '오역'일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다른 대목에 대한 이견은 저도 기대가 됩니다.^^   

확인한 결과 러시아어 문장은 생략문이며 am님의 영문해석과 러시어는 동일한 뜻입니다. '국가기구'가 20명 정도로 구성되는 게 아닌가라는 제 판단 때문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결과적으로 제가 간과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리며 본문 내용을 다시 정정했습니다... 


am 2006-09-2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를 받아도 될만한 내용도 못 되고, 게다가 제가 말 꺼내 놓고 시간이 가면 숙제처럼 느끼게 될까봐 정돈되지 않아도 얼른 적었습니다.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이 문장과 그에 대한 로쟈님 설명 읽을 때는 의문스럽다기 보다 혼란스러웠어요. 서로 거의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제시하신 번역문을 보면 눈으로나마 해 본 제 번역문과 조금 달라 보이고, 하지만 그걸 말로 풀어 보면 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건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저 따위로 쓴 자(다시 읽다 덧붙입니다-감정이 많이 실린 것처럼 읽히네요. 헛갈리게 해서 에이 밉다, 그런 마음은 있었지만 나쁘게 말하려고 쓴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에게 탓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에이 모르겠다 하고 넘기려고 닫기 직전에 다시 보면 실제 글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단순/명백한 것 같기도 해서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같은 듯 하지만 다른 독해인 것 같다는 제 감이 실제 그런지를 확인하는 정도로 또 적어 보겠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내가 읽기에 지젝의 원문은 ‘능력’ 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금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기 때문에. (중략)
지젝의 원문을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해서, 나로선 국역본의 문장이 ‘불가피한 오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역자가 국역본의 문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여전히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 두 문단에 제가 말하려는 내용이 다 있어요. 우선, 저는 영문만 보아서는 저 문장이 능력(알 수 없다) 의 문제가 아닌 필요 (알 필요가 없다) 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신 근거를 찾지 못하겠어요. 제 이해로는 저 문장은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 ‘not A but B’ 의 대구를 썼고, 금지 그것도 진정 금지된 무엇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겠다는 강한 도입부가 있으므로 문장의 주 의미가 forbidden (=must not) 에서 파생될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이 문장에서는 앎) 혹은 그러도록 절대 허용되지 않은 것과 그 반대로는 용납되는 것 그러는 것이 가능한 것의 대구로 보았고요. 아무튼 저는 로쟈님께서 말씀하신 ‘need not’’don’t have to’의 의미는 못 읽어 냈습니다. 혹시 그런 필요가 아니라 소용없음이나 무위를 말씀하시나 했지만 확대해석인 것 같아서 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처럼 문장 앞 뒤는 물론 지젝거리기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음을 전제하고)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object 가 말씀하신 ‘필요’로 해석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두 번째 이유를 그냥 문장구조가 같은 다른 문장들을 떠올리면서 찾았어요. there is nothing to see/there is nothing to eat/there is nothing to sa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 (먹을 것, 말할 것) 이 없다고 다른 식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시계에 보도록 허용된 게 없다 등등이 아닐까요. 여기 어디에 그럴 필요 없다 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은 로쟈님 설명에 상응해서 나온 생각은 아니고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헛갈리는 와중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던 생각이었어요. 저는 여기서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nothing to learn about something 과 the reason of something is impossible to know because it occupies the prohibited place 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흔히 무엇에 관해 다 알지 못함을 크게 말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근본적인 어떤 불가능성, 용납불가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불가능의 이유는 그것이 무엇을 통해 듣고 보고 익혀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what can be learn about is nothing), 그게 금지되었다는 이유에서, 그게 금단의 무엇으로서 우리/사회/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특히 the object 에서였는데 the beloved 는 주관성이잖아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소중히 하고 하지만 무엇에 “관해”아는 것은 대상과 객관이고. 그 앎은 무엇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흔히 그에 관해 잘 아느냐 잘 못 아느냐, 완전한 앎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그 모든 것은 실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그것의 문제라면 우리는 무엇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알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사실 쉽게 허용되지 않는 앎이다..이렇게요.

엉성하긴 하지만 제가 읽은 바를 아래에 옮겨 보면,

영문/ “The truly forbidden knowledge is thus not the full knowledge of the reality of the beloved, but the very knowledge about how there is NOTHING to learn about the reality of the object, about how what makes the object the cause of my desire is the prohibited place that it occupies.”

로쟈님 번역/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상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며,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금지된 자리일 뿐이라는 앎이다.”

제가 해 본 번역/

“정말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재에 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그 대상의 실재에 관해 우리가 터득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앎, 어떤 것을 내 욕망의 원인이게 하는 것은 그것이 금지된 자리에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앎이다.”

혹은 how 의 의미를 why 로 살려서 해 본다면,

“정말로 금지된 앎은 사랑하는 대상의 실재에 관한 완전한 앎이 아니라, 왜 그 대상의 실재에 관해 우리가 터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지를 깨닫는 바로 그 앎, 즉 그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이게 하는 것은 왜 금단의 자리에 있는가를 알게 되는 앎이다.”

정도입니다. 역시 어떤 의견이건 잘 받고 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은 하루 잘 보내세요.

로쟈 2006-09-2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설명이 난삽했을 수도 있고, am님 말씀대로 저자(지젝)가 좀 고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용문장이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한 거라는 설명은 번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고, 문장의 논지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해보이지만 제시하신 두 번역 중 첫번째 것은 제가 한 번역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국한하자면 "서로 거의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며 (조금 달라보이더라도) "말로 풀어보면 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번째 번역은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하군요. 지젝만큼이나...

am 2006-09-26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잘 생각하고 쓰지 못해서 쓸데없이 복잡했나 봅니다.^^;;

위에 역자의 번역문에 나온 ‘정황’ 이라는 말이 불필요하게 삽입된 문구 같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다가, 혹시 번역자들이 how 의 뜻을 살리려고 저 말을 썼나 의문이 들어서 두 번째 번역이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 저기서의 how 는 이러저러하여, 이런저런 정황에 라는 의미 보다는 이유나 왜의 의미가 더 크지 않겠나 해서요. 첫 번째 것 보다 어색하다는 지적, 동감하고 알겠습니다. 아 참, 첫 번째 번역에서의 ‘어떤 대상’은 아무래도 ‘그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날 말을 옮기다가 문득, the beloved 를 the object 로 받아야 문장 상 맞을 줄 알지만 혹시 저자가 the beloved를 포함한 일반적인 대상을 칭한 건 아닌가 하는 괜한 추리가 들었는데 그만 그 생각이 그대로 옮겨졌네요.

논지파악과 번역어 선택 사이에 관한 말씀은 제가 아직 완전히 이해를 못한 것도 같지만, 저 문장에 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를 더 잘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여러모로 눈으로만 볼 때보다 구체적인 생각들이 들어서 불쑥 질문 겸 의견 드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6-09-2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저도 공부가 되겠습니다.^^ '학문'이란 게 물어서 배우는 것이니까요.
 

지난 화요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과학기사를 옮겨온다. 스크랩해놓은 것인데, 이 정도 기사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필자는 발군의 과학기사들을 쓰면서 현재 매주 화요일 '과학을 읽다'를 연재하고 있는(그래서 화요일엔 한국일보를 본다) 김희원 기자이다. 며칠전 복잡계 과학에 관한 책들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거기에 '링크'에 관한 책 몇 권을 보태기로 한다. '링크' 혹은 '넥서스'의 교훈?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한국일보(06. 09. 05) 내가 쓴 1달러 3년후엔 어디에...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중에는 '고무도장'이 표시된 달러 지폐를 입수했을 때 달러의 일련번호와 입수 위치를 등록하는 사이트가 있다. 1달러 지폐에 그려진 대통령(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딴 '조지는 어디에?(Where's George?)'(www.wheresgeorge.com)라는 이 사이트는 고무도장이 찍힌 지폐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순전히 재미를 위한 게임 사이트다. 누구든 지폐에 고무도장을 찍어 돌릴 수 있고, 등록한 지폐가 돌고 돌아 많은 사람들이 기록할수록 점수를 많이 받아 순위에 이름을 올린다.

-이 단순한 게임사이트가 사람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s) 연구의 데이터 생산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복잡계 연구는 복잡다기한 변수들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정치 사회 경제현상 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이동은 분자와 같다?
-복잡계 물리를 연구하는 일군의 물리학자들은 1998년 이후 '조지는 어디에?'에 축적된 100만여건의 지폐이동 데이터를 분석, 수학적 모델을 수립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D 브록만, T 지젤 박사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후프나겔 교수는 이를 지난해 1월 네이처에 발표했다. 최근 이들은 이 모델을 전염병 사스(SARS)의 확산에 적용, 해석했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김승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지폐)의 이동을 실제 데이터를 분석해 수학적으로 모델화한 최초의 연구사례"라고 말했다.

-물리학자가 왜, 어떻게 인간의 여행법칙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의 운동과 같이 여기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서로 부딪히면서 균일하게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아서, 대형 운동장을 설계할 때 군중의 입·퇴장을 유체의 흐름으로 계산하곤 했다. 교통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근 복잡계 연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여행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방정식을 찾아냈다. 복잡계란 변수가 너무 많아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날씨예보, 주가의 등락, 단백질의 3차원 구조, 생태계 분석, 유전자의 조합 등이 복잡계의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을 솜씨 있게 다루는 이들이 바로 통계물리학에 뿌리를 둔 연구자들이다.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기체가 될 때 무수한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하고 계산해내던 통계물리학자들은 최근 경제물리학자, 구조단백체학자 등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다.

●게임에서 시작된 복잡계 연구성과
-브록만 박사 등의 연구는 분자 확산을 설명하는 아인슈타인 확산법칙과 비교해 사뭇 다른 점들을 시사한다. 아인슈타인 확산은 분자들이 두 배 멀리 퍼질수록 시간이 제곱만큼 소요된다고 요약된다(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통계청에서 일하던 1905년 분자의 확산 이론은 발표했다). 즉 분자들이 1m 퍼지는데 10초가 걸렸다면 10m 퍼지는데는 16분, 100m 퍼지는데는 2시간 46분이 걸린다.



-브록만 박사 등은 '조지는 어디에?' 사이트에 수록된 100만여건의 지폐 이동 데이터를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얼마나 멀리 움직였는가 라는 시간, 거리 척도에 따라 입력해 분포곡선을 그려 방정식을 구했다. 그 결과 공간적으로 지폐의 이동은 짧은 거리를 자주 움직이지만 간혹 먼 거리를 도약하는 멱급수(冪級數)함수로 설명되며, 속도에 대해선 초확산(super-diffusive spread)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아냈다(*무슨 말인가?). 아인슈타인 확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동네에서의 움직임이 아닌 전세계적 범위에서 그렇다. 이는 당연히 현대인이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세계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초확산 분포는 전염병 확산을 예측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004년 전세계가 사스의 공포에 휩싸였던 것은 질병 자체가 치명적이어서가 아니라(사스의 사망률은 독감이나 폐렴보다 낮다) 전염 범위와 속도가 유례없이 넓고 빨랐기 때문이었다. 김승환 교수는 "게임 사이트가 방대한 로 데이터(기초 자료)를 제공했고, 현대인이 초확산법칙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에서나 가능한 흥미로운 과학"이라고 말했다.(김희원 기자)

06.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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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9-08 15:56   좋아요 0 | URL
김희원 기자의 기사는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국일보를 보거든요.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군요. :)

로쟈 2006-09-08 20:05   좋아요 0 | URL
저는 황우석 사태 때 논리적인 분석기사로 처음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출간됐다. 언젠가 이 책의 러시아어판 번역가능성을 타진해보다가 국내 한 출판사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들은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인가 보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레닌인가란 '상식적인' 의구심에 대한 반문으로 책을 열고 있는 지젝은 "하지만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일상 생활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레닌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통해 레닌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고유하게 '레닌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역자에 따르면, "지젝은 레닌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론가를 발견한다. 오늘날 서구의 대다수의 행동하는 지성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촘스키와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지젝 자신은 실천하는 이론가이고 싶어한다. 지젝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최선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상대주의와의 투쟁을 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지젝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젝은 노동자의 눈으로 (레닌처럼) 인텔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가의 눈으로 (라캉처럼) 인텔리를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가이다."

한데, 목차에서부터 경제학 전공자인 역자가 너무도 잘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의 문구이자 지젝의 저서명이기도 한) 문구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길 걸 보면 좀 우려되는 번역이기도 하다.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를 구별해주지 않는 라캉-지젝 번역이 온전한 번역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한데, 역자 나름의 해명을 적어놓았다고 하다). 

 

이 책의 영어본은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the gates)>(Verso, 2002)이며,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씌어진 레닌의 문건 선집에다가 지젝이 서문과 후기를 붙인 것이다. '레닌의 선택'이란 제목이 붙은 후기의 분량만 170쪽 가량이 되는데, 독어판과 러시아어판은 이 후기만을 따로 독립시켜서 출간한 것이다. 이 영어판 출간과 관련한 소식이 교수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잠시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2. 09. 14) 영국의 레닌 다시 읽기 열풍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기’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왔던 사상적 공황상태가 끝나가고 있다는 징조일까. 한국에서 거세게 불어닥쳤던 ‘청산’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긴 유령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맑스와 벤야민에 이어 이제 레닌까지 이 대열에 합류할 태세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재발간한 데 이어, 펭귄출판사도 새로운 서문을 이마에 붙인 같은 책을 다시 출간함으로써, 이 귀환의 행렬을 실체화하고 있다. 버소는 오는 9월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을 받아 재출간할 예정인데, 이 또한 오늘날 영국의 사상적 지형에 흐르는 기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한 레닌의 동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똑똑히 지켜보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레닌의 전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일대기를 조망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것은 어안이 벙벙한 일임에 틀림없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과거란 언제나 사후에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단순하게 이런 사상적 ‘복고’현상을 심리적 과잉결정의 효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유령들을 불러내고 있는 힘은 과거의 유토피아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그 노스탤지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손질을 거쳐 나온 레닌 선집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Gates)>은 이런 낭만주의적 노스탤지어에 대항해서 제기되는 ‘레닌 다시 읽기’의 전형처럼 보인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복판을 뚫고 나온 지젝의 입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실 사회주의는 리얼리즘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가 이 선집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영웅적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왔던 ‘천재 레닌’을 ‘인간 레닌’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최근 류블랴나 대학의 ‘철학교수’로 직위를 옮겨 앉은 지젝은 혁명이란 파국적 상황을 온 몸으로 뚫고 갔던 ‘인간’ 레닌을 특유의 분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지젝이 레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을 기준으로 한 쾌락의 정치학이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던 러시아에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행위를 경고한 레닌의 입장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농민 대중에 대한 문화 교육과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젝이 볼 때 스탈린은 이런 레닌의 중도 점진적 사회주의 이행노선을 철폐하고, 일국 사회주의를 성급하게 달성하려고 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읽는다. 레닌은 말년에 이르러 <국가와 혁명>에서 제기된 유토피아주의를 폐기하면서, 훨씬 더 현실적인 볼셰비키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이 지젝의 말이다. 물론 이런 레닌의 노선 수정이 혁명의 물질적 기반만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적 태도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에 따르면, 레닌은 1920년대에 볼셰비키의 주요 임무가 교육을 포함해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런 레닌의 바램은 오히려 레닌이 지적한 러시아의 후진성은 유럽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흥분 속으로 레닌을 몰고 갔던 것이다.

-이런 지젝의 분석은 다분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전개된 레닌의 정책들을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헬레네 카레리가 쓴 <레닌>은 이런 지젝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구석이 있다. 카레리는 레닌의 역사적 성취가 전형적 혁명의 내러티브라고 할,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황홀경 뒤에 찾아오는 낭만주의적 상실감을 극복함으로써 이룩됐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레닌은 이런 냉엄한 리얼리즘을 통해 유토피아적 순간을 연장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능력으로 인해, 레닌의 글들은 라캉이 지칭한 ‘상실된 원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사실은 레닌을 오늘날 가장 ‘실재’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20세기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물론 이 ‘실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야심들이 20세기의 사상사를 밀고 나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의 인식 문제와 별도로, 시종일관 지젝은 이런 실재의 범주를 리얼리티로부터 분리해왔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리얼리티는 허위이며, 그 리얼리티의 고갱이가 바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리얼리티의 가상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실재를 직관적으로 경험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 지젝의 궁극적 평가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경험될 뿐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실재는 언어 내에 존재하는 틈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어적 상징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 틈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뿐이다. 20세기의 숱한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 언어를 임계상황으로 밀어붙여 실재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혁명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노스탤지어를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재현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무의식적 상실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상실감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레닌의 글들을 강조한다. 냉철한 리얼리즘을 통해 레닌은 이 실재에 대한 상실감을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더 생생한 ‘혁명의 임박’을 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이택광 영국통신원)

 

 

 

 

06. 09. 07.

P.S. 아래는 책의 러시아어본(2003). 제목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경험>이며, 표지 이미지는 데이비드 베컴과 레닌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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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2006-09-0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긴 이유를 본문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네요. 영화의 대사를 제외하고는 '실재'와 혼돈하고 있지는 않으니 목차와 소개글만 보고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책 표지 날개에 소개된 지젝의 저작 목록은 전부 국내 번역본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기존의 번역서를 참고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성급하셨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좋은 번역서로 읽힙니다. 과문하지만 흥미를 갖고 독서 중입니다.

로쟈 2006-09-09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워낙에 안 좋은 번역서들이 많은지라 지레 짐작한 면도 있습니다. 주문한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흥미로운 독서가 될 거 같군요...

토마스 2006-09-0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약간 수정해야 할 듯 싶네요. 주석은 이렇게 달려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를 따라 'the Real'을 실재(계)'가 아닌 '현실'로 번역했다." 원문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12장에서 현실과 실재가 좀 혼용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경우 일일이 현실과 실재라는 용어에 괄호를 치고 the Real을 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여하튼 로쟈님의 지젝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두 군데 강의가 있었고, 점심 먹고 논문 한편 읽고 도서관에서 책 한권 복사하고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계간지도 하나 챙기고(이건 필요 때문이다), 그러고 저녁을 먹으니 이 시간이다. 잠시 여유를 부려서 계간 <세계의 문학>(가을호)을 훑어보다가 이근화 시인의 시에 눈길이 머문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이런 시들이 마음에 든다. <문학과사회>(가을호)에도 '우리들의 진화' 외 3편이 발표됐는데, 그 정도면 아주 활발한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론 이 계절에 읽은 가장 눈에 띄는 시인으로 꼽고 싶다.

약력을 보면, 이근화씨는 지난 2004년 등단하고 지난봄에 첫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을 낸 아직 초년병 시인이다. 분류하자면, '문사마(문태준)' 계보도 아니고 소위 '미래파'도 아니다. 그의 시는 무겁지 않고 난해하지 않다. 가볍고 평이하다. 그게 마음에 든다. 나는 내게 재미있는, 그래서 지지하는 시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인용해보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하는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니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중략)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후략)

 

이 정도면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지 않는가? 덩달아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고 합창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저 혼자 폼잡는 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들의 진화'는 또 어떠한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이건 놀라운 시 아닌가? 감자나 고구마가 등장하는 시들을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당신은 감자와 고구마를 싫어하는가?) 그 '놀라운 영양성분'에 대해서 토로하는 시는 아주 드물다. 하니, 이건 아주 드문 시이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빈 구명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중략)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후략)

 

그래, 그 골목들을 나도 사랑했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로 시작하는 시도 쓴 적이 있었지. 그래, 그 이불에 대해서 나도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게 일상이고, 일상의 발견이다. 그러니 터놓고 얘기하자.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그리고, 너만 알고 있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사실, 아니면 어쩌겠냐구?)..   

 

 

06.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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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0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들도 마음에 들어요^^

2006-09-06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도 맘에 듭니다.^^
**님/ 안 그래도 오늘 <맥베스>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항상 이런 강의는 하고 나야 좀더 많이 알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들으시는 분들께는 미안하죠). 애초에 너무 견적을 크게 잡아서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그래도 며칠 더 기다리심이). 그리고, 복사/제본한 책들의 보관기준이 따로 있는 건 아니구요. 읽는 중에 튿어지거나 하는 경우는 드물 던데요(요즘은 아무래도 이전보다 좋은 제본기들이 많이 나와서요). 제 경우에 문제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는 데 있습니다. 오늘도 복사해둔 듯한 책을 찾아야 할 일이 생겼는데, 백사장에서 동전 찾는 것보다는 약간 쉬울라나...

bookie 2006-09-08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시들을 좋아하는 로쟈님이 마음에 듭니다. ^^

로쟈 2006-09-0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ookie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서  곧 개봉된다는 영화 <호텔 르완다>와 관련한 칼럼을 읽었다. 100만명이 넘는 인종 대학살(제노사이드)가 벌어진 12년 전 '94년의 석달'을 재연한 영화라고 하는데, 그 봄의 벚꽃과 목련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지구 한쪽에서 벌어지던 그때의 참상에 대해선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불편하고, 잠시 허탈하고 착잡했다. 달리 더 보탤 말도 없다(그냥 '잘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속편하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으며 영화가 개봉되면 잠시 시간을 내봐야겠다...  

경향신문(06. 09. 05) 영화 '호텔 르완다'

-토마스 카밀린디. 그를 처음 만난 건 1년전 이맘 때다. 저널리즘 연수프로그램 참가차 머무른 미국 미시간대학에서였다. 토마스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왔다고 했다. 첫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미소가 선량하고, 유창하진 않아도 품위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점이 조금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한달쯤 뒤였을까. ‘신산(辛酸)’이란 말로는 부족할 그의 삶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가난하지만 우애깊은 집안의 장남. 고등학교 시절 대통령 앞에서 연극 공연한 것을 계기로 국영 라디오방송 기자가 된다. TV가 드물고 문맹률이 높은 르완다에선 라디오가 가장 사랑받는 매체라고 한다. 끔찍한 내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토마스는 안온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나 1994년 4월6일 그의 생일날, “모든 것이 변했다”(토마스의 술회).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지면서, 잠복해 있던 후투·투치족 사이 갈등이 폭발한다. 후투족 전사들은 벌목용 칼과 구식 총을 들고 닥치는 대로 투치족 학살에 나선다.



-온건파 후투족이던 토마스는 투치족 출신 아내와 둘째딸을 데리고 벨기에 기업 소유의 ‘밀 콜린’ 호텔로 피신한다. 호텔은 평소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하지만 그날은 위험지역을 피해 가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토마스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끈인 팩스전화기를 들고 프랑스 라디오 RFI에 기사를 송고한다. 이 때문에 밀 콜린 호텔은 “바퀴벌레(후투족이 투치족을 멸시해 부르는 호칭)들의 온상”이란 비난에 휩싸인다. 후투족 자치군이 호텔로 몰려와 토마스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지만,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단호히 거절한다.



-루세사바기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는 토마스뿐이 아니다. 당시 밀 콜린에는 많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이 총칼을 피해 모여들었다. 루세사바기나는 때로는 돈과 고급 샴페인으로, 때로는 탁월한 협상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넘어서는 용기로 1,268명의 생명을 지켜낸다. 하지만 호텔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져간다. 유엔도 미국도 유럽도 수수방관하는 사이, 석달 만에 1백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토마스도 처가에 보낸 맏딸이 숨졌다는 비보를 듣는다. 대학살은 끝나지만 희망을 놓아버린 그는 고국을 등진다. 아내와 둘째딸을 벨기에로 보낸 토마스는 미국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토마스가 겪은 ‘94년의 석달’을 담담히 재연한 영화 <호텔 르완다>가 7일 개봉한다. 당시 전세계가 외면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토마스가 꽃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다. 필자도 기자로서 무력했다. 국제면에 실린 기사를 무심코 읽은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때 내가, 우리가 외면했기에 12년이 지난 지금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죄없는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픈 마음으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가려 한다. ‘또다른 토마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호텔 르완다’를 권한다.(김민아 정치부 차장)

한겨레(06. 09. 05) 아프리카 르완다를 위임통치했던 벨기에는 소수 부족인 투치족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다수 부족인 후투족을 지배하게 했다. 르완다는 1962년 독립했지만, 이때부터 두 부족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크고 작은 인명 피해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00일 동안 민간인을 포함해 100만여명이 숨졌으며, 르완다는 초토화됐다.



-<호텔 르완다>(감독 테리 조지)는 이 처절했던 100일 동안 1268명의 목숨을 지켜낸 한 호텔 지배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이 시작되면서 수도 키갈리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에는 올리버 대령(닉 놀테)을 비롯한 유엔군과 잭(호아킨 피닉스) 같은 외신기자, 외국인 여행객은 물론 투치족 피란민들이 모여든다. 이 호텔의 투치족 출신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도 투치족 출신 아내 타티아나(소피 오코네도)와 자식들, 이웃들을 호텔로 대피시킨다.



-영리하고 처세에 능한 폴은 불안정한 정국에서 안전망을 확보하려고 오래 전부터 온갖 서비스와 뇌물로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내전 초반, 그는 그렇게 쌓은 인맥을 동원해 가족들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가족들을 지키려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웃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돕게 되고, 같은 이유로 호텔에 몸을 숨긴 투치족을 살리는 데 인맥과 지혜를 쏟아붓는다.

-폴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지만, <호텔 르완다>는 그를 ‘영웅 떠받들 듯’ 과대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흑인들의 생과 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유엔과 서구사회의 모습을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 너무 무겁지도 않게 ‘당시 사실 그대로’ 틈틈이 묘사한다. 이를 통해 자기 가족이 최우선이고 전부였던 가족주의자 폴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엔과 서구사회는 자신들의 역량 밖이라며 내전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또 호텔에 묵었던 백인들과 그들의 개까지만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투치족 흑인들을 남겨둔 채 호텔에서 유엔군을 철수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 폴은 등떠밀리듯 호텔에 남은 피란민들의 목숨을 책임지게 되지만, 떠밀린 등을 되돌리지 않는 건 그의 따뜻한 인정과 연민 때문이다.



-과대포장은 없지만 <호텔 르완다>는 밋밋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르완다 내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오감을 멎게 할 정도로 끔찍할 뿐더러, 에피소드들도 디테일하다. 또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도 영화에 윤기를 덧입히는데, 특히 돈 치들은 마치 다큐멘터리 속 실재인물 폴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폴의 심리변화와 긴장감을 뛰어나게 표현해냈다.(전정윤 기자)

 

 

 

 

06.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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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한겨레에서 이 영화기사 봤습니다.저두 이거 페이퍼로 올리고 싶었지만 낮에는 바쁘고...물론 밤에도 애기땜에 바쁘고...ㅜㅜ필름 2.0인가에서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정도 줘야 되는거 아니냐고 주인공의 연기를 높이 평가하더군요.이게 동숭아트센터에서 개봉하는것 같은데...다른데도 하는지 모르겠어요.많이 개봉하진 않을 거 같은데.동숭 아트센터는 대학다닐때 참 자주 갔던 영화관이었지만...그나저나 아기 태어난 후 천만명이 봤다는 <괴물>도 못보고 있는데 동네 상가에 영화관에 생겨도 보긴 힘들겠죠?

로쟈 2006-09-0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은 봤으니까 제가 조금 형편이 나은 듯합니다(한때는 일주일에 3-4편씩 개봉관에서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문화생활은 '여유'를 필요로 하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