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읽은 시집은(책소개로만) 김경후의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이다. 어젯밤에도 평이 좋다는 시집 두 권을 뒤적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모처럼 가슴이 뚫리는 듯하다. ‘속수무책‘을 읽자니 그렇다.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자칫 말장난으로 끝나기 쉬운 착상을 그런대로 버텨내고 있다.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새처럼‘까지 읽어보며 미덥다고 느낀다.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불새처럼‘ 전문)

‘이주의 시집‘으로 주문해야겠다. 전작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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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과학서‘로 데이비드 버코비치의 <모든 것의 기원>(책세상)을 고른다. 저자는 생소하고 제목도 기시감을 갖게 하지만, 눈길을 끄는 건 ‘예일대 최고의 과학강의‘라는 부제다.

˝예일대학교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학 교양강의를 엮은 <모든 것의 기원>은 별과 은하의 탄생에서 생명과 진화, 문명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핵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만물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장구한 138억 년 우주의 역사를 탐구한 호모 사피엔스들의 수많은 발견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그러고 보면 ‘예일대 강의‘가 ‘하버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 권 소개되었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건 프랭크 터너의 <예일대 지성사 강의>(책세상)와 이안 사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문학동네), 그리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책으로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웅진지식하우스) 등이다. 난이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용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그게 명문대의 이름값인 것. <모든 것의 기원>도 그 정도의 기대를 갖고서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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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이 종결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텐데 내게는 책이 그런 종결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호주의 역사학자 존 허스트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위즈덤하우스)가 이번에 출간되었는데, 이로써 지난 9월의 카프카문학기행이 마무리되었다고 느낀다. 귀국길에 오르던 프랑크푸르트공항 서점에서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이 바로 이 책의 보급판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9년 출간된 이후 “역사의 가장 큰 주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놀랍도록 짧고 간단한 책이다. 내 유일한 소원은 작가가 더 긴 버전을 쓰는 것이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마존 역사 분야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복잡한 역사의 전체 맥락을 한눈에 이해하고 싶은 사람, 매번 세계사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 번 읽고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을 알려 줄 것이다.˝
 
공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세계사 책(정확하게는 유럽사 책이다)은 어떤 구성과 내용일까 궁금해서 구입했고 번역본이 근간 예정이란 건 귀국해서 알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책이 나온 것. 9월에서 10월까지. 책을 주문하면 아마도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손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를 표방한 책으로는 독일 작가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세계사라는 이름의 농담>(추수밭)과 비교해서 읽어봐도 되겠다. 누가 더 짧은가 대보는 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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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은 중고본으로 구입한 황석영 중단편전집인다. 창비판이 세 권짜리로 나왔었는데 개정판이 따로 나오는 것인지 오랫동안 품절상태다(<몰개월의 새>만 재고가 남아 있다).

<객지>와 <삼포 가는 길>은 소장도서이지만 서고도서라 당장 손에 들 수 없어서 이번에 재구매했는데, 똑같이 ‘최상‘품으로 주문했건만 전혀 다른 책이 왔다. <객지>와 <몰개월의 새> 판매자가 책의 위쪽과 아래쪽을 잘라낸 파본을 보내온 것이다.

출판사에서 반품도서를 다시 내보낼 때 그렇게 잘라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이 정도로 표가 나게 처리할 리 만무하다. 본문은 읽을 수 있지만 ‘전집‘을 구매한 의미가 없어서 책은 파기하고 다시 구입할 생각이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도 있지만 이런 책을 ‘최상‘으로 분류하는 알라딘의 기준도 문제가 있다.

여하튼 나의 중고본 구입 낭패사에 한 줄 더 적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전집을 마련해놓은 다음에 번듯한 개정판이 다시 나온다면 의문의 1패가 추가되는 것인가?..

PS. 구매 불만족 코멘트를 보고서 판매자가 환불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책은 파본이기에 파쇄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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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하나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현대문학, 2017)가 두 권으로 묶여서 나왔다. 대표 단편 30편이 두 권으로 갈무리된 것인데, <위대한 개츠비> 등 5편의 장편소설로 유명하지만, 피츠제럴드는 160여 편의 단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더 수입이 좋았기에 돈벌이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한데 헤밍웨이 단편과는 달리 피츠제럴드의 단편에 대한 문학사의 평가는 박한 편이어서 30편 가량만 읽어줄 만한 것으로 친다. 나머지는 재능의 낭비 사례. 피츠제럴드 단편 전집은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온 현대문학판을 비롯하여 국내에 소개된 피츠제럴드 단편선이 대개 30편 가량을 묶고 있다. 구체적인 목록은 대조해봐야겠지만 거의 대동소이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학판은 번역가를 겸하고 있는 소설가 하창수의 번역이고,민음사의 <피츠제럴드 단편선1,2>는 김욱동 교수의 번역이다. 



세계문학전집판의 또다른 선택지는 펭귄클래식인데, <아가씨와 철학자>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두 권이 나와 있고, 20편 가량의 중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피츠제럴드 작품의 붐을 가져온 건 전적으로 영화화된 두 작품,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덕분인 것 같다. 피츠제럴드 자신이, 이번에도 돈벌이를 위해서였지만, 영화계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도 보인다.    


겨울학기에 미국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분량을 고려해) 첫 단편집 <아가씨와 철학자>를 다룰 예정인데, 겸사겸사 대표 단편들을 일독해보면 좋겠다. 번역된 작품집을 모두 갖고 있으니 시간만 내면 되는 일이다...


1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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