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권의 시리즈로 구성되는지는 모르겠는데(아, 4부작이란다)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의 둘째권이 출간되었다. <모멸의 조선사>(글항아리). ‘지배권력에 맞선 백성의 몇 가지 얼굴‘이 부제다. 지배와 저항이라는 프레임이 평소 관심사와 맞아서 반갑다.

˝시중에 나와 있는 조선시대 관련 책에서 조선 지배 세력의 통치법이나 백성의 생활상을 분리시켜 각각을 다룬 책은 많지만 이 양자의 관계 양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한 책은 드물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정면으로 겨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의 지배 전략과 통치에 대응해나간 조선 백성의 반응을 계층과 직업 별로 자세히 살피고 있다. 지배 전략을 매개로 관료 세력과 백성이 형성하는 관계 양상을 파악하고,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러한 상호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유지됐음을 드러낸다.˝

전작인 <두 얼굴의 조선사>에도 자연스레 손이 가는데, 흠, 어디에 두었는지 잡히지 않는다. 찾아봐야겠다. 지배와 저항이라는 프레임과 관련해서는 박영규의 <조선반역실록>도 참고해볼 만하다. 이건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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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귀가 후에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오늘 온 시집들 가운데 두 권을 읽었다. 며칠 전에 기대감을 적은 김경후의 최근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과 그보다 앞서 2012년에 나온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이다.

읽은 순서는 출간 순서인데 <열두겹의 자정> 이전에 낸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가 빠졌다. 주문에서 빼놓은 건 아마 배송예정일이 달라서였을 거 같은데 뒤에 나온 시집 두 권을 읽고 나니까 따로 읽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내가 호감을 갖고 읽은 ‘불새처럼‘이나 ‘속수무책‘ 같은 시들이 희소했기에. 흔히 하는 말로 ‘그게 다예요‘에 해당한다(이 시인은 여러 편의 칼리그램(형상시)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미 한국시에서도 더이상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놀라울 뻔한 시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의 첫 시, ‘입술‘이었다.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이렇게 첫 연이 시작하는데 도발적인 비유(˝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와 상투적인 진술(˝네게 닿고 싶다고˝)이 기대반 염려반으로 나뉘다가 결국 염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마지막 연.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절벽‘에서 멈춘 시가 되었다.

<열두 겹의 자정>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물론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일 뿐이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취향이 까다로운 독자인 것인지 의구심도 갖게 된다. 더불어 시집 해설을 쓰는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도 때론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경후의 시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인 것만 같다.˝(이소연)

그렇지만 김경후의 순례를 따라가는 독자의 여정은 첫 시 ‘토르소‘에서 멈췄어도 무방했을 듯하다.

텅 빈 카페 선반 위
토르소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나절
기다리지 않기로 한 뒤
또 한나절
허벅지와 미소
울부짖음과 발바닥
있어선 안 되는 건 이미 모두
없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뿐
벌건 할로겐 램프 아래
벌거벗은
토르소
잊기의
기억

내가 덧붙일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잃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토르소의 세계를 김경후는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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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입소문으로만 듣던 박준의 <당신이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를 앞뒤로 읽었다. 그냥 자연스레 와닿는 시들을 좋아하는데, 몇편의 후보작 가운데 ‘이 한편‘으로 고른 시는 ‘꾀병‘이다. 찾아보니 나만의 예외적인 선택은 아닌 듯싶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나이에 대한 감이 없어서 그런데 이런 것이 83년생 시인의 일반적인 감각인지 잘 모르겠다. 심증으론 아주 예외적인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읽은 범위에서는 백석 시에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이 시인이 ‘미인‘의 손과 곁을 떠나서도 이런 감각과 어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시집에 실린, ‘미인‘과 무관한 시들에서는 나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1987년의 가족사를 소재로 한 시 ‘눈썹‘도 그렇다.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1987년이면 네 살 때 기억을 소재로 한 시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능청스럽게 가족사의 한 에피소드를 그려내고 있는데 역시나 이런 감각이나 어투는 요즘 시 같지 않다. 시집 제목도 그렇고 산문집 제목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같은 구닥다리 표현이 묘하게 정서를 환기한다. 적당한 분류 범주를 찾지 못해서 임시로 ‘박준적 신파‘라고 부르겠다. 이 젊은 시인은 대체 몇 살의 나이로 어느 시대에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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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크리스토퍼 헤이즈의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를 고른다. 저자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찾아보니 책의 원제는 ‘엘리트 계급의 황혼: 능력주의 이후의 미국‘이다.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사회를 실패로 이끄는가‘가 번역판의 부제다. 대략 책의 주제와 시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엘리트 사회는 무너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대안을 찾아 획기적이고 참신한 해답을 제시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성취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지 못한다. 실패의 시대에 대해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단순하면서도 날카롭다. 

미국 국내 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 우수 선정도서(2012)로 꼽힌 이 책은 ‘포브스‘, ‘애틀랜틱‘ 등 많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실패를 주제로 삼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마이클 해링턴의 <새로운 미국>처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문제작으로 꼽힌 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미국사회 비평서이면서 엘리트주의 비판서로 읽을 수 있겠다(참고로 <새로운 미국>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셔키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이 책을 읽으라˝고 충고한다. 적폐 청산의 시대적 과제를 떠안고 있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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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이시구로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연구자료는 지난 주말까지 다 구비해놓았지만 오늘 강의는 작품과 그에 대한 논문 두 편 정도만을 참고했다. 예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지만 전체 강의의 가닥은 잡을 수 있었다. 28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이시구로의 차기작들은 나도 기대가 된다. 그는 4년 뒤 두번째 작품으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를 발표하게 될 것이다.

전작 읽기가 가능한 작가여서 작품은 발표순으로 읽어나갈 예정이지만 부커상 수상작 <남아있는 나날>(1989) 이후에 발표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만 뒤로 미루었다. 분량도 가장 두꺼우면서 가장 난해한 작품. 부커상 수상작가의 ‘갈라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강의에서 이 작품까지 다루게 될지는 다음주에 결정할 예정이다(다루게 된다면 12월의 한 주를 나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씨름하며 보내야 한다).

역자도 충분한 고려 끝에 ‘A Pale View of Hills‘를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옮겼지만 일반적인 선택은 ‘희미한 언덕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도 더 무난하지 않나 싶은데 ‘창백한‘은 너무 이미지가 강하게 여겨져서다. ‘희미한‘ 내지 ‘흐릿한‘이 작품의 의도와 더 호응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창백한‘ 기억이 아닌, ‘희미한‘ 기억, ‘흐릿한‘ 기억을 다루고 있기에 그러하다. 동시에 그렇게 희미한 과거를 더듬으며 재구성하는 것은 화자(에츠코)의 불가피한 전략이기도 하다. 자살한 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기에.

‘전후 소설‘이면서 여성 문제를 다룬 ‘여성 소설‘로 읽히는데, 그 점을 문제 삼은 리뷰가 적은 것은 의외다. 이시구로의 인터뷰나 자료에서 확인하고 싶은 부분인데 이 작가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처리방식은 충분히 주목거리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궁금한데, 이런 개인사는 인터뷰에 자세히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강의자료에도 넣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조각상 사진을 옮겨놓는다. 작품에서도 에츠코가 뜨악하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원폭과 무슨 상관이 있는 조각상인지 의아하다. 에츠코의 희미한 사적 기억은 이 공적인 기억에 대한 교정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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