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일찍 먹은 날은 밤참을 먹게 된다. 밤참용 책이 따로 있지 않지만 오늘은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를 읽었다. 읽다 말았다. 단숨에 읽기에는 분량이 좀 되는 시집이어서다. 그래도 ‘읽다 만 책‘까지는 읽었다.

사다 만 책은 없다
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
읽다 만 책만 있다

이런 게 오은 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다 알고 읽은 터에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말장난도 상습이면 심지가 굳은 말장난이다. 다만 그의 시가 무얼 생산하는지는 의문이다. ‘유에서 유‘로 가는 여정은 제자리 걸음의 여정이어서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계절감‘)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또한 오은의 시다. 이 시집이 최소한 세번째 시집임에도 그러하다. ˝오은의 시는 현대의 도시락폭탄이다˝는 평도 재미있지만 올드하다. 도시락폭탄은 현대적이지 않다. ‘시인의 말‘도 저렴하다.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
미래니까, 아직 오직 않았으니까.

이런 게 오은의 오원 짜리 유머다. 그대로 반복하지면 오은의 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시는 미래에 속한다. 그는 오다 만 미래파다. 온 것 같잖은 미래파다. 그래서 뭔가 기대하면 읽을 수 없는 게 오은의 시다. 기대를 접으면 터진다.

터진 수도관은 분수도 모르고
분수를 내뿜었어
시원한 것은 순간이었어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시원시원한 고통이었어 (‘폭우‘)

권혁웅 시인은 해설에서 ˝오은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오, 에, 그건 원 없이 읽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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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내가 가장 많이 강의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새 번역본이나 새 해설서가 나오면 뭔가 다른 얘기를 하나 궁금해서 펴보게 된다(예상밖의 내용과 만나는 일은 드물다. 나대로 요즘 추가한 레퍼토리는 스탕달의 <적과 흑>과 비교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고전 해설서로 나온 수경의 <죄와 벌, 몰락하는 자의 뒷모습>(작은길)도 그런 관심 때문에 가방에 챙겼다. 내일도 <죄와 벌> 강의가 있어서다. 수경의 책으론 <비참함으로부터 탄생한 위대한 벽화 레미제라블>도 <레미제라블> 강의 때 참고한 듯하다. 그리고 이 시리즈(‘고전 찬찬히 읽기‘)의 책 가운데서는 오선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죄와 벌>의 부제가 ‘몰락하는 자의 뒷모습‘인 건 의외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라스콜니코프의 어떤 모습과도 맞지 않아서. 새로운 해석인가? 새로우면서 말이 되는 해석이라면 충분히 의의가 있다. 과연 그런지는 내일 확인하기로. 오늘은 오늘의 할일도 아직 많이 남았다. 내일로 넘어간다고 해도 안 하면 그대로인. 나는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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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국경 2023-01-1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의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이주의 발견‘으로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서해문집)을 고른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제목은 도드라진다.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하고 부정당했던 조선공산당의 역사가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저자는 사람이 아닌 ‘조선공산당‘에 ‘평전‘이란 말을 붙였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관련서가 다수 출간되고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관심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결성된 것이 조선공산당이기에. 마침 박종성의 <평전 박헌영>(인간사랑)도 나왔다. 박헌영 평전이 처음은 아니지만 업데이트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다.

두께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로버트 스칼라피노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돌베개)도 수시로 참고할 만하다. 내년에는 한국계급문학 운동사에 대해서도 강의를 해볼까 한다.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의 ‘부작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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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한달만이다!). 건너뛴 저자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따로 대책이 있는 건 아니고, 가끔씩 이렇게 입막음 페이퍼를 적는 수밖에 없다. 이주에는 일본 문화학자와 전문 인터뷰어, 그리고 의학자 3인이다. 



먼저 일본문화, 특기 종교 전문가인 박규태 교수의 새책이 나왔다. <신도와 일본인>(이학사, 2017). 아마도 일본 신사와 신도에 대해서는 가장 깊이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난 여름에 두툼한 학술서로 <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역락, 2017)을 펴냈고, 이번에 나온 책은 일본 신도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서이다. 입문서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좀 묵직한 입문서라고 해야겠다. 


"신도는 과연 종교일까 아니면 일본인의 역사적 관습일까? '신도'는 무엇이고, 어떻게 성립되어왔으며, 서구의 눈으로 본 신도는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신도의 아이덴티티'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끝나는 이 책은 '신도'라는 낯선 문을 지나 일본인의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다. 신도를 통해 일본/일본인/일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책에 눈길이 간 건 아마도 일본문학기행을 계획하면서 일본문화에 대한 좀 심도 있는 책을 찾으려해서인 듯하다. 언제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옮긴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제이앤씨, 2010)과 같이 읽어보려 한다. 문고판으로는 <일본의 신사>(살림, 2005), 품절된 책 가운데는 무라오카 츠네츠구의 <일본 신도사>(예문서원, 1998) 등도 같이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아트북스, 2014)로 알게 된 독립 저널리스트이자 전문 인터뷰어 안희경의 새책이 나왔다. <사피엔스의 마음>(위즈덤하우스, 2017). <문명, 그 길을 묻다>(이야기가있는집, 2015)가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인사동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다음 책으로 '마음'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예술'과 '문명'에 뒤이은 주제가 '마음'이었던 것인데, 스티븐 핑커 같은 저명한 인지과학자에서부터 종림 스님까지 인터뷰이도 다양한다(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과학, 문학, 예술, 사회학, 철학, 종교 등 각 분야에서 ‘마음’을 다루는 세계 지성들―스티븐 핑커, 게리 스나이더, 마이클 가자니가, 로버트 트리버스, 이해인, 지그문트 바우만,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 이사벨 아옌데, 마루야마 겐지, 장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종림, 셸리 케이건―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보통의 마음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개인의 마음이 어떻게 시대의 마음으로 이어지는지, 그 마음들을 통해 어떻게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모색한다."


<문명, 그 길을 묻다>도 그렇지만, 세계적 지성들과의 흔치 않은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인터뷰어의 안목과 노고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의사이자 학자로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현석의 <아름다운 우리 몸 사전>(지성사, 2006) 개정판이 <교양으로 읽는 우리 몸 사전>(서해문집, 2017)으로 출간되었다. "지난 2006년 출간돼 의학계의 권위 있는 상인 제39회 ‘동아의학상’을 수상한 최현석 저자의 <아름다운 우리 몸 사전>을 11년 만에 전면 개정증보한 책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각 분과별 최신판 의학 교재들과 국내외 의학 논문, 단행본 등을 섭렵하면서, 지난 10여 년간 의료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최신 의학 정보를 총망라해 거의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으로 정리해냈다." 


몸에 관심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조짐은 아닌데, 해마다 정기 건강검진을 받다 보니 몸의 상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게 된다. <우리 몸 사전>도 사전이니만큼 수시로 참고하면 되겠다. 



저자는 '인간 개념어 사전' 시리즈로 <인간의 모든 감각>부터 <인간의 모든 감정>, <인간의 모든 동기>까지 3부작을 펴내기도 했는데, 백과사전적 지식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우리 몸과 관련한 방대한 사전을 갖게 되었으니 저자의 관심과 욕심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저작 목록 중 <유전자의 비밀지도>는 검색되지 않는다. 근간으로 보인다)...  


17.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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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과제로 읽어야 한다고 해서 일연의 <삼국유사>를 사러 서점에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다. <삼국유사>는 판본이 많은데 집에는 학교에서 추천한 판본이 없어서다(추천본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이 들고 다니는 책이 있다고). 서점에도 없다면 좀 거리가 있는 도서관에까지 갈 뻔했는데 다행히 수고는 덜었다.

돌아가는 길에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며 표절에 관하여 적는다. 정확히는 <표절에 관하여>(봄날의책)란 책에 관하여. 이번에 나온 건 저자가 프랑스의 문학교수이자 표절 전문가다. 표절은 겉보기에는 간단한 문제이지만(이걸 베꼈잖소?) 텍스트간의 영향관계를 지칭하는 상호텍스트성으로까지 시야를 확장하면 매우 복잡한 문제가 된다. 게다가 역사적 고찰까지 더한다면? 저자가 바로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다.

˝표절에 관하여 누구도 명확히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표절은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창조적 변형과 추악한 범죄행위 사이에서, 이제는 무엇이 표절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논의와 판단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표절에 관한 공시적, 통시적 고찰을 통해 그 역할을 꽤 유용하게 해낸다.˝

표절에 관해선 남형두의 <표절론>(현암사)이 묵직한 가이드북이자 사례집. 너무 두꺼워서 나도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주로 저작권과 관련하여 표절 문제를 다룬다.

토머스 맬런의 <표절, 남의 글을 훔치다>(모티브북)는 이번에 주목하게 된 책인데 엘렌 모렐-앵다르의 <표절에 관하여>와 비교하며 읽어봄직한 책이다. 표절에 관한 여러 시비와 논란을 소개하고 있어서 실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나저나 관심이 간다고 하여 모든 책을 구입할 수는 없으니(그렇잖아도 매달 상당한 비용을 쓰고 있기에) 가까운 도서관을 검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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