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중인데 손에 책을 들고 있지 않아서(우산을 들었다) 내주에 주문할 책이나 북플에 적기로 한다. 먼저, 인류학자 팻 시프먼의 <침입종 인간>(푸른숲).

˝‘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는가’는 인류 진화의 오랜 미스터리다. 동물고고학과 화석생성학의 세계적 대가로 우수한 과학 도서를 여럿 펴낸 고인류학자 팻 시프먼은 이 책에서 고인류학, 생물학, 유전학, 동물행동학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를 촘촘한 논리로 풀어나간다. 인류학자들이 발굴한 오래된 뼈와 유물이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방사성동위원소, 탄소연대측정법 등 최신 과학을 만나 인간의 본성과 행동의 원리를 밝혀낸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을 펴낸 바 있는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한다(저자의 다른 책도 소개됨 직하다). 이 책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는 이유.

국내서로는 정연보의 <초유기체 인간>(김영사)도 관심도서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나‘란 부제 말고는 정보가 뜨지 않아 목차만 보고 내용을 가늠할 따름인데 대략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여파‘로 읽힌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휴머니스트)과 비교해서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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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관련서로도 다시 나옴직한 책은 데보라 펠더의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부글북스, 2007)이다. 출간된 지 10년이 되었고 현재 절판된 상태라 나는 중고본으로 다시 구했다(소장하고 있는 책이지만 찾는 일이 또 일인지라). 50권의 목록도 그렇고 이 주제의 강의를 하는 데 요긴한 책이어서다.

 

 

전체 50권의 책이 5개의 장에 나뉘어 소개되는데, 내게 특별히 유익한 건 '19세기 중엽부터 1920년대까지'를 다룬 제4장이다. 14권 가운데 콜레트의 <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번역돼 있으니 '여성의 삶을 바꾼 책 13'이라고 좁혀서 말해도 되겠다(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가 절판된 상태에서 다시 안 나오고 있는 건 유감이다). 따져보니 이 가운데 9권은 강의에서 다룬 바 있다. 대략 70%는 강의한 셈. 토머스 하디의 <테스>나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마들마치>가 다시 나온다면 19세기 영문학으로 묶어서 한번 다뤄보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욕심이 나는 책은 이디스 워튼의 <환희의 집>(1905)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 여성작가가 쓴 최초의 위대한 소설"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워튼의 대표작은 퓰리처상 수상작인 <순수의 시대>(1920)이고 올해 강의 목록에 포함시킨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인지도나 대표성을 고려하여 <환희의 집> 대신에 <순수의 시대>를 고른 셈인데, '여성의 삶을 바꾼 책'으로 <환희의 집>이 선정된 걸 보면, 언젠가 다루면 좋겠다 싶다.

 

 

 

 

<환희의 집>이라고 제목을 적었지만 국내 번역본은 <기쁨의 집>(펭귄클래식)과 <환락의 집>(현대문화센터), 두 종이 나와 있다. 제목의 성경의 전도서 7장 4절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는데("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환락의 집에 있느니라"), 구성경 번역으로는 '혼인집'(혹은 '잔칫집')이라고 돼 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어떻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전공자들의 논문에서는 제목이 제각각으로 표기돼 있어서 좀 불편하다. 이런 작품의 제목 정도는 통일시켜주면 좋겠다.

 

 

 

여유만 있다면,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지만(원서도 구입해놓은 터여서) 당장은 <전쟁과 평화>와 <미성년>,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아가씨와 철학자>를 읽어야 한다. 내주에 강의할 책들이다. 이디스 워튼의 경우에는 자서전도 구입했는데, 이 역시도 번역본이 나오면 읽기 편하겠다. 20세기 초 미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작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그 정도는 소개될 만하다...

 

17.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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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출판문화(624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이미 서재에 올려놓았던 몇 편의 시 읽기를 한데 묶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김광규 시인의 시에서 제목만 따왔다.

 

 

출판문화(17년 12월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세계문학 강의와 함께 한국문학 강의도 진행하면서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한국현대시도 마치 밀린 일거리를 해치우듯이 읽는다. 아마도 지난 한두 달 동안 20여 권 이상의 시집을 읽은 듯하다. 주로 2000년대 이후 시인들의 시집을 읽었고 간간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 전 시대의 시집들도 읽었다. 20대에 시를 가장 많이 읽었으니 시가 희미한 옛사랑과 같이 연상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읽는 시집들 가운데 몇 권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적는다. 아니, 내가 읽은 몇몇 시편들에 대한 촌평이다.

 

 

황인숙의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를 읽었다. 지난해 늦가을에 나왔으니 뒷북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빠른 속도로 ‘못다 한 사랑’을 읽어나갔다. 여전한 의성어와 여전한 감탄사(느낌표)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가면(페르소나)을 쓰지 않은 드문 시인들 가운데 한 명이 황인숙이다. 시의 화자가 곧바로 시인 황인숙이란 뜻이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조재룡 교수가 ‘명랑과 우수‘의 세계로 명명한 황인숙의 시세계는 요즘 시로서는 희귀할 정도도 꾸밈이 없다. ˝황인숙에게는 예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사실, 시의 중요성이나 고유성도 신봉하는 것 같지 않다˝는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게 황인숙의 시다. 시가 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마음이 빚어낸 시들 가운데 내가 고른 한 편은 ‘세입자‘다.

 

내 방 지붕 위에서 비둘기들
발 구르고, 우르르 몰려다닌다
가볍도 아니한 몸으로
왔다 갔다 우르르
기왓장 다 흐트러지겠네!
밤새 굳은 몸들을 푸는 모양
아침마다 저런다

 

이 무례한 세입자들아!
집은 또 얼마나 너저분하게 쓸꼬, 비도로기들!(아마 나만큼이나)
나처럼 관대하고 게으른 집주인이
어디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쫓아낼 수도 없고

 

나 또한 세입자인데
내가 또 세를 내준 걸 알면
그들이 이리 집을 망가뜨리는 걸 알면
우리 전부 쫓겨나리

 

적으면서 한 번 더 좋은 시라고 느낀다. 꾸밈이 없어 밋밋한 시도 많은데 비하면 이 시는 확실히 재미와 넉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긴장감까지도! 한 권의 시집은 이런 한 편의 시로 어엿해진다. 

 

 

‘가면을 쓰지 않은 시인’이라고 하니까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의 황동규를 떠올리게 된다. 노년의 시들을 묶은 <연옥의 봄>(문학과지성사, 2016)도 뒤늦게 읽었다. 어느새 시인도 팔순이고 시집의 다수 시편이 ‘마지막 날’의 상상과 ‘별사(別辭)’로 읽힌다. 당장 시집의 문을 여는 ‘그믐밤’도 그렇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시인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는 시다. 그만큼 황동규 풍이 완연하다(하기야 대다수 그의 시가 그러하다). 시적 페르소나가 따로 없는 만큼 시에서 ‘나’는 시인 자신이다. 황동규는 맨얼굴의 시인이고 굳이 꾸미거나 연기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솔직하고 정직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것은 소위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그의 언어 구사력과 발견술 덕분이다. 시인은 항상 발견하고 감탄하고 마음 환해진다. 그 환해진 마음을 적는 것이 또한 그의 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행길에 제자의 부음을 듣고서 별을 보러 언덕에 오른다. 관목덤불을 지나고 여울을 건너 어렵사리 언덕에 올라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본다. 별이 지면 사람도 진다는 오랜 믿음! 그렇게 별과 인간의 운명이 상응하기에 마지막 연에서 별들의 안부를 유심히 관찰한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더 내려오는 별˝이 없자 그나마 안도하며 언덕을 내려온다. 그러자 제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비로소 절감한다. 그 대목을 시인은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숨죽여 흐느꼈다˝ 정도를 대신하는 시구인데, 이런 대체에 의해 시적 긴장이 만들어진다. 시는 다르게 말하는 방법이기에. 그리고 이런 게 황동규 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게 옛시인들의 시만 읽은 건 아니고 젊은 시인들의 시집도 다수 챙겨서 읽었는데, 가령 신철규의 첫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로 그런 경우다. 시집을 여는 첫  시 ‘소행성’이 일단 마음의 과녁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시의 마지막 연이다. ‘소행성’은 물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이 시를 처음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시에 대한 시인의 정의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시란 곧 소행성의 감각이고 언어라는 것. 그에 따르면 시인들은 너무 작은 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신철규의 시를 만들어내고 또 지탱하는 건 이러한 소행성적, 어린왕자적 상상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세계보다 우월할 때 성립한다는 시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도 잘 부합한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소행성‘의 어법은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시인의 특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거기에 있었으면 싶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눈물의 중력‘)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플랫폼‘)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슬픔의 자전‘)

 

잡히는 대로 골라본 소행성의 언어들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고 적었는데, ‘절벽 끝’의 사람을 뒤로 물러서게 하는 시는 새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내게 신선해 보이는 것은 소행성 유머다.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시집을 읽는 시간은 휴지(休止)의 시간이다. 멈추어 생각하고, 생각하기 위해 멈춘다. 세밑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2017년도 ‘지난해들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테고, 점차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겠다. 기억해둘 만한 올해의 책과 저자들을 생각해보다가 그냥 시집 몇 권에 대한 감상을 적었다. 시는 다르게 말하는 방법이기에.

 

17. 12. 24.

 

P.S. 제목을 빌려온 시도 옮겨놓는다. 세밑에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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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작가 로베트르 발저(1878-1956)의 산문과 단편 선집이 한권 더 출간되었다. <세상의 끝>(문학판, 2017). 최근에 독문학계에서 발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는 전언도 들은 바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때맞춰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이 나와서 바로 구입했다.

 

 

 

발저의 책으로는 배수아 번역의 <산책자>(한겨레출판, 2016)와(민음사판은 <산책>)와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온 <벤야멘타 하인학교>(문학동네, 2010) 등이 나와 있다. 올 한해 독일문학 강의를 꾸준히 해온 게 나름의 성과인데(현재도 진행중이고) 내년에는 발저와 제발트까지 다루는 게 목표다. 발저의 경우는 3-4강 정도의 강의를 진행할 수 있겠다.

 

생몰연대로 알 수 있지만 발저는 카프카와 동시대 작가다. 그리고 카프카를 비롯해서 벤야민과 헤세 등에 영향을 미쳤다.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 등에게 격찬을 받았으나 생전에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일생을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그러다 1970년대 그의 작품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에서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일단 관심사는 카프카와 벤야민, 그리고 발저 사이의 커넥션이다. <카프카 문학사전>(학문사, 1999)에서는 '로베르트 발저' 항목에서 카프카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카프카의 작품을 최초로 다루었던 비평가들은 발저와 카프카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했다. 로베르트 무질은 카프카의 단편집 <관찰>이 발저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고 질책했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단어와 대상 사이의 전통적 의미의 해체, 간결한 언어의 표현, 절망의 원칙 등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카프카의 첫 책 <관찰>(1912)이 발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발저의 '작은 문학'은 카프카의 '단편산문'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요긴한 도움을 준다. 수전 손택은 발저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발저의 작품에 나타나는 윤리의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발저의 힘은 고도로 세련된 예술의 힘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움과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이다."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의 형식이 바로 발저와 카프카를 같은 범주로 묶어준다.

 

 

 

이 '작은 문학'은 벤야민과의 연결고리도 되는데,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의 어린시절>)과 단편들(영어판이 <이야기꾼>이라고 나와서 구입했다)의 벤야민을 '발저적'이라고 읽을 수 있겠기에. 발저와 카프카, 그리고 벤야민의 단편산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고 내년 카프카 강의에서부터 적용해봐야겠다.

 

 

 

벤야민의 카프카론을 비롯해서 얼마전 특강까지 한 책, 게르하르트의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에디투스, 2017),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동문선, 2001), 블랑쇼의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그린비, 2013) 등도 참고할 책들. '카프카와 로베르트 발저'도 연구 과제 가운데 하나로 올려놓는다...

 

17.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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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와 지성사를 넘나드는 대작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피터 왓슨이 이번에는 과학사에까지 손을 댔다. 신간 <컨버전스>(책과함께)가 그것인데 ‘현대 과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이 부제다. 무엇을 가리키는 제목인가?

˝컨버전스(convergence)는 여러 가지 것들이 통일이나 단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혹은 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을 뜻한다. 통섭, 융합, 수렴과 비슷한 개념이다. 150여 년 전 최초의 거대한 양대 통일 이론인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진화론이 발표되었을 때, 현대 과학은 분야들 간에 공고했던 경계를 허물고 서로 교류하고 조화를 모색하며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 사건은 과학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이었다. 이후로 현대 과학에서는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이고, 관계가 없다고 여겨지던 분야들도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이론들을 탄생시켜왔다.˝

저자의 관점이 현대 과학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통찰로 이어지는 것인지 한번 따라가볼 참이다. 저자가 에너지 보존법칙과 진화론의 시대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앞뒤의 책으로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동아시아)과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도 나란히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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