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니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이 손 닿는 곳에 있어서 펼쳐들었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는 시집은 아니어서 덮었다. 요즘 나오는 많은 시집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인의 관심도 언어로 보인다. 언어를 관찰하고 심문하고 학대하고 다시 어르기. 자기지시적이라는 시어의 특징은 자폐적이라는 말과도 바로 통한다. 좀처럼 외출하지 않는 언어들.

가장 많은 시편들의 제목이 ‘발화 연습 문장‘이다. 제목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조차도 그 시편들 가운데 한 문장이다. 어느 스포츠 경기이건 선수들의 연습 장면이나 연습경기(시범경기라고도 하고)도 관람거리가 된다. 열성팬들이라면 기꺼이 스타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에 대해서 더이상 그런 열정이나 인내를 갖고 있지 않다. 언어실험이나 무의미시는 이상부터 김춘수, 오규원까지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승훈의 비대상시도 때로 속도감을 보여주었다. 나는 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폐적 세계에서 발화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 불가하다.

이제니 시에 한정된 건 아니지만 가령 이런 제목의 시.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소위 젊은 시인들의 어떤 시집을 펼치더라도 이런 투의 식상한 문장과 발상을 만나게 된다(지시와 의미의 문제는 언어학과 언어철학에서 매우 진지하게, 지겨울 정도로 다뤄온 주제다. 시가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주제가 더이상 아니다).

한낮은 태양의 눈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사라진 것의 자리를 메우는 것 같지만 빛은 공백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짐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한 자리에서 위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흔적조차 흔적을 남긴다.(...)

말에 정서와 실감이 얼마나 실려있는가. 그게 빠진다면 비어있는 말이고 무의미한 말이다. 그게 소위 발화연습 삼아 흘려쓴 것들이리라. 열성 독자가 아닌 나는 선수들이 진짜 경기에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독자는 이상의 ‘절벽‘부터 김춘수의 ‘꽃‘과 김수영의 ‘꽃잎‘까지 다 읽어왔다. 이들을 뛰어넘거나 그에 준하는 시를 읽고 싶은 것이지 ‘연습‘을 읽으려는 게 아니다). 시인들의 발화연습을 굳이 독자를 상대로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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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3-05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력질주보다 눈에 띄는 운동복과 헤어스타일에 더 신경을 쓰고 나온 선수를 보는 씁쓸함~ 한편을 읽고도 오랜시간 그 의미에 잠길수있는 그런 시가 좋습니다~

로쟈 2020-03-05 10:56   좋아요 0 | URL
시집도 시인도 너무 많아서 ‘연습‘까지 지켜볼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영화 <엠마>가 다시 만들어졌기에 오스틴의 소설 <에마>(1816)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영화와 달리 소설 표기는 <에마>로 굳어진 느낌이다. <에마>는 오스틴이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 사후에 유작으로 발표되었고 <샌디턴>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성과 감성> 이후 생전 출간작은 이렇다.

<이성과 감성>(1811)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파크>(1815)
<에마>(1816)

<맨스필드 파크>를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강의에서 읽었는데(몇년 전에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된 <레이디 수전>까지 다루었다) 한 작품만 다룰 경우엔 아무래도 <오만과 편견>을 고르게 된다. 두 작품을 선택한다면 보통 <오만과 편견>과 <설득>. 네 편 이상을 읽을 때에라야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까지 포함하게 되는데, 이는 번역본 출간 상황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다(현재로선 <맨스필드 파크>가 가장 적게 번역되었다).

<에마>가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건 영화뿐 아니라 새 번역도 나왔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판을 기준으로 열린책들판 <엠마> 외에 세 종 이상의 <에마>가 나와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펭귄클래식판이다.

강의에서는 오스틴 소설을 주로 여성소설, 결혼소설, 풍속소설, 사회소설 등의 맥락에서 다루는데 철학사와 경합하는 소설로 읽는 독법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언급이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헤겔을 더 읽고 이해하게 되면 이런 언명이 어떤 뜻인지 강의에서 풀어줄 수 있겄지만 아직은 아니다. 게다가 헤겔의 <논리학>(보통 <대논리학>을 가리킨다)은 절판된 지 오래다. <백과사전>(<철학강요>로 나왔던가)도 마찬가지다(부분 번역이 있다). 해서 헤겔과 대적하는 오스틴은 아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오스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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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오정희 소설에 관한 견적을 낸 김에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대해서도 정리해두려 한다. 정리라는 건 어느 만큼,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지 가늠해본다는 의미다. 다작의 작가여서 세 종의 전집이 현재 나와있는데(소설전집, 단편전집, 산문전집) 이 정도로 잘 정리된 전집이 나온 작가도 드물지 싶다.

나의 관심은 일단 소설인데 세계사에서 2003년(17권)과 2012년(22권) 두 차례 전집을 낸 바 있다. 현재 읽을 수 있는 건 물론 2012년 결정판이다.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이제 보니 두 전집 목록에 차이가 있다. 2003년판 전집에 들어 있던 <욕망의 응달>(1979)이 빠졌다(<꿈엔들 잊힐리야>는 <미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드라마화의 영향일까?). 결정판 전집에 빠진 만큼 박완서 작품이면서 동시에 지워진 작품이 되었다.

22권 전집은 15종의 소설로 구성되었는데, <엄마의 말뚝>만이 장편소설이 아닌 소설집으로 포함되었다. 유일한 연작소설이어서다(거기에 단편이 몇편 더 들어가 있다). 이 가운데 여성문제를 다룬 ‘여성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1980년대에 발표한 세 작품이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3)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내가 기억하는 건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이지만 그 시절에는 대수롭지 않은 대중소설로만 생각했다(중고등학교 시절 내게 박완서는 통속적인 ‘여성지 작가‘였다). 그리고 대학 초년시절 나는 ‘여성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내게는 여자형제가 없었고, 교회라도 나가지 않는 한 여학생을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러고는 30년이 지났다.

어제 전집판 <살아있는 날의 시작>과 <서 있는 여자>를 주문했다(<그대 아직도>는 몇년 전에 구입). 박완서 강의에서 데뷔작 <나목>(1970)만을 다루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15종 22권을 다 읽거나 강의에서 다룰 여력은 없다. 나의 개인적인 관심은 한국여성소설에서 박완서의 지분을 확인하려는 것 뿐이다(90년대 들어서면 공지영의 소설들이 뒤를 따른다).

기억에 1980년대와 90년대 평단에서 박완서 소설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단편들의 성과와는 별개로 장편소설들은 대개 통속적이라고 폄하되기 일쑤였다(사정은 다른 작가들도 비슷했다). 여성문제소설에 초점을 맞출 때도 박완서는 보통 ‘반면교사‘였다. 여성문제의 형상화가 도식적이며 진정한 여성해방과는 거리가 있다는 식. 그랬던 것이 이제 작가가 문학사적 연구대상으로 변모하면서 그 평가도 사뭇 달라지는 성싶다. 흠보다는 미덕이 치켜세워진다. 여하튼 실상은 어떠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세 작품을 읽어보려 한다.

또다른 분류로는 ‘중산층 소설‘이 있는데 <휘청거리는 오후>(1977)나 <도시의 흉년>(1979) 같은 70년대 소설들이다. 전체적으로는 박완서 소설의 조감도와 분류학이 필요하다. 전공자도 많으니 만큼 그들의 작업에 기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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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율리시즈'를 읽기 위하여

13년 전에 쓴 글이다. 생각의나무판 <율리시스>는 이미 절판된 지 오래고(출판사가 문을 닫았다) 나는 지난해에야 동서문화사판으로 강의에서 읽었다. 제3의 번역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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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레비나스 혹은 '사랑의 지혜'로 가는 길

14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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