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강조할 만한 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 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로 불렸던 수잔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이다. "2004년 작고한 20세기의 대표적 예술평론가이자 작가인 수전 손택의 에세이 41편을 모"은 책으로 "고전이 된 첫 에세이집 <해석에 반대한다> 출간 이후 40여년만에 발간된" 것이며,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책은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현대미학사, 2004), <우울한 열정>(시울, 2005)에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 연재에서 다루었던 <우울한 열정>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강조해야 할 것>이 도착했으니 대략 난감이다. 덥석 집어물 형편도 아니면서 무시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 지성계의 여왕'이란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만한 여성 지성인이 많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강조해야 할 것> 이후에 (그녀의 소설들이 남아있지만) 더 나올 만한 책도 없다는 것.  

친절한 소개나 리뷰를 미리 참조하고서 책을 손에 잡는 게 유익할 듯싶은데, "총 3부 구성으로, 해박한 교양 지식과 다독으로 유명한 지은이답게 수많은 예술 작품에 대한 글들,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지은이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1부 '내가 본 것들'은 영화와 회화, 오페라, 연극, 사진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2부 '내가 읽은 것들'에서는 그녀 스스로 정전으로 생각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돈키호테, 롤랑 바르트 이외에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상당수 다루고 있어, 독자들에게는 예술에 대한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만, 맥락을 알 수 없기에 헤맬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리고, "3부 '그곳과 이곳'에서는 수전 손택의 사적인 이야기가 그녀의 사유와 얽혀들어간다. 첫 출간 30년 후 <해석에 반대한다>의 현재적 효용성은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 전쟁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에피소드와 번역의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그 가운데 지식인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날카롭게 설파한다." 나라면 3부부터 읽기 시작하겠다.

 

 

 

 

두번째 책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2006). 주말에 각 언론에서 생각보다 많이/크게 다루어서 의외라고 생각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에 출간된 <도덕의 정치>(백성, 2004)에 대해서는 비교적 잠잠했었기 때문이다(<도덕의 정치>는 당시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산 책으로 기억된다. 한편 알라딘에는 이 책의 저자가 '조지레이 코프'로 잘못 기입돼 있다). 레이코프는 자주 공동작업을 하는 마크 존슨과 함께 현대 인지언어학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언어학자이다(그러니까 포스트-촘스키의 선두주자쯤 된다). 별로 읽을 짬은 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출간한 모든 책을 나는 챙겨둔다(물론 번역서들이다). 참고로 말하면, 러시아에서도 몇년 전부터의 그의 책들이 하나둘 소개되고 있다.

언어학자의 정치론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은 물론 촘스키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와 인지언어학의 거목은 관점이 약간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일차적인 호기심은 그것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을 텐데, 그건 당연히 '언어(말)'에 대한 관심일 터(우연찮게도 같이 나온 촘스키의 최신간의 제목은 <여론조작>(에코리브르, 2006)이다). 

소개의 말을 잠깐 따라가본다: ""문제는 말[언어]이다."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꼽히는 지은이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 정치를 바라보며 내놓은 결론이다. 왜 말일까? 그건 말이 유권자들이 세계를 보는 프레임[생각의 틀]을 결정짓고, 이는 곧 정치적 입장과 투표 성향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언어의 문제에 주목하여 미국 민주당의 선거 승리전략에 대해 실제적인 지침들을 조언으로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4년 출간 이후 민주당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2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정치와 언론에서 '프레임' 개념이 새로을 각광받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치언어학 도서로 분류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따라가보면, "지은이의 전작 <도덕의 정치>를 기반으로 책이 내놓는 주장은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실패와 거짓말을 공격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유권자들이 진보 진영에 투표해 줄거란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것.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이 아닌 정체성에 맞추어 투표하며, 그들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진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서민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겉으로 보기엔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명쾌하게 증명해낸 것." 우리의 경우엔, 언론학자 강준만이 언어학자였다면 썼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더불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어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다.

"터미네이터를 연기한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 대한 분석을 비롯하여 각종 미국 정치 담론에 말과 프레임의 힘이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쉬운 내용 구성 안에서 언어학과 정치학이 흥미로운 결합하여 한국 정치 환경을 해석하는 데에도 강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하니까 선거의 계절을 맞이하여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그런데, 내 <도덕의 정치>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세번째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잘 알려진" 저자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2006). "지은이가 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시론·시평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하니까 분량에 비해서는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지만, 그건 글의 형식상의 문제이고 내용상으로는 책의 제목 만큼이나 무겁고 갑갑할 것이니 미리 각오하고 읽는 편이 낫겠다. "'"난민'도 '국민'도 될 수 없는 추방자(디아스포라)의 감수성을 지닌 재일조선인인 지은이의 주변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 사회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는 책.

난민 얘기가 나오니까 떠오르는 건 작년 봄에 <씨네21>(2005. 05. 13) '유토피/디스토피아'란에 실렸던 이진경 교수의 칼럼이다. '난민이 필요한 나라'라는 제목. 이 참에 한번 더 읽어본다.

-난민, 어느 한 나라에서 정부에 항거하거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던 꿈을 꾸다 체포를 피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망명, 여전히 전복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혹은 전복을 꿈꾸던 삶을 등질 수 없어서 자신의 나라를 뒤로 한 채 이국 땅을 떠도는 행위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자국 정부가 자신에게 할당한 지위에서 벗어나 떠도는 이탈자들이고, 새로운 체제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자 꿈꾸는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자국 정부와 혹은 자신의 국가와 맞서는 위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맞먹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외부에서 살기에, 한 사회의 내부에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내부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들의 시계가 망명하던 시간에 멈추어버린, 그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의 외부자고 망명자, 난민이기에, 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디서도 외부자다. 내부에, 그 친숙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익숙함의 관성에 따라가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나라, 혹은 자신이 사는 나라에 긴장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없는 것을 밀어넣는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이 만들어지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저주받은 삶, 피곤하고 힘든 삶을 강요받지만, 그것을 좀더 나은 삶으로 되돌려준다.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망명자나 난민의 이러한 역할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가 여부에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든 외부자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명자나 난민이 아예 없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원하는 누구나 쉽게 그런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망명이 자유로운 사회. 그리고 되돌아오는 귀국도 자유로운 사회.(*'망명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망명자'는 여전히 '망명자'인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망명이 꼭 정치적 핍박과 목숨을 위협하는 억압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국적을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전에 내가 아는 한 선배는 붕괴한 소련으로 늦은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의 소련행을 “문화적 이유에 의한 망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귀국할 수 없게 하는 위협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망명이 결국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것은 분명하다.(*그런 소련행을 환영할 '러시아인'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요즘 러시아에는 스킨헤드 경계령이 다시 떨어졌다.) 

-이른바 ‘임시정부’를 자처한 망명자들에 의해 수립된 나라, 가장 저명한 정치지도자가 오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대통령이 된 과거를 가진 나라, 그러나 난민협정에 가입하기 전에는 물론, 뒤늦게 가입한 뒤에도 10년이 넘도록 단 한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 그리고 미얀마의 망명자들처럼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난민보다는 불법체류자 다루듯 처리하는 나라, 목숨이 걸린 문제를 서류에 동그라미 치는 ‘서면회의’로 처리하는 나라, 난민된 사정이나 현재의 처지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그가 돌아가도 결국 죽지는 않을 거라는(사람은 정말 얼마나 죽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으로 안심하고 추방명령을 내리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나라다. 이 나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혹시 윤리적, 혹은 도의적 이유에 의한 망명자들인지도 모른다. 정말 난민이 필요한 나라다.

칼럼을 읽을 당시에 몇 마디 촌평을 페이퍼로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다른 일들에 치여 흐지부지됐었다. 칼럼의 반어적인 문제제기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내가 가졌던 소박한 의문은 '난민'과 '망명자'자 과연 같은 부류인가? '한번쯤 국적을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해본 사람과 난민/망명자는 같은 부류인가? 하는 점. 그런 의문은 '노마드적 사유(노마디즘)'와 '노마드'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나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비롯된다. 물론 저자 서경식이 다루는 건 '재일 조선인'이라는 진짜 '난민', 혹은 국민도 난민도 아닌 어중간한 '난민'이다. 구체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책소개를 따라가자면, "총 3부 구성으로, 1부는 본격적인 시론과 시평에 앞서 지은이의 정치적 관점과 윤리적 감수성을 개괄할 수 있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실었다. 2부에서는 식민지배 시기부터 재일조선인의 과거를 구성하는 주요 사건들을 돌이켜보며 이들을 타자로 취급하고 차별하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국민의 영역 안에 들어와야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오류라는 것."

 



 

 

"책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대 국가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또다른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3부에선 윤이상,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애도한다. 국가에 의해 배제당하고 추방당하고 희생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 우리 안에 숨어있는 근대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네번째 책은 팔 다리가 없는 장애를 딛고 화가가 된 여성, 앨리슨 래퍼(1965- )의 자서전 <앨리슨 래퍼 이야기>(황금나침반, 2006)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쏟아지던 편견과 배척을 이겨내고,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당당한 엄마로 살아가게 된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그 래퍼가 23일(오늘) 방한했다.



'살아있는 비너스'라고 불리는 "앨리슨 래퍼는 양쪽 팔이 모두 없고 다리는 무릎 아래가 없이 넓적다리뼈에 발이 달려 있는 형상의, 이른바 '해표지증'이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모두가 의심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벗은 몸에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조각 같은 영상을 표현하는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니까 책은 그냥 한 예술가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혼한 뒤인 1999년에 임신을 했고, 아이 역시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출산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생명을 지키기로 결정하고, 건강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임신 9개월의 앨리슨 래퍼의 모습은, 트라팔가 광장에 역사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각상의 모델이 되었다. 모성 및 장애에 대한 편견에 도전하는 앨리슨의 예술작품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2005년 세계 여성 성취상'과 대영제국국민훈장(MBE)이 그녀에게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더불어 드는 생각은 장애나 콤플렉스가 없는 미래 '생명복제시대'의 인간이란 '위대함'의 조건을 박탈당한 '평균인'이 아닐까란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초상은' 완벽하지만 위대하지는 않은' 인간들의 군집은 아닐까?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2006). 중앙일보의 리뷰는 "거침없는 '역사 비빔' 스페셜"이란 타이틀을 뽑았는데, 이 '비빔(퓨전)'에 있어서 저자의 솜씨는 단연 독보적이란 걸 우리는 이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에서 확인한 바 있다. 저자가 다시 3년만에 내놓은 책은 "시공간, 인간, 성(性), 몸, 앎, 글쓰기 등을 주제로 2001년부터 5년여간 써온, 한국 근대성의 기원과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고 탈근대의 미래를 논의하는 11개의 글을 실었다."

"책 전반에서 지은이가 시도하는 접근법은 근대, 18세기, 탈근대 이렇게 세 가지 시간대를 서로 충돌시키고 넘나드는 것이다. 즉 근대의 담론을 이질적인 다른 두 시간대의 담론에 '밀어넣음'으로써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나비와 전사'라는 제목은 이 접근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다산, 이옥, 옹녀와 변강쇠, 대장금, 그리고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 등 18세기와 탈근대 담론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지니 소문난 잔치상으로 충분하다. 챙겨먹는 건 독자의 몫이다.

 

 

 

 

다소 예외적이지만, 여섯번째 책도 꼽아본다. 존 릭던의 <1905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랜덤하우스중앙, 2006). 1905년,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에겐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에 아인슈타인은 무려 5편의 세기적인 논문들을 써냈는데, 그 논문들 이야기란다. "당시 물리학의 상황배경을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이 이들 논문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발전시키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보여주어, 아인슈타인 특유의 사고방식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1905년 이후 물리학계의 흐름을 다루어 아인슈타인이 미친 영향을 실감하게 해준다." 과학사 산책으로 더없이 유익해 보인다.

게다가 책은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본문 중간에 삽화를 삽입하여 일반인들도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아인슈타인의 인간적인 면보다는 학자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고, 상대성이론 이외에 아인슈타인이 남긴 과학적 업적들을 대거 다루어,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여타의 '아인슈타인'까지 같이 챙겨서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일곱번째 책은 러시아 특파원으로 활동한 일본인 기자 에가시라 히로시의 <푸틴의 제국>(달과소, 2006). 몇년 전에 나온 <푸틴 자서전>(문학사상사, 2001)과 함께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제국'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될 듯하여 꼽아둔다. 나로선 불가피한 '전공관련서'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고(얼마나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는 궁금하기도 하고 미지수이기도 하다).

소개를 약간 옮겨오면, "지은이는 일본 특파원 기자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푸틴 정권의 권력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미디어와 의회를 장악함은 물론, 소련 해체 이후 엄청난 부를 획득한 신흥 재벌(올리카키)들이 차지한 자원사업을 다시 국영화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푸틴 정권의 활동상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와 함께 러시아와 체첸 간 분쟁이 푸틴 정권에게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남북정당회담에서 드러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야심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주변 4강 중에서 미, 일, 중에 대한 전문가들은 많다. 당신의 '희소가치'를 좀 살리기 위해서라면, '러시아'에 좀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연구의 미답지들은 그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널려 있기에 5년만 공부하면, 자기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 러시아이다. 당신에게 러시아를 권한다.

06. 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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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를 옮겨오도록 한다. 작년 봄 한겨레(2005. 05. 31)에 실렸던 것으로 대담자는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진의 강의를 듣기도 한 황종연 교수이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저자 서문에는 두 사람이 인연이 잠깐 언급돼 있다). 동아시아 지성들과의 연쇄 대담 시리즈의 한 꼭지였는데, 타이틀은 "중/일은 '동양은 하나'라고 말해선 안돼"이며, 주요 화제는 '동아시아의 근대와 탈근대'이다. 작년봄에 읽을 때에는 굳이 옮겨오거나 할 생각이 없었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보인다. 고진에 입문하시려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고려대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긴키대 교수를 황종연 동국대 국문학 교수가 만났다. 황 교수는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겸하면서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 등을 주제로 삼은 활발한 문학평론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라타니와 황 교수는 동아시아의 근대와 탈근대, 한·일 민족주의 극복 등에 관해 대담했다. 

황종연= 동아시아론이 유력한 지역주의 담론이 됐다. 이런 지역주의 유행은 ‘중화 체제’ 붕괴 이후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한다. 어떤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라타니= 세계사 전체에서 역사의 반복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120년 전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1880년대의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지금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현재 중국은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청나라 말기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로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제국주의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유럽의 공동체 형성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지역적 공동체화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동시에, 중동과 마찬가지로 위기에 놓여 있다.

황종연= 동아시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나름의 교역 체제를 갖고 있었다. 핵심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체제다. 여기서 유래한 국제적 교역 공동체가 현재 동아시아 경제의 강력한 통합 고리를 이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동아시아 경제 통합의 움직임과 관련해 과거 중화 제국 체제와는 다른 어떤 초국민국가적 질서가 가능한가.

가라타니= 조공은 구 제국의 세계적 모습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두루 존재했다. 이때 구 제국주의는 국민국가를 확장한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다른 국민국가를 지배할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 각지의 국민국가 형성을 (저해한 게 아니라) 촉발시켰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제국주의는 각 국민국가들이 민족 자결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 시기 한국,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때의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국민국가를 넘어선 경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국주의를 파괴하면서 현대의 국민국가가 성립됐다. 유럽의 경우에는 제국의 이념이 유럽 통합의 이념 아래 계속됐다.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다가, 서로 분쟁하지 말자는 형태로 유럽연합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유럽은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을 형성했다. 나는 제국주의가 아닌 지역 공동체를 제국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동아시아에서 그런 제국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1880년대에도 여러 선택의 길이 있었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결합했다. 일본은 현재 중국 공산당과 북한에 의한 군사적 위협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종류의 위협은 없다. 그 위협은 외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위협으로 인한 피해가 최소화된다면 동아시아 공동체, 또는 동아시아 제국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황종연= 근대 동아시아 정치사에서는 국민국가 이념과 함께 지역 정치공동체의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근대 일본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담론 전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의 아시아주의나 동양론은 제국주의와 얽혀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 공동체 주장을 들을 때면 역사의 악몽이 떠오른다.

가라타니= 어떤 슬로건이건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오카쿠라 덴싱이 말한 ‘동양’이라는 이상은 대단히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동양’은 그가 일본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일본 시기의) 동양 또는 아시아는 하나라는 말은 오카쿠라라는 사람을 내쫓은 ‘국가’의 말이다. 그러니 말 자체가 아니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동양이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그런 말을 하는 게 적절하지 못하다. 한국이나 대만이 아시아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장래에 형성이 된다면 그 열쇠를 쥔 것은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이다. 북한과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5개 나라 가운데 스스로 시민운동을 일으킨 것은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종연= 선생님은 80년대 이후 일본에 출현한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하나는 ‘백치의 천국’이 될 가능성, 다른 하나는 광신적 내셔널리즘으로 나아갈 가능성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가라타니=당시 내 예언이 맞은 것 같다.(웃음) 1980년대 일본인들의 행동이 지금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백치들의 천국’은 세계적 현상이 돼버렸다. 미국의 경우 한편으론 백치 천국이 되고 있고, 한편으론 기독교나 유대교의 근본주의가 퍼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다. 세계 근대 시스템 전체를 모더니즘이라 본다면, 이를 뛰어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지금 (서구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안에 국한된 것이다. 실제로는 이를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황종연= 지금 우리는 상호연관성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여러 문화가 중첩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 만큼 확고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다중적 소속감과 다면적 충성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코스모폴리턴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언젠가 한일작가회의에 참석해 칸트의 코스모폴리턴한 이상에 대해 말했었다.

 

 

 

 

가라타니= 작가회의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웃음) 칸트가 말한 ‘공공(public)’이라는 개념은 공공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흔히 공공을 국가나 민족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칸트는 반대로 매우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한 개인이 가족이나 국가에 속해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공공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공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코스모폴리턴이다. 그래서 코스모폴리터니즘은 민족적·지역적인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를 부정하면 오히려 진정한 코스모폴리터니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국민국가를 극복한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보다 국가적·민족적인 흐름에 빠질 수 있다.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자기가 처한 위치를 뛰어넘어 생각하는 것이다.

황종연= 최근 한일 양국의 대중 언론은 일제히 내셔널리즘으로 복귀하고 있는 듯하다. 한일 양국의 민간에서는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연합이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라타니= 내셔널리즘의 문제는 각 국가 안에서 해결돼야 한다. 한국인이 일본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일본인이 한국 내셔널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상대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대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고 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난 2000년 한일 작가회의에 참석한 뒤에 나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한국을 비판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통해 일본에도 일본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이런 신뢰 속에서 ‘연합’이라는 것이 가능하다.(정리 안수찬 기자)

06. 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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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최신작인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의 표제 강연문을 나는 이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 버전으로 읽은 바 있지만, 저자 자신이 단행본에 수록하면서 전면적인 개정을 가했다고 하므로 다시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펼쳐놓는다. 원래는 2003년 10월, 고진이 몸담고 있던 긴키대학의 한 연속강연에서 행한 강의록인데, 출간을 위해서 꼼꼼하게 다시 가필을 한 듯하다.

재작년에 이 글이 번역/소개되면서 언론의 주목과 함께 문단에도 잠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당시 한겨레 신문(2004. 11. 26)의 최재봉 기자는 '혁명을 팽개친... 문학은 끝장났다'라는 제목으로 그 내용을 정리/소개했었다. 새롭게 고진의 이야기를 따라가보기 전에 먼저 기사를 읽어본다(*를 한 코멘트와 강조는 나의 것이다).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확인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의 의연한 생존을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런 선언은 양치기 소년의 되풀이되는 거짓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풍문이야말로 거꾸로 문학의 생존 근거이자 양식이라는 주장조차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살아 있는가. 여기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글이 있다.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일본의 문학평론가 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3)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풀어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논리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혁명의 핵심을 문학이 담당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체적 비평과 포스트모던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근대문학’은 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우에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미국은 더 일러서 1950년대로 시점이 올라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진은 (가령 앨빈 커넌처럼) '문학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근대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근대문학'이란 (근대)소설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한 소설/소설가의 전범으로 고진의 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가 '근본적으로 소설가'라고 간주하는 사르트르이다. 그는 문학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이라고 주장했던 것. 그런 (과잉)부담으로부터 문학이 자유로울 때, 그건 곧 (근대)문학의 죽음/종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진이 보기에) 프랑스의 경우에는 1960년대 들어서 사르트르의 시대가 끝나고, '소설' 대신에 '에크리튀르' 같은 개념이 보급되면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미국의 경우엔 1950년대이고, 일본의 경우엔 1980년대라는 것. 이러한 현상을 고진은 대중문화(텔레비전)의 보급/발달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제도적 상관물은 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 즉 문창과의 등장과 급증이다. 가령, 포크너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사창가의 포주가 돼 보라고 권유했지만, 요즘에 등단하는 작가들은 사창가 출신들이 아니라 대개가 문창과 출신들인 것. 하지만, 정작 고진이 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것은 한국의 경우를 목도하면서라고.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00년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해 ‘일본에서 문학은 죽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문학평론가인 자신이 평론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만은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본문학의 죽음에 대한 고진의 선언과 짝을 이루었던 것은 (문학이 아닌) '상품'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브랜드의 세계화였다. 고진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90년대 이후 하루키는 한국 독자들도 열성적으로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 "한국에서는 문학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거라고" 예견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던 것이다. 문학코너의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하루키의 작품들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자면, '문학 상실의 시대', '문학의 유령', '문학의 저편', '문학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식이 될 것이다. 하루키로선 그게 별로 유감스러운 게 아닌데, 그에겐 문학 대신에 위스키가 있으며, 게다가 브래지어 위를 흐르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하루키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

 

 

 

 

(*)한국에서 문학의 급속한 쇠퇴는 1990년대 말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걸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작가는 김영하가 아닌가 싶다(그는 신경숙이나 윤대녕, 공지영 같은 '진지한' 작가들과 경향/유형을 달리하며 등장했다). '우리는 문학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문학)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다오', '엘리베이터에 낀 문학은 어떻게 되었나', '문학은 왜 (아직도 버티고 있나)' 등등. 문학의 죽음 이후의 문학? 그건 '포스트잇'으로서의 문학이며, '랄랄라 하우스'이다.

-가라타니는 문학은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학’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으로 팔리는 문학을 권장하기조차 한다. 다만, 거기에다 본디 의미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고진의 표현을 빌자면,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저 직업적 직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물론 여전히 1억원 고료, 5천만원 고료의 소설을 쓰는 일은 가능하다. 더불어 가능한 것은 소설가가 미국과 일본에서처럼 문창과 교수가 되고 문화센터의 강사가 되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도 되는 일이다(잘 나가는 소설가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그걸 '사회적 책임'으로 용인하는 태도가 가능하듯이. 하지만, '문학'이 윤리적/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 그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게 고진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고진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을어 주시기 바랍니다.(*우리의 처지에서 보자면, '한류'에 한몫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그것이 가능한 작가는 미스터리계 등에 상당히 있습니다(*한국에서 팔리는 일본 소설의 경우를 고려해보면, 멜로계에도 상당히 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

 

 

 

 

(*)즉, 작가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종류의 '문학'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나 쓰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90년대 중반 <문학동네>의 창간은 한국문단에서 '문학의 종언'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됨 직하다. '창작과 비평'이니 '문학과 지성'이니 하는 '문학시대'의 거창한 타이틀을 그들은 내걸지 않았다(그들은 잘난 체하지 않았다). 그냥 '문학동네'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들은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문학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때문에 창간 10주년이 되는 해에 게재된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일면 '문학동네'의 뒤늦은 마니페스토로도 읽힌다. 문학동네 여러분,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본디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사례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그만둔’ 두 사람의 사례를 든다.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인 ‘전직’ 평론가 김종철씨가 그들이다.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는 로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는 김종철씨야말로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대로,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밖에는 읽히지 못할 통속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나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는 문학의 생존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일갈한다. 그는 “역사적 이념도 지적·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일본적 스노비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결론 삼아 제안한다.(*기사는 여기까지이다.)

 

 

 

 

(*)먼저, 로이 이야기: "그녀는 처녀작으로 (부커)상을 받은 후, 소설은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으로 분주합니다. 발표하는 저작도 그런 종류의 에세이뿐입니다. 구미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 작가는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문단생활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로이는 자신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쓸 것이 있을 때만 쓰며, 이런 위기의 시대에 무사태평하게 소설 따위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로이의 언동은 문학이 책임지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김종철 이야기: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그는 최근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었는데, 이번이 네번째라고 말하는 타입의 인물입니다(*즉 대단한 문학애호가라는 것). 나는 왜 문학을 그만 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동감을 표했습니다."

(*)문학비평가 김종철의 경우를 사례로 제시하기 이전에 고진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의 학생운동이다. 노동운동이 탄압받던 독재시대에 강렬한 정치운동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언 한국에서의  학생운동도 실제의 정치운동,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레 종언을 고하지 않았느냐고(물론 이건 고진의 탁견이 아니라 그냥 상식이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았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가 지나갔고, (문학으로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적어도 현저하게).

(*)이미 대학의 총학생회가 비운동권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건 뉴스거리도 되지 않지만, 투표율 저조로 투표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겨우겨우 당선자를 낸 올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이는 노골적으로 反운동권을 표방하고 나선 '30대 인디밴드 가수'였다('학생운동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동아일보(06. 04. 15)의 분석기사는 이렇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대학 총학생회(총학)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2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황라열(30) 씨의 독특한 이력이 알려진 뒤부터다. 현실적인 공약을 내세운 인디밴드 가수 출신의 황 씨는 거대담론을 외쳤던 운동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탈(脫)이념’ 현상 가속화=이번 서울대 총학 선거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대학 총학 선거에서도 비운동권 출신 후보가 당선됐다. 이는 몇 년 전부터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한 ‘탈이념’ 현상이 갈수록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각 대학의 동아리들도 대체로 이 같은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이념적 이슈보다는 학교생활이나 취업 등과 관련된 학내 활동에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 여기에 특히 올해 들어 두드러진 현상은 총학 구성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가 급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 총학은 지난해 11월 ‘총학 선거에서 투표율이 50%를 넘겨야 한다’는 규정에 걸려 구성이 무산됐다. 이후 이달 4일부터 재선거를 한 뒤 투표 기간과 시간까지 연장하면서 결국 최종 투표율 50.6%로 가까스로 구성됐다. 고려대 총학도 지난해 투표율 저조로 총학 선거가 무산되자 재선거를 하고서야 투표율이 커트라인을 통과한 경우다. 52.7%라는 투표율 역시 학교 측에서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병설 보건대 2, 3학년생 표를 제외하면 51.1%로 떨어진다. 서울시립대와 동국대의 경우 지난해 저조한 투표율로 총학 선거가 무산돼 총학 없이 1년을 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이념 추구든 현실적 공약이든 총학 선거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정치적 관심사와 개별 사안에 따라 ‘∼빠’, ‘∼안티’ 등의 형태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며 “자기 관심사에 따라 조직하고 어울리는 대학생들이 굳이 총학 조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학 학생회, 대안 찾기에 나섰지만…=이에 따라 아직 뚜렷한 지향점은 없지만 일부에서는 운동권도, 비운동권도 아닌 ‘제3의 대안’을 찾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2001년 이후 ‘명예혁명’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비운동권을 자처한 한양대의 경우 5년째 총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학 총학생회장인 신재웅(23) 씨는 “당초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 대항하며 비운동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운동권도 비운동권도 아니다”라며 “기존 학생회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봉사, 학내 복지 개선 활동 등이 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주요 요소”라고 설명했다.

 

-건국대 손석호(26) 총학 집행위원장은 “학생운동 1세대가 정치투쟁이 목적이었다면 2세대는 학내 문제에 집중했다”며 “이제 3세대 학생회는 학생들과 소통하고 학내 문제를 해결한 뒤 학생들과 관련된 정치 문제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 교수는 “투표율은 떨어지고 선거 형태도 다양해지는 것은 자기 계발, 개성을 형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요즘 학생들의 특성이 집단운동 형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소집단과 집단운동의 정체성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날씨도 궂은 날이지만, 대학가에서는 (오늘) 4.19 기념행사도 대거 취소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형편이라고(중간고사 기간과 겹치기 때문에!).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은 지난 17일부터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등록금 동결 등의 이슈르 내세우며 단식농성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런 게 대학가의 현실이다. 요는 정치와 정치참여 방식이 변화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으며, 예전과 같은 학생운동은 더이상 그러한 시대의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문학은 끝났다." 이건 오버가 아니다.

한국문학의 경우 4.19세대와 함께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어야 하지만, (일본과 달리) 얼마간 연장된 것은 학생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80년 광주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80년대 한국문학은 '위대한' 문학이다. 이건 그 문학의 퀄리티와는 다소 무관하다. 문학의 위대함은 문학성과 같은 내적 자질이나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외부'에 의해 규정된다. 시대가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시대는 위대한 문학을 요청한다. 이런 시대에는 문학에 '과부하'가 걸린다. 우리의 80년대가 그러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과부하'로부터 도망가는 문학까지도 위대함의 아우라를 나눠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문학시대'의 마지막 비평가라 할 고 김현(1942-1990)의 비평이 위대했다고 생각한다(그는 자신이 생의 마지막까지 4.19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요구에 복무하는 문학에 맞서 문학의 자율성을 끝까지 옹호하고자 했지만, 그러한 긴장관계 바깥의 '통속적인' 문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문학주의적 태도를 '식물성의 저항'으로 요약하고 있는 작가 이인성도 그의 문학적 성취와 무관하게 대단한 작가이다. '낯선 문학 속으로', '문학의 한없이 낮은 숨결', '마지막 문학의 상상' 등이 그가 문학시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운동으로서의 문학시대'에 고집스레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인성의 소설들이 맥이 풀리게 되는 것은 90년대 접어들면서 문학에 대한 시대적, 정치적 과부하가 더이상 걸리지 않게 되면서부터이다. '미쳐버리고 싶은' 시대, 하지만 '미쳐지지 않는' 시대에, 그의 문학은 그냥 '강 어귀에 섬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비되는 것이 80년대의 대표작가에서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가/조감독을 거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는 이창동이다. 그는 문학의 시대가 곧 물건너간다는 걸 예감했던 것일까?(최근의 사례로는 역시나 작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재중 감독 장률이 있다.)

 

 

 

 

고진에 따르면, 과거 네이션 형성에 기반이 되었던 근대소설은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해서,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소설을 쓰는 것보다 영화를 만드는 쪽이 빠르겠죠. 혹은 만화가 좋을 것입니다. 요컨대, 활자문화가 아니라, 시청각으로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쪽이 대중이 접근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라고 충고한다. 가령, 새로운 시대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젠 영화나 만화에서나 기대해볼 수 있다는 게 억측만은 아닌 것. 만화를 좀 아는 지인은 우라사와 나오키,  미우라 켄타로, 후루야 미노루 등을 내게 권했다(일찍이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공언한 바 있으니, 그는 소설의 언어로 만화를 그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만화의 시대인가?(물론 올해는 축구의 해이지만.)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의 문제가 문학이나 소설의 차원에서만 사고될 수 없으며, 그렇게 돼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문학이나 소설만을 생각하면 잘 이해되지 않으며 의미도 없습니다. 원래 근대라는 개념만 해도 매우 불명료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근대비판이나 포스트모던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더욱 불명료해질 뿐입니다. 이런 문제는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6쪽) 하지만, 그의 사고를 따라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분량상/시간상 '근대문학의 종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한다.

06. 0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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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아룬타티 로이나 김종철의 태도가 방관자의 태도(더러운 거 몸에 묻히고 싶지않은)처럼 보입니다. 문학이야말로 "협소"한 것들의 설왕설래는 아닌지... 김영하의 경우 오히려 저홀로 발랄해지려는 게 안쓰러울때도 있습니다. [검은꽃]은 그이의 "발광"이었다는 생각이...

로쟈 2006-04-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관자적 태도'라는 건 좀 모호한 표현 아닐까요? 두 사람 다 문학에 기대했던 사회적 역할이 막혀버리자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인 텐데요. 더불어, '협소한 것들의 설왕설래'라는 건 문학 이후의 문학 아닐까요? 역사적으로 문학이 대단했던 시대가 있었고(문학이 잘 나서가 아니라 다만 시대적 조건이 그러한 문학을 요구했었던 것이지만), 다만 그 시대가 이제는 '과거'라는 게 문학종말론의 요지입니다...

twoshot 2006-04-1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관자의 태도'가 모호한 표현이긴 합니다. 헌데 제가 보기에 아룬다티 로이나 김종철이나(저 '녹색문학'으로 가버린) 어째 '문학'을 떠나버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투철함'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정치적으로 저도 충분히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소함'들을 애써 '괄호'치려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었습니다.

로쟈 2006-04-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버린 사람'처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라도) 떠난 사람들 아닌가요? 그리고,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더불어 고진이 문제삼는 것은 문학의 사소화, 오락화이구요(그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twoshot 2006-04-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횡설수설한 김에 마저 적겠습니다. 문학의 종언이다...그렇다면 영화도 마찬가지..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대가 다시 오지않을 것 같은 것처럼 타르코프스키나 베리만의 시대도 끝났다..는 식의 표현은 그저 탄식이나 안타까움으로 충분하다는 거죠.고진이 "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하는데(여기서 제가 꼬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저 오만으로만 보입니다. 그 사람 한국말 할 줄아나요? 그럼 한국문학은? 한국문학에 대한 상찬은 그럼 그저 '주례사'였던건가요? 무슨 '종언'을 말할 게 아니라 누구처럼 꾸준히 '월평'을 쓰는게 더 생산적으로 보입니다.

yoonta 2006-04-19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학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2000년대 작가?는 바로 귀여니가 아닐까요? ..그의 글들을 보면 정말 저게 문학인지 일기장인지 혼동스럽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게 뭐냐면 문학이 죽었다면 그 이후에 나오는 글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근대)문학이 아니라면 그러한 (근대)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자기표현행위자체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죽었다"기 보다는 단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문학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변화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을 보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좀 오바스럽다는 생각이 드네요..비록 그가 문학종말론을 이야기함으로써 강조하고자하는 "시대의 변화"에 대해 상당부분 동의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앞으로 김영하나 하루키나 귀여니같은 작가들이 점점 더 늘고 문학의 주류로 자리잡는다고 하더라도 사르트르와 같은 글쓰기를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그처럼 사회적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더라도요.

p.s.아참 그리고 한가지 제안을 드리면 페이퍼를 읽을때 로쟈님 코멘트와 인용글이 혼동될때가 많거든요? 두가지를 글자체를 달리하던가 색을 바꿔서 써주시는게 어떨까요?..로쟈님글을 즐겨보는 애독자로서 종종느끼는 불편함이 있어 한번 말씀드려봅니다. ^^

로쟈 2006-04-1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다 문학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고 계시군요. 이미 철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인간의 종말까지 다 유행담론처럼 지나가 버린 상황에서 '문학의 종말' 정도 언급되는 게 기이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문학의 시대-영화의 시대-TV의 시대-멀티미디어 시대-모바일시대(?) 등으로 이행해가고 있다는 게 억지일까요? 보다 자세한 제 의견은 본문에서 개진하겠습니다.

yoonta님/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한데, 인용과 코멘트에 대한 제 구분은 (-)와 (*)입니다. 최소한의 구분이지만, 눈에는 띄게 해놓고 있습니다. 글에 칼라는 입히는 건 제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

그리고, "제가 궁금한게 뭐냐면 문학이 죽었다면 그 이후에 나오는 글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근대)문학이 아니라면 그러한 (근대)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자기표현행위자체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죽었다"기 보다는 단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라고 하신 건 고진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고진이 말하는 건 '정치운동으로서의 근대문학의 종언'일 뿐이니까. 덧붙이지면, 그 종언 이후의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이전의 후광을 자기것인 양 잘난 체하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니브리티 2006-04-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잘난체 하지 마라! 라고 말했다면 아마 하루키는 꼰대의 훈계 정도로 흘려버리지 싶네요.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진정성의 소비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요. 다만 그것이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제스처(이미 죽은 근대문학식 제스처vs쿨한 제스처)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지 둘 모두 '삶의 진정성'을 옹호하긴 마찬가지죠. 근데 그들이 옹호하는 '삶의 진정성'이라는 것이 사실 허구라면? 아니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이 사실은 발화와 동시에 소비되는 방식(그러나 문화적 축적과 성장이라는 생산적 소비양식으로서의 소비)일 뿐이라면... 말이죠.

니브리티 2006-04-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로쟈님 지인께서 권한 만화는 그 세계의 입문용으로 꽤 괜찮아 보이네요. 세 명 모두 일정정도의 꽤 큰 범위의 매니아를 거느리고 있죠. 요즘 저는 <충사>라는 만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기생수>나 <에덴>같은 중급고전들도 대단한 포스를 가지고 있죠. 만화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해요...^^

로쟈 2006-04-1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브리티님마저 무궁무진한 만화의 세계에 빠져계시다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냥 사실 확인 정도의 의미만 갖겠습니다(아무런 센세이션 없이).^^ 제가 고진에게 공감하는 것은 제스처나 진정성의 문제가 아닌 객관적 정세(=역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입니다. 저는 그게 고진의 파워라고 생각합니다.

사량 2006-04-19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플랭카드... 어이없네요. '탈이념'이란 게 몰상식, 몰염치, 무례 등등과 같은 뜻일까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요즘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요. 대학에서든 인터넷에서든 비아냥거릴 수 있는 자유도 사실 어느 날 하늘에서 문득 떨어졌던 게 아닌데 말입니다.

로쟈 2006-04-2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연대에 정치가 '현실'이었던 만큼 요즘의 反정치, 혹은 '다른 정치'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이 다른 것처럼...(그리고 플랜카드가 걸린 곳은 고대 같은데, 일부 총학 학생들의 점거농성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출교' 처분을 받았다고 뉴스에 크게 뜨는군요. 교권을 무시했다고.)

니브리티 2006-04-1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문학하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서사적 틀 안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영상매체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그렇지만 그 불안이 어떤 경로로 유포된 것인지는 뻔히 보이는 그런 것)과 불만 말이죠. 그런데 들뢰즈가 영화와 철학을 함께 펼쳐낼 때 저는 거기서 어떤 장르적 우위나 우월감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정말 고진이 정세판단을 했다면 문학의 종언이 아니라 근대의 종언이었겠죠. 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했었는데 거기서 배운 것이라곤 역사=진실이라는 등식의 허구였습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실망)과 주관적 보상을 넘어선, 진리라고만 말할 수 없는 어떤 근본에 대한 강력한 주장 같은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직 그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판단컨대 고진이 말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을 해 본적도 없는데 혁명의 시대가 가버렸다는 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것만큼이나, 제가 종언을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 저를 문학근본주의자로 이끌고 갈 수도 있고 그에 따라 끌려가고 싶기도 하는 욕망을, 또한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라고 써놓고보니 대책없는 낭만주의자로 보이는군용...ㅜ.ㅜ

로쟈 2006-04-20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빠를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브리핑'은 얼마간 축약하고 단순화시키니까요. 고진의 주장은 특정한 한 종류의 문학, 하지만 역사적 근대에 지배적이었던 그 문학이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므로, 문학 일반의 죽음과는 무관합니다. 물론 그때의 '문학'이 일반적으로는 '근대문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때의 종언은 애도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비관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문학이 해오던 것을 영화니 만화니 뭐니 하는 다른 영역, 다른 매체가 대신한다고 해서 크게 억울하거나 분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물론 그때도 어떤 영화인가, 만화인가가 문제가 되겠죠. '통속적인' 영화/만화를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영화하는 친구들의 오해처럼). '늙으면 죽어야지'란 속된 표현도 있는데, 현장에선 뛰기엔 (근대)문학은 충분히 늙었습니다. 지금 교태를 부리며 번성하는 건 다른 문학이죠. 아직 '잔영'으로 일부 남아있는 근대문학, 즉 '정치'나 '종교'로서의 문학을 약간 빼면...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고진이 말하는 근대문학은 '문학은 위대하다' '문학은 전부다'라고 말할 때의 그 문학입니다. 요즘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뭐 별거나' 아니면, '고게 좀 재미있네, 귀엽네' 수준이죠. 후자를 전자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waits 2006-04-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려워라. 저는 조용히 추천하고 퍼갑니다. 늘 감사해요...^^;;

2020-04-18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0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울 클레의 전시회 소식을 접하고 주최기관인 소마미술관의 보도자료를 옮겨오려고 했으나, 오마이뉴스에 더 잘 정리된 기사가 있기에 그걸 대신 가져온다. 작성자는 김형순 기자이며 나는 기사에 따로 손대지 않았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지의 논리>와 관련하여), 나의 관심은 소쉬르의 언어학과 그와 동시대인인 클레의 방법론 사이의 유사성, 혹은 상관성에 놓여 있다(매개가 되는 것은 음악, 음악적 컴포지션이다). 그럴 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컴포지션 추상화들이다. 아무려나 국내에서는 최초의 전시회라고 하니까 언제 시간을 좀 내야겠다. 아래는 소마미술관이 내건 간략한 작가 소개이고(강조는 나의 것), 바로 이어지는 것이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환상적이고, 재치 있으면서, 때로는 괴기스럽기도 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 파울 클레(1879-1940)는 현대 미술가 중에서도 가장 지적이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 스위스 베른 근처에 있는 뮌헨부흐제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화가였으며, 1920년대에는 독일의 조형미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하였고, 철학, 식물학, 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화가에게도 '폭넓은 독서'는 필수적이다). 그에게 있어 풍부한 이미지의 원천은 자연이었다. 그는 바다나 산, 들을 찾았고 조개껍질, 식물, 꽃, 나무 등을 관찰했다. 또 캔버스뿐 아니라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유화, 템페라, 수채, 과슈, 동판, 드로잉 등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했다.

-클레의 작품은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완전히 형상적이지도 않다. 그의 작품은 고도로 숙련된 드로잉 기법을 보여주는 한편, 색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소품들로, 기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심원한 지성으로 파악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읽고,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원초적인 상징과 형태를 창조해냈다. 그의 미술은 시, 음악, 그리고 꿈에 가까우며, 한눈에 들어오는 미술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게 하는 미술이다. 마치 하나하나가 작은 보석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무려 9,100여 점에 달하는 클레의 작품들은 몇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하고 다면적인 미술세계를 이룬다.

 
▲ 올림픽공원 옆 미술관, 마치 영화 제목 같다. 현대적 건축물이 조각 공원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뒤로 움직이는 백남준 작품 '쿠베르탱'이 자리 잡고 있다.
ⓒ 김형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미술관이 이름을 바꾸고 새로 단장한 '소마(SOMA)미술관'에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동화적 환상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형태와 색채를 표현한 20세기 미술의 거장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눈으로 마음으로' 전이 오는 7월2일까지 국내에서 처음으로 판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약 60점을 선보이며 열린다.

 
 
  파울 클레(Paul Klee) 생애 및 프로필  
 
 
 
▲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여념이 없는 파울 클레
1879 12.18 스위스 뮌헨부흐제 출생
1898 뮌헨 이사.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
1906 릴리 슈툼프와 결혼
1910 첫 전시회 56점(베른, 취리히, 바젤 미술관)
1912 F. 마르크, W.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 그룹전' 참가
1914 마케 등 친구들과 튀니지 여행
1920 '클레 회고전'에 362점 출품(골츠 갤러리)
1921 '바우하우스'에서 강의 시작
1925 '바우하우스' 데사우로 이전
1929 '탄생 50주년전'(뉴욕 근대미술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1931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
1933 나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해고
1935 희귀병인 진행성 피부경색증 발병으로 다작 시도
1937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0여점 압류
1938 스위스 시민권 획득
1940 6.29 스위스에서 사망
 
 
파울 클레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미술 교과서에서 많이 봐왔지만 뚜렷한 대표작이 연상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본질을 추구했는지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요소와 함께 시적 상징성과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그림 속에서 잘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Münchenbuchsee) 음악가 집안에서 1879년 12월 18일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클레는 성악가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음악 교사가 된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프리크도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후에 결혼한 릴리 슈툼프도 피아노 교수였다.

그는 이렇게 음악의 한복판에서 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미술을 택했다. '그림 한 점에 대하소설이 담겨 있다'든가 '예술의 꽃은 단연 미술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결국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과 경험을 미술 안에서 통합시켰다.

그의 작품이 조금 괴기하고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선묘와 추상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서정적 분위기 연출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적 요소가 공상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로 승화되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리라.

 
▲ '미래의 남자(1933, 좌)', '비탄에 빠짐(1934)' 클레 작품은 독특한 선묘와 구도와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람객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갖가지 구도와 색채 실험

클레는 평생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쓸 정도로 성실했고 지적 호기심을 불태우는 학생처럼 살았다. 철학, 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은 독서와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과 바다, 꽃과 나무와 물고기 등 주변의 사물을 예의 관찰하였고 그 속에서 풍부한 이미지를 발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해부학에서 푸생이나 다비드, 밀레 등 고전주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탐구했다.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 이면에 인간의 번뇌를 표현한 고흐, 현대 회화를 연 세잔, 야수파의 선각자 마티스, 북유럽의 표현파 특히 입체파를 한 단계 끌어올려 오르피즘의 창시한 들로네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별들과 함께(1923)' 판지 위에 종이에 연필과 수채. 클레의 9천여 점 작품이 다 천차만별이지만 이 작품도 이채롭다. 엷고 진한 색채 간 대조와 어린이처럼 장난기 넘치는 해학과 유머가 돋보인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그림 재료도 캔버스,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복합 매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안료로는 유화는 물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인 구아슈, 동판, 드로잉, 그리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템페라 물감까지도 두루 시도했다.

무려 9146점에 달하는 작품은 제작한 클레는 사물의 원리를 다각도로 실험하고 검사하는 과학자 같은 작가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 하나도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르게 그린 것 같다. 그는 이런 각고 끝에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미술의 공간성 실험이나 시각적 확대, 현대적 조형성을 창조하여 20세기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다.

클레는 1912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및 프란츠 마르크와 알게 되어 상호 교류했으며 그들의 전위파 그룹인 '청기사파(Blaue Reiter)' 전시회도 참가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쾰른, 베를린 등 유명 사립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언덕(1914, 하좌)', '색채 띠에 연결된 추상적 색채의 수채(1914, 하중)', '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1916, 상좌)' 글씨를 채색화로 형상화한 작품, '여러 층의 작은 구조물(1928, 우)' 튀니지 여행 후 채색의 확연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파울클레미술관
ⓒ 김형순
 
2년 후 30대 중반이 된 클레는 겨우 12일간 짧은 여행이었지만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와 동료 화가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지중해 해안의 이글거리는 색이 주는 눈부신 광채에 반해 버렸다.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는 더 강력한 추상적 화풍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극과 극이 통하나 보다. 아프리카의 가장 원시적 색채와 미술이 서구의 가장 전위적 미술의 원형이 된 것이다. 하긴 피카소나 마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첨단 미술을 대표하는 입체파나 야수파도 결국은 아프리카 부족의 원시 조각이나 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수염이 있는(1939 좌)', '빛에 비추어진 나뭇잎(1929)' 두 작품이 10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상에서 보다 확대된 추상으로 변모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추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미술 개념에 더 가까우리라.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보이지 않는 색채와 소리까지 그리기

이는 이번 전시회 부제인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냥 '눈으로 보는 관점'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는 점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층 전시실에 붙어 있는 클레의 명구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말과 전시 표제어는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해석을 이 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박윤정씨에게 부탁드렸더니 그는 "그림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심상의 표현"이라는 명쾌하고 멋진 해석을 내놓았다. 클레다운 이 명구에 전문가다운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듣고 보니 이런 말이 떠오른다. "현대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도 그리는 것이다."

 
▲ '피라미드(1932)' 판지 위에 종이에 펜과 수채.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작품으로 선과 면, 형태와 색채만으로 조형 효과를 최대화했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위에 '피라미드(1932)'를 보게 되면 사람의 이목구비가 약간 보일 정도로 완전한 추상화는 아니지만, 이목구비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선과 면이나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형태 그리고 여러 밝기의 붉은 색, 고동색 등 색채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런 것이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미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나치 박해와 불치병과 투쟁

한편 40대에 들어선 클레는 '바우하우스' 조형예술 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힘쓴다. 당시 그의 별명은 '바우하우스 부처'였다고 하니 그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구도자적이었을 거라는 추리해 볼 수 있다. 이 학교가 바이마르 공화국 언론과 당시 따가운 여론에 밀려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1931년 대학을 뒤셀도르프로 옮겼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아 1933년엔 나치에 의해 해임된다. 게다가 1937년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2여점 자신의 작품이 압류하는 등 나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라 말을 남기고 스위스로 귀화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가장 잔인한 한 시대의 생생한 증언자가 되었다.

 
▲ '눈(1938)' 삼베에 파스텔. 캔버스 대신에 삼베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이렇게 그림 재료에서도 두루 다각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눈으로 보이는 것을, 다른 한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1938년 작 '눈'이라는 작품은 당시 분위기를 풍긴다. '한눈으로 보고 다른 눈으로 느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라'라는 메시지도 포함된 것 같다. 제작 연도로 봐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로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것 같다.

클레는 말년에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희귀병인 피부경색증를 보이자 반대급부인지는 몰라도 놀라운 정도로 많은 작품을 쏟아 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초기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묘와 다르게 병마로 손길이 무뎌지면서 선과 면이 단순해지고 굵어졌지만 원숙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으로 넘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담은 듯하다.

 
▲ '밤의 암탉(1939)' 작고 1년 전 작품으로 검붉은 바탕에 굵고 검은 선이 더욱 완숙해 보인다. 작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도 감지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구상적 요소를 해체하여 추상적 바탕에 담았다. 추상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클레 그림은 때론 추상 화가답지 않게 고전적 느낌을 준다는 지적도 받는데, 이는 그가 미술과 음악, 추상과 구상, 서구적 미술과 비서구적 미술, 천진난만함과 괴기함,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서정 등 경계를 넘나들며 퓨전적 요소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클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나중에 배워야 하는 작가라고 이 미술관 큐레이터 박윤정씨는 귀띔해 준다.

 
▲ '소문(1939)' 판지 위에 페이스트에 유채. 극도로 단순화한 형상과 구도를 띠고 있으며 돌고 도는 소문처럼 아래 작은 바퀴처럼 인생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사화복을 초월하여 말년의 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 김형순
 
한국 작가 중 그의 영감을 많이 받은 분이 장욱진 화백이 아닌가 싶다. 새와 나무가 많이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만나는 넉넉하고 한가로운 마음과 우화적이고 해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장욱진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반추상이긴 하나 도교 풍의 한국판 클레 같다.

클레의 '보이게 하는 그림'과 장욱진의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 동서를 넘어서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니 클레가 먼 나라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06. 04. 18.

 

 

 

  


P.S. 오래전에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던 장욱진 전시회가 기억난다. 관련서와 기념품을 샀던 기억도. 그리고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기억도. 10년도 더 된 기억 같다. '도쿄풍의 한국판 클레'라... 그러고 보니, 닮은 점도 없지 않다. 한데, 클레도 자기 가족의 그림을 그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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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4-1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욱진 전시회 기념 도록과 슬라이드 필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 님과 제가 같은 공간에 있었겠군요.
아참, 클레 이 화가를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는 강금실씨가 좋아한다죠? 아마두.
일단 퍼가요

로쟈 2006-04-1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었다니 뒤늦게 영광입니다.^^

비자림 2006-07-1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울 클레의 그림을 좋아해요. 살짝 얻어 가서 찬찬히 다시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최근일자 교수신문(06 04. 12)의 해외동향란에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전성시대에 관한 특파원 보고가 실렸길래 여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빌레펠트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정광진 통신원이다. 루만은 흔히 20세기 후반의 독일 사회학을 하버마스와 양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국내에서의 번역/소개는 그 지명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소략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그의 주저들이 소개되기를 기대한다(개인적인 관심은 그의 예술체계론이다.)  

-바야흐로 ‘루만의 전성시대’다. 니클라스 루만(1928~1998)은 생전에 6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와 30여년에 걸쳐 쌓아올린 체계이론으로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의 대표 사회이론가로 명성을 누렸지만, 체계이론에 기초한 사회학 연구는 타계후 더 화려하게 만개하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한 반향을 최근 출간된 서적과 논문으로 살피면 크게 다섯 줄기로 볼 수 있다. 우선 루만의 유고출간이다. 10여권 정도 나왔는데, 최근 것으론 <교육학 논문집>(2004)과 강의녹취록인 <사회이론입문>(2005)이 있다. 둘째, 이론 소개서들이다. ‘체계이론 입문서 시장’이라 할 정도로 루만이론을 쉽게 소개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삽화와 도식을 곁들인 <쉽게 이해하는 루만>(2003)이 인기다. 셋째, 루만이론의 각론을 다른 학문·이론과 비교하는 것이다. 가령 루만의 정치이론에 관해 지난 3년간 발간된 연구서만 6권에 달한다. 넷째, 체계이론 자체를 발전시킨 연구들이다.

-루만은 ‘루만학파’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한명의 체계이론가로 여겼던 것. 제자그룹이 있긴 하나 루만을 교조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계이론을 심화·발전시키고 있다. 대표주자로 D. 배커, R. 슈티히베, P. 푹스, A. 나세히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루만과 다른 접근법으로 혹은 그가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연구서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끝으로, 구체적 사회학 연구에 체계이론을 적용시키는 경우다. 이에 해당하는 문헌은 워낙 다양한데, 특기할만한 점은 경험적 연구의 부재라는 체계이론에 대한 대표적 비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만한 연구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는 대부분 ‘조직’이나 ‘상호작용’을 분석단위로 삼고 해석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루만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이론없이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하는 경험적 사회학과 고전의 뼈다귀만을 갉아먹고 있는 이론사회학 모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에 필생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 이론을 세우는 것으로 삼았다.

-루만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체계이론은 어느때보다 정교해졌지만 경험적 연구와 친화성을 갖추는 일은 여전히 중요과제로 남아있다. 이를 해결 못한다면 루만의 전성시대는 체계이론가들만의 파티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밖에 체계이론가들은 독립된 논의의 지면도 확보하고 있는데, 체계이론적 사회 이론지를 표방하며 1995년 창간된 ‘Soziale Systeme’가 그것이다. 현재 편집장은 스위스 루체른 대학의 루돌프 슈티히베 교수가 맡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도 체계이론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체계이론 전성시대의 도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시 사회이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사회학도들을 끌어당기는 루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체계이론이 ‘세계사회’에서 ‘조직’, ‘상호작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현상을 하나의 이론틀로 설명하려는 드문 ‘슈퍼이론’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연구전통에서 오랫동안 사회는 국가와 동일시됐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심화된 지구화는 이러한 사회학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이에 대한 사회학의 반응은 지구화를 하나의 현상으로 기술하거나, 조직, 네트워크 등 더 미시적인 차원에 시야를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만은 이미 1971년에 발표한 ‘세계사회’라는 논문에서 국가는 정치체계의 자기서술일 뿐이고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에는 유일한 하나의 ‘세계사회’가 있을 뿐이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기능적 분화, 지역적 분화, 사회, 조직 등 다양한 차원의 체계와 그들 간의 관계를 하나의 이론틀 안에서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시도가 매끄럽게 진행된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야심찬 기획임엔 틀림없다.

-또 다른 이유로 체계이론의 개방성을 들 수 있다. 체계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존 사회학도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하기로 악명높다. 하지만 일단 그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복잡한 개념들의 연결고리를 찾기만 하면 쉽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 있기도 하다. 체계이론은 루만에 의해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에 대한 이론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괴로운 정독의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또한 독일어를 모르면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극히 일부만 번역됐기 때문.

-외국인의 경우 설령 독일어를 익혔더라도 루만이 전제하고 있는 철학적, 사회과학적 전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하려면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제약 때문에 체계이론이 갖는 장점에도 불구, 비독일어권에서 루만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예측하기는 힘들다.(*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루만의 전성시대는 기대하기 어렵겠다.) 

-한국에서도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해 소개된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최근 연구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루만의 저서 두 권과 한 권의 입문서가 번역됐을 따름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올 상반기에 루만의 주저로 꼽히는 <사회체계>(1984)가 박여성 제주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그것이 루만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가장 반가운 소식이면서 한편으론 두려운 소식이다. 그 방대한 분량을 고려한다면 책값은 얼마나?)  루만과 체계이론 소개를 또 다른 서구 이론의 ‘수입’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문닫아 걸고 한국어로만 학문할 수는 없는 이상 말이다. 그 보다는 한국 학문 생태계의 건강 유지와 자생력을 키워나가기 위한 ‘이론 다양성’의 자원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편식은 건강에 해롭지 않은가.

06.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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