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인류학자들이 쓴 책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가 부제. 흔히 '적자생존'의 뜻을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로 해석하는데, 저자들에 따르면 타당하지 않다(진화인류학의 최근 경향으로도 보인다). 
















"늑대는 멸종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개는 어떻게 개체 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을까? 사나운 침팬지보다 다정한 보노보가 더 성공적으로 번식할 수 있던 이유는? 신체적으로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끝까지 생존한 까닭은? ‘21세기 다윈의 계승자’인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이에 대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며 최후의 생존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자였다고 말하는 한편, 친화력의 이면에 있는 외집단을 향한 혐오와 비인간화 경향도 포착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 또한 교류와 협력이 기반이 된 친화력이다. 우리 종은 더 많은 적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친구를 만듦으로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두 저자의 공저로는 <개의 천재성>(2013)도 있는데, 애견가들이 늘어난 상황이라 소개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따로 소개했단 <우정의 과학>이다. 역시나 지난해에 나온 책으로 유대의 기원과 진화를 다룬다.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도 주제적으로 같이 묶을 수 있는 책. 안 그대로 강의차 읽고 있는 책이다. 브레흐만의 앞서 소개되었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도 생각나서 찾는 중이다...
















P.S. 책의 추천사는 최재천 교수가 쓰고 있는데(<휴먼카인드>의 추천사도), 최 교수의 책으로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샘터)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다윈의 저작 가운데서는 특히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참고할 채. <휴먼카인드>가 다시 떠올려준 책인데,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도 재난 상황에서 피어난 공동체적 우정을 탐사하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 필요한 성찰을 담은 책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의 부제는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다. 비관적인 뉴스에 너무 취약한 우리의 본성을 고려하면, 뉴스를 멀리하는 것도 희망 찾기의 방책이겠다(게다가 제대로 된 뉴스가 드물어진 지 오래되었기도 하고). 저자가 인용한 스위스 소설가의 말. ˝뉴스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설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우리 인간은 왜 그렇게 비관적인 뉴스에 취약한 것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심리학자들이 부정편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우리의관심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많이 이끌린다. 과거 인류가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절, 거미나 뱀을 보고 너무 자주 겁을 먹는 편이 아주 드물게 무서워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두려워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등에 가용성 편향이라는 짐도 지워져 있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그것이 흔하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우리가 매일 끔찍한 뉴스에 폭격을 당하는 탓에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왜곡된다. 대형 항공사고, 어린이 납치, 참수형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똬리를 트는 경향이 있다.
레바논의 통계학자 나심 탈레브Nassin Taleb가 냉담하게 지적했듯이 "우리는 뉴스에 노출되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그녀는 이듬해에 죽었다

2년 전에 쓴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의 서문에서 지젝이 팬데믹 속 삶의 노래로 제시하는 것은 독일 헤비메탈 밴드 람슈타인의 ‘달라이 라마‘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깨닫고 얼마나 우리의 삶이 (우리 눈에 보이기로는) 여러 우연들의 알 수 없는 상호작용에 좌우되는지 알게 된 지금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태도를 적절한 자세로 취해야 할 때이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람슈타인의 노래는이 교착 상태로부터 벗어날 출구를 그려준다. 삶으로부터 물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팬데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위험을 충분히 알면서도 매일같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있는 많은 의료 노동자보다 지금 더 살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의 위선적인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벌거벗은 삶에 내몰린 생존 기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타르코프스키(1)

16년 전에 옮겨놓았던 지젝의 타르콥스키론(의 일부)이다. <봉인된 시간>(<시간의 각인>)이 다시 나온 김에, 타르콥스키 자료를 정비하고 있다(십수권은 된다). 여차하면 하반기에 강의로도 진행할까 생각중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07-28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