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겠다고 했는데, 좀 늦어졌다. 분야를 약간 조정하고 좀더 자유롭게 고르려고 한다. 책이 너무 많으니 목록을 줄여보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나 어차피 골라서 읽는 거라면 읽을 만한 책 '후보'로 생각해도 되겠다.

 

 

1. 문학예술 

 

아무래도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관심을 쏠릴 듯하다. 이미 상당수 작품이 번역돼 있고 몇 권은 추가적으로 더 나온다고 하니까 독서 목록은 충분하다. 대표작으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0)이 꼽히는 모양인데, 1978년 공쿠르상 수장작이니까 그럴 만하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작품은 그보다 한 해 전에 나온 <가족수첩>(1977)인데,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문장사, 1978)라고 나왔었다. 그게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세계사, 1991)이라고 재출간됐고, 내가 읽은 것도 그 책이다. 읽었다곤 하지만 역자 해설만 기억이 난다. <프랑스문학 산책>(세계사, 1989)에서 저자 김화영 교수는 동시대 프랑스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르 클레지오, 미셸 투르니에와 함께 파트릭 모디아노를 꼽았었다. 그 중 벌써 두 작가가 노벨상 수상작가가 된 셈인데,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편애'라고 하면 억지일까. 그럼에도 물론 '이변'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결과다. 10년 전, 2004년에 옐리네크가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의 '파격'에 비하면 아주 조신해보이기까지 한다. 아무튼 결과는 나왔고 한두 권 읽어보는 걸로 '의례'를 갈음해도 좋을 듯. 그러다 작가의 매력에 뒤늦게 빠진다면 한 계절을 축내고 어쩔 수 없겠고.  

 

 

예술분야에선 미술사 관련서 세 권을 골랐다.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의 <예술적 원숭이>(시그마북스, 2014)는 '300만 년에 걸친 미술 진화사'가 부제. 초기작이 이제 번역됐나 했더니 2013년작이다(초기에 유인원들의 그림에 대한 책을 펴냈던 걸로 기억한다). "<털없는 원숭이>로 유명한 동물학자이자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초현실주의 화가로 직접 작품활동을 펼쳐온 데즈먼드 모리스는 우리 인류의 비범한 진화 이야기를 통해 예술이 사소하고 평범하게 시작하여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시각 미술을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알에이치코리아, 2014)는 '천재 예술가들의 크리에이티브 경쟁'이 부제. 저자는 세계적인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역임했고, 그런 경력을 바탕으로 "19세기 인상파 작품들에서 시작된 현대미술 태동기부터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깡통」, 데이미언 허스트의 「상어」로 이어지는 동시대미술을 아우르며, 걸작에 숨은 이야기들을 예술가들의 눈과 입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토비 레스터의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 인간을 그리다>(뿌리와이파리, 2014)는 '인체비례도에 얽힌 2000년 서양문화 이야기'다. 원과 정사각형 안에 사내가 팔다리를 내뻗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비트루비우스 인간'이다. 저자는 "그 상징적 그림에 담긴 비밀을 풀고 미술과 사상의 역사를 솜씨 좋게 엮어낸다."

 

 

 

2. 인문학

 

네덜란드 만화가 마르흐레이트 데 헤이르의 시리즈를 고른다. <과학이 된 무모한 도전들><철학이 된 엉뚱한 생각들>, 그리고 <종교가 된 사적인 고민들>(원더박스, 2014). 좀 가벼운 느낌의 책을 고른 건 사회과학 분야에서 무거운 책을 골라서다.

 

 

3. 사회과학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이다. 주변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도 골라놓는다. '올해의 책'으로도 가장 강력한 후보이기에 군말은 적지 않는다.

 

 

4. 과학 

 

과학쪽은 뇌과학 분야의 책 세 권을 골랐다. 모든 이전에 한번씩 언급했던 책들이라 별도의 언급은 피한다. 에릭 캔델의 <통찰의 시대>(알에이치코리아, 2014)와 크리스토퍼 코흐의 <의식>(알마, 2014), 그리고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스티브 다얀의 <우리는 꼬리치기 위해 탄생했다>(위즈덤하우스, 2014) 등이다.

 

 

5. 글쓰기

 

글쓰기나 책읽기 분야의 책들을 매달 돌아가면서 고르려고 한다. 이달에는 문장 교정에 지침서가 될 만한 책으로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 2014)와 <고종석의 문장1,2>(알마, 2014) 두 권을 고른다(<고종석의 문장>은 한번 '이달의 읽은 만한 책'으로 고른 적이 있다). 저자의 이름이 제목에 박힌 것 자체가 책에 대한 신뢰를 암시한다. 자신이 쓰는 문장에 대한 '마사지 효과'를 경험해보시길.

 

14. 10. 11.

 

 

P.S.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고른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무리한 일이기에 자본론 읽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 세 권을 고른다. 최근에 나란히 출간됐는데,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돌베개, 2014),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길, 2014), 그리고 중국학자 양자오의 <자본론을 읽다>(유유, 2014)가 그 세 권이다. 가이드를 셋이나 두면 여정이 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확한 길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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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친숙한 주제이지만, 민족주의를 다룬 묵직한 연구서가 출간되었기에 '이주의 묵직한 발견'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서양사학자 김인중 교수의 <민족주의와 역사>(아카넷, 2014). '겔너와 스미스'가 부제인데, 민족주의 연구의 거목으로서 어니스트 겔너와 앤서니 스미스를 집중 조명하고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한스 콘 같은 학자는 이제 지나간 이름이 되었나 보다).

 

 

저자는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 2013) 등의 굵직한 저서들을 공역했고, 민족주의 관련서로는 브라이언 젠킨스의 <프랑스 민족주의>(나남, 2011)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랑스 민족주의>의 부제는 '1789년 이후의 계급과 민족'인데, 홉스봄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창비, 1998)를 떠올려준다. 1780년대가 중요한 분기점이란 걸 시사한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연구자로 언급되고 있지만 어니스트 겔너의 책은 <쟁기, 칼, 책>(삼천리, 2013)만 소개된 터이고 <민족과 민족주의> 같은 주저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앤서니 스미스 같은 경우는 사정이 나아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용의숲, 2012)가 번역돼 있다(<국제화 시대의 민족과 민족주의>(명경, 1996)도 번역됐었지만 절판된 지 오래다).

 

 

저자는 앤서니 스미스의 저작들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검토하고 있는데, 주요 저작들 가운데 특히 <민족들의 족류공동체적 기원>(1986)을 자세히 다룬다. 현단계 민족주의 연구를 대표할 만한 저작이라면 소개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켜줄 만한 노작이 나온 듯싶어 반갑다...

 

1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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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국내 저자로만 골랐는데, 먼저 <한국사 이야기(전22권)>(한길사)의 저자,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신간으로 <허균의 생각>(교유서가, 2014)가 출간됐다.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 2011) 이후 단행본으로는 <처음 만나는 우리문화>(김영사, 2012) 다음인 듯싶다. 허균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은데, 이이화판 허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역사학자 이이화의 첫 책으로 초판 출간 당시 독서계에 ‘허균’ 바람을 일으켰던 위험한 책 <허균의 생각>이 수정·보완을 거쳐 새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에는 허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그의 글을 추가로 풍부하게 실었다. 이 책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역모죄에 얽혀 능지처참에 처해졌던 허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

찾아보니 초판이 나온 건 1980년이고 한때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으며 두 차례 수정판이 나온 바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기존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허균의 저작을 더 많이 예시하여 독자들의 감상과 평가를 유도하려" 해고 "그의 고발정신과 저항정신, 그리고 열렬한 개혁의지와 냉철한 현실인식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허균에 관해서는 전기소설로 이병주의 <허균>(나남, 2014)과 김탁환의 <허균, 최후의 19일>(민음사, 2009)를 들 수 있고, 국문학자 허경진 교수의 <허균 평전>(돌베개, 2002)과 <청소년 위한 허균 산문집 홍길동전>(서해문집, 2013), 그리고 김풍기 교수의 <독서광 허균>(그물, 2013) 등이 같이 참고할 만한 책들이다.

 

 

이어서 얼마전 핫이슈를 몰고 오기도 했던 법학자 이상돈 교수. 주로 미국의 외교와 국제정세에 관한 외서들을 읽고 적은 서평집으로 <공부하는 보수>(책세상, 2014)가 출간됐다(나온 지는 두어 주 된 듯싶다). 제목에 걸맞게 저자의 공부 내공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한데, 말 그대로 읽어볼 만한 책들의 가이드북 역할에 충실하다.

‘합리적 보수’ ‘열린 보수’로 평가받는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세계의 정치·경제·사회·외교·군사 분야의 미번역 영어 저작들을 읽고 분석하고 우리 현실에 대입하며 공부해왔다. 이 책은 그렇게 읽은 100권의 영어 책에 대한 서평집이자 공부 일기이자 세상 읽기의 결실이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에서 출간된 서구 보수 지식인들의 일급 저서 100권을 골라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예측하는지 소개하고,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저자의 다른 책으론 '보수적 자유주의자 이상돈 교수의 3년여간에 걸친 MB 정책 비판 보고서'로 나온 <조용한 혁명>(뷰스, 2011)과 <비판적 환경주의자>(브레인북스, 2006) 등이 눈길을 끄는데, MB정부의 4대강 사업을 가장 앞장 서서 비판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다른 쟁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지만 '反MB' 전선의 대오에서는 같은 편에 설 수 있겠다. 그게 '최소한의 양심적 보수' 아닐까. 가치가 아닌 돈에 편에 선 '사이비 보수'를 걸러내는 보수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미술사학자 최완수 선생. <겸재 정선(전3권)>(현암사, 2009)을 펴낸 데 이어서(겸재에 대한 다른 책으론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겸재의 한양진경> 등이 있다) 이번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을 옮긴 <추사집>(현암사, 2014)을 펴냈다(<추사 평전>도 근간 예정이다). 이 역시 38년 전에 나온 책의 복간본인데, "그동안 수정을 거듭해왔던 <추사집>의 번역문과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는 작업에 돌입하여 아쉬운 부분들을 과감하게 바로잡아 나갔다. 주석(註)의 도움 없이 이해가 어려운 내용은 더욱 보충했다" 한다.

 

 

절판된 책이긴 하나 추사에 관한 책으론 한승원의 장편소설 <추사>(열림원, 2007)이 있으며,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설흔의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위즈덤하우스, 2013)가 '삶.사람.사물을 대하는 김정희의 지혜'를 전해주는 책이다...

 

1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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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발표된 대로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돌아갔다. 정확히 60년전,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굳이 6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 건 그의 1937년작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소담출판사, 2014)가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다.

 

 

1926년에 나온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보다 조금 먼저 나온 <봄의 급류>를 첫 장편으로 치면 네번째 장편소설에 해당한다. 세번째 장편 <무기여 잘 있거라>로 작가적 명성을 확고히 한 시기에 기대를 모은 작품이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통상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 이후 10년만에 발표한 <강건너 숲속으로>(1950)과 함께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분류된다(헤밍웨이 전집이 아닌 선집이라면 보통 누락되는 작품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당시 유행된 사회소설을 지향한 것이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사회소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식의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로선 실패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헤밍웨이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리라 기대를 갖게 하는 작품. 그래서 절판된 <가진 자와 안 가진 자>(덕성문화사, 1988)를 구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띠지에는 '국내 최초 출간'이라는 문구도 들어 있지만, 과거 1970년대에 나온 헤밍웨이 전집에는 <빈부>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80년대 단행본으론 <가진 자와 안 가진 자>란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니 사실이 아니다.

 

 

덧붙여 흥미를 끄는 점은 영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1944). <소유와 무소유>란 제목으로도 출시돼 있는데, 거장 하워드 혹스가 메가폰을 잡았고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이 주연을 맡았다. 그것만으로도 화려하지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윌리엄 포크너가 공동각본을 썼다는 점. 이미 걸작들을 써내던 시절이었지만 포크너는 자신의 소설들이 팔리지 않자 생계를 위해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윤색하는 일을 했었는데(주로 대사를 다듬었다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은 그의 손길이 더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헤밍웨이의 원작이 많이 수정됐다고 하니까 그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다.   

 

여하튼 이런 이유들로 새 번역본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환영하는 뜻의 페이퍼를 적는 이유다...

 

1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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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라 시스템 점검을 하는지 도서 정보가 제대로 뜨지 않아 불편한 대로 '이주의 고전'을 골라놓는다.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의 <해체신서>(한길사, 2014). 서양 근대해부학을 일본에, 그리고 동아시아에 처음 소개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궁금하던 차에 마침 번역돼 나온 것. 알라딘에는 아무런 책 소개가 없어서 교수신문의 리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686)에서 일부 발췌한다.  

 

<해체신서>는 원래 독일의 쿨무스(1685~1745)가 1722년 펴낸 <해부도표>의 네덜란드어 출판본을 스기타 겐파쿠 등이 일본어(한문)로 다시 번역해 1774년에 출간한 해부서다. 쿨무스의 책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출간됐는데, 설명과 도판이 해부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집약적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성수 서울대 교수(한국의학사)에 의하면, <해체신서>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서양 근대 해부학이 동아시아에 널리 소개됐을 뿐 아니라, 특히 일본으로서는 번역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대규모로 받아들이는 한 시대의 문화적 태도, 즉 난학이라 불리는 학문적 풍토가 다져지게 됐다.

이미 전반적인 소개는 이종각의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를 참고할 수 있다.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도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을 주제로 한 책. 서양 해부학의 수용을 계기로 일본 근대화의 바탕이 마련되었다면,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역시나 교수신문에서 발췌한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19세기 전반부를 조선에서 살았던 李圭景(1788~?)은 전60권에 이르는 백과전서적인 <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한 지식인이다. 그는 인간의 몸, 신체의 형태와 기능 그리고 작동하는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그는 성리학적 학문방법인 격물과 궁리의 시작은 天理가 아니라 내 몸이며, 거대담론보다 내 몸에 대해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하늘이나 하늘의 법칙과 따로 떼어내 상정하지 않는 이상, 이것만으로는 근대적 학문방법과 통한다고 보기 어렵다.


옮긴이에 의하면, 무엇보다 이규경이 지녔던 명백한 한계는 그가 볼 수 있었던 서양의 서적이, 한역된 洋書인 탕약망(Adam Schall)의 <주제군징>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이었다. 갈레노스로 대표되는 서양 중세의 의학론을 담고 있는 <주제군징>은 이미 시간이 무척이나 지난 과거의 지식만을 제공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의학·천문·군사 등의 기술학 관련서적을 원전으로 보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상관에서 일하는 역관이 서양학문의 전수를 주도했다. <해체신서>야말로 서양의학서를 원전으로 접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주요 사례였다. 최신의 서양학문을 자국어로 번역해 수용하는 것은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시도였다.

여하튼 근대와 근대화의 기원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한번쯤 씨름해봐야 하는 주제이고 책이다. 개인적인 궁금증. 근대 학문의 표본이 해부학이었다면, 소위 탈근대 학문의 모델은 무엇일까. 무엇이 근대 이후로 우리를 데려가는가. 혹은 몰고 가는가?..   

 

14.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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