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읽기 위해 아껴두었다가 들고 온 책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다. 이번 체코문학기행의 핵심작가가 카프카와 쿤데라, 그리고 3인어서(물론 짧은 일정에서 다루기에 적은 수는 아니다) 불가불 다른 작가들이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으론 흐라발이 그렇다(하셰크와 클리마가 뒤를 잇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작품이 번역돼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여야 한다는 점.

카프카와 쿤데라는 전집까지 나와있고, 차페크는 주요작이 거의 번역되었다. 하지만 쿤데라 세대의 체코 독자들에게 국민작가로 사랑받는다는 흐라발의 작품은 몇편 소개되었다가 절판되고 지금은 <너무 시크러운 고독>과 <이야기꾼들>만이 남아있는 상태. <고독>의 이런 멋진 서두를 보면 이 작가의 책들이 이토록 번역되지 않고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미스터리다(이반 클리마도 그렇다).

사실 그런 이유로 체코문학 강의 때도 흐라발은 빼놓았었다(체코에서 시작해서 헝가리를 거쳐서 현재는 폴란드를 진행하는중).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흐라발을 고독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삼십오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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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3일차는 카프카로 시작해서 카프카로 마무리되었다. 일정이 조정되면서 카프카의 무덤과 카프카박물관을 하루에 찾아보게 되어서다(카프카를 위해선 더 잘된 일이다). 아침에 신유대인묘지로 가서 카프카의 무덤을 보고 프라하 근교 테레진(나치의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를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다시 카프카 일정을 소화했다.

테레진 수용소 방문 소감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방문과 같이 엮어서 나중에 적기로 하고 카프카 일정만 요약한다(프라하를 처음 찾았을 때 온도시가 카프카로 덮여있는 듯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어제 내려왔던 프라하성 계단길을 다시 걸어올라가 황금소로의 카프카 작업실(1916-17년 사이 5개월쯤 머물며 <시골의사> 수록 작품들을 쓴 집)을 보고나서 일행은 캄파섬의 카프카박물관으로 향했다.

나로선 8년만에 다시 찾은 것인데 과거와는 전시 내용과 순서가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카프카의 배우 친구 이차크 뢰비의 대한 별도의 전시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벽에만 사진이 붙어 있고 따로 보이지 않았다. 작년봄 오스트리아문학기행 때 다시 찾은 프로이트박물관에서 느꼈던 낯섦 만큼은 아니어도. 프로이트박물관을 처음 찾은 것도 카프카문학기행 때였다).

카프카박물관을 나와 다시금 구시가지로 이동할 무렵에는 벌써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있었다. 카프카 생가 건물 앞에서 어제 못 찍은 단체사진을 찍고서 유명한 카프카 동상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다음. 야로슬라프 로나가 초기작 <어느 투쟁의 기억>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유명한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카프카 데이 일정은 종료되었다(전체일정은 천문시계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카프카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동상까지.

설국문학기행을 별도로 하면 겨울문학기행은 맨처음 러시아문학기행어 이어 9년만이다. 여름보다 해가 많이 짧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아침해는 러시아 때보다 빨리 뜨는 것 같지만). 원래는 프라하 일정에서 오후엔 자유시간을 갖기로 비워놓았지만 지연출발이 원인이긴 했어도 어제오늘 자유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야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 한곳에 들러 잠시 체코어책(영어로 나온 체코작가들의 책 코너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다)을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프라하의 남은일정은 카렐 차페크. 날이 밝으면 아침일찍 비셰흐라드 묘지의 차페크 무덤을 찾고 이어서 차페크박물관을 방문한다. 그러고는 쿤데라의 고향 브르노로 향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체코의 제2도시 브르노의 인구는 40만 가량(프라하가 140만이다)이고 모라비아지방의 중심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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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중심은 광장
프라하 중심부엔 바츨라프광장
바츨라프 성인의 이름을 딴
바츨라프광장
바츨라프는 성인보다 먼저 왕이었네
바츨라프 1세
기독교를 전파하고 빈민들을 구제한 왕
바츨라프는 동생에게 암살당하고
소속이 바뀌었네
왕이자 성인이 아니라면
왕이거나 성인이거나
바츨라프는 왕으로 죽고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
보헤미아의 수호성자가 되었네
바츨라프광장에 우뚝선
바츨라프의 동상을보라
바츨라프광장의 목소리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
성 바츨라프를 보라
얀 후스가 지키는 프라하 한쪽에
바츨라프가 지키는 보헤미아
바츨라프광장은 아침부터
공사장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8년만에 다시 찾은 바츨라프광장은
바츨라프 공사장
바츨라프 기마상이
공사장 감독관처럼 내려다보는
바츨라프 광장
(소속이 또 한번 바뀐 것인가)
바츨라프 겨울광장에
언젠가 다시 봄이 오기를
바츨라프광장에서 시작되는
프라하의 봄이 다시 오기를
나는 프라하 방명록에 적는다
그 봄에 다시 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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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는 익사자들의 성인이 있지
익사자들의 수호성인은
익사당한 얀
네포묵 출신의 얀
얀 네포무츠키
그는 성자가 되어 성 얀 네포무츠키가 되지
한국인은 성 네포묵이라고 불러
네포무츠키는 먼 나라 사람이지
네포묵이 정겨운 이름이지
네포묵은 박해받은 성인
왕비의 고해신부 네포묵은
바츨라프 4세의 심문을 받지
아내를 의심하는 왕에게도
고해성사의 비밀은 지켜야 한다네
네포묵은 비밀유지의 수호성인
네포묵은 혀기 잘리고 강물에 던져졌다네
카를교에서 불타바강으로 던져졌다네
시신을 건졌을 때 다섯 개의 별이
강물 위에 떠올랐지
아름다운 전설이 시작되었지
수호성인 네포묵이 전설이 시작되었지
온 세상 모든 익사자들의 성인이 되었지
프라하의 카를교에는
성 네포무츠키 성인상이 서 있네
왕비의 고해와 성인의 죽음이 새겨진
동판을 누구나 어루만지며
소원을 빈다네
비밀의 소원을 빈다네
카를교를 찾을 때마다 만나는
성 네포무츠키
(프라하성 비투스성당에는 그의 은제 관이 있어)

얀 네포묵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바츨라프의 안부가 궁금하네
의심받은 왕비는 무사했을까
왕비는 바이에른의 소피아
네포묵의 순교에도
소피아는 남편보다 오래 살았다네
바츨라프 4세는 뇌줄중으로 급사했다네
(바츨라프의 관도 비투스성당에 있다는군)
바츨라프의 혀는
바츨라프 영혼은
어디로 던져졌을까
아무도 관심이 없는지
전설은 침묵을 지킨다네
카를교 다리 아래
갈매기들처럼
블타바강의 겨울손님
붉은부리 갈매기들처럼
떼지어 숨죽이고 있는
갈매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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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으면(일정 시작하고 첫 호텔 조식이 있다) 프라하 신유대인 묘지의 카프카 가족묘를 찾는다. 1924년 6월, 가족 가운데서는 장남 프란츠 카프카가 먼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부모의 죽음이 차례로 뒤를 잇는다(아버지 헤르만, 1931년, 어머니 율리에, 1934년). 카프카의 형제자매로는 어릴 때 죽은 남동생 둘을 제외하고 세 여동생(엘리, 발리, 오틀라)이 성년까지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모두 나치의 수용소에서 생을 마친다(1942-43년). 이들은 시신이 없어서 가족묘에는 이름만 남겨져 있다.

특히 안타까워보이는 건 막내동생 오틀라(황금소로에 오빠의 작업실을 마련해준 여동생이다). 비유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두 딸을 두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남은 가족이 피해를 볼까 두려워 위장 이혼을 하고(남편과 아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자신은 테레진(테레지엔슈트) 수용소로 추방된다. 제발트(1944-2001)의 마지막 소설 <아우스터리츠>(2001)에서 아우스터리츠의 부모가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그 수용소이다.

테레진은 나치가 국제제십자사 사찰단에게 보여주기 위해 보기좋게 꾸며놓은 선전용 수용소 역할도 했지만 실제로는 아우슈비츠로 보내기 전에 인원을 집결시킨 중간수용소였다. 1942-44년 사이 테레진을 거쳐간 유대인 아이(15세 미만)가 1만 5000명 가량이었고(이 가운데 150여명이 생환했다)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약 1600명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거의 90퍼센트의 아이들이 학살당했다(테레진의 아이들이 쓴 시와 그림이 남아있어서 책으로도 출간됐다).

1942년 테레진에 수용된 오틀라는 간호인으로 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1943년 10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이 어딘가(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고 하자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자발적으로 동행한다. 유대인 수송열차가 아우슈비츠의 도착하자 마자 오틀라는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보내져 생을 마친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테레진과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건 오틀라의 선택과 여정을 되밟아보는 의미도 갖는다.

지난해 타계한 이반 클리마(1931-2025)는 쿤데라와 함께 동시대 체코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이었다(유감스럽게도 그의 소설은 한두편의 단편과 절판된 <하룻밤의 연인, 하룻밤의 연인>밖에 소개돼 있지 않다. 소설과 함께 자서전 <나의 미친 세기> 등이 번역돼 나오면 좋겠다). 소설가로서도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어린시절(1941-45)을 테레진에서 보낸 테레진의 아이, 테레진의 생존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자서전이 번역됐더라면 테레진의 찾아가보는 일정에도 무게감이 더해졌을 것 같다(현재로선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가 테레자 경험을 반추하게 하는 문학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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