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으면(일정 시작하고 첫 호텔 조식이 있다) 프라하 신유대인 묘지의 카프카 가족묘를 찾는다. 1924년 6월, 가족 가운데서는 장남 프란츠 카프카가 먼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부모의 죽음이 차례로 뒤를 잇는다(아버지 헤르만, 1931년, 어머니 율리에, 1934년). 카프카의 형제자매로는 어릴 때 죽은 남동생 둘을 제외하고 세 여동생(엘리, 발리, 오틀라)이 성년까지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모두 나치의 수용소에서 생을 마친다(1942-43년). 이들은 시신이 없어서 가족묘에는 이름만 남겨져 있다.

특히 안타까워보이는 건 막내동생 오틀라(황금소로에 오빠의 작업실을 마련해준 여동생이다). 비유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두 딸을 두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남은 가족이 피해를 볼까 두려워 위장 이혼을 하고(남편과 아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자신은 테레진(테레지엔슈트) 수용소로 추방된다. 제발트(1944-2001)의 마지막 소설 <아우스터리츠>(2001)에서 아우스터리츠의 부모가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그 수용소이다.

테레진은 나치가 국제제십자사 사찰단에게 보여주기 위해 보기좋게 꾸며놓은 선전용 수용소 역할도 했지만 실제로는 아우슈비츠로 보내기 전에 인원을 집결시킨 중간수용소였다. 1942-44년 사이 테레진을 거쳐간 유대인 아이(15세 미만)가 1만 5000명 가량이었고(이 가운데 150여명이 생환했다)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약 1600명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거의 90퍼센트의 아이들이 학살당했다(테레진의 아이들이 쓴 시와 그림이 남아있어서 책으로도 출간됐다).

1942년 테레진에 수용된 오틀라는 간호인으로 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1943년 10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이 어딘가(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고 하자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자발적으로 동행한다. 유대인 수송열차가 아우슈비츠의 도착하자 마자 오틀라는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보내져 생을 마친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테레진과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건 오틀라의 선택과 여정을 되밟아보는 의미도 갖는다.

지난해 타계한 이반 클리마(1931-2025)는 쿤데라와 함께 동시대 체코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이었다(유감스럽게도 그의 소설은 한두편의 단편과 절판된 <하룻밤의 연인, 하룻밤의 연인>밖에 소개돼 있지 않다. 소설과 함께 자서전 <나의 미친 세기> 등이 번역돼 나오면 좋겠다). 소설가로서도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어린시절(1941-45)을 테레진에서 보낸 테레진의 아이, 테레진의 생존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자서전이 번역됐더라면 테레진의 찾아가보는 일정에도 무게감이 더해졌을 것 같다(현재로선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가 테레자 경험을 반추하게 하는 문학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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