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로 넘어가기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지만, 쾌락원칙을 따르는 마음은 또 얼른 '본격적인' 방학으로 넘어갔으면 한다. 방학이라고 해야 대학강의만 없을 뿐이고 다른 일은 두 배가 되지만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에 대한 '로망'을 아무래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 7월에 읽을 만한 책을 골라본다. 여름이 독서의 계절이라면 7월은 그 정점이 아닐까. 이달부터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선정한 책들의 추천사가 한 줄로 짧아졌다. 덕분에 나도 '슬림'한 페이퍼를 올려놓을 수 있겠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책은 마종기 시인의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2010). "모국어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으로 투명한 서정의 언어를 선보이는 마종기 시인의 시와 시작(詩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는 소개다. 시집은 지난 봄에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2010)이 출간됐다. 루시드폴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아주 사적인, 긴 만남>(웅진지식하우스, 2009)도 이를 테면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사실 마종기 시인의 전집은 환갑을 맞은 해이던 지난 1999년에 나온 바 있다. 이후로 시인은 세 권의 시집을 더 펴냈으니 '전집'이 무색하게 됐다. 칠순을 넘긴 시인의 열정이 아직 열일곱 살 소년 같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책은 김시혁의 <통아프리카사>(다산북스, 2010). "월드컵이 열리는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를 우리 시각에서 평이하게 서술하여 읽어볼 만하다."는 것. 이건 안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추천 사유다. 아프리카사의 경우는 이미 한 차례 붐이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한비야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돼 베스트셀러가 된 루츠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5)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권 더 보탠다면 존 아일리프의 <아프리카의 역사>(이산, 2002)도 통사다. 월드컵 기간에 아프리카의 역사 한 권 정도 떼는 것도 '에티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알라딘에선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으로 인문서 가운데는 올 상반기 최고 베스트셀러일 듯싶다. 속칭 '대박'이 난 책. 추천사유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의의 딜레마에 대한 도전적인 개설서로 매우 흥미로운 책"이라는 거. 아마도'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소개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않았나 싶다. 같은 저자의 책인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는 전혀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도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어깃장을 놓자면 스테판 뮬홀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7)까지는 읽어주셔야 샌델을 포함한 '공동체주의'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경로야 어찌됐던 간에 '정의'와 '도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다면 지극히 다행스럽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온 국민 주치의 제도>(시대의창, 2010).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알기 쉽게 잘 지적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추천사유다. 미국도의료 보험제도가 약간 바뀌었기에 좀 지나간 얘기일 수도 있지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것은 역시나 마이클 무어의 <식코>(2008). 그리고 또 마침 출간된 책이 <또 하나의 혁명쿠바 일차진료>(메이데이, 2010)다. "쿠바에서 ‘건강형평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 개념을 제도화시켜 전 세계 유일한 일차의료제도를 만들어냈는가를 보여주는 책". 도입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책도 출간되길 기대해본다(영리병원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고칼럼은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27588.html 참조).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강의>(YBM Sisa, 2010). "현대 경제학계의 거인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 평론을 모아서 펴낸 책으로 대가다운 안목이 돋보이는 평론에서 경제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고. '평론'이라고 하지만 분량상 '칼럼' 모음집 성격의 책이다. 특이한 건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새뮤얼슨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게 별로 없다는 점. 대표작인 <경제학>이 1959년부터 몇 차례 번역된 듯싶지만, 작년에 19판이 나온 원저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평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해야 할까. 공저인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지식산업사, 2008) 정도가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이다(서문만 쓴 책이지 않을까 싶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빌 브라이슨의 <거인들의 생각과 힘>(까치, 2010). "자신의 분야 이상을 뛰어넘는 창조적 생각으로 이 세상을 이끈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추천사유다. 저자가 빌 브라이슨으로 뜨지만 그가 서론과 편집을 맡았고 나머지는 영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쓴 책으로 영국 '왕립학회 창립 350주년 기념 과학 에세이집'이다. 왕립학회의 역사가 곧 근대과학사라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빌 브라이슨의 대표작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2003)을 다시 손에 들 수도 있겠다. 시간이 없으신 문들은 일러스트레이션판으로. 시간이 남는 분들은 아예 원서로.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이태호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나무, 2010). "옛날 화가들이 다양한 재료 위에 그려낸 우리 땅의 모습이 집성되어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라는 평이다. 그러고 보니 흥미로운 주제고, 진작에 이런 책이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하다. 미술사가인 저자는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나무, 2008)란 전작도 갖고 있다. '시리즈'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검색해보니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여성신문사, 1998)이 절판된 책으로 뜬다. 때가 안 맞었던 듯한데, 포맷을 좀 바꾸면(표지라도) 재출간해도 되지 않을까싶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서는 스티븐 로져 피셔의 <문자의 역사>(21세기북스, 2010)다. "지식 전달의 근본 매체인 문자의 탄생과 변화를 추적하며, 특히 한글의 세계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는 게 추천사유다. <문자의 역사>란 타이틀로는 이전에도 두어 권 책이 나온 바 있지만, 가장 탄탄해 보인다.
9. 교양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교양서는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민음인, 2010).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가 된 축구의 역사와 흥행에 성공한 비밀을 해독하고 있다"고.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북마크, 2010)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왓북, 2010) 같은 국내서도 눈에 띈다. 일단 '마크'만 해놓는다.
10. 정신병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정신병'이다. 그건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정신병자'의 파울 슈레버의 회상록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다.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자음과모음, 2010). 프로이트부터 벤야민, 라캉, 들뢰즈/가타리, 지젝, 카네티, 샌트너 등의 지성인들을 매혹시킨 바로 그 회상록이다. 나는 영역본과 샌트너의 연구서만 갖고 있었는데, 좀 여유를 찾으면 이제 이 기이한 정신병의 세계로 들어가볼 수 있겠다.
그러러면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도 다시 나올 필요가 있다. 나도 사실 '슈레버'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앙띠 오이디푸스>의 서두 덕분이었다. 푸코가 재판기록과 진술을 편집해놓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앨피, 2008)도 이 참에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젊은 농부로 1835년 6월 3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모친과 누이 그리고 남동생을 살해한 존속살해범이다. 절판된 책으론 엽기적인 '파팽 자매' 이야기를 다룬 <잔혹과 매혹>(이제이북스, 2005)도 같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간단한 사건 개요는 이렇다.
1933년 2월, 프랑스의 시골 도시 르 망에서 하녀로 일하던 한 자매가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눈알을 다 뽑은 뒤 자매는 망치로 주인 모녀의 머리를 때리고, 부엌칼로 몸통과 다리를 베었다. 일을 마친 자매는 범행을 은폐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다락방에 있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얼마 후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다.
이 기이한 사건이 다양한 담론들을 생산해낸 건 당연한 일. 장 주네는 희곡 <하녀들>을 썼고(사진은 공연 이미지), 몇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여하튼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엔 이런 책들도 읽어볼 수 있겠다는 것.
10. 06. 26.
P.S. '7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역시 우연찮게도 존속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군. 개인적으론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인데, 이번엔 민음사판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7월초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죄와 벌>, 그리고 7월말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런 게 여름나기용 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