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산 인디고서점에 구입한 책들 가운데 하나는 황인숙 시인의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다. 지난해 늦가을에 나왔는데 챙기지 못한 듯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2007)는 긴가민가하지만 분명 <자명한 산책>(2003)까지는 읽은 기억이 나는데, 알라딘의 구매내역에는 빠져 있다. 시집이야 서점에서도 구입하고 했으니 그럴 수 있는데 다시 구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
여하튼 귀경길 기찻간에서 오랜만에 황인숙 시집을 통독했다(시집은 어떤 종류의 책보다 속독하는 편이다). 여전한 의성어와 여전한 감탄사(느낌표)를 다시 확인. 그러고 보면 가면(페르소나)을 쓰지 않는 드문 시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진다. 시의 화자가 곧바로 황인숙이란 뜻이다(58년생이어서 시인도 이제 우리 나이로는 예순이다. 고종석의 ‘인숙 만필‘이 떠오르는군).
해설에서 조재룡 교수가 ‘명랑과 우수‘의 세계로 명명한 황인숙의 시세계는 요즘 시로서는 희귀할 정도도 꾸밈이 없다. ˝황인숙에게는 예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사실, 시의 중요성이나 고유성도 신봉하는 것 같지 않다˝는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게 황인숙의 시다. 시가 되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 듯한 마음이 빚어낸 시들 가운데 내가 고른 한 편은 ‘세입자‘다.
내 방 지붕 위에서 비둘기들
발 구르고, 우르르 몰려다닌다
가볍도 아니한 몸으로
왔다 갔다 우르르
기왓장 다 흐트러지겠네!
밤새 굳은 몸들을 푸는 모양
아침마다 저런다
이 무례한 세입자들아!
집은 또 얼마나 너저분하게 쓸꼬, 비도로기들!(아마 나만큼이나)
나처럼 관대하고 게으른 집주인이
어디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쫓아낼 수도 없고
나 또한 세입자인데
내가 또 세를 내준 걸 알면
그들이 이리 집을 망가뜨리는 걸 알면
우리 전부 쫓겨나리
적으면서 한번 더 좋은 시라고 느낀다. 꾸밈이 없어 밋밋한 시도 많은데 비하면 이 시는 확실히 재미와 넉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긴장감까지도! 한 권의 시집은 이런 한 편의 시로 어엿해진다. 못다 한 사랑이 있거나 말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