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입소문으로만 듣던 박준의 <당신이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를 앞뒤로 읽었다. 그냥 자연스레 와닿는 시들을 좋아하는데, 몇편의 후보작 가운데 ‘이 한편‘으로 고른 시는 ‘꾀병‘이다. 찾아보니 나만의 예외적인 선택은 아닌 듯싶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나이에 대한 감이 없어서 그런데 이런 것이 83년생 시인의 일반적인 감각인지 잘 모르겠다. 심증으론 아주 예외적인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읽은 범위에서는 백석 시에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이 시인이 ‘미인‘의 손과 곁을 떠나서도 이런 감각과 어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시집에 실린, ‘미인‘과 무관한 시들에서는 나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1987년의 가족사를 소재로 한 시 ‘눈썹‘도 그렇다.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1987년이면 네 살 때 기억을 소재로 한 시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능청스럽게 가족사의 한 에피소드를 그려내고 있는데 역시나 이런 감각이나 어투는 요즘 시 같지 않다. 시집 제목도 그렇고 산문집 제목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같은 구닥다리 표현이 묘하게 정서를 환기한다. 적당한 분류 범주를 찾지 못해서 임시로 ‘박준적 신파‘라고 부르겠다. 이 젊은 시인은 대체 몇 살의 나이로 어느 시대에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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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크리스토퍼 헤이즈의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를 고른다. 저자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찾아보니 책의 원제는 ‘엘리트 계급의 황혼: 능력주의 이후의 미국‘이다.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사회를 실패로 이끄는가‘가 번역판의 부제다. 대략 책의 주제와 시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엘리트 사회는 무너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대안을 찾아 획기적이고 참신한 해답을 제시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성취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지 못한다. 실패의 시대에 대해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단순하면서도 날카롭다. 

미국 국내 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 우수 선정도서(2012)로 꼽힌 이 책은 ‘포브스‘, ‘애틀랜틱‘ 등 많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실패를 주제로 삼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마이클 해링턴의 <새로운 미국>처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문제작으로 꼽힌 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미국사회 비평서이면서 엘리트주의 비판서로 읽을 수 있겠다(참고로 <새로운 미국>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셔키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이 책을 읽으라˝고 충고한다. 적폐 청산의 시대적 과제를 떠안고 있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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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이시구로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연구자료는 지난 주말까지 다 구비해놓았지만 오늘 강의는 작품과 그에 대한 논문 두 편 정도만을 참고했다. 예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지만 전체 강의의 가닥은 잡을 수 있었다. 28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이시구로의 차기작들은 나도 기대가 된다. 그는 4년 뒤 두번째 작품으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를 발표하게 될 것이다.

전작 읽기가 가능한 작가여서 작품은 발표순으로 읽어나갈 예정이지만 부커상 수상작 <남아있는 나날>(1989) 이후에 발표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만 뒤로 미루었다. 분량도 가장 두꺼우면서 가장 난해한 작품. 부커상 수상작가의 ‘갈라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강의에서 이 작품까지 다루게 될지는 다음주에 결정할 예정이다(다루게 된다면 12월의 한 주를 나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씨름하며 보내야 한다).

역자도 충분한 고려 끝에 ‘A Pale View of Hills‘를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옮겼지만 일반적인 선택은 ‘희미한 언덕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도 더 무난하지 않나 싶은데 ‘창백한‘은 너무 이미지가 강하게 여겨져서다. ‘희미한‘ 내지 ‘흐릿한‘이 작품의 의도와 더 호응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창백한‘ 기억이 아닌, ‘희미한‘ 기억, ‘흐릿한‘ 기억을 다루고 있기에 그러하다. 동시에 그렇게 희미한 과거를 더듬으며 재구성하는 것은 화자(에츠코)의 불가피한 전략이기도 하다. 자살한 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기에.

‘전후 소설‘이면서 여성 문제를 다룬 ‘여성 소설‘로 읽히는데, 그 점을 문제 삼은 리뷰가 적은 것은 의외다. 이시구로의 인터뷰나 자료에서 확인하고 싶은 부분인데 이 작가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처리방식은 충분히 주목거리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궁금한데, 이런 개인사는 인터뷰에 자세히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강의자료에도 넣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조각상 사진을 옮겨놓는다. 작품에서도 에츠코가 뜨악하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원폭과 무슨 상관이 있는 조각상인지 의아하다. 에츠코의 희미한 사적 기억은 이 공적인 기억에 대한 교정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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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읽은 시집은(책소개로만) 김경후의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이다. 어젯밤에도 평이 좋다는 시집 두 권을 뒤적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모처럼 가슴이 뚫리는 듯하다. ‘속수무책‘을 읽자니 그렇다.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자칫 말장난으로 끝나기 쉬운 착상을 그런대로 버텨내고 있다.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새처럼‘까지 읽어보며 미덥다고 느낀다.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불새처럼‘ 전문)

‘이주의 시집‘으로 주문해야겠다. 전작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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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과학서‘로 데이비드 버코비치의 <모든 것의 기원>(책세상)을 고른다. 저자는 생소하고 제목도 기시감을 갖게 하지만, 눈길을 끄는 건 ‘예일대 최고의 과학강의‘라는 부제다.

˝예일대학교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학 교양강의를 엮은 <모든 것의 기원>은 별과 은하의 탄생에서 생명과 진화, 문명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핵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만물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장구한 138억 년 우주의 역사를 탐구한 호모 사피엔스들의 수많은 발견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그러고 보면 ‘예일대 강의‘가 ‘하버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 권 소개되었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건 프랭크 터너의 <예일대 지성사 강의>(책세상)와 이안 사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문학동네), 그리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책으로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웅진지식하우스) 등이다. 난이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용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그게 명문대의 이름값인 것. <모든 것의 기원>도 그 정도의 기대를 갖고서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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