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설겆이하고 지난여름 교토에서 사온 전병 남은 걸 커피와 함께 먹어치우고, 이제 배를 깔고 엎드려서 책을 펼친다. 이시영 시집 <하동>(창비)을 뒤적이다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생각함‘에서 눈길이 멎는다. ‘김남주를 생각함‘으로 읽어도 되는 시다. 아래가 전문이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새벽 전화를 받고 고려병원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황달이 퍼져 샛노란 눈빛의 김남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개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부탁한다. 남은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마라!˝ 그의 숨이 끊어지고 난 뒤 병실 복도에 나와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 살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지막 문장은 김남주가 옮긴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마지막 행에서 차용했다고 시인은 덧붙였다.

잠시 브레히트와 김남주와 개 같은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개처럼 살지 말아야 할 사명에 대해서도. 어젯밤 라스베이거스 총기난사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들에게도 세상은 얼마나 개 같았을 것인가. 우리는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로 살해되어서는 안될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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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고백록>(을유문화사)이란 정체불명의 책이 나와서 지난주에 구입했는데, 알고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 일부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합본해놓은 것이다.

거기에 편역자의 길지 않은 해설이 붙여졌는데, 차라리 <작가일기>에서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부분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겠다. 초역이라고 하지만 새로 번역소개한 <작가일기>는 77쪽 분량이다.

<작가일기>는 러시아어 전집에서 두권 정도 분량으로 전체를 번역하면 얼추 1000쪽은 될 것 같다(현재 나와있는 건 지만지판의 얇은 선집. 예전에 벽호에서 나온 조금 두툼한 <작가의 일기>는 절판되었다).영어판으론 두 권짜리 완역본이 나와 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번역본이 10종 이상 나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다면 재번역의 의의를 찾기 어렵다. 올초에도 작가와비평사판이 추가된 상태다.

덧붙여, 을유문화사에서는 세계문학전집판에서 작가명을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하고 단행본에서는 다시 ‘도스토옙스키‘로 표기했다. 보통은 출판사마다 원칙을 정해서 외국어 표기를 통일하는데 이 경우는 책마다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그때그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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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임시공휴일이었으니 오늘부터가 본격적인 추석 연휴다. 가족 식사모임도 오늘내일 갖게 돼 나도 오후 늦게는 ‘이동‘을 해야 한다. 차례를 따로 지내지 않는 집이라면 명절의 대사는 식사다. 그 ‘식사‘를 ‘푸드 히스토리‘로 푼 책들이 나왔다(북플에서는 한자를 어떻게 넣지?).

먼저 로마사 전공자인 정기문 교수의 책으로 <역사학자 정기문의 식사>(책과함께). ‘생존에서 쾌락으로 이어진 음식의 연대기‘가 부제다. 고기부터 초콜릿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음식 7가지를 선정하여 그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본˝ 책이다.

경향신문 기자 출신의 맛칼럼니스트 황광해의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하빌리스)도 음식 이야기다. 정기문의 식사가 주로 서양음식 이야기였다면 황광해는 우리 음식을 다룬다. 주로 궁궐과 양반댁에서 먹은 음식들이 소개된다(그럴 수밖에).

그리고 식사후 고정메뉴가 된 커피 이야기도 곁들여야겠다. 박영순의 <커피인문학>(인물과사상사). 20여 년간 언론인 생활을 하고서 커피 전문가로 나선 저자가 커피에 관한 교양상식을 총정리했다(대학에서 ‘커피인문학‘을 강의한다고). 명절 이후 혼자서 커피를 즐길 시간에 책장을 넘겨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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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막간에, 다시 서점에 들렀던 얘기. 신철규의 시집을 사들었다고 했는데 신작 시집들 가운데 잠시 망설이긴 했다.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과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가 모두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한두 편씩 읽고서 최종 선택은 원래 의도대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로 낙착. 첫번째 시 ‘소행성‘부터 마음의 과녁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마지막 연이다. ‘소행성‘은 물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이 시를 처음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시에 대한 시인의 정의로 가름되는데 그것은 시란 곧 소행성의 감각이고 언어라는 것. 그에 따르면 시인들은 너무 작은 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신철규의 시를 만들어내고 또 지탱하는 건 이러한 소행성적, 어린왕자적 상상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세계보다 우월할 때 성립한다는 시 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도 잘 부합한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소행성‘의 어법은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시인의 특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거기에 있었으면 싶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눈물의 중력‘)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플랫폼‘)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슬픔의 자전‘)

잡히는 대로 골라본 소행성의 언어들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고 적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좀 식상했다. ‘절벽 끝‘이라는 상투적인 비유를 들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우리도 대개 그렇지만 시인도 자신이 무얼 쓰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내게 신철규는 이런 유머를 구사할 때 비로소 시인이다. 소행성 유머다.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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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에 들렀다가(집에서 양방향 도보로15분거리에 두 곳의 중형서점이 있다) 신철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와 함께 유종호 선생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사들고 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알라딘에 품절로 뜨는 책이니 나름대로 득템(알라딘에도 중고본은 뜬다). 초판은 1989년 가을에 나왔고 내가 그 즈음에 읽었으니 28년 전 책이다. 오늘 구입한 건 2판 30쇄로 2011년 여름에 찍은 것이다. 오랫동안 문학 입문서 역할을 해온 스테디셀러인데 품절이 일시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단지 품절도서라서 재구입한 건 아니고 28년만에 읽으면 어떤 인상을 받을지 궁금해서 골랐다. 이를 테면 독서의 키재기 같은 것. 키를 재면서 벽에다 눈금을 그어놓고 비교하는 것처럼 같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그동안 생각이 얼마나 자랐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흠, 성장기도 한참 전에 지난 나이에 키를 잰다고 하니까 멋쩍지만 정신의 성장에는 따로 시한이 있는 게 아니잖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책으로 내가 제일 먼저 읽은 건 사르트르의 책으로 기억한다(기억과 사실은 언제나 다를 수 있다). 당시엔 문예출판사판. 그리고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 이 책도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을 들으면서 그밖에도 몇권 더 읽었을 테지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에 한정하자면, 내게는 ‘3종세트‘에 해당한다.

이제 연어가 모천 회귀하듯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이 책들을 손에 든다. 나대로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낳기 위해서다. 연어들이 돌아오는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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