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막간에, 다시 서점에 들렀던 얘기. 신철규의 시집을 사들었다고 했는데 신작 시집들 가운데 잠시 망설이긴 했다.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과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가 모두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한두 편씩 읽고서 최종 선택은 원래 의도대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로 낙착. 첫번째 시 ‘소행성‘부터 마음의 과녁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마지막 연이다. ‘소행성‘은 물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이 시를 처음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시에 대한 시인의 정의로 가름되는데 그것은 시란 곧 소행성의 감각이고 언어라는 것. 그에 따르면 시인들은 너무 작은 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신철규의 시를 만들어내고 또 지탱하는 건 이러한 소행성적, 어린왕자적 상상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세계보다 우월할 때 성립한다는 시 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도 잘 부합한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소행성‘의 어법은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시인의 특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거기에 있었으면 싶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눈물의 중력‘)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플랫폼‘)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슬픔의 자전‘)

잡히는 대로 골라본 소행성의 언어들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고 적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좀 식상했다. ‘절벽 끝‘이라는 상투적인 비유를 들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우리도 대개 그렇지만 시인도 자신이 무얼 쓰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내게 신철규는 이런 유머를 구사할 때 비로소 시인이다. 소행성 유머다.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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