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휴가중이던 지난주에 나왔지만 '이주의 발견'으로 적는다. 데이비드 벨로스의 <내 귀에 바벨 피시>(메멘토, 2014). 제목만으로 어떤 책인지 짐작하긴 어려운데, '번역이 하는 모든 일에 관하여'가 부제다. 번역론이자 번역에 관한 성찰, 번역에 관한 에세이 등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의 관심은 번역 이론이나 번역 기술보다 ‘번역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번역가이자 전기 작가인 저자 데이비드 벨로스(David Bellos)는 언어학, 철학, 인류학의 풍부한 교양 위에서 사전, 기계 번역, 성서 번역, 국제법, 뉘른베르크 재판, EU와 동시통역의 탄생, 문학작품 번역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날렵한 재치와 풍성한 입담으로 풀어나간다. 언어, 말, 번역에 대한 신선하고도 유익한 이야기로 우리가 몰랐던 번역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이 책은, 번역이라는 주제로 흥미롭고 진기한 문화사 한 상을 차려낸다.     

 

 

책은 초면이지만 알고 보니 저자와는 구면이다. 데이비드 벨로스가 카뮈의 영역본 선집에 공역자로 참여했고, 내가 그 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페렉과 이스마일 카다레의 책을 여러 권 옮겼고 로맹 가리에 대한 전기도 썼다(로맹 가리의 전기는 국내에 한 권 소개돼 있지만 한 권 더 나와도 좋지 않을까).

 

 

번역가의 번역란이란 점에서는 최근에 나온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도 떠올리게 한다.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바르가스 요사의 여러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다. 개인적으론 그로스먼 역시 <번역 예찬>과 만나기 전에 영어본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통해서 먼저 접한 바 있다.  

 

 

 

번역에 관한 좀더 이론적인 책으론 윤성우, 이향 교수의 <번역학과 번역철학>(한국외대출판부, 2013)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두 저자가 공역한 앙트완 베르만의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철학과현실사, 2009), <번역과 문자>(철학과현실사, 2011) 등도 번역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필독서다.

 

주섬주섬 사모은 번역학 관련서도 여럿 더 되는데, 정리해놓질 못해서 어느 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번역 문제에 대한 정리는 나중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겠다. 일단은 <내 귀에 바벨 피시>부터 읽고서...

 

14. 01. 23.

 

 

P.S. 아, 제목의 '바벨 피시'는 뭐냐고? "이 책의 표제에 쓰인 ‘바벨 피시’는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작고 노랗고 거머리같이 생긴 물고기다. 이 물고기는 귀에 집어넣으면 어떤 언어라도 즉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통역기다." 그러고 보니, 이 두꺼운 책도 구입해놓고 아직 펼쳐보지 못하고 있구나. '은하수 여행'을 떠나려면 며칠간의 휴가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당분간은 '그림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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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민주(통권 10호)의 '삶과 문학' 코너에 실린 인터뷰를 일부 옮겨놓는다. 이 코너를 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가 제안을 해와서 연초에 동대 근처 카페에서 가졌던 인터뷰다. 전문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블로그(http://blog.kdemo.or.kr/1183)에서도 읽을 수 있다(인터뷰 중에 나오는 <생애 바깥에서>란 시집 제목은 <생의 바깥에서>의 오기다).   

 

 

 

민주(2013년 겨울호)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요구, 그것이 민주주의의 희망이다

 

(...)

 

정여울: 올해 경향신문에서 뽑은 ‘뉴 파워라이터’ 20인에 선정되셨는데, 그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극대주의자다’라는 표현을 쓰셨더라구요.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이현우: ‘문학은 자고로 시와 소설, 희곡이지’ 이런 식으로 딱 정해진 장르와 분과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문학 극소주의자라면, 역사도 철학도 넓은 의미의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극대주의자이지요. 저는 모든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평을 쓰는 것도 문학의 일부이지요.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문학적 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갔어요. 우리는 문학에 대해 뭘 알 수 있는지, 어떤 작품, 어떤 작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뭘 알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 같았어요. 문학이 무엇을 알려주는가에 대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로쟈 버전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을 써보고 싶어요. 문학극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문학이 전부로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문학으로 보여요. 문학은 제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커다란 무엇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만이 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문학주의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죠.

 

정여울: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문학이 가장 크다’라는 표현이 문득 뭉클합니다. 과학보다도, 철학보다도, 역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 크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런 문학극대주의자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는 것이겠지요?(웃음)

 

 

 

이현우: 그렇죠. ‘문학과 정치’, ‘문학과 사회’, 이런 식으로 나눌 필요가 없어져요. 모든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극대주의자의 망상이지요(웃음).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래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망상보다 더 큰 망상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제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톨스토이는 합리주의자이면서 문학극대주의자는 아니지요. 제가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 문학극대주의자의 과대망상증 계보를 잇지요.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문학이에요. 그리고 문학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도 도스토예프스키다운 것이지요. 문학은 문학으로서만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쪽이구요. 그래서 톨스토이는 문학을 끝내 버릴 수 있었던 거예요. 톨스토이는 문학이 자기가 원한 것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던 거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곳에서 문학을 보았기 때문에 문학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했던 거죠.

 

정여울: 저도 사실 그 ‘과대망상증 계보’가 참 좋아요. 아직도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에 계속 빠져 살아가지요(웃음).

 

이현우: 톨스토이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걸 소설에서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문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자신이 쓴 위대한 작품들도 말년에는 다 ‘쓰레기’라고 부정할 수 있었던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 뭔가 거창한 소명을 떠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위대한 예술은 톨스토이에게 의미가 없었지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은 문학이 아니라 사상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고 톨스토이는 거대한 작가라는 말이 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라는 것 자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작가라면, 톨스토이에게 문학은 너무 ‘작은 것’이었고 그 이상의 뭔가 원대한 이상을 꿈꾼 사람이었던 거죠.

 

정여울: 이 위대한 작가와 거대한 작가가 한 나라에서 났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내심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중한 만큼 톨스토이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품은 이상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 무기가 ‘문학’인지 문학이 아닌지는 조금 작은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대단한 소명을 다 하지 못할 때 문학을 버리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과도 비슷하네요.

 

이현우: 그렇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 톨스토이를 언급하기도 해요.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이 인류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들에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문학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거죠. 더 이상 문학으로 세상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작가가 바로 톨스토이였던 거죠.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이 그런 중요한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버린 거고, 톨스토이는 아예 문학은 그런 중요한 일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버린 거죠.

 

정여울: 박사논문에서는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를 다루셨는데요. 푸쉬킨이 선생님의 문학관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요.

 

이현우: 푸쉬킨은 기본값이예요. 푸쉬킨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 ‘나는 투르게네프가 좋아’라는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지요.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의 수원(水原)이고 러시아 문학의 전부예요. 러시아는 푸쉬킨 공동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민문학의 힘이에요. 푸쉬킨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출발점이면서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지요. 국민문학이라는 것의 개념 자체가 흥미로워요. 물론 국민문학이라는 개념도 판타지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분열이나 모순을 봉합시켜줄 수 있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소중하지요.

 

정여울: 푸쉬킨은 기본값이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 공동체다, 이 모든 말들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요. 공동체의 분열과 사회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푸쉬킨 식의 국민문학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작품들이 그런 국민문학의 수원(水原)에 속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옛날에는 국민문학의 계보로 이광수의 <무정> 같은 작품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춘향전>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춘향전>에는 사회적 모순이 응축되어 있죠. 그 모순 때문에 사회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봉합하려는 흔적을 담고 있어요. 양반층의 요구와 천민층의 요구가 결합되어서 묘하게 화해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양반집 규수처럼 수절하겠다고 버티는 춘향이는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를 닮았죠.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양반과 대등하게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변사또는 권력층에 기대는 악의 무리 중 한 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양반, 선한 양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몽룡을 차별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어요. 양반도 천민의 편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양반도 천민도 둘 다 만족시키려는 것이에요. 자아가 초자아와 이드 사이를 중재하는 것처럼 국민문학은 하층계급과 상층 계급을 화해시키고 있어요. 푸쉬킨의 <대위의 딸>도 그렇지요. 민중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고 귀족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아요. 국민국가라는 판타지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 통합의 환상, 푸시킨적 판타지이지요. 그건 민주공화국이라는 환상이기도 하구요.

 

정여울: 아, 그럼 러시아 문학이 푸쉬킨 공동체라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춘향전 공동체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푸시킨과 연결시키니까 춘향전이 훨씬 깊이 있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춘향전>은 어쩌면 봉건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의 테마를 태동시킨 집단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생각도 들어요.
 
이현우: <춘향전>에 여러 가지 판본이 있지만 춘향이 ‘양반의 서녀’라는 입장과 ‘천기 출신’이라는 입장,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성참판의 서녀 성춘향보다는 월매의 딸 천기 출신의 춘향이 훨씬 더 래디컬한 버전이죠. 서녀 신분보다는 천기 신분이 훨씬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이고, 더 도전적인 문제제기예요. 이건 거의 세계문학 수준이죠. 성춘향이라는 것은 뭔가 저항의 가능성을 거세시키고, 춘향을 좀 더 양반 쪽에 가깝게 순치시킨 버전이지요. 춘향의 고결한 태도나 수절의 의지를 그냥 핏줄로 해결해버리면, 절반은 양반의 피를 타고났다고 하면, 이것은 양반 쪽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버전이니까요. 하지만 천기 버전의 <춘향전>은 세계문학사의 고전이 될 만해요. 아래로부터의 문학이거든요.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것을 말한 텍스트는 고전문학에서는 거의 없어요. 한국문학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텍스트죠.

 

정여울: 그럼 오늘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춘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정리해도 되겠네요(웃음).

 

이현우: 홍길동만 해도 율도국이라는 별도의 유토피아를 정해서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도피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춘향은 체제 내에서 인정을 받아요. 임금이 이몽룡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정경부인으로 봉했다는 것이니까 ‘저 세계’가 아닌 ‘이 세계’ 안에서 천민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춘향전의 판본이 이렇게 엄청나게 범람하는 것도 민중들이 보였을 어떤 열광의 흔적이라고 봐요.

 

(...)

 

14.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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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란 제목만으로는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한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는 부제로도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파리 리뷰 인터뷰'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잡지 '파리 리뷰'와 가진 인터뷰 모음집이어서 '파리 리뷰 인터뷰'다.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가들의 인터뷰만 모은 걸로 생각했는데, '파리 리뷰 인터뷰1'라고 돼 있는 걸로 보아 시리즈로 나온다는 의미다. 자세히 보니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도서출판 다른에서는 국내 문예창작학과 대학생들과의 설문을 통해 「파리 리뷰」에서 인터뷰한 250여 명의 소설가들 중 '가장 인터뷰하고 싶은 작가 36인'을 선정했고, 이중 12인의 이야기를 <작가란 무엇인가>로 묶어냈다.

그럼, 두 권 정도는 더 나온다는 얘기인가? 그러길 기대한다. 찾아보니 영어판으론 피카도르출판사에서 네 권짜리 선집이 나온 바 있다.

 

 

선집은 피카도르에서만 나온 건 아니고, 모던라이브러리에서는 '작업실의 작가들'이란 타이틀로 몇 권의 인터뷰 선집을 묶어낸 바 있다. 국내에서 처음 나왔던 파리 리뷰 인터뷰집의 저본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안정효 선생의 번역으로 나왔던 <나의 삶, 나의 문학>(책세상, 1989)가 바로 첫 번역본이었다(<11인의 위대한 작가들>(책세상, 1997)로 다시 나오기도 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다). '20세기 대표작가들과의 대화'라는 부제하에 11명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로버트 프로스트
T.S.엘리어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월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아이삭 바셰비스 싱거
아더 밀러
소울 벨로우
월리엄 개스
해롤드 핀터

 

개인적으로는 파스테르나크의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고, 강의시간에 종종 인용하기도 한다. 이번에 나온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린 12명의 작가는 에코, 파묵, 하루키, 오스터, 매큐언, 로스, 쿤데라, 카버, 마르케스, 헤밍웨이, 포크너, 포스터 등이다. 헤밍웨이와 포크너가 겹치는 걸로 보이는데, 이어질 선집들에서 다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파리 리뷰>를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 여기에 게재된 인터뷰를 엮어 책으로 펴낸다면 더없이 훌륭한 책이 될 것이다." 그 '더없이 훌륭한 책'이 이번에 나온 걸로 보면 되겠다...

 

14.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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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이틀 늦게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전주의 책'이라고 해야 할까. 타이틀은 알랭 바디우의 책 <세기>(이학사, 2014)를 풀어서 적었다. 바디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기'가 '20세기'이며, 그가 본 20세기의 가장 큰 특징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인용된 문구를 통해서 처음 접하고 영어본 <세기>를 구해놓은 기억이 난다. 이제 편하게 한국어본으로도 읽어볼 수 있게 됐다.

 

바디우에 따르면 20세기를 지배했던 진정한 열정은 결코 상상적인 것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정도, 메시아적 열정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그 무시시한 열정은, 19세기의 예언주의와 반대로, 실재에 대한 열정, 즉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참된 것"을 활기 있게 하기 위한 열정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바로 이 열정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또 이를 통해 지난 세기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판단을 시도해보기 위해, 실재에 대한 열정, 의지, 욕구 등을 담은 여러 자료를 찾아 탁월하게 분석한다.

두번째 책은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민음사, 2014)이다. 마오주의자였던 바디우와 짝을 맞추자면 <마오쩌둥 평전>이 더 어울리겠지만, 덩샤오핑 역시 덩샤오핑과 함께 지난 세기 중국의 건설자다. '현대 중국의 건설자'란 부제가 무안하지 않게 말이다. "세계적인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는 정부 인사, 당 역사 연구자, 가족, 주변 인물 등과의 인터뷰와 최근에 공개되거나 발굴된 각종 문서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덩샤오핑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생애와 맞물린 중국의 전환기를 세밀히 그려 낸다."

 

 

세번째 책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KH사업단에서 엮은 <사회인문학과의 대화>(에코리브르, 2013). 사회인문학총서의 네번째 책으로 "국내외 학자 일곱 명의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와의 만남 속에서 기존의 인문학적 사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독자적인 사유의 틀을 일구어내고자 애써 온 사회인문학자의 삶을 잘 보여준다." 사회인문학의 실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어림해볼 수 있을 듯싶다.

 

네번째 책은 홍윤철의 <질병의 탄생>(사이, 2014)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가 오늘날 현대인이 앓고 있는 수많은 질병들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또 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과거 선조들보다 훨씬 더 질병에 잘 걸리는지를 수백만 년 전의 수렵채집 시대부터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하려 한 독특한 문명사 책이다." 조지 윌리엄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사이언스북스, 1999)와 내용이 다른지 궁금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끝으로 전방위 인문학자 박홍규 교수의 <독서독인>(인물과사상사, 2014). '독서는 인간을 어떻게 단련시키는가'란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는 인간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단련시켰으며, 책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만나느냐에 따라 권력자가 될 수도 있고, 반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독서는 한 영혼을 단련시키면서도 세상을 혁명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박홍규 교수의 독서론으로 읽어도 되겠다. 모르고 지나쳤는데, 저자의 인생론으로 <서른 이후, 문득 인생이 무겁게 느껴질 때>(경향미디어, 2011)도 수년 전에 나왔다. 매일같이 신간을 검색해보는 나도 모르게 출간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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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알랭 바디우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14년 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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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평전- 현대 중국의 건설자
에즈라 보걸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50,000원 → 45,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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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문학과의 대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사업단 엮음 / 에코리브르 / 2013년 12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2014년 01월 20일에 저장
절판

질병의 탄생- 우리는 왜, 어떻게 질병에 걸리는가
홍윤철 지음 / 사이 / 2014년 1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0월 2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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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연재 '로쟈가 푸는 문학을 낳은 문학'도 옮겨놓는다. 이번 회에서 다룬 건 카뮈의 <페스트>와 김은국의 <순교자>다. 작가가 <순교자>란 작품을 아예 통째로 카뮈에게 헌정했기에, 두 작가의 영향 관계라는 건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다. 두 작가의 공통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나대로 짚었다.

 

 

 

중앙선데이(14. 01. 19) 절망에 맞서 계속 희망하라 … 인간이니까

 

“도스토옙스키와 카뮈의 문학 세계가 보여준 위대한 도덕적, 심리적 전통을 이어받은 빼어난 작품!”

미국 언론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는 뜻밖에도 석사학위 청구 작품으로 『순교자』(1964)를 쓴 재미 작가 김은국이다. 한국인 작가의 소설이 미국 평단을 뒤흔들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런데 헌사에서 김은국은 “나로 하여금 한국 전선의 참호와 벙커에서의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 카뮈에게 작품을 바친다”고 적었다. 이 작품의 문학적 계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문제작이었던 카뮈의 『페스트』(1947)에서 이어진 것이다.

 



『순교자』는 출간 과정에서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전투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 의견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점이라면 『페스트』가 한술 더 뜬다.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남자이며, 게다가 ‘전후 문제작’이라는 평판에 어울리지 않게 전쟁은 ‘페스트’라는 알레고리로서만 암시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페스트는 모두 ‘감옥살이’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페스트』는 카뮈가 대니얼 디포를 인용했듯 “한 가지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한” 소설이다. 현대적인 도시 알제리 오랑에서 사람들은 “시간이 없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달리 특징 없는 무료한 곳에, 갑자기 페스트가 번진다. 도시는 폐쇄되고 시민은 감금 생활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 간다. 의사 리유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환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보건대를 꾸리지만 역부족이다. 무고한 어린아이들까지 고통 속에 죽어 간다. 당초 페스트를 죄인들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파늘루 신부에게 리유는 이렇게 항의한다.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어째서 신은 죄가 없는 아이들까지 고통받게 하는 걸까? 신의 심판론에서 한 발짝 물러서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신부 입장에서는 이것만이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반대로 리유에게 페스트라는 재난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고통일 뿐이다. 하지만 리유는, 비록 패배가 예정돼 있을지라도,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반항한다. 카뮈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페스트』에서 페스트로 비유된 전쟁의 고통과 부조리성이 어린아이의 고통으로 응축되었다면, 『순교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고문받고 처형당한 목사들의 운명으로 집약돼 있다. 당초 열네 명의 목사가 심문을 받았지만 젊은 목사 한 명은 실성하고 신 목사라는 노(老)목사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살아남는다. 반공주의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육군 정보대 장교가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가는 과정이 『순교자』의 줄거리다.

다른 목사들을 배신했을 거라는 의혹을 받는 신 목사는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결국 진상은 체포된 북한군 소좌를 통해 밝혀진다. 열두 목사는 위대한 순교자로 죽은 것이 아니라 목숨을 구걸하며 “꼭 개새끼들처럼 죽어 갔다”는 것이다. 반면 신 목사만이 유일하게 대항한 자였다. 북한군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런 당당한 태도 덕에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난 내게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해”라는 게 소좌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신 목사는 왜 오해를 무릅쓰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에겐 여전히 신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숭고한 순교자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신 목사는 무신론자다. 평생 신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는 게 그의 토로다. 그 대신에 신 목사가 발견한 건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다. 그에겐 쓰라린 경험이 있다. 느지막이 결혼해 얻은 첫아이를 잃었을 때, 그의 아내는 상심과 죄책감에 빠진다. 온종일 기도하던 아내에게 그는 참다 못해 저승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일러 준다. 신 목사는 진리를 일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때 신 목사는 “나의 그 잘난 진리, 남들이 모르는 내 진실”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절망에 맞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오.”

『페스트』에서 카뮈가 보여준 죽음에 대한 반항은, 『순교자』에서 절망에 맞선 희망으로 나타난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잊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14.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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