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중앙(11년 봄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문학이란 何오'란 비평특집에 들어간 글이다. 지난 2월 모스크바에서 작성한 것이라 기억에 남는데(기본 아이디어는 10년쯤 전의 것이긴 하다), 몇가지 문학공식(수학공식)이 페이퍼에서는 지워지기에 그간에 포스팅을 보류했었는데, 지워진 대목은 근사치에 가깝게 고쳐넣었다. '문학들이란 무엇인가'가 글의 제목이고, 말하자면 '나의 문학유형학'이다.

  

문예중앙(11년 봄호) 문학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의 자리가 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이었나?’란 물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오래전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혹은 소비사회의 도래와 함께 ‘문학의 죽음’이 애도되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죽음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죽음이었던지 문학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이기 전이다. 그것은 애초에 식은 감자였던 것일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만 뜨거웠던 것일까. 이제 ‘문학들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묻는다. ‘문학의 죽음’ 이후에도 문학이 존속한다면, 존속해왔다면 애초에 그것은 ‘문학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죽는 문학이 있고, 사는 문학이 있는 것일까. 혹은 살아서 죽는 문학이 있고, 죽어야 사는 문학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문제는 이제 문학이 아니라 문학들이다. 그것이 문학에 대한 사유가 혹은 추리가 도달하게 된 어떤 물음의 장소이다. 물음은 언제나 추리의 형식을 띤다. 문학이란 범인은 이제 혼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수이다. 그 다수의 문학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문학들의 자리에 대해 잠시 말해보고 싶다. 능력이 닿는다면 그 자리 혹은 현장의 배치도나 위상학 혹은 생태학을 제시하면 좋으련만, 이건 그저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주로 러시아문학의 사례를 동원한 것은 ‘문학들’의 어떤 기원과 함께 원형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다.    

먼저, 문학 혹은 문학들이 놓인 자리를 ‘문학장’이라고 말해보자. 문학장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정의에 따르면, 장(Champ)이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소세계를 지칭한다(문학은 ‘작은 감자’다). 이 소세계는 대세계처럼 사회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소세계는 대세계의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한 부분적 자율성을 보유한다. 즉 완전히 타율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모든 장은 세력의 장이며 이 세력을 유지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의 장이다. 즉 불평등하게 배분된 자본을 소유한 행위자들이 정당성의 독점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투쟁의 사회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비가시적 관계의 소산이다.  

부르디외가 분석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학장에서 이러한 투쟁의 자본은 문학적 인정과 경제적 이익이지만, 전통적으로 문학장에서 인정투쟁의 규칙은 정치적․제도적 인정(타율성)과 미학적 인정(자율성)이었다(경제적 이익은 상업적 인정으로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규칙은 문학의 정치적 타율성․종속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이 문학장은 의미론적 구조를 갖는다. 문학의 타율성(이념성)과 자율성이라는 개념적 대립쌍을 구조의미론의 의미소 S1과 S2로 지정하면, 그와 모순관계의 의미소 -S1과 -S2를 도출해낼 수 있고, 이 네 가지 의미소는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사각형이라는 의미론적 위상공간을 형성한다. 이 관계를 단순화한 명제형식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S1과 S2, -S1과 -S2는 각각 대립관계이고, S1과 -S1, S2와 -S2는 모순관계이며, S1과 -S2, S2와 -S1은 포함/전제관계이다.)        

            <정치적 인정>               <미학적 인정>

                   S1                                S2
           (문학은 타율적이다)      (문학은 자율적이다) 
                                                      
                   -S2                              -S1
       (문학은 자율적이지 않다) (문학은 타율적이지 않다)

문학장을 구성하는 이 네 가지 입장은 보다 구체적인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다. 즉 S1은 이념문학, -S1은 (생철학에 빗대) 생문학, S2는 망명문학, -S2는 참여문학이라고 불러보자. 이념문학은 정치현실에의 복무를 주장하는 문학이다. ‘정치적으로 옳은 것이 문학적으로도 옳다’는 것이 이념문학의 구호다. 때문에 그것은 자기 이념의 정당성에 대해 확신하는 ‘단의성의 신화’(피에르 지마)를 구축하고자 한다(루카치의 문학론). 이러한 이념문학과 모순․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이 모든 의미의 분산 혹은 해체를 조장하는 불온한 문학으로서의 생문학이다. 그것은 “문학적으로 옳은 것이 정치적으로도 옳다”고 말한다. 생문학에서 삶과 문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한편으론 그런 의미에서 이 삶과 문학의 비분리성은 이념문학에서 이념과 문학의 비분리성과 닮았다. 차이라면 생문학의 난센스와 카니발리즘적 다의성의 근거가 바로 이념이 아닌 삶이고, 삶의 육체성이라는 점이다(바흐친의 문학론).   

망명문학은 정치와 분리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문학이다(형식주의 문학론). 이 분리주의 미학은 부르주아 미학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한데, 그것은 정치와 문학뿐만 아니라 삶과 문학 또한 분리․구분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생문학과 다르다. 망명문학은 “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한다. 끝으로, 동반자문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참여문학은 소위 ‘앙가주망문학’을 뜻한다(사르트르의 문학론). 이 계열의 문학은 문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을 닮지만, 적극적인 정치적 발언과 현실 참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의 분리주의 노선과 구별되며 이념문학과 나란하다. 즉 ‘문학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참여문학의 주장이다. 다만 참여하되 ‘문학으로서’ 참여해야 한다. ‘빤스는 입고’ 끼어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야콥슨과 라캉의 이론을 차용하여 이 네 가지 입장의 문학적 세계관을 공식으로 표시해볼 수도 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살펴보면, (1) 이념문학은 라캉의 분류에서 은유에 해당한다. f(S'/S)S=S(+)s이 은유의 공식이다. 여기서 하나의 기표는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해내는데, 오른쪽 항에서 (+)라는 기호는 저항선을 뚫고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미작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기표(S)가 어떤 방식으로든 기의(s)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은유적 적대’ 관계에 놓여 있던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념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사회주의 이념의 문학적 표현으로 기본적으로는 은유적 성격을 갖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존재하는 현실이 아닌 당위적 현실을 묘사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만큼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은유이되 ‘빈곤한’ 은유였다.   

(2) 이념문학과 모순․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생문학은 조금 변형된 은유 공식으로 표시된다. f(S'/S)S=S(-)s이 생문학의 공식이다. 여기서 (-)라는 기호는 기표와 새로운 기의와의 결합이 좌절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생문학의 지배적 수사학은 ‘실패한 은유’이다. 실패한 은유는 기표가 기의와 안정되게 결합하지 못한다.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처럼 생문학에서 의미와의 만남은 한없이 유예된다. 러시아 혁명기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자신의 생을 문학적 질료로 삼은 전형적인 생문학의 시인이다. 가령 대표작이면서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서사시 「열둘」(1918)의 결말을 보라. 12개의 장면을 통해 혁명 직후의 혼란상을 제시한 시인은 마지막 장면에서 눈보라가 치는 도심의 거리를 걸어가는 적위군 병사들 앞에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비록 12란 숫자에 의해 암시되고는 있지만, 그 등장은 돌발적이고 묵시록적이다. 

(…) 그렇게 단호한 걸음걸이로 그들이 간다 -
     뒤에는 - 굶주린 개
앞에는 - 피에 젖은 깃발,
     논보라에 가려 보이지도 않고,
     총알에도 다치지 않으며,
눈보라 속을 부드러운 걸음으로
진주같이 흩날리는 눈발처럼,
     흰 장미 환관을 쓴 -
     앞에는 -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피에 젖은 깃발’과 계열체적 관계에 놓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적위군 지도자의 은유가 될 수 있는가는 불확정적이다. ‘피에 젖은 깃발’이 ‘붉은 깃발’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경계에서 단호하게 걸어가는 (야만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역사의 움직임은 포착하지만, 그것을 의미화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는 시인에게 실현된 이미지가 아니라 요청된 이미지였을 뿐이다. 「열둘」이 사실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은 그 무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 참여문학은 라캉의 공식에서 환유를 따른다. f(S'...S)S=S(-)s이 참여문학의 공식이다. 여기서 환유작용은 기표와 기표의 연결구조(인접성)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끊임없는 기표의 연결고리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만을 드러낸다. 때문에 기표는 기의로 환원되지 못한다. 즉 안정된 환유적 기호들은 안정된 기호의미를 실현하지 못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저항선(-)이 나타내는 것은 그러한 불가능성이다. 블록의 사례와 대조하자면 ‘혁명의 목청’ 마야코프스키의 문학은 이러한 공식에 잘 부합한다. 블록이 낡은 질서로부터 찢겨져 나간 현실의 조각(몽타주)들을 이어붙이는 데 소극적이었다면 마야코프스키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일에 나선다. 대표적인 것은 1917년 혁명에 대한 최초의 소비에트 문학적 대응이라고 할 만한 드라마 <미스테리야 부프>(1918)이다. 이 작품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열둘」의 적위군들처럼 단호한 걸음걸이로 전진하는 ‘불순한 사람들’의 형상화를 통해서 혁명의 대의를 극화한다. <미스테리야 부프>의 제목 그대로 마야코프스키는 미스터리(신비극)와 부프(광대극), 두 가지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즉 그는 부르주아(순수한 사람들)를 ‘부프화’하고 프롤레타리아(불순한 사람들)를 ‘미스터리화’한다.   

블록의 「열둘」과 대비되는 것은 한 배역으로 등장하는 ‘미래에서 온 인간’이다. 마야코프스키 자신이 직접 연기하기도 했던 이 배역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디이다. 눈보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블록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마야코프스키의 그리스도는 새로운 산상수훈을 통해 천상의 왕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의미부여는 임시방편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길’이란 형식은 남겨두고 모든 풍경(내용)들은 당대적인, 당면적인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마야코프스키의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즉 현실과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는 이 드라마는 결코 자족적인 미적 완결체가 아니다. 때문에 인식론적 은유(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점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어떠한 산들을 또다시 폭파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다.”고 한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목청껏 소리 지르고 지옥으로, 천국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전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길’이란 형식은 자연스레 인식론적 환유와 연결된다. 마야코프스키에게서 환유적 욕망은 공간의 확장이란 형식으로 자주 표출되는데, <미스테리야 부프>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대표적이다. 결말에 이르러서 배우와 연출가, 관객의 구분이라는 장애는 모두가 한 무대 위로 올라가 합창하는 장면에서 극복되며, 무대 공간은 전 세계로 확장되어가는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터내셔널리즘의 연극적 번역이기도 했다. 

(4) 망명문학의 공식은 환유의 공식을 역전시킨다. f(S'...S)S=S(-)s이 망명문학의 자리를 표시하는 공식이다. 현실과 인접하여 나란하지만, 망명문학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문학은 또 하나의 정부이고 국가이기에, 망명문학은 달리 ‘문학으로의 망명’을 뜻한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나오는 표현을 빌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가 망명문학적 세계관을 집약해주는 말이다. 왜 불타지 않는가? 원고(문학)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문학들’에 대한 이런 간단한 밑그림 혹은 스케치가 무얼 말해줄 수 있는가. ‘문학들’을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진 않을까. 혹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정말로 ‘문학들’을 갖고 있는가라고. 우리가 쫓고 있는 범인은 과연 ‘그들’일까?   

11. 04. 23. 

P.S. 참고로 본문에서 언급한 블로크와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번역본들이 절판되고 남아있지 않다.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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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문학들이로군요!!! 또 많이 배웠습니다ㅎㅎ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인용돼서 특히 반가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아주 지독하네요^^

로쟈 2011-04-24 18:15   좋아요 0 | URL
화창한 봄날에 감기시라니요.^^;

빵가게재습격 2011-04-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문학(들)을 알려면 수학을 잘 해야겠네요. 오랜만에 로쟈님의 아카데믹한 글 반가웠습니다.^^

로쟈 2011-04-24 18:16   좋아요 0 | URL
라캉이 수학소를 즐겨쓴 탓에 저도 흉내를 내본 것뿐입니다.^^

sommer 2011-04-2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지마의 책은 압도적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군요. 흥미로운 수용이네요.

로쟈 2011-04-24 18:16   좋아요 0 | URL
'한때'였죠. 이미 주요서들은 품절되고 없으니까요...
 

내러티브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다 보니 떠오르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화요일쯤에 좌석버스에선가 읽은 듯싶다. 이번주 한겨레21의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묻고 답하는데,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이 인용돼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최근에 나온 소설 몇 권에 대한 스케치로도 읽을 수 있다.  

 

한겨레21(11. 04. 25)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왜 소설을 읽는가, 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자주 궁리한다. 누군가 멋진 대답을 해놓은 게 있으면 메모를 해두기도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답은 메모의 전당에 올라간다.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론과실천·2001)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작가 체호프를 열광적으로 흠모했던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이렇다. “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306쪽)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처럼 간결하고 정확하게 말하기도 어려울 거다.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에서 ‘시작’과 ‘종말’이라는 말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일단은 출생과 죽음이겠지만, 더 나아가 기쁨과 슬픔, 소유와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만남과 이별 등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는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모른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한동안 신간들을 따라 읽지 못했는데 그새 소설집이 여러 권 나왔다. 이걸 다 어쩌나. 일단 유독 끌리는 한 편씩만을, 체호프를 읽는 쇼스타코비치처럼, 게걸스럽게 읽었다.   

1974년생 작가 김숨의 <간과 쓸개>(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에는 간암을 앓는 67살 사내가 있고 쓸개즙이 넘쳐 장기가 썩는 중인 92살의 누님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일이 한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런 이의 눈에 그를 둘러싼 인간과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낯설어지는지 알게 된다. 아무래도 이 소설의 핵심은 바닥 모를 저수지나 귀뚜라미 시체 같은 이미지들과 사내의 마지막 울음 속에 있겠지만, 나는, 주인공 사내가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져 줍지 못했고, 수도꼭지 잠글 일이 아득하여 서너 대야의 물을 흘려보냈다, 라는 식의 무심한 디테일들에 특히 오래 머물렀다.  

1976년생 작가 윤이형의 소설집 <큰 늑대 파랑>(창비)에서는 ‘결투’를 먼저 읽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인간들이 두 개의 개체로 분리된다고 하자, 각각을 ‘본체’와 ‘분리체’라고 하자, 그럴 경우 어느 쪽이 본체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둘은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한다, 이긴 자가 곧 본체다, 라는 식의 이야기다. 왜 분리되는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1974년생 작가 백영옥의 <아주 보통의 연애>(문학동네)에서도 표제작을 읽었다. 두 권의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의 ‘스타일’과 ‘다이어트’를 탐구한 이 작가는, 장신구나 손잡이나 식사 예절 따위의 사소한 것들의 사회학을 시도했던 게오르크 지멜처럼, 그러나 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

예닐곱 권의 새 소설집 중에서 우선 이 정도를 추천해드린다. 세계관과 스타일에서 사뭇 대조적인 이 세 편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점검해보셔도 좋겠다. ‘메모의 전당’ 운운하면서 말문을 열었으니 또 다른 메모로 글을 닫자.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이른바 ‘신비평’의 이론가로 기억되지만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86)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문학평론가)  

11.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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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스타코비치의 말, 멋지네요. 정확하기도 하구요.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체호프 글의 매력이지 싶어서요. 누구나 항상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만요ㅎㅎ 주말 잘 보내시구요^^

로쟈 2011-04-24 18:17   좋아요 0 | URL
네, 인용을 잘하는 것도 평론가의 자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주의 이론서'라 할 만한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비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후마니타스, 2011)이다. 원서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기에 출간이 반갑지만 아직 서점에 배포되진 않았고 언론쪽으로만 '릴리스'를 한 모양이다. 한겨레에 기사가 올라왔기에 미리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4. 23) “국민국가는 끊임없이 뒤섞이는 개념”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은 19세기 말 뒤로 서구가 중심이 되어 펼쳐낸 근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의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도 전해진 이 말은 그동안 국민, 민족, 국가, 국민국가 등 다양한 옮김말로 소개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우리말로 딱 부러지게 옮길 방법이 없다’고 곤란해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래저래 옮겨보는 국민, 민족, 국민국가 등의 옮김말들은 결국 영어 단어인 ‘네이션’이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번역이 불가능한 채로 주변부에 남겨진 말에 불과한가?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1949~·사진)의 이론에 기대어 본다면, 한반도에서 네이션이 번역되는 과정과 결과 모두가 네이션의 개념에 포함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와 ‘타자’를 나누어, 나의 외부에 있는 타자를 배제해왔던 서구의 식민지배 권력의 본질을 비판한 바 있다. 바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국가(네이션의 옮김말) 담론이 내부 또는 외부라는 단일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중간지대인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섞이는 것이라고 봤다. 바바가 1990년에 엮어서 펴낸 <국민과 서사>는 국민국가 담론을 엮어내는 내러티브(서사)를 파헤치면서, 국민국가의 이런 양가적 성격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소개되는 바바의 저작이다. 식민주의, 문화비평 연구자들의 다양한 논문들을 엮었으며, 바바는 머리말과 함께 나가는 말에 해당하는 논문 ‘디세미-네이션’을 썼다.

인도 출신인 바바는 같은 인도 출신인 가야트리 스피바크, 팔레스타인 출신인 사이드와 더불어 흔히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꼽힌다. 영문학자이며 문화연구가인 바바는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등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사유를 빌려와 자신의 식민주의 연구에 적용해왔다. 혼종성, 모방, 계역성, 양가성 등 난해한 개념어들을 즐겨 쓰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로 꼽힌다. 



국민국가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이 책을 가능하게 한 선행연구라 할 수 있다. 앤더슨은 “국민국가가 새롭고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에도, 그들의 정치적 표현은 언제나 태고의 과거로부터 나타나 무한의 미래로 활주한다”며 국민국가의 양가적 성격을 짚었다. 이에 대해 바바는 근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라는 진보적인 공동체 개념이, 어째서 일관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내러티브를 동원해 국민의 정체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물음을 던진다.

본격적인 연구 논문들로 들어가기 전에, 서구 국민국가 담론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의 저술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실은 것은 이 때문이다. 르낭은 국민이 언어, 종교, 왕조, 인종, 지리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기원했다는 이론들을 하나하나 깨부순 뒤, “국가는 매일의 국민투표”라며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국민국가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 의지를 이루기 위해 역사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바바는 이 지점이 “국가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라며 “국민국가 담론이 주장하는 문화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균열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문화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단일한 기원이나 역사적 권위 등을 내세우는 교육적인 국가 내러티브가 동원되는데, 이는 국민국가 수립에 관련된 폭력을 망각하도록 요구하는 분열적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바바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초역사적·본질주의적 개념으로서 훈육적으로 강요되는 내러티브인 ‘국민(국가)’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국민국가가 자기완결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내부와 외부가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지점에 주목한다. 책을 옮긴 류승구 박사는 “바바는 서구 근대 담론이 상정하는 문화 정체성이 실제로는 내부의 근원적 타자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분열, 그리고 불안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내러티브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정리한다. 훈육적 국가 내러티브를 비판한 바바는 다른 한쪽 영역, 곧 배제되고 억압되고 묻혀버린 소수자들의 개별적이고 지역적인 목소리를 불러낸다. 식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그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내러티브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최원형 기자) 

11.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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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오래 기다린 책인데, 호미 바바의 <국민과 서사>(후마니타스, 2011) 출간 소식을 접했지만 알라딘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밖의 신간에 관해서라면 아주 '조용한' 한 주이다. 경험상 분기의 한 주 정도 있을까 말까 하는. 덕분에 책값이 좀 굳긴 했다. 그래도 지갑을 연다면,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동녘, 2011)는 어떨까. 여성사에 대한 개관으로 아주 간략한 분량이다. 찾아보니 여성사에 관한 책이 생각보단 많지 않다. 몇권을 모아 리스트로 묶어둔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차별을 겪었는지 시대 흐름에 따라 들여다본다. 고대 사회의 모권제 논의부터 중세의 마녀사냥, 페미니즘의 등장, 세계대전 속 여성, 사회주의 속 여성의 삶, 여성노동 차별, 자본주의 시대 여성, 지구화 시대 여성의 모습 등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여성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와 고교 교사인 김정안씨가 여성사의 중요한 맥을 짚어가며 왜 여성은 차별받고 소외돼 왔는지 설명한다. 마녀사냥의 진짜 희생자들은 누구인지, 전쟁이 진정으로 여성을 해방시켰는지 등 흥미로운 질문과 함께 진지하고 명쾌한 해설이 이어진다.(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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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가 몰랐던 인류 절반의 역사
정현백.김정안 지음 / 동녘 / 2011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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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 다시쓰기- 여성사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하여
정현백 지음 / 당대 / 2007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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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사인가- 한 역사가의 치열한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며
거다 러너 지음, 강정하 옮김 / 푸른역사 / 2006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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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세유럽 여성의 발견- 이브의 딸 성녀가 되다
차용구 지음 / 한길사 / 2011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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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이론가로 잘 알려진 조정환의 새책이 출간됐다. '인지자본주의'라는 생소한,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으로 현단계 자본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어제 전철에서 읽은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1. 04. 19) "지금은 ‘인지자본주의’시대” 

구글과 네이버가 돈을 버는 방식은 독특하다. 노동자를 더 고용해 그들이 창출하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과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사람들,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부를 창출한다. 필요와 욕망을 위해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지식IN에 글을 올릴수록 그들은 돈을 벌지만 우리에겐 특별한 보상이 없다.

최근 <인지자본주의>(갈무리)를 출간한, 우리나라 대표적 자율주의 이론가 조정환씨(55)는 이러한 새로운 자본 축적 방식에 주목했다. 18세기까지 이탈리아와 지중해 등을 중심으로 교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것이 상업자본주의라면,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공장과 기계를 통해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가치로 자본을 축적한 것이 산업자본주의다. 이 시대 자본 축적은 엔클로저 운동과 같이 소작인을 강제추방하고 그 땅에 양을 키우거나, 돈 벌려고 상경한 농민들을 공장에서 밤 늦게까지 부리는 ‘폭력성’이 수반됐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본의 축적 방식에 변화가 시작됐다. ‘폭력’이 아니라 ‘동의’를 얼굴로 하고 노동자의 육체력보다 인간의 지식·감정·소통·정보를 자본 축적의 동력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2일 서울 서교동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만난 조씨는 “지난 30여년간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것이 학술 혹은 사회운동의 주요한 관심사였다”며 “지식·감정·소통·정보, 즉 인간의 인지능력을 동력으로 돌아간다고 분석했기 때문에 이를 인지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가 몰락하고 ‘구글’이 뜨는 상황, 공장에 붙여진 ‘정숙’이라는 표어는 없어지고 자유로움을 강조하면서 그 성과는 어디론가 가로채지는 상황, 이것이 조씨가 말하는 제3기 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다. 

 

조씨는 지난 10여년간 연구성과를 토대로 기존의 마르크스 이론뿐만 아니라 인지과학의 성과까지 가져와 현대사회의 변화를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왜 현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매김할 수 있으며, 변혁의 시발점은 어디부터인지를 전망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 사회는 공간 개념부터 변하고 있다. 공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 전체가 생산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기존의 육체적 노동을 넘어 인간의 감정·지식·정서까지 자본 축적에 동원당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 자체도 오늘날에는 하나의 ‘공장’이다.

더욱이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인지자본주의적 분석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게 조씨의 주장이다. 인간이 내놓은 인지력의 성과와 소통 과정을 독점하는 것이 하나의 권력이며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를 촉발시킨 광우병 사건은 광우병의 위험성 자체에 대한 지적 논란이 핵심 중 하나였다. 4대강 문제, 천안함 사건도 과학적 이슈가 중점으로 떠올랐다. 최근 원자력 발전과 방사성물질에 대한 우려 또한 인지적 문제가 농축된 것이다. 그러나 지식·정보는 독점되고 사람들의 감정을 소통하는 통로들은 모두 자본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씨는 최근 벌어진 아랍혁명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는 “무함마드 부아지지라는 한 청년의 분신이 튀니지 혁명을 불러왔고, 와엘 고님이라는 한 청년의 문제제기가 이집트 혁명의 시발점이 됐다”며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라는 오래된 전문 혁명가 집단이 세밀하게 조직한 것이라면 요즘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혁명은 없다”고 말했다. 고교생·청년실업자 등 전문가도 아니고 당원도 혁명가도 아닌 사람들의 감정적·정서적 호소가 이름 모를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인지자본주의’에서 변혁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바탕으로 하면 변혁의 동력은 과거 시대와 완전히 달라진다. 상업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해적이었고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것이 ‘만국 노동자의 단결’을 통한 파업이었다면,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저항은 ‘네트워크’이다. 수없이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대도시 안에 널리 분산돼 있는 사람들, 조씨가 ‘다중’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의 직접 소통과 ‘공통되기’를 통해 인지의 축적과 소통구조를 혁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SNS와 같은 도구를 자본의 축적 방식으로 이용당하지 말고 다중의 것으로 전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랍혁명같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름모를 한 네티즌의 문제제기로 여러 사람이 공감하며 타오른 촛불집회가 그 한 사례다. 조씨는 “촛불집회 때 한 여학생이 한참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고 있는 노조 사람들에게 ‘일어나라’며 호통을 치던 장면이 생생하다”며 “이 변화된 풍경, 이 어린 친구를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것에 하나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씨는 <인지자본주의>에서의 분석을 바탕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혁명의 세계사>(가제) 출간을 준비 중이다.(황경상기자) 

11.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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