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다 보니 떠오르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화요일쯤에 좌석버스에선가 읽은 듯싶다. 이번주 한겨레21의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묻고 답하는데,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이 인용돼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최근에 나온 소설 몇 권에 대한 스케치로도 읽을 수 있다.  

 

한겨레21(11. 04. 25)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왜 소설을 읽는가, 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자주 궁리한다. 누군가 멋진 대답을 해놓은 게 있으면 메모를 해두기도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답은 메모의 전당에 올라간다.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론과실천·2001)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작가 체호프를 열광적으로 흠모했던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이렇다. “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306쪽)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처럼 간결하고 정확하게 말하기도 어려울 거다.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에서 ‘시작’과 ‘종말’이라는 말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일단은 출생과 죽음이겠지만, 더 나아가 기쁨과 슬픔, 소유와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만남과 이별 등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는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모른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한동안 신간들을 따라 읽지 못했는데 그새 소설집이 여러 권 나왔다. 이걸 다 어쩌나. 일단 유독 끌리는 한 편씩만을, 체호프를 읽는 쇼스타코비치처럼, 게걸스럽게 읽었다.   

1974년생 작가 김숨의 <간과 쓸개>(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에는 간암을 앓는 67살 사내가 있고 쓸개즙이 넘쳐 장기가 썩는 중인 92살의 누님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일이 한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런 이의 눈에 그를 둘러싼 인간과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낯설어지는지 알게 된다. 아무래도 이 소설의 핵심은 바닥 모를 저수지나 귀뚜라미 시체 같은 이미지들과 사내의 마지막 울음 속에 있겠지만, 나는, 주인공 사내가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져 줍지 못했고, 수도꼭지 잠글 일이 아득하여 서너 대야의 물을 흘려보냈다, 라는 식의 무심한 디테일들에 특히 오래 머물렀다.  

1976년생 작가 윤이형의 소설집 <큰 늑대 파랑>(창비)에서는 ‘결투’를 먼저 읽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인간들이 두 개의 개체로 분리된다고 하자, 각각을 ‘본체’와 ‘분리체’라고 하자, 그럴 경우 어느 쪽이 본체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둘은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한다, 이긴 자가 곧 본체다, 라는 식의 이야기다. 왜 분리되는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1974년생 작가 백영옥의 <아주 보통의 연애>(문학동네)에서도 표제작을 읽었다. 두 권의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의 ‘스타일’과 ‘다이어트’를 탐구한 이 작가는, 장신구나 손잡이나 식사 예절 따위의 사소한 것들의 사회학을 시도했던 게오르크 지멜처럼, 그러나 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

예닐곱 권의 새 소설집 중에서 우선 이 정도를 추천해드린다. 세계관과 스타일에서 사뭇 대조적인 이 세 편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점검해보셔도 좋겠다. ‘메모의 전당’ 운운하면서 말문을 열었으니 또 다른 메모로 글을 닫자.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이른바 ‘신비평’의 이론가로 기억되지만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86)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문학평론가)  

11.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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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스타코비치의 말, 멋지네요. 정확하기도 하구요.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체호프 글의 매력이지 싶어서요. 누구나 항상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만요ㅎㅎ 주말 잘 보내시구요^^

로쟈 2011-04-24 18:17   좋아요 0 | URL
네, 인용을 잘하는 것도 평론가의 자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