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이론서'라 할 만한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비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후마니타스, 2011)이다. 원서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기에 출간이 반갑지만 아직 서점에 배포되진 않았고 언론쪽으로만 '릴리스'를 한 모양이다. 한겨레에 기사가 올라왔기에 미리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4. 23) “국민국가는 끊임없이 뒤섞이는 개념”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은 19세기 말 뒤로 서구가 중심이 되어 펼쳐낸 근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의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도 전해진 이 말은 그동안 국민, 민족, 국가, 국민국가 등 다양한 옮김말로 소개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우리말로 딱 부러지게 옮길 방법이 없다’고 곤란해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래저래 옮겨보는 국민, 민족, 국민국가 등의 옮김말들은 결국 영어 단어인 ‘네이션’이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번역이 불가능한 채로 주변부에 남겨진 말에 불과한가?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1949~·사진)의 이론에 기대어 본다면, 한반도에서 네이션이 번역되는 과정과 결과 모두가 네이션의 개념에 포함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와 ‘타자’를 나누어, 나의 외부에 있는 타자를 배제해왔던 서구의 식민지배 권력의 본질을 비판한 바 있다. 바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국가(네이션의 옮김말) 담론이 내부 또는 외부라는 단일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중간지대인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섞이는 것이라고 봤다. 바바가 1990년에 엮어서 펴낸 <국민과 서사>는 국민국가 담론을 엮어내는 내러티브(서사)를 파헤치면서, 국민국가의 이런 양가적 성격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소개되는 바바의 저작이다. 식민주의, 문화비평 연구자들의 다양한 논문들을 엮었으며, 바바는 머리말과 함께 나가는 말에 해당하는 논문 ‘디세미-네이션’을 썼다.

인도 출신인 바바는 같은 인도 출신인 가야트리 스피바크, 팔레스타인 출신인 사이드와 더불어 흔히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꼽힌다. 영문학자이며 문화연구가인 바바는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등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사유를 빌려와 자신의 식민주의 연구에 적용해왔다. 혼종성, 모방, 계역성, 양가성 등 난해한 개념어들을 즐겨 쓰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로 꼽힌다. 



국민국가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이 책을 가능하게 한 선행연구라 할 수 있다. 앤더슨은 “국민국가가 새롭고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에도, 그들의 정치적 표현은 언제나 태고의 과거로부터 나타나 무한의 미래로 활주한다”며 국민국가의 양가적 성격을 짚었다. 이에 대해 바바는 근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라는 진보적인 공동체 개념이, 어째서 일관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내러티브를 동원해 국민의 정체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물음을 던진다.

본격적인 연구 논문들로 들어가기 전에, 서구 국민국가 담론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의 저술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실은 것은 이 때문이다. 르낭은 국민이 언어, 종교, 왕조, 인종, 지리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기원했다는 이론들을 하나하나 깨부순 뒤, “국가는 매일의 국민투표”라며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국민국가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 의지를 이루기 위해 역사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바바는 이 지점이 “국가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라며 “국민국가 담론이 주장하는 문화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균열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문화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단일한 기원이나 역사적 권위 등을 내세우는 교육적인 국가 내러티브가 동원되는데, 이는 국민국가 수립에 관련된 폭력을 망각하도록 요구하는 분열적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바바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초역사적·본질주의적 개념으로서 훈육적으로 강요되는 내러티브인 ‘국민(국가)’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국민국가가 자기완결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내부와 외부가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지점에 주목한다. 책을 옮긴 류승구 박사는 “바바는 서구 근대 담론이 상정하는 문화 정체성이 실제로는 내부의 근원적 타자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분열, 그리고 불안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내러티브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정리한다. 훈육적 국가 내러티브를 비판한 바바는 다른 한쪽 영역, 곧 배제되고 억압되고 묻혀버린 소수자들의 개별적이고 지역적인 목소리를 불러낸다. 식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그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내러티브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최원형 기자) 

11.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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