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중앙(11년 봄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문학이란 何오'란 비평특집에 들어간 글이다. 지난 2월 모스크바에서 작성한 것이라 기억에 남는데(기본 아이디어는 10년쯤 전의 것이긴 하다), 몇가지 문학공식(수학공식)이 페이퍼에서는 지워지기에 그간에 포스팅을 보류했었는데, 지워진 대목은 근사치에 가깝게 고쳐넣었다. '문학들이란 무엇인가'가 글의 제목이고, 말하자면 '나의 문학유형학'이다.

  

문예중앙(11년 봄호) 문학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의 자리가 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이었나?’란 물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오래전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혹은 소비사회의 도래와 함께 ‘문학의 죽음’이 애도되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죽음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죽음이었던지 문학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이기 전이다. 그것은 애초에 식은 감자였던 것일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만 뜨거웠던 것일까. 이제 ‘문학들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묻는다. ‘문학의 죽음’ 이후에도 문학이 존속한다면, 존속해왔다면 애초에 그것은 ‘문학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죽는 문학이 있고, 사는 문학이 있는 것일까. 혹은 살아서 죽는 문학이 있고, 죽어야 사는 문학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문제는 이제 문학이 아니라 문학들이다. 그것이 문학에 대한 사유가 혹은 추리가 도달하게 된 어떤 물음의 장소이다. 물음은 언제나 추리의 형식을 띤다. 문학이란 범인은 이제 혼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수이다. 그 다수의 문학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문학들의 자리에 대해 잠시 말해보고 싶다. 능력이 닿는다면 그 자리 혹은 현장의 배치도나 위상학 혹은 생태학을 제시하면 좋으련만, 이건 그저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주로 러시아문학의 사례를 동원한 것은 ‘문학들’의 어떤 기원과 함께 원형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다.    

먼저, 문학 혹은 문학들이 놓인 자리를 ‘문학장’이라고 말해보자. 문학장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정의에 따르면, 장(Champ)이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소세계를 지칭한다(문학은 ‘작은 감자’다). 이 소세계는 대세계처럼 사회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소세계는 대세계의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한 부분적 자율성을 보유한다. 즉 완전히 타율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모든 장은 세력의 장이며 이 세력을 유지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의 장이다. 즉 불평등하게 배분된 자본을 소유한 행위자들이 정당성의 독점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투쟁의 사회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비가시적 관계의 소산이다.  

부르디외가 분석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학장에서 이러한 투쟁의 자본은 문학적 인정과 경제적 이익이지만, 전통적으로 문학장에서 인정투쟁의 규칙은 정치적․제도적 인정(타율성)과 미학적 인정(자율성)이었다(경제적 이익은 상업적 인정으로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규칙은 문학의 정치적 타율성․종속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이 문학장은 의미론적 구조를 갖는다. 문학의 타율성(이념성)과 자율성이라는 개념적 대립쌍을 구조의미론의 의미소 S1과 S2로 지정하면, 그와 모순관계의 의미소 -S1과 -S2를 도출해낼 수 있고, 이 네 가지 의미소는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사각형이라는 의미론적 위상공간을 형성한다. 이 관계를 단순화한 명제형식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S1과 S2, -S1과 -S2는 각각 대립관계이고, S1과 -S1, S2와 -S2는 모순관계이며, S1과 -S2, S2와 -S1은 포함/전제관계이다.)        

            <정치적 인정>               <미학적 인정>

                   S1                                S2
           (문학은 타율적이다)      (문학은 자율적이다) 
                                                      
                   -S2                              -S1
       (문학은 자율적이지 않다) (문학은 타율적이지 않다)

문학장을 구성하는 이 네 가지 입장은 보다 구체적인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다. 즉 S1은 이념문학, -S1은 (생철학에 빗대) 생문학, S2는 망명문학, -S2는 참여문학이라고 불러보자. 이념문학은 정치현실에의 복무를 주장하는 문학이다. ‘정치적으로 옳은 것이 문학적으로도 옳다’는 것이 이념문학의 구호다. 때문에 그것은 자기 이념의 정당성에 대해 확신하는 ‘단의성의 신화’(피에르 지마)를 구축하고자 한다(루카치의 문학론). 이러한 이념문학과 모순․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이 모든 의미의 분산 혹은 해체를 조장하는 불온한 문학으로서의 생문학이다. 그것은 “문학적으로 옳은 것이 정치적으로도 옳다”고 말한다. 생문학에서 삶과 문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한편으론 그런 의미에서 이 삶과 문학의 비분리성은 이념문학에서 이념과 문학의 비분리성과 닮았다. 차이라면 생문학의 난센스와 카니발리즘적 다의성의 근거가 바로 이념이 아닌 삶이고, 삶의 육체성이라는 점이다(바흐친의 문학론).   

망명문학은 정치와 분리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문학이다(형식주의 문학론). 이 분리주의 미학은 부르주아 미학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한데, 그것은 정치와 문학뿐만 아니라 삶과 문학 또한 분리․구분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생문학과 다르다. 망명문학은 “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한다. 끝으로, 동반자문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참여문학은 소위 ‘앙가주망문학’을 뜻한다(사르트르의 문학론). 이 계열의 문학은 문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을 닮지만, 적극적인 정치적 발언과 현실 참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의 분리주의 노선과 구별되며 이념문학과 나란하다. 즉 ‘문학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참여문학의 주장이다. 다만 참여하되 ‘문학으로서’ 참여해야 한다. ‘빤스는 입고’ 끼어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야콥슨과 라캉의 이론을 차용하여 이 네 가지 입장의 문학적 세계관을 공식으로 표시해볼 수도 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살펴보면, (1) 이념문학은 라캉의 분류에서 은유에 해당한다. f(S'/S)S=S(+)s이 은유의 공식이다. 여기서 하나의 기표는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해내는데, 오른쪽 항에서 (+)라는 기호는 저항선을 뚫고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미작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기표(S)가 어떤 방식으로든 기의(s)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은유적 적대’ 관계에 놓여 있던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념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사회주의 이념의 문학적 표현으로 기본적으로는 은유적 성격을 갖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존재하는 현실이 아닌 당위적 현실을 묘사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만큼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은유이되 ‘빈곤한’ 은유였다.   

(2) 이념문학과 모순․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생문학은 조금 변형된 은유 공식으로 표시된다. f(S'/S)S=S(-)s이 생문학의 공식이다. 여기서 (-)라는 기호는 기표와 새로운 기의와의 결합이 좌절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생문학의 지배적 수사학은 ‘실패한 은유’이다. 실패한 은유는 기표가 기의와 안정되게 결합하지 못한다.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처럼 생문학에서 의미와의 만남은 한없이 유예된다. 러시아 혁명기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자신의 생을 문학적 질료로 삼은 전형적인 생문학의 시인이다. 가령 대표작이면서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서사시 「열둘」(1918)의 결말을 보라. 12개의 장면을 통해 혁명 직후의 혼란상을 제시한 시인은 마지막 장면에서 눈보라가 치는 도심의 거리를 걸어가는 적위군 병사들 앞에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비록 12란 숫자에 의해 암시되고는 있지만, 그 등장은 돌발적이고 묵시록적이다. 

(…) 그렇게 단호한 걸음걸이로 그들이 간다 -
     뒤에는 - 굶주린 개
앞에는 - 피에 젖은 깃발,
     논보라에 가려 보이지도 않고,
     총알에도 다치지 않으며,
눈보라 속을 부드러운 걸음으로
진주같이 흩날리는 눈발처럼,
     흰 장미 환관을 쓴 -
     앞에는 -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피에 젖은 깃발’과 계열체적 관계에 놓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적위군 지도자의 은유가 될 수 있는가는 불확정적이다. ‘피에 젖은 깃발’이 ‘붉은 깃발’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경계에서 단호하게 걸어가는 (야만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역사의 움직임은 포착하지만, 그것을 의미화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는 시인에게 실현된 이미지가 아니라 요청된 이미지였을 뿐이다. 「열둘」이 사실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은 그 무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 참여문학은 라캉의 공식에서 환유를 따른다. f(S'...S)S=S(-)s이 참여문학의 공식이다. 여기서 환유작용은 기표와 기표의 연결구조(인접성)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끊임없는 기표의 연결고리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만을 드러낸다. 때문에 기표는 기의로 환원되지 못한다. 즉 안정된 환유적 기호들은 안정된 기호의미를 실현하지 못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저항선(-)이 나타내는 것은 그러한 불가능성이다. 블록의 사례와 대조하자면 ‘혁명의 목청’ 마야코프스키의 문학은 이러한 공식에 잘 부합한다. 블록이 낡은 질서로부터 찢겨져 나간 현실의 조각(몽타주)들을 이어붙이는 데 소극적이었다면 마야코프스키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일에 나선다. 대표적인 것은 1917년 혁명에 대한 최초의 소비에트 문학적 대응이라고 할 만한 드라마 <미스테리야 부프>(1918)이다. 이 작품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열둘」의 적위군들처럼 단호한 걸음걸이로 전진하는 ‘불순한 사람들’의 형상화를 통해서 혁명의 대의를 극화한다. <미스테리야 부프>의 제목 그대로 마야코프스키는 미스터리(신비극)와 부프(광대극), 두 가지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즉 그는 부르주아(순수한 사람들)를 ‘부프화’하고 프롤레타리아(불순한 사람들)를 ‘미스터리화’한다.   

블록의 「열둘」과 대비되는 것은 한 배역으로 등장하는 ‘미래에서 온 인간’이다. 마야코프스키 자신이 직접 연기하기도 했던 이 배역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디이다. 눈보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블록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마야코프스키의 그리스도는 새로운 산상수훈을 통해 천상의 왕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의미부여는 임시방편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길’이란 형식은 남겨두고 모든 풍경(내용)들은 당대적인, 당면적인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마야코프스키의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즉 현실과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는 이 드라마는 결코 자족적인 미적 완결체가 아니다. 때문에 인식론적 은유(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점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어떠한 산들을 또다시 폭파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다.”고 한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목청껏 소리 지르고 지옥으로, 천국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전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길’이란 형식은 자연스레 인식론적 환유와 연결된다. 마야코프스키에게서 환유적 욕망은 공간의 확장이란 형식으로 자주 표출되는데, <미스테리야 부프>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대표적이다. 결말에 이르러서 배우와 연출가, 관객의 구분이라는 장애는 모두가 한 무대 위로 올라가 합창하는 장면에서 극복되며, 무대 공간은 전 세계로 확장되어가는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터내셔널리즘의 연극적 번역이기도 했다. 

(4) 망명문학의 공식은 환유의 공식을 역전시킨다. f(S'...S)S=S(-)s이 망명문학의 자리를 표시하는 공식이다. 현실과 인접하여 나란하지만, 망명문학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문학은 또 하나의 정부이고 국가이기에, 망명문학은 달리 ‘문학으로의 망명’을 뜻한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나오는 표현을 빌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가 망명문학적 세계관을 집약해주는 말이다. 왜 불타지 않는가? 원고(문학)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문학들’에 대한 이런 간단한 밑그림 혹은 스케치가 무얼 말해줄 수 있는가. ‘문학들’을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진 않을까. 혹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정말로 ‘문학들’을 갖고 있는가라고. 우리가 쫓고 있는 범인은 과연 ‘그들’일까?   

11. 04. 23. 

P.S. 참고로 본문에서 언급한 블로크와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번역본들이 절판되고 남아있지 않다.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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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문학들이로군요!!! 또 많이 배웠습니다ㅎㅎ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인용돼서 특히 반가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아주 지독하네요^^

로쟈 2011-04-24 18:15   좋아요 0 | URL
화창한 봄날에 감기시라니요.^^;

빵가게재습격 2011-04-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문학(들)을 알려면 수학을 잘 해야겠네요. 오랜만에 로쟈님의 아카데믹한 글 반가웠습니다.^^

로쟈 2011-04-24 18:16   좋아요 0 | URL
라캉이 수학소를 즐겨쓴 탓에 저도 흉내를 내본 것뿐입니다.^^

sommer 2011-04-2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지마의 책은 압도적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군요. 흥미로운 수용이네요.

로쟈 2011-04-24 18:16   좋아요 0 | URL
'한때'였죠. 이미 주요서들은 품절되고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