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경향신문에서 '목수정의 파리통신'을 옮겨놓는다(지난번 신형철 칼럼과 짝을 이룰 만하다).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가 제목이어서, '좀 센데!'하며 클릭했는데, MB 얘기가 아니라 사르코지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MB 얘기. 위안거리는 그렇게 잘났다는 프랑스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 베를루스코니를 총리로 둔 이탈리아 국민들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번 월드컵에서 나란히 죽을 쒔다는 점도 공통적이군. 정치사에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세 나라 국민의 다음 번 선택이 벌써 궁금하다...  

경향신문(10. 07. 17)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 

‘난 소중하니까.’ 10년 전쯤, 지겹도록 들었던 저 광고의 주인공, 로레알사가 프랑스를 스캔들 정국으로 몰아넣는 중이다. 어지간한 남의 인생살이엔 콧방귀도 안 뀌는 이 동네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이 집안 얘기를 속속들이 알게 된 연유는 재벌가에서 벌어진 그 흔한 재산 소송의 귀퉁이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에게로 흘러간 불법 정치자금의 꼬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87세의 릴리안 베탕쿠르는 로레알사 창업주의 딸로, 로레알사 주식의 31%를 점유하고 있는 프랑스 제1의 거부다. 이 여인의 주변을 40여년 전부터 맴도는 사람이 있었으니, 소위 다큐전문 사진작가 바니에란 자다. 꾸준히 베탕쿠르가 주변을 맴돌던 그는, 20년 뒤 베탕쿠르 가족의 절친이 되기에 이른다. 귀도 성치 않고, 심신 상태도 흐릿해진 릴리안의 심리를 조정하여 약 1조5000억원에 이르는 돈을 빼간 혐의로 이 자를 고소하고, 어머니가 자산관리 부적격자이니 자신이 그 대리인 역할을 하겠다고 외동딸이 소송을 걸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릴리안은 인생 최고의 낙이 바니에와의 대화였다며, 딸의 방해로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딸이 오히려 자신을 모함한다고 항변한다. 그 와중에 릴리안의 경리담당 직원이 비밀리에 녹음테이프에 담아오던 몇 가지 진실을 법정에서 폭로하고, 언론에 진술하면서 사르코지가 시장이던 시절부터 그와, 그의 대선자금 담당이던 뵈르트(현 노동부 장관)에게 지속적으로 불법 정치자금이 건네진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다급해진 사르코지는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과 측근의 결백을 소리 높여 주장하였으나,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은 분위기다. 그러면서 연금개혁(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연장하는)은 끝까지 밀어붙인다고 천명한다. 프랑스의 모든 노조들이 총력을 다해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연금개혁이다. 이제 그의 지지율은 프랑스의 그 어떤 대통령도 가보지 못했던 26%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대통령의 발언보다, 일개 경리직원의 말을 사람들이 더 신뢰하기까지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23살의 대학도 아직 안 졸업한, 오토바이 뺑소니 경력의 심히 의심스러운 청년을, 단지 사르코지의 아들이란 이유로 정부 고위직에 임명하려다, 천지를 뒤흔드는 조롱소리에 카드를 잠시 내려놓은 일도 있었다. 농민박람회에서 만난 농민에게 악수를 청한 사르코지의 손을 한 농민이 회피하자, “꺼져버려, 이 멍청아”라고 시원하게 내질러 유튜브의 톱스타가 된 적도 있다. 교황과의 면담 중에 아내 브루니에게 문자를 보내다가 들킨 사건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2008년, 사르코지가 임기 1년을 넘겼을 때, 프랑스의 유력 주간지 마리안은 표제로 “제기랄, 4년이나 남았어!”를 뽑아냈다. 친부자 반서민 색깔이 명백한 데다, 경악할 수밖에 없는 언어감각, 게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한 사르코지를 1년간 겪고 난 프랑스인들의 피로감을 정확하게 드러낸 한마디였다. 집권 3년차에 해당하는 지난 1년을 르몽드는 “끔찍한 한해”라고 묘사했다. 한 동안 시사주간지들은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표지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어딘지 좀 이상해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얼굴은 사르코지였다. “사르코지 왕조” 라는 유행어를 뒷받침하는 섬뜩한 패러디였다. 프랑스 사람들과 정치얘기를 하면, 꼭 우리나라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친밀감을 급격히 느끼는 요즘이다.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 우리는 소중하니까.(목수정 | 작가·프랑스 거주) 

10.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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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이면 이번주 리뷰도서들의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개인적으론 게임이론 관련서 두 권도 꼽아두고 싶다. 톰 지그프리트의 <호모 루두스>(자음과모음, 2010)과 브루스 부에노스 데 메스키타의 <프리딕셔니어 미래를 계산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전자는 과학 저널리스트가 쓴 책으로 부제는 '존 내시의 게임이론으로 살펴본 인간본성의 비밀'이고, 후자는 국제정치학자가 쓴 것으로 '북핵 문제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게임이론이 보여주는 미래 설계도'가 부제다. 원론적인 책과 그 응용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래 전에 나온 책으로 윌리엄 파운드스톤의 <죄수의 딜레마>(양문, 2004)와 같이 손에 들고 싶어진다.   

<죄수의 딜레마>는 박스보관도서라 읽어보려면 도서관 신세를 져야 하지만, <호모 루두스>는 책상맡에 놓여 있다(<프리딕셔니어>는 구해봐야겠다). 책의 원제는 '아름다운 수학'을 뜻하는 <뷰티풀 매스(A Beautiful Math)>.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책 <뷰티풀 마인드>(승산, 2002)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화되기도 한 존 내시의 전기 말이다. 게임이론의 창시자는 폰 노이만이지만 그것을 '완성'한 공로가 내시에게 있다고 해야 할까. 내시의 기여가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책을 읽으면서 확인해봐야겠다.    

게임이론보다 더 화급한 주제를 다룬 책들도 이번주 관심도서다. '지구의 미래'를 화두로 내건 책 프란츠 알트의 <지구의 미래>(민음인, 2010)와 디냐르 고드레지의 <기후변화, 지구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가?>(이후, 2010)가 또 두 권의 책이다. 프란츠 알트는 <생태적 경제기적>(양문, 2004), <생태주의자 예수>(나무심는사람, 2003) 등이 이미 소개된 바 있는 독일의 방송인이자 환경운동가.   

생태경제학자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는 이렇다. "프란츠 알트는 대중들에게 환경 문제의 심각성과 대안의 가능성을 알기 쉽게 풀어 준다. <불편한 진실>의 앨 고어, <침묵의 봄>의 레이첼 카슨,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의 반다나 시바와 함께, 우리 시대의 가장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저자 중 한 명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디냐르 고드레지의 책은 '아주 특별한 상식' 시리즈의 한 권인데, 2007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다. 역자도 바뀌었는데, '해당 분야 전문가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것으로 보아 초판엔 오류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지구의 미래'가 눈길을 끈 것은 두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멕시코만의 기름유출이 최악의 생태계 재앙을 가져올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다. 한마디로 '기름에 오염된 지구의 미래'다. 오늘 아침 기사는 이렇다.  

 

지난 4월30일 석유시추시설 폭발로 시작된 원유 유출로 미국 멕시코만에 생태계 파괴라는 최악의 재앙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흘러나온 원유 탓에 해양생물이 죽어가거나 오염되는 가운데 기름에 찌든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유가 닿은 해역 인근에서는 우렁쉥이 사촌격인 피로솜(pyrosome)이 떼죽음을 당했다. 젤리 같은 피로솜은 길이 15~20㎝의 오이 모양으로 바다거북과 참치 등의 주된 먹이다. 게다가 물고기와 거북이, 바다새의 먹이는 어린 게의 껍데기 속에서 기름방울들이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원유와 천연가스를 먹는 아주 작은 박테리아들도 급증하고 있다.

15일 AP통신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해양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십억달러 규모의 멕시코만 어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껏 유출된 원유량은 6억 8900만ℓ, 천연가스 3억 4000만㎥로 추산됐다.

해양학자 존 케슬러와 루이지애나주 튤레인대 데이비드 밸런타인 교수는 최근 오염해역을 조사한 결과, 해저 900여m 아래의 천연가스 농도가 정상치의 10만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농도가 높아지면 가스가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될 때 산소 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해양생물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또 멕시코만 오염 해역의 수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수천마리의 피로솜은 마치 ‘대량 학살’과도 같다며 원유의 유독물질을 원인으로 추정했다.(서울신문)

규모로 보아 이미 이 기름유출 사건은 전 지구적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라고 뒤질세라 지구 종말을 앞당기는 데 거들고 있는 '4대강' 사업도 가관이다. 역시나 오늘 아침 기사의 일부다.    

4대강사업구간 퇴적토에 중금속이 검출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석면석재를 사용한 것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이 사업구간에서 석재로 사용됨에 따라 수도권시민들이 오염된 식수에 노출될 수 있다며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석재란 채석장에서 캐낸 큰 돌을 말하며 주로 방조제 공사나 조경공사에 쓰인다. 환경운동연합은 12일과 14일 두 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4대강사업 한강살리기 15공구(제천지구)사업장과 남한강본류 한강8공구(충주2지구)에서 잇따라 석면석재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발견된 트레몰라이트 석면은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에서 1급 발암물질로 규정한 물질이다. 1급 발암물질이란 것은 사람에게 확실하게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분류된다.

특히 석면의 경우 노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야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침묵의 살인자’로 부릴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해성이 입증된 물질이다. 석면은 머리카락 굵기의 수백~수천분의 1정도로 미세해 공기 중으로 노출되면 사람의 코나 기관지에 걸리지 않고 바로 폐 깊숙이 침투한다. 때문에 석면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폐암이나 폐증, 늑막이나 흉막에 악성종양이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석면이 식수를 오염시킬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는 것인데 환경단체들은 석면이 잘 부서져 물에 뜨는 특성상 충분히 오염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석면이 돌이기 때문에 물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현장을 가보면 석면이 부서진 가루와 먼지들이 물에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현장 바로 아래쪽에 취수장이 있는 것을 보고 상수원 오염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고 전했다.(메디컬투데이)

한심하고 답답한 마음에 원고를 쓰다 말고 기사를 인용하며 몇 자 적었다... 

10.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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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엇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24 09:15 
    이번주에 눈길을 끄는 책들도 게임이론 관련서 두 권을 꼽았는데, 두 권이 더 있다(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는 기억할 만한 주이다). '인간행동 예측이론 책'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7. 24) 나는 네가 할 일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철학자 칼 포퍼는 1959년에 쓴 에세이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이 바로 예측의 꿈이다. 우리는 일식
 
 
yamoo 2010-07-16 13:2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죄수의 딜레마>보다는 애비니쉬 딕쉬트의 <전략적 사고>가 훨씬 괜찮았던거 같습니다. 게임이론에 관계된 책 중에서 가장 쉽고 풍부한 사례를 담고 있는 있는 책이 아닌가 합니다..

로쟈 2010-07-16 13:27   좋아요 0 | URL
저는 진화생물학적 응용에 관심이 있어서 <협력의 진화> 같은 책을 꼽고 싶긴 하네요. <전략적 사고>는 많이 보던 책인데, 어느새 절판됐나 봅니다...

lefebvre 2010-07-17 02:28   좋아요 0 | URL
게임이론에 흥미가 있으신줄은 몰랐습니다. ^^ 저희 신간 <두뇌를 팝니다>의 저자에 따르면 게임이론은 구소련 지도부들의 행동패턴을 분석하기 위해서 (발명이 아니라) 계발되었다고 하더군요. 노이만도 한 몫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내시를 "미치게 만든 곳"도 게임이론의 산실 랜드연구소네요. 게임이론가치고 랜드연구소를 거쳐가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내시 전기에 랜드연구소 얘기가 나오나 모르겠네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로쟈 2010-07-17 08:48   좋아요 0 | URL
<호모 루두스>에도 랜드연구소가 언급됩니다.^^ '랜드사'라고 번역됐네요...
 

'로쟈의 컬렉션'이란 카테고리를 얼마전에 만들어놓고 따로 페이퍼를 쓰지 못했다. 이게 '컬렉션'이니만큼 남들이 안 갖고 있을 법한 책을 구해놓고 '자랑질'을 해보겠다는 심사 혹은 계산으로 하나 더해놓은 것인데, 파리만 날리는 걸 보면 자랑할 일이 꽤나 드물다는 반증이다. 사실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보부아르의 자서전 얘기를 적어놓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치면서 흐지부지됐을 뿐이다. 너무 적조하다 싶어서, 억지로 하나 끼워넣는다. 어제 구입한 빅토리아 알렉산더의 <예술사회학>(살림, 2010) 얘기다.   

저자의 머리말과 역자의 말('옮기고 나서')를 읽다 보니, 소프트카바의 책으론 비교적 '고가'인 이유가 '교재용'이어서 그런가 보단 생각이 들었다(독자가 한정돼 있을 경우 책값은 올라간다). 머리말의 첫머리가 이렇다. 

나는 지금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예술사회학에 대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학생들은 매번 내가 수업에서 다룰 내용을 개략적으로 한 권에 담은 교재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요청에 부응하여 하나 써주신 것. 하버드대학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리(Surrey)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저자는 아직은 이 분야의 소장학자로 보인다. 다만 이 분야의 연구성과나 최신 동향, 소위 '최전선'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까라는 게 나의 기대다. 특이사항은 저자가 조직사회학자이기도 하다는 것. 학부 때 내가 들은 사회학 강의의 담당교수는 '범죄사회학'과 '종교사회학'을 번갈아가면서 강의하던 분이었는데(그래서 나는 '종교=범죄'라고 서로 통하는 게 있구나 싶었다. 아니면 범죄자들을 종교로 구원한다는 뜻이었을까?), 알렉산더의 경우는 '예술사회학'과 '조직사회학'을 동시에 혹은 교대로 강의하는 모양이다.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나는 조직사회학도 강의해왔는데, 이때 배운 한 가지는 학생들이 추상적인 이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이끄는 사례 연구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 효과적인 교수법이라는 점이다. 사례 연구는 일이나 직업, 그리고 조직 행위를 가르치는 데 필수적이지만 사회학의 다른 하위 분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조직사회학 강의를 하면서 사례 연구의 유용성을 확신하여 이를 예술사회학 수업에도 적용했는데 역시 사례 연구는 효과적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에는 장마다 사례 연구가 덧붙여졌다는 얘기. 최근의 화제작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다양한 사례의 제시는 강의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면서 학생들의 집중도도 높일 수 있다. 저술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기대해봄직하지 않은가. 국내에서도 인문서 저자들이 적극 고려해볼 문제다.   

한편, 옮긴이의 말에선 이런 대목을 읽을 수 있다. 공역자의 한 사람인 이대 사회학과의 최샛별 교수가 적은 것이다(문화론과 문화사회학 분야의 역서들이 몇 권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수업 '예술사회학'에서 사용했는데 주교재로도 손색이 없었다. 학부 교양과목으로 '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수업을 개발하고 담당하면서 내용의 일부를 다루었더니 다양한 전공을 지닌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얘기. 부제대로 '순수예술에서 대중예술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책의 장점인데, 역자는 사회학자로서의 바람도 덧붙인다.  

그동안 예술은 미학에서 주로 작가와 작품에 주목하여 그 심미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다루어 왔다. 역자들은 사회학이 예수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유용한 시각을 제공하기를 소망한다.

사실 원론적인 바람이긴 하나 소개되는 책이 적으니 여러 몫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튼 예술사회학 교재 하나는 확실히 마련된 걸로 쳐도 좋겠다... 

10. 07. 16.     

P.S. 사소한 교정사항 하나를 덤으로 적어둔다. 속표지 저자 소개에 빅토리아 D. 알렉산더 교수의 저작이 <미술관과 자본>(2005)과 공저 <예술과 국가>(1996)라고 소개되는데, 두 저작의 출판년도가 바뀌었다. <미술관과 자본>(1996), <예술과 국가>(2005)라고 해야 맞다. <예술사회학>(2003)의 후속작으로 메릴린 루시마이어와의 공저인 <예술과 국가>는 흥미를 끄는 책이다. 이걸 구했다면 제법 '자랑질'이 됐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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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1:30   좋아요 0 | URL
오늘 랑시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을 '잠깐' 열어볼 시간이 있었습니다. 역자 소개로는, 랑시에르가 기존의 예술이 정치적 위계화-감성의 분할에 묶여 있음을 비판했다고 하던데요... 긴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얘기였는데요, 로쟈님 페이퍼를 읽으니 낮의 잠깐이 떠오릅니다. 저도 엄청 땡기는데요... <예술과 국가>도요...^^ 사례의 풍부함은 태도들의 풍부함, 유머 감각의 함양으로부터 가능한 거라서... 그야말로 '문화적 여유'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엄청 콤플렉스 느끼는 부분입니다. 아마 샌델의 '정의'가 호소력 있었던 것은 그런 여유로운 화법에 대한 갈증, 부러움 등등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로쟈 2010-07-16 09:04   좋아요 0 | URL
샌델의 책만 유독 그런 건 아니고 철학서들이 기발한 사고실험이나 사례들을 많이 동원하지요. 그쪽 '문화' 같기도 해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고리타분한 책이 많지요...
 

필요 때문에 그래픽 노블의 걸작이라는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를 읽어보게 됐다. 책은 지난 5월에 출간됐는데, SF독자라면 이번 여름 필독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늦게나마 서평기사를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5. 29) 지구 저편 ‘어둠의 도시’에선 무슨 일이?

소녀 마리는 갑자기 기울어져버렸다. 사선으로 서 있고 걷는다. 그 탓에 어디서건 ‘왕따’다. 서커스단만 마리를 반긴다. 자신을 고쳐줄 유일한 과학자를 찾아가니 그는 마리가 다른 행성의 중력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천체의 축 정반대편에 있어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미지의 세계다. 마리는 그곳을 향하는 우주선에 올라탄다. 마리가 사는 세계는 지구와 닮았지만 지구는 아니다. 그 반대편 ‘어둠의 도시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지구의 화가 오귀스텡은 평론가들의 혹평에 질렸다. 그는 도시를 떠나 오브라크 고원지대를 떠돌다 저택을 발견하고 그 벽에 홀린 듯이 둥그런 구(球)들을 그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느 구 하나에 균열을 만든다. 이후 그는 그 집 어두운 복도를 빨려 들어가듯 걷다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어디인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마리와 오귀스텡은 만난다. 



이 기묘한 이야기가 1983년부터 이제까지 이어져온 에스에프 만화의 걸작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의 문을 연다. 브누아 페테르스가 글을 쓰고 프랑수아 스퀴텐이 그림을 그린 이 시리즈는 총 16권, 거기에 디브이디, 각종 관련 전시, 세미나 등으로 가지를 쳤다. 두 사람은 27년 동안 지구의 반대편 거울 세계, 검은 도시들의 대륙을 완성해가는 중이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조심해야 한다. 다시 나가기 어렵다. 마리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싶나? 달라서 배척당하는 소수자의 삶,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그렇게 가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비트는 이야기일까? 우리가 아는 세계는 반쪽뿐이고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는 암시일까? 이 거울, 우리 모습을 비춘다 싶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데 어느새 기괴한 상상의 세계를 투영해 시선을 묶어둬버린다. 잡았다 싶으면 그새 모습을 바꿔버리는 동물, 그래서 끝까지 좇게 만드는 새다.

이 거울의 매혹적인 수작은 <보이지 않는 국경선>에도 이어진다. 신참 지도제작사 롤랑의 이야기이다. 소드로브노볼다치 정부는 지도제작국을 활용해 ‘위대한 영토의 국경’을 확정하려 한다. 지도제작사들은 종교의 지도, 물류의 지도 등 모두 달라 국경은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해도 소용이 없다. 정부는 팽창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작국에서 사람의 섬세한 결은 사라지고 기계가 지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혼란 통에 롤랑은 스코드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 등에서 옛 국경과 일치하는 지도를 발견한다. 공격적 민족주의의 대한 경고일까? 인간에게서 오직 지도만 봤던 지도제작자의 비극일까?

<우르비캉드의 광기> 속 우르비캉드는 계획도시이다. 이 도시의 파국은 로빅의 책상에서 비롯됐다. 희한한 육면체를 책상 위에 놓아뒀는데 그게 식물처럼 점점 거대하게 자라 갈라진 남과북, 사람들을 잇는다. 이 이야기는 육면체에 대한 한 보고서로 마무리된다. “비인간화된 도시에 대한 자연의 승리”, “무정부주의적인 전복의 움직임”…. 육면체에 대한 여러 해석을 설명한 뒤 보고서 작성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간단하지만 무한한 결론으로 열려 있는 이 구조물은 신들이 어둠의 도시에 사는 인간들에게 보낸 신비한 물체다. 신들은 이를 통해 인간이 제아무리 오만해도 결국 세상 만물의 본질은 그 신비로움에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자체가 이 육면체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무한한 결론으로 열려 있는 이야기, 세상의 비밀, 상상의 경계를 다 담을 때까지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이야기 말이다. 황홀한 그림체와, 건축 지식, 철학적 상징으로 뭉친 이 육면체 퍼즐은 너무 익숙해 못 보던 우리 자신의 세상을 낯설게 보여주거나, 또는 그 너머의 세계를 그리며 신비한 마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세미콜론은 시리즈 가운데 모두 열두권을 출간할 예정이다.(김소민기자)

10.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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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를 읽다가 관심을 갖게 된 저자는 어슐러 르 귄이다. 이미 SF 독자라면 페이퍼의 제목이 르 귄의 두 작품명이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샌델이 인용하는 건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인데(63쪽에 인용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바로 떠올려주기에 흥미가 생겼다. 정작 르 귄은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와는 간접적인 영향관계다). SF소설로서라기보다는 유토피아 문학으로 대표작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을 읽어볼까 싶다. 오래전 글이긴 한데, 정재승 교수의 소개글을 참고삼아 챙겨둔다.    

  

씨네21(02. 12. 07)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올 한해 두드러진 출판경향 중 하나는 그동안 문단과 독자로부터 냉대받아온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들이 완역·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걸작 <셜록 홈스 전집>과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 큰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추리문학의 숨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 전집>이나 고급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시리즈>가 완역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추리소설과 함께 아웃사이더 장르 취급을 받아온 SF소설의 걸작들도 하나둘씩 다시 출간될 채비를 하고 있어 각별히 주목된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미국 SF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SF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수작 <어둠의 왼손>(시공사 펴냄)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펴냄)이 세련된 편집본으로 재출간된 것은 자유추리문고 문고판으로 처음 르 귄을 접했던 SF마니아들에겐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일반 SF소설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선 아직 소개가 미흡한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르 귄은 ‘헤인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소설 속에서 우주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헤인인들이 거주 행성의 환경에 맞춰 독특한 문명과 세계관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 독특한 상황을 설정했다. 이때 광속을 뛰어넘는 통신수단 ‘엔서블’이 발명되면서 이들 문명은 서로 충돌과 연합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로캐넌의 세계>(1966)에서부터 최근작 <세계의 탄생일>(2002)에 이르기까지 11편의 헤인 시리즈 작품들 중에서도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은 권위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어둠의 왼손>은 지구를 모태로 하는 에큐멘 연방에서 인류 연대를 위해 파견된 대사 ‘겐리 아이’가 여러 난관 끝에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결국 게센과 동맹을 맺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소설에서 과학기술의 진보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전제가 아니며, 좀더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성숙, 즉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따라서 빛과 어둠, 두려움과 용기, 추위와 따뜻함, 여성과 남성은 둘인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라는 대사는 르 귄 자신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게센인이 남녀 구분이 없는 양성인으로 나오며, 26일을 주기로 ‘케머’라는 발정기 때에만 두 성으로 발현되는 설정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빼앗긴 자들>에선 쌍둥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배경이다. 두 행성의 교류를 위해 물리학자 쉐벡이 우라스에 파견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환경은 황폐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실현한 아나레스와 환경은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우라스가 어떻게 화합의 다리를 놓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집단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났을 때의 화학반응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첨예한 이념 대립의 지구촌 유일한 접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각별한 의미로 읽힌다.

르 귄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SF소설가는 현재의 과학기술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는 예언가나 미래학자가 아니라, 독특한 허구적 설정을 통해 현재의 인류와 사회에 대해 기술하는 작가임을 강조한 것이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진정한 발견자’로 만들어줄 것이다.(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10. 07. 14.  

P.S. 참고로, '오멜라스로 떠나는 사람들'의 우리말 번역본은 르 귄의 작품집 <바람의 열두 방향>(시공사, 2004)와 SF작품선 <마니아를 위한 SF걸작선>(도솔, 2002) 두 종이 있다. 인터넷에서도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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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0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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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0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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