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머리말에서 제목 ‘신의 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대목이다. 곧 신의 역사란 신이라는 실재의 역사가 아니라 신 개념의 역사다...

이 책은 시대와 변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형언할 수 없는 신의 실재 그 자체의 역사가 아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의 역사이다. 인간의 신 개념은 역사가 있다. 다양한 시점에서 그 개념을 사용한 각 집단 사람들에게 항상 조금씩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어느 한 시대 한 집단에 의해 형성된 신 개념은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할 수 있다. "나는신을 믿는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객관적인 의미가 없고, 다른 일반 명제들처럼 오직 특정 집단에 의해 선포될 때 그 맥락 안에서어떤 의미를 띠게 된다. 따라서 ‘신‘이라는 말에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개념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심지어 상충하기까지 하는 의미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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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의 <레미제라블>을 10년만에 다시 읽는 김에 막스 갈로의 평전 <빅토르 위고>에서 <레미제라블>을 쓴 동기를 옮겨놓는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재공연도 하반기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시 읽어볼 계기가 되어도 좋겠다...

"나는 왕 없는 사회, 국경 없는 인류, 책 없는 종교를 지향합니다. 맞습니다. 나는 거짓을 파는 사제, 불의를 자행하는 재판관과 싸우고 있습니다. 나는 봉건적 요소를 없애고 재산권을 보편화되길 바랍니다. 나는 사형제도가 없어지기를 원하며, 노예제도를 거부합니다, 나는 불행을 몰아내고,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질병을 치료하고, 밤을 밝히고 싶습니다. 나는 증오를 증오합니다.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까닭이며, 내가 <레미제라블>을 쓴 이유입니다. 
내 생각에 <레미제라블>은 기본적으로는 형제애, 궁극적으로는 진보를 담고 있는 책일 뿐입니다." - P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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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발자크와, 프루스트와도 그렇긴 하다). ‘위대한‘이란 수식이 부끄럽지 않은 작가라면 단연 위고다. 옮긴이도 위고와 만나는 일을 ‘위대함을 만나는 일‘이라고 적었다. 좀스런 인간들이 권력이랍시고 설치는 시절이어서 새삼 돋보인다. 위대함과 여름을 함께하련다...

위고를 읽는 건 하나의 약속이다. 프랑스 역사에서가장 요동친 세기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약속이고, 숭고함을 스치고 무한을 경험하게 해주는 약속이다. 우연이 구해낸 고아들을 만나게 해주는 약속이고, 절름발이들이 사랑을 만나는 걸 보게 해주는 약속이다. 그리고 정치적 용기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약속이다. 위고를 읽는 것은 문학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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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강의에서 ‘변덕이라는 심술쟁이‘(1845)를 중요하게 다룬다. 교재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판 대신에 쏜살문고판을 쓰는 이유가 이 단편이 전집판에는 들어 있지 않아서다. 한데 시공사판 에드거 앨런 포 전집과 비교해보니 마지막 단락이 누락되었다(시공사판 <모르그 가의 살인>에는 ‘심술의 악령‘이란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 아래 단락이 쏜살문고판 25쪽에서 빠진 부분이다...

재판에서 온전히 유죄판결을 받는 데 필요한 모든 이야기를 마친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제 이야기를 더 할 이유가 있을까? 오늘 나는 이렇게 족쇄를 차고 이곳에 있다! 내일이 되면 이 족쇄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어디일까?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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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 단편작가의 한 사람이라는(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단편집은 절판되었다) 조지 손더스의 창작수업은 놀랍게도 러시아 단편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단편작가 이전에(나는 그의 장편 <바르도의 링컨>만 읽었다) 매우 훌륭한 러시아문학 전도사를 만나게 돼 반갑다...

젊은 작가가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은 젊은 작곡가가 바흐를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형식의 기반이 되는 원리 모두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도전하고 맞서고격분시키려고 쓴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위로하려고.

대부분 조용하고 가정적이고 비정치적인 이야기들로, 따라서 이이야기들을 실제로 읽어나가면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저항문학이다. 억압적인 문화 속에서, 항상적인 검열의 위협하에서, 작가가 정치적 입장 때문에 추방이나 투옥이나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시기에 진보적 개혁가들이 쓴 것이다. 이야기속의 저항은 조용하고 완곡하지만 아마도 가장 급진적인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주목할 가치가 있고, 우주의 선한 능력과 악한 능력의 기원은 단 한 명의 인간, 심지어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과 그의 정신 안에 놓인 갈림길들만 관찰해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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