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가에도 이번주 강의책들을 챙겨왔으니 사실 백퍼센트 휴가는 아니다. 그나마 휴가책으로 가방에 더 넣은 책이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이다. 금요일에 책장을 열고 처음 몇 쪽을 읽었고 오랜만에 김훈 산문과 만나는 느낌을 맛보았다. 오래전 <풍경과 상처>(1994)를 읽었을 때의 느낌. 30년의 세월이 많은 걸 바꾸어놓았는데, 나이 쉰도 되기 전의 김훈은 어느새 여든을 가까이에 둔 김훈으로 바뀌었다(‘헛되다‘는 말이 수사가 아니라 실감이 되는 나이랄까). 그래도 여전한 건 여전하다. 아주 멀지 않은 날, 나도 허송세월로 바빠지리라...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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